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2.25. 백일법문 9일째, 열린법회 5강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9일째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 7시 30분에 시애틀정토회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8시 30분에는 콜럼버스정토회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2024년 사업 보고와 결산, 2025년 사업계획과 예산을 심의하고 의결한 후 이사회를 마쳤습니다.

곧바로 백일법문을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10시 15분이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열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150여 명 대중들이 자리한 가운데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정토회 회원들이 매일 아침 1시간씩 수행하는 '천일결사 수행법'을 주제로 열린법회가 열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삼귀의 다음에 이어지는 ‘수행문’과 ‘참회’, ‘정토행자의 서원’을 읽는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한국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합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은 ‘내가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를 명심한다.’ 는 의미입니다. 남방 불교에서는 삼귀의를 한 후 반드시 오계를 독송합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하느냐’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내용이 좋지만, 현실로 딱 다가오지는 않죠.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수행문을 읽는 것으로 반야심경 독송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수행문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와 해탈, 열반으로 나아가려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구체적으로 계율을 지키고, 명상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을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수행문은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런 관점을 유지해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잘 살펴보면
다 내 마음이 일으킨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괴로움과 얽매임이 밖으로부터 오는 줄 착각하고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행복과 자유를 구하지만 끝내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행복과 자유는 밖으로 찾아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 일어난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안으로 살펴보면
그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의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즉시 사라진다.

수행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바깥을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깥을 논하게 되면 내가 세상에 굴림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조종하는 대로 내가 화를 냈다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하게 됩니다. 세상에 굴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런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주체적인 관점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면, 그것은 내가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하고 자기가 주인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을 선에서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합니다. 어느 곳을 가든, 어떤 상황이 되든, 항상 주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자꾸 자기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방법

예를 들어 남편이 바람을 피웠거나 아내가 재산을 탕진해서 이혼했다고 한다면, 나는 이혼을 당한 것이 됩니다. 나는 같이 살고 싶었는데 상대방이 이런 짓을 해서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수동적인 관점이에요.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살다 보니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돈을 탕진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것이 이혼인 거예요. 같은 관점에서, 결혼하는 것도, 회사에 입사하거나 퇴사하는 것도, 모두 일어난 상황에 대한 내 선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죠. 늘 ‘누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바람에 휘둘리다가 어느 날 어느 계곡에 떨어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진실에 깨어 있지 못하고 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거기서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화가 나든 욕심이 나든 자기 성질에 사로잡혀서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말에 ‘호랑이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하는 것처럼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관점에 서 있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어리석음에 사로잡히지 말고, 주어진 조건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참회

화나고, 짜증 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이 모든 괴로움은
밖으로 살피면 상대가 잘못해서 생긴 괴로움인 것 같지만,
안으로 살피면 '내가 옳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일어난 것이므로
본래 옳고 그름이 없고 서로 다름을 깨달아
'내가 옳다'는 한 생각을 내려놓으면
화날 일도 없고 미워할 사람도 없어지게 된다.

불교의 수행법은 한마디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는 것입니다. 계율이란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할 바를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즉 타인에게 해가 되고,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타인을 괴롭히는 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때, 계율을 어기고 있는 그 순간에 바로 알아차리고 반성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절을 하면서 어제 하루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어제는 내가 잘한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놓쳤구나!’

이렇게 돌아보는 것이 참회입니다. 어제는 내가 잘한 줄 알고 화도 벌컥 내고 욕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하루 동안에도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죠.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얻는다

소승불교의 계율은 바깥으로만 행하지 않으면 됩니다. 마음속에서 화가 나고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말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돼요.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마음을 일으킨 것도 계율을 범했다고 봅니다. ‘화가 나서 팍 때려주고 싶다.’ 하는 마음이 일어났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일도 계율을 어긴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것을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짓는다.'고 표현합니다. 즉 몸과 말로만 업을 짓는 게 아니라 뜻으로도 업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일으켜도 업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계정혜 삼학 중 첫 번째 계(戒)를 지키기 위해 108배 참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10분간 명상을 합니다. 10분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적게 해도 10분은 명상을 하라는 얘기예요. 일반적으로는 30분쯤 명상을 합니다.

세 번째는 혜(慧)를 얻는 것입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 독경을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계속 읽는 것은 지혜를 얻고, 이치를 확연히 아는 데 도움이 됩니다. 지혜에는 듣고 깨우친 지혜인 문혜(聞慧)와 스스로 사유해서 깨우친 사혜(思慧), 직접 경험해서 깨우친 수혜(修慧)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법문을 듣고 이치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즉 인과법의 이치도 알게 되고, 중도의 이치도 알게 되고, 제법이 공한 도리도 알게 된 거예요. 이것은 문혜라 하고, 그럴 때 ‘견도(見道)가 열렸다.’고 표현합니다. 견도가 열려서 도를 보았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 없어요. 그런데도 순간적으로는 찰나 무지가 일어납니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순간 자동으로 미혹이 생기는 겁니다. 찬찬히 바라보면 다 아는 일인데도 실제 행위에서는 찰나 무지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을 연습하는 행위를 ‘수도(修道)’라고 합니다. 도를 닦는다는 말이죠. 주의 집중을 하지 않아도 늘 알아차리는 수준이 되어서 미혹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무학도(無學道)’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무학도는 아라한의 경지를 말합니다. 이렇게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 소승 불교의 수행법입니다.

원을 세워서 중생을 구제한다

대승 불교의 수행법은 소승 불교의 수행법과는 조금 다릅니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경전을 독송하여 이치를 아는 것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대승 수행법은 그 무엇보다 마음을 크게 내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내가 남한테 손해를 끼치지 않고, 해치지 않고, 괴롭히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소승 수행법이라면, 대승은 남을 해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립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남을 도와주고 베풀어 줍니다.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타인을 아껴줍니다. 이렇게 마음을 크게 내는 것이 대승의 원(願)입니다. 소승의 핵심이 계를 지키는 것이라면, 대승의 핵심은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천하 만물이 어떠하든, 적어도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하는 소승의 자세는 분명히 수행에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승 보살은 크게 원을 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호랑이가 와서 내 어머니를 물어 죽였다고 해봅시다. 몹시 분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호랑이를 죽였다고 하면 그것은 계율을 범하는 거예요. 살생을 한 것이니까요. 이미 어머니는 죽었고 호랑이는 살아 있는데, 분해서 호랑이를 죽이면 복수를 한 게 됩니다. 수행자는 복수를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호랑이가 또 옆집 할머니를 공격하려고 해요. 그냥 놔두면 할머니가 죽게 되겠죠. 할머니를 살리려면 호랑이를 물리쳐야 하는데, 그냥 막대기로 건드리며 ‘저리 가라’ 한다고 되겠어요? 그래서 호랑이를 창으로 찔렀다면, 그것은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한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소승에서는 이 상황에서도 호랑이를 죽이는 것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살생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방 불교에서는 무슬림이 쳐들어와서 절을 불태우고 스님들을 많이 죽였을 때도 무력으로 저항한 기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죽든지 도망가든지 한 거예요.

반대로 대승은, 즉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호랑이를 잡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승병이 등장했던 거예요. 이 이야기를 남방 스님들이 들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스님이 창과 활, 칼을 가지고 싸우는 병사 노릇을 했다면 승려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대승이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호랑이를 죽일 수 있는 것은, 할머니를 살리는 일이 호랑이를 죽이면 안 된다는 계율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죄가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을 구하기 위해 살생을 저질렀더라도 살생의 과보는 받습니다. 할머니를 살렸기 때문에 과보가 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과보를 받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할머니를 살리는 거예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놓으면 ‘내 보따리 내놔라’ 하며 나에게 덮어씌울 게 분명한데도 내버려두지 않고 사람을 건지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고는 보따리값도 물어줍니다. 손실을 감수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대승 보살입니다.

그래서 대승은 좋은 일을 하고 나서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좋은 일을 했지만, 나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과보를 받습니다. 그런 과보를 기꺼이 받으며 사람을 살리는 것이 대승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장보살의 원입니다. 사람을 지옥에서 건져내고자 할 때 지옥 밖에 앉아서 톡 톡 건져낼 수 있으면 아무 문제가 안 되겠죠. 그런데 사람을 지옥에서 건져내려면 자신이 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져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지옥에 가고, 그 사람을 지옥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 보살입니다.

세상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진단

여기에서 ‘정토행자의 서원’이 나온 거예요. 정토행자들은 모두 대승 보살이기 때문에 대승 보살은 어떤 원을 세워야 하는지를 정리해 놓은 것이 ‘정토행자의 서원’입니다.

지금 우리 인류는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라는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대승 보살이 중생 구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지, 오늘날 세상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법에 비추어 봤을 때 현재 우리는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첫째, 지구 전체로 봤을 때 최고의 문제는 기후위기입니다. 즉 자연환경 파괴로부터 오는 문제입니다. 현재 가장 위험한 문제는, 기온 상승으로 인해 발생하는 기후위기입니다. 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재난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미세 플라스틱 문제입니다. 미세 플라스틱은 알갱이의 크기가 매우 작아서 육안으로 보기에도 어려울 만큼 거의 먼지와 같습니다. 이것을 먹은 물고기를 우리가 먹음으로써 우리의 몸에 쌓이기도 하고, 숨을 쉴 때 먼지와 함께 몸으로 들어와 쌓이기도 합니다. 중금속이 쌓이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플라스틱 알갱이가 오랜 기간 축적되면 어떤 부작용을 유발할지 모릅니다. 모든 유기물은 분해되는 과정을 거쳐 원래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때 박테리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박테리아는 모든 것을 일종의 용광로처럼 녹여서 분해하고, 다시 원료로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썩지 않는다는 것은 분해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만 잘게 부서질 뿐입니다. 커다란 덩어리일 때는 우리 눈에 보이지만, 잘게 부서지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둘째, 인류 공동체 붕괴입니다. 공동체는 개인이 모여서 함께 생활하는 단위입니다. 제일 작은 공동체가 가족입니다.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공동체는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죠. 더 커지면 옛날 씨족 공동체나 부족공동체가 되고, 더 확장되면 오늘날의 국가 공동체를 이룹니다. 개인이 모여서 가족 공동체가 되고, 국가 공동체가 되고, 나아가 인류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지금 인류 공동체 안에 있는 각 국가 공동체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족 공동체 안에서도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붕괴되어 가고 있는 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셋째, 공동체 안의 개개인을 살펴보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아 상실’ 또는 ‘인간성 상실’이라고 합니다. 자기중심을 잡지 못하고 정신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행위가 최소한의 어떤 윤리나 도덕적 가치 판단 없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묻지마 폭행이나 마약 중독처럼요.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어떤 행위도 서슴지 않습니다. 가족이라도 내 이익에 반한다면 소송을 걸어 재판을 하고, 심지어 살해하기도 합니다. 사귀는 사람을 이유 없이 폭행하는 데이트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아 상실’ 또는 ‘인간성 상실’이라고 합니다. 인간성이란 양심을 바탕으로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고 판단하는 기본적인 기준을 말합니다.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가치조차 져버리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인간성 상실’의 문제입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 그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불교 내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불교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인물인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되어 직접 사람들을 교화한 초기 불교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불교가 아니라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이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 연기법을 우리의 세계관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세계를 근본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나 틀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세계관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독립된 존재이고, 전체는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개별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회 현상이나 자연 현상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관점에서 봅니다. 진화론도 이런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홉스가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본 것도 마찬가지예요. 지금까지 모든 사회사상이나 종교는 다 이런 세계관을 기반으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천당 간다, 지옥 간다, 다시 태어난다, 이것도 모든 존재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이 세계를 서로 연관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이 세계를 보니 모든 존재는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緣起)라고 쓴 거예요. 말미암을 연(緣), 일어날 기(起),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여기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하는 것을 철학적으로 ‘무아’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하는 것은 ‘무상’이라고 합니다. 아(我)라는 실체가 없고, 항상 하는 것도 없다는 말이에요. 이 연기법을 우리의 세계관으로 삼는다는 말이 정토행자의 서원에 첫 번째로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관점입니다. 그래서 정토행자는 연기법을 바탕으로 세계를 보고 세계가 연기되어 있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탈과 열반이라는 목표에 이르기 어렵고, 불교의 정체성 또한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어느 날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께 ‘제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되겠습니까? 왕도를 알려주십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타인의 불행 위에 자기의 행복을 쌓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복하거나 기분이 좋아질 때, 대개 타인의 불행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시험에 합격하면 누군가는 불합격하고, 내가 당선되었다면 누군가는 낙선하고, 내가 이득을 보면 상대방은 손해를 보고, 내 주식이 올라서 기분이 좋아 한잔하면 그 주식을 판 사람은 기분이 나빠 한잔합니다. 우리 아들이 평범한데 며느리 잘 봤다 싶으면 며느리 친정에서는 사위 잘못 봤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나와 타인이 서로 연관된 관계에 놓여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타인의 불행 위에 쌓은 기쁨이나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행복은 불완전해서 지속 가능하지 않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에게 부처님께서는 ‘백성을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시대에도 국민을 외아들처럼 사랑하라고 말하기 어려워요.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에게 국민을 당신 아내나 아들보다 더 사랑하라고 말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절 하나 지어주세요.’, ‘교회 하나 지어주세요.’, ‘병원 하나 지어주세요.’ 이런 말을 하기가 쉽지 그런 말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연기법을 우리의 세계관으로 삼아서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세계를 바라봐야 합니다. 연기적 세계관은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입니다. 물질의 세계에서도, 생명세계에서도, 정신세계에서도 연기적 세계관이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다고 해서 다 믿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론적인 이치만이라도 분명하게 알면 믿음이 절로 생깁니다.

둘째, 부처님과 보살을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는다

정토행자의 서원 두 번째는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부처님과 보살을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살아가셨나요? 평생을 가사 한 벌과 발우 한 개로 걸식하며 살아가셨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삶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검소하게 살자는 거예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며,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구도자의 자세를 갖자는 것입니다. 적어도 먹고 입고 자는 것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그런 것에 구애받는 사람은 출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을 내 삶의 모델로 삼는 사람은 적어도 먹고 입고 자는 것으로 인해 불평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조금 불편함은 느낄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부처님보다는 잘 먹습니다. 내가 입는 옷이 부처님보다는 잘 입습니다. 내가 자는 곳이 부처님이 주무셨던 나무 밑보다는 낫습니다.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불편을 느낄 수는 있지만, 불평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꼭 부처님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생활하는 것으로 불평은 하지 말자는 얘기입니다. 소승적 관점에서 스스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대승적 관점으로 중생의 아픔을 곧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중생을 구제하는 대승 보살의 원력을 본받아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수행자가 되고자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검소하게 사는 것은 내가 수행자로서 상구보리 하는 자세에 해당하고, 전 세계의 재난 지역이나 극빈촌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은 하화중생 하는 자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승과 대승을 구분하지 않고, 소승의 장점인 수행과 대승의 장점인 원력, 이 두 가지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셋째, 무아, 무소유, 무아집을 수행의 지표로 삼는다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 무아(無我)입니다.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내가 옳다고 고집할 것이 없다는 것이 무아집(無我執)입니다. 무아, 무소유, 무아집, 이 세 가지를 수행의 지표로 삼습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사로잡힘에서 벗어나
나를 버리고, 내 것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고
오직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보살이 되어
괴로움도 없고 얽매임도 없는 대자유인(成佛)이 되고자 한다.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보살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라는 것이 본래 정해진 것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화현’이라고 말합니다. 아무 때나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중생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것에 응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수순한다’는 말이 뜻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없고 얽매임도 없는 대자유인이 되고자 한다.’ 하는 말은 자유롭게 무엇이든 인연 따라 화현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비록 밖에서는 부잣집 사모님이거나 사장님이라고 해도 절에 올 때는 수행자로 온 거잖아요. 그러니 청소할 일이 있으면 빗자루를 들고 그냥 청소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집에서도 안 하는데 여기 와서 내가 청소하고 걸레를 빨아야 해?’ 하며 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위치를 낮추는 일 같기 때문입니다. 허상을 버리지 못하면 외로워집니다. 한편으로는 잘난 척하면서 교만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운 거예요. 열려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허상을 버리면 자유로워집니다.

나아가 인류에게 불어닥친 이 위기를 극복하고
행복한 인생(맑은 마음), 평화로운 사회(좋은 벗),
아름다운 자연(깨끗한 땅)을 일구어
살기 좋은 세상 정토(淨土)를 만들고자 한다.

‘행복한 인생’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대안입니다. ‘평화로운 사회’는 공동체 붕괴에 대한 대안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은 자연환경 파괴에 대한 대안입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살기 좋은 세상 정토(淨土)를 만드는 것이 정토행자의 서원입니다.”

법문이 끝나고 대중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사홍서원을 한 후 12시가 넘어서 열린법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 1시부터 필리핀 JTS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2024년 사업 보고와 결산, 2025년 사업 계획과 예산을 심의하고 의결했습니다. 작년에는 민다나오 지역에서 산악 원주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 학교를 10개 건축하고 준공식을 마쳤습니다. 올해는 작년의 성과를 이어서 12개의 학교를 짓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현장을 답사하느라 수고하고 있는 필리핀 JTS 활동가들을 격려한 후 이사회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오후 2시에는 필리핀정토회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여 2024년 사업 보고와 결산, 2025년 사업 계획과 예산을 심의하고 의결했습니다. 이번 주는 틈틈이 해외 법인 이사회에 계속 해서 온라인으로 참석할 예정입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저녁반 회원들을 위한 열린법회 제5강을 시작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직장을 퇴근하고 달려온 100여 명의 대중들이 자리했습니다.


저녁반 열린법회의 강의 주제는 발우공양과 소심경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발우에 음식을 담을 때 읊는 게송인 십념에 대해 설명을 한 후, 이어지는 봉반게와 오관게의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십념(十念)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열 가지 불보살을 말합니다. 발우를 펴고 십념을 할 때 음식을 배분하게 됩니다. 먼저 부처님 다섯 분을 거명하고, 법은 그냥 하나로만 거명하고, 보살은 네 분을 중심으로 해서 거명했기 때문에 십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언을 외웁니다. 수행자는 항상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한 원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진언을 외우는 겁니다. 십념과 불법승 삼보와 계정혜 삼학에 대한 진언을 외울 동안에 음식 배분이 끝나야 하고, 음식 배분이 안 끝나면 게송을 쉬는 상태로 음식 배분을 마쳐야 합니다. 대부분은 게송이 끝날 때 음식 배분도 다 끝납니다.

이 음식을 받는 자도 베푸는 자도 한량없는 바라밀을 얻게 되기를

봉반게(奉飯偈)는 부처님께 음식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발우를 눈높이로 들고 외우는 게송입니다.

차식색향미 상공시방불 중공제현성 하급군생품
此食色香味上供十方佛 中供諸賢聖 下及群生品

등시무차별 수함개포만 영금시수등 득무량바라밀
等施無差別受咸皆飽滿 令今施受等 得無量波羅蜜

이 음식의 색깔과 향기와 맛을 위로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가운데로는 모든 현인과 성인에게 공양을 올리며, 아래로는 모든 중생에 이르기까지 아무 차별 없이 이 음식을 똑같이 베푼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라고 많이 드리거나 하지 않고 똑같이 평등하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 음식을 받아먹고 모두가 배불러지기를 바란 후 이 음식을 받는 자도 베푸는 자도 똑같이 한량없는 바라밀을 얻게 되기를 발원한다는 내용입니다. 바라밀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염원과 축원이 들어있는 것이 봉반게입니다.

이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수고한 모든 이들의 공덕을 생각하며

그다음 구절이 소심경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만약 소심경 전체를 다 외우지 않고 그중 한 게송만 외운다고 하면 바로 이 오관게(五觀偈)를 외워야 합니다.


계공다소량피래처 촌기덕행전결응공 방심리과탐등위종 정사양약위료형고 위성도업응수차식
計功多少量彼來處 忖己德行全缺應供 防心離過貪等爲宗 正思良藥爲療形姑 爲成道業應受此食

‘계공다소량피래처(計功多少量彼來處)’는 이 음식이 저곳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수고한 모든 이들의 공이 적고 많음을 계산해 본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받은 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는 많은 사람의 노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 노고를 생각해 본다는 얘기예요. 그 노고 중에 제일 가까이에는 공양주의 노고가 있겠죠. 부엌에서 쌀을 씻고 밥을 안치고 반찬을 만드는 공양주의 노고는 눈에 쉽게 보입니다. 어린아이들한테 물이 어디서 나오는지 물으면 수도꼭지라고 대답하고, 밥은 어디서 나오는지 물으면 밥통이라고 대답하고, 옷은 옷장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이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수고한 사람들의 노고를 잘 모릅니다.

보통 아이들은 엄마 아빠 중에 누구한테 정이 더 많습니까? 엄마한테 정이 더 많습니다. 엄마는 눈에 보이게 젖을 물리고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혀 주는데, 아빠는 그것을 제공하는 돈을 벌어다 주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직접 안 보이잖아요. 그래서 공과를 생각할 때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도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음식을 만든다고 하면 쌀은 농부가 생산했을 테고, 밥통은 노동자가 생산했을 겁니다. 프라이팬, 기름, 전기, 가스도 누군가 생산했을 테고요. 이것을 다 생각해 보면 쌀 한 톨에 수많은 사람의 노고가 그 속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헤아려 본다는 내용입니다.

‘촌기덕행전결응공(忖己德行全缺應供)’은 내가 이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돌아본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수행한 이 덕행이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스스로 따져보는 겁니다. 하루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나의 이 조그마한 덕행을 가지고 이런 수많은 공덕이 들어있는 공양을 내가 먹을 자격이 있는지 살펴보는 거예요. 내가 누리는 삶이 타인의 노고 위에 있다면 빚을 지는 거잖아요. 복을 지어야 하는데 복을 까먹고 있다는 말이에요.

‘방심리과탐등위종(防心離過貪等爲宗)’은 잘못이라든지 탐하는 마음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내 마음에서 멀리 떠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음식을 먹는 목표는 내가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거죠.

‘정사양약위료형고(正思良藥爲療形姑)’는 맛으로 이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이 몸이 말라비틀어지지 않기 위해서 약으로 이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음식을 먹고 위없는 도를 이루겠습니다

‘위성도업응수차식(爲成道業應受此食)’은 이 음식을 먹고 위없는 도를 이루겠다고 발원한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 음식을 먹고 수행 정진해서 도를 이루어야 그 빚을 다 갚게 된다는 겁니다. 나의 수행이 부족하니 이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음식을 먹는다면 그만한 수행을 해서 그 빚을 갚는 것도 방법입니다. 내가 직접 농사를 짓는 방법도 있지만, 세상일 중에는 서비스 직종도 있잖아요. 어려운 사람을 상담해 주거나 보살피는 일, 청소하는 일도 모두 세상에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처럼 수행자가 게으름 없이 오롯이 정진하는 것도 빚을 갚는 행위입니다. 수행자가 이 음식을 먹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것은 중생을 희생시키거나 중생에게 고통을 주는 일입니다.”

각 게송에 대한 설명이 끝나면 다 함께 큰소리로 게송을 읊어 보았습니다.


법문이 끝나자 대중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설법전을 나와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10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워싱턴정토회 이사회와 캐나다정토회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한 후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주간반 수행법회를 하고, 오후에는 사회 인사를 만나고, 저녁에는 저녁반 수행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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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화

고맙습니다. 밥먹을 자격이 있는지 살펴보는 법문이었습니다.

2025-03-04 12:07:09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5-03-02 06:36:23

월광

스님의 하루팀분들 영상팀분들 스님! 삼보님! 나라 선조님들 부모님 자원봉사자분들 일체중생 자연의 한량없는 은혜속에 오늘도 살아있어 스님의 하루를 읽으며 행복합니다. 참 고맙습니다. 이 귀한 법 널리 전하겠습니다.

2025-03-02 0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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