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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44일째 날이고, 정토불교대학 4강 수업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뒤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 앞마당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한 달 앞두고 형형색색의 연등이 아름답게 걸렸습니다. 올해는 연등을 ‘희망’이라는 글자 모양으로 달아, 오가는 사람들이 작은 희망을 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오전반과 저녁반 두 과정이 개설되어 있으며, 오전 10시 15분부터 오전반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는 180여 명의 입학생들이 자리했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170여 명이 접속해 총 350여 명이 정토불교대학 오전반 수업에 함께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를 올린 뒤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지난 3강 동안 불교의 핵심 사상인 사성제, 연기, 중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강의를 들으며 의문이 든 점에 대해 질문을 먼저 받았습니다. 두 명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4강을 이어나갔습니다.
스님은 지난 세 번의 강의를 다시 한번 요약해서 설명한 후 오늘은 팔정도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팔정도(八正道)는 해탈과 열반, 즉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길입니다. 지금 나의 현실에는 괴로움이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할 목표는 괴로움 없이 사는 삶입니다. 괴로움에서 괴로움 없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중도(中道)이고, 그 방법이 팔정도입니다. 돈을 버는 길도 아니고, 다음 생에 좋은 데 태어나는 길도 아니며, 복을 받는 길도 아닙니다. 괴로움이 있는 현실에서 괴로움이 없는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입니다. 그 방법으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는 것입니다. 즉,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는 방법을 여덟 가지로 나눈 것이 팔정도입니다.
그중에 ‘계(戒)’는 욕망에 눈이 어두워지는 탐욕을 절제하는 방식입니다. 내가 아무리 먹고 싶어도 그 음식에 쥐약이 들어 있으면 안 먹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행위의 결과가 나에게 손해가 날 일이면 멈출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를 할 때 주의를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손해가 날 일인지 아닌지 살펴야 해요. 팔정도 중에서 ‘계(戒)’를 닦는 것에 해당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정어(正語)입니다. 말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그 말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지,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나와 남을 함께 봐야 해요. 말을 하는 목적은 사실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위쪽에서 물을 확 부으면서 밑에 있는 사람이 젖지 않도록 하려면 ‘물 내려갑니다.’ 하고 알려줘야 하겠죠. 말은 전달이 목적이고, 전달할 때 담는 내용은 사실이어야 합니다. 거짓을 담아서는 안 됩니다. ‘믿는다.’라는 말은 ‘사람의 말을 믿는다.’라는 것에서 나왔어요. 믿을 신(信) 자를 보면, 사람 인(亻) 변에 말씀 언(言)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니까 믿을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의 말이 믿을 만한가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죠. 사람의 말은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으려면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즉, 욕설을 하면 안 됩니다. 위에서 물을 흘려내려 보내는 상황에서 ‘야, 이 새끼야! 물 내려간다. 안 피하면 너 뒤진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어요? (웃음) 이렇게 말하면 사실을 전달하긴 하지만 듣는 이의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되 부드럽게 말해야 합니다.
또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가서 이 말 하고, 저기 가서 저 말 해서 입방아에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동자한테 가서는 노동자를 위해 주는 말을 하고, 기업에 가서는 ‘기업이 잘되도록 하겠다.’ 하고 말합니다. 여성들에게 가서는 그들이 좋아할 말을 하고, 남성들에게 가서는 ‘여자는 군대도 안 가는데 남자는 군대에 가니까 가산점을 받아야 해.’ 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나중에 그가 한 말을 다 합해 보면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런 것을 양설(兩舌)이라고 합니다. 한문으로 거짓말은 망어(妄語)라고 하고, 욕설은 악구(惡口)라고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을 기어(綺語)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법문을 듣다가 ‘스님, 사랑합니다.’, ‘스님 인물이 좋으십니다.’ 하는 말은 아무 쓸데없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합니다. 둘러앉아 차를 마시면서 내내 쓸데없는 잡담을 합니다. 기어는 쓸데없는 잡담, 즉 꾸며서 하는 말을 일컫습니다. ‘말을 바르게 하라’, 즉 정어(正語)는 망어, 악구, 양설, 기어 같은 말들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말을 할 때는 깨어 있어서 진실을 말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앞뒤 조리가 맞도록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어(正語)입니다.
둘째, 정업(正業)입니다.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살아 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그리고 모든 생명에게 가장 큰 고통은 폭행과 죽음입니다. 폭행과 살인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오계(五戒) 중 첫 번째 계율은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입니다. 다른 생명에게도 폭력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다음으로,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뺏거나 훔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재화가 있습니다. 마실 물, 먹을 음식, 입을 옷, 최소한의 집, 아플 때 먹는 약이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생존에 필요한 것을 훔치면 그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으니 훔치거나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주워 가서도 안 돼요. 그래서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은 절대 뺏거나 훔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때리거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아닌데도 인간에게 크나큰 괴로움을 주는 행위가 있습니다. 바로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 중에 가장 심한 것이 바로 성폭행입니다. 서로 좋아서 만나면 사랑이라고 하지만, 상대는 싫어하는데도 내가 좋다고 관계를 맺으면 이것은 범죄 행위에 해당합니다. 성적인 행위를 강제하는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을 삿된 음행이라고 합니다. 재가 수행자들은 결혼을 허용하기 때문에 음행이 허용되지만, 삿된 음행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첫째, 강제성을 갖는 성적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서로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삼가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성년자, 아내가 있는 남자, 남편이 있는 여자와의 관계는 금합니다. 이 세 가지 경우에는 미성년자의 부모, 유부남의 아내, 유부녀의 남편이 큰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행위를 할 때 스스로 유의해야 하고, 가능하면 사람들을 살려주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 대하여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가능하면 어려운 사람을 위해 베풀어 주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보다는 즐겁게 해주어야 합니다. 타인을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행동을 뜻하는 정업(正業)입니다. 상대를 괴롭히면 업을 짓는다고 하죠. 그래서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정명(正命)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직업에 대한 가치관을 의미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하지만, 남을 괴롭히는 일을 해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벌린다고 해도 마약을 제조하고 유통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인신매매나 성매매를 직업으로 삼는다든지, 성적인 동영상을 올리는 것 같은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해서 먹고살면 안 됩니다. 옛날 같으면 활을 만드는 일, 지금으로 보면 무기를 만든다든지 미사일 공장에 다니는 것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내가 한 행위가 살상을 하거나 남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남을 괴롭히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명(正命)은 ‘바르게 생활하라.’ 이렇게 번역합니다. 즉, 바른 직업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나 약사가 돈에 집착하면 어떻게 될까요? 과잉 진료를 하거나 과다 처방을 하겠죠. 먹을 필요 없는 약을 팔 수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모두 올바른 직업관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욕심은 어긋난 가치관을 갖게 만듭니다. 돈, 명예, 지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거친 말을 하고, 남에게 사기를 치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타인을 폭행하고, 성추행을 하게 됩니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직업을 갖는 것도 전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에서 벗어나면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팔정도(八正道) 중 정어, 정업, 정명은 계율을 지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활함으로써 욕심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를 못 이겨서 벌컥 성을 내고 짜증을 부리는 것은 마음이 들떠서 생기는 일입니다. 늘 마음을 고요히 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합니다. 팔정도 중에서 ‘선정(禪定)’을 닦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정정(正定)입니다. 편안한 가운데 집중하는 것을 정정이라고 합니다. ‘바르게 안정하라.’는 말입니다. 집중은 하고 있는데 긴장된 상태로 집중하면 정정이 아닙니다. 편안하기는 한데 졸고 있으면 정정이 아닙니다. 산만해도 정정이 아니에요. 또렷이 집중하되 편안한 가운데 있어야 정정입니다. 편안한 속에서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에,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에, 주력하는 사람은 주력에, 관법을 하는 사람은 호흡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정념(正念)입니다. 바른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을 정념이라고 합니다. 팔정도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정념입니다. ‘알아차림’, ‘깨어 있음’, ‘분명히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자꾸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졸음이 오거나 망상이 피어오릅니다. 자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생각을 하는 것은 선정이 아닙니다. 생각이 끊어져야 해요. 하지만 생각은 잘 끊어지지 않죠.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거예요. 오직 화두만 참구하거나 염불만 하거나 호흡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돼요. 그래서 꾸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셋째, 정정진(正精進)입니다. 바르게 노력하는 것을 정정진이라고 합니다. 안 되면 또 하고, 넘어지면 일어나서 다시 하고, 던져서 안 들어가면 계속 던지는 것이 정정진입니다.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지 말고 그냥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긴장을 하며 오래 하면 지칩니다. 지치면 하기 싫어져요. 그러다가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앞에 ‘편안함’이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하니까 죽을 때까지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 힘이 들지 않으니까요.
바르게 노력하는 정정진, 바르게 알아차리는 정념, 바르게 집중하는 정정, 이 세 가지를 합해서 선정이라고 합니다. 선정을 닦으면 통찰력이 생깁니다. 통찰력은 사물의 전모를 파악하는 힘이에요. 통찰력이 생기면 서치라이트를 탁 비춰서 보듯이 분명히 알게 되는 직관력이 생깁니다. 골똘히 생각하는 게 아니라 딱 보면 바로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문리(文理)가 트인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척하면 아는 직관력을 지혜(智慧)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왜 지혜가 없는 걸까요? 그것은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면만 보기 때문에 통찰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팔정도의 일곱 번째는 정견(正見)입니다. 정견은 ‘바르게 보라.’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조견(照見)이라고 표현합니다. 비추어 보라는 것이죠. 바르게 본다는 것은 바르게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팔정도의 여덟 번째는 정사유(正思惟)입니다. ‘바르게 사유하라.’는 뜻입니다. 일의 앞뒤 이치를 따져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의 종아리를 만지고 싶어도 ‘종아리를 만지면 성추행범으로 걸릴 것이고, 그 일로 신문에 나고 감옥에도 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르게 사유하는 것입니다. 인연과보를 생각한다면, 남의 종아리를 한 번 만지고 감옥 가서 1년을 사는 게 손해입니다. 그러니 만지고 싶어도 안 만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사유하는 정사유, 바르게 보는 정견,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팔정도의 원래 순서는 ‘바르게 보라(정견)’, ‘바르게 생각하라(정사유)’, ‘바르게 말하라(정어)’, ‘바르게 행동하라(정업)’, ‘바르게 생활하라(정명)’, ‘바르게 노력하라(정정진)’, ‘바르게 알아차려라(정념)’, ‘바르게 집중하라(정정)’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상에서 늘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해서 마음이 들뜨거나 흥분하지 않으면, 욕설이나 과한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게 됩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예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세계관에 해당하는 ‘연기법’과 실천론에 해당하는 ‘중도’입니다. 중도의 길을 가는 방법이 ‘팔정도’이고, 팔정도를 다른 말로 하면 '계정혜'입니다. 연기법은 연기(緣起), 무상(無常), 무아(無我)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확연히 알면 괴로울 일이 없는 열반을 증득하게 됩니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합니다. 무상과 무아를 알지 못하면 일체개고(一切皆苦)가 되는데, 이것을 삼법인에 더해서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합니다. 법인(法印)이란 진리의 도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인연과보(因緣果報)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원인이 작용할 때는 조건이 결합하게 됩니다. 원인과 조건이 결합하는 것이 ‘인연’입니다. 거기에서 결과가 나오고, 결과에 따라서 우리에게 울고 웃는 일이 생깁니다. 이것을 ‘과보’라고 합니다. 인과응보가 아니라 인연과보인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규명해 가는 과정을 ‘십이연기(十二緣起)’라고 합니다. 원인의 원인을 찾아 끝까지 가서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찾아가면 무명, 즉 어리석음에 이릅니다. 무명이 씨앗이 되어 크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이 지혜를 닦고, 선정을 닦고,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법문이 끝난 뒤,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안내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직접적인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수업마다 수행 과제가 주어집니다. 학생들은 다음 주까지 부지런히 수행한 뒤 다시 만나기로 하고,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이어갔습니다.
스님은 지하 1층 공양간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JTS 활동가들과 미얀마 지진 피해 긴급 구조단 파견을 어떻게 할 것인지 회의를 했습니다.
미얀마 지진 피해 긴급 구호를 하기 위해 박지나 JTS 대표와 실무자 2명이 함께 파견을 가기로 했습니다. 내일 저녁 또는 모레 아침에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하기로 하고, 미얀마 긴급 구호 활동 계획에 대해 의논을 하였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4강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직장을 마치고 달려온 200여 명의 입학생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340여 명이 접속하여 총 540여 명이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과정에 참석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오전반 강연처럼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궁금한 점에 대해 학생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명이 질문을 했는데요. 그중 한 명은 욕망을 알아차리고 따라가지 않으면 참게 되는 것이 아닌지, 중도를 어떻게 일상에서 행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스님께서 중도가 무엇인지 설명하실 때 욕망을 억제하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고, 그저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욕망을 알아차리기만 하고 어떻게 행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욕망을 알아차리면 행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행하지 않으면 참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욕망을 알아차린 다음에 어떻게 해야 욕망을 잘 다스릴 수 있나요?”
“수행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수행을 하는 목적은 다음 생에 극락에 태어나기 위해서도 아니고, 큰 부자로 태어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번 생에 중요한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도 아니에요. 수행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은 즐거움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으면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따릅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감수하더라도 즐겁게 살고 싶다면 그런 인생을 살면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누구나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신 겁니다. 예를 들어, 일을 무리하게 해서 몸이 아팠다가 안 아팠다가 해요. 몸이 아픈 걸 감수하고라도 그런 인생을 살겠다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굳이 무리해서 몸이 아프고 싶지 않다면 무리하지 않고 안 아프게 살 수 있다는 거예요. 몸이 아프지 않은 상태를 ‘건강’이라고 하듯이 수행적 관점에서는 괴롭지 않은 상태를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괴로울 때 왜 괴로운지 탐구해야 합니다. 먼저 ‘지금 왜 괴로울까?’ 하고 스스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롭구나.’ 하는 대답을 얻었다면, 다음 단계로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탐구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면 되겠구나.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까?’ 하는 의문이 생기겠죠. 이쯤 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는 존재가 따로 있어서 그 존재에게 빌면 해결된다는 생각으로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탐구해 보면, 첫째,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둘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좋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롭다고 생각하는데,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이뤄지면 다행이고, 아니면 그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이 꼭 이뤄져야 한다고 집착할 때 괴로움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집착만 놓아버리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집착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무지 때문입니다. 정말 모르기 때문에 무지에 빠지기도 하지만, 아는데도 불구하고 무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알긴 아는데 순간적으로 욕망에 눈이 멀어서 찰나 무지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지로 인해 집착이 일어나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무지를 깨트리면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괴로울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도 ‘원하는 족족 다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쾌락주의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신에게 매달리고 빌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행 주의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즐거움과 괴로움을 반반씩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괴로움을 다 겪어 버리면 결국에는 즐거움만 남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서 미리 겪는 방법으로 괴로움을 없어지게 하겠다는 게 고행주의자입니다. 쾌락주의는 욕망을 따르는 것이고, 고행주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쾌락주의자는 욕망을 따르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하고, 고행주의자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다 치우쳐 있습니다. 욕망이 일어날 때는 욕망을 따르지도 말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욕망을 따르면 과보가 생기고, 욕망을 억제하면 긴장해서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둘 다 괴로움이 생기는 길이에요. 그래서 중도는 욕망이 일어나면 다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욕망이 일어나면 따르든지, 참든지, 이 두 길밖에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욕망이 일어나면 자동으로 욕망을 따르든지 아니면 참든지, 그것도 아니면 참았다가 터트리든지, 이게 다였어요. 그래서 욕망을 따랐다가 후회하고, 후회하니 참게 되고, 참았다가 터뜨려서 과보를 받습니다. 이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에요.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욕망이 일어날 때 다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욕망을 알아차리면 행하지 않기 때문에 과보가 없습니다. 참아서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습니다. 물론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욕망을 따르든지 참든지 둘 중의 하나만 계속해 왔습니다. 그래서 늘 화를 냈다가 참기를 반복해 왔던 거예요.
이제는 욕망이 일어나면 ‘욕망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세요. 이를 악물고 참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고 그냥 가만히 두세요. 만약 내가 행했다면 과보가 있는 줄을 알고, 참았다면 스트레스가 있는 줄을 알면 됩니다. 스트레스도 싫고 과보도 싫다면, 행하지도 말고 참지도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셋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됩니다. 첫째, 참고 싶으면 참되 스트레스가 따를 것임을 알면 됩니다. 둘째, 따르고 싶으면 따르되 과보가 따를 것임을 알면 됩니다. 셋째, 이래도 피곤하고 저래도 피곤하거든, 행하지도 말고 참지도 말라는 겁니다.
잘 안 되면 연습하세요. 모르는 건 제가 가르쳐 줄 수 있지만, 안 되는 건 본인이 연습해야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스케이트를 처음 탈 때 타는 방법을 알려줘도 자꾸 넘어진다면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연습하는 게 안 된다면 스케이트를 안 타면 됩니다. 연습하기 전에는, 스케이트를 신으면 넘어지고, 넘어지지 않으려면 스케이트를 벗어야 하고, 이렇게 두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스케이트를 벗으면 스케이트를 탈 수가 없어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스케이트를 신고도 넘어지지 않으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데, 연습을 안 하는 사람은 할 수가 없어요. 넘어지기 싫다면 안 타면 됩니다. 타고 싶다면 넘어지는 과보를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이어서 지난 3강의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한 후 팔정도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괴로움 없이 사는 길을 깨우친 사람을 일컬어 부처(佛)라고 합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인 부처가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바로 귀의불, 즉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이 뜻하는 내용입니다.
괴로움이 없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합니다. 항상 사실에 깨어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법(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래서 귀의법, 즉 ‘법(法)에 귀의합니다.’ 하는 말은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자를 수행자라고 합니다. 이런 수행자들의 모임을 상가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승(僧)입니다. 그래서 ‘승(僧)에 귀의합니다.’라는 말은 항상 해탈, 열반을 향해서 멈춤 없이 꾸준히 연습해 나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부처님(佛)께 귀의합니다.’, ‘법(法)에 귀의합니다.’, ‘승(僧)에 귀의합니다.’ 하고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인생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고, 그러려면 항상 사실에 깨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잘 안 되어도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도말로는 ‘나무 붓다’, ‘나무 담마’, ‘나무 상가’라고 합니다. 팔리어로는 ‘붓당 사라남 갓차미’, ‘담망 사라남 갓차미’, ‘상강 사라남 갓차미’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이라고 합니다. 한글로 바꾸면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스님들께 귀의한다고 하니까 일부 사람들은 종교 의식이라고 생각해서 거부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표현을 이렇게 바꿨습니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합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부처님 제자 됨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땅에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중생을 구원한다.’는 말은 그들도 이 법을 알아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극락에 보내주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이것이 삼귀의(三歸依)입니다.
정토회에서는 어떤 행사를 하더라도 가장 먼저 삼귀의를 하고 수행문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는 괴로움이 없는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른 법을 꾸준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먼저 하고 나서 공부를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삼귀의와 수행문을 읽는 거예요. 수행문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정토불교대학에서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겁니다.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잘 살펴보면 다 내 마음이 일으킨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괴로움과 얽매임이 밖으로부터 오는 줄 착각하고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행복과 자유를 구하지만 끝내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행복과 자유는 밖으로 찾아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 일어난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안으로 살펴보면 그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의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즉시 사라진다.
여기에서 ‘마음’ 앞에는 ‘어리석은’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괴로움은 어리석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면 행복과 자유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정토불교대학 수업을 시작할 때는 늘 삼귀의와 수행문을 외우고 나서 시작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戒), 정(定), 혜(慧)에 관해서 더욱 자세하게 배우기로 하고 4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알려준 후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으로 다시 돌아와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45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주간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고, 오후에는 정토회 상임 천일준비위원회와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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