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외국인 수행자들이 천일결사 기도에 입재하는 날이고,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1일째 법문이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 8시부터 정토회관 방송실에서 외국인 천일결사 입재자들을 위한 8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참석했습니다. 어제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정토행자들이 백일기도를 시작했고, 오늘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정토행자들이 백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외국인 정토행자들이 모두 화상 회의 방에 입장하자 사회자가 반갑게 환영 인사를 했습니다.
“Welcome to the 8th 100-Day Practice, Opening Ceremony of the 1st 1000-Day Practice!”
(제1차 천일결사 중 제8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먼저 지난 백일 동안 열심히 수행해 온 분들의 소감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크레이그(Craig) 님이 수행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I have also made some changes in my awareness during the rest of the day. I make more conscious efforts to find time to be mindful. For example, if I'm walking through the city, instead of being preoccupied with thoughts of what I need to do later in the day or the following day, I'd be more present with my surroundings, unconscious of the feeling of the air on my skin, the quality of the lights around me, things that I used to notice naturally when I was much younger but have gradually stopped paying attention to. All of this has reminded me that practice is about cultivating a way of seeing and a way of being in the world, and even when my practice has been inconsistent, it has still been enough to reveal something that I think is valuable. Thank you very much.”
(수행을 통해서 항상 깨어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서 도시를 걷는 동안에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는 대신 주변 환경에 더 집중하고, 피부에 닿는 공기의 느낌, 주변의 불빛, 어렸을 때는 자연스럽게 알아차렸지만 점차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 것들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수행이란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존재의 관점을 바꾸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제 수행이 조금 꾸준하지 않더라도 제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데는 충분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어서 엘리자베스(Elizabeth) 님이 수행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My journey into Buddhism has been amazing. It started with watching a few videos and signing up for Buddhism 1. Sunim's talks would just cut through any kind of confusion I had and bring me right back to the present moment. And I've had some breakthroughs throughout that time. I would say I went from feeling kind of half a week to feeling much more weeks about how I am in charge of my own happiness. I remember every day that I can let go of thoughts that aren't helpful or useful and just tune into the moment.”
(불교 공부를 시작한 이후 저의 여정은 놀라웠습니다. 그 여정은 몇 개의 영상을 보고 정토 담마 스쿨 근본 불교에 등록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요, 스님의 법문은 제 혼란을 단숨에 정리하고 저를 다시 현재로 돌아오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저는 몇 가지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일주일에 절반 정도만 행복을 느꼈던 것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나의 행복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죠. 도움이 되지 않거나 쓸모없는 생각을 버리고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어서 다 함께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외국인 정토행자들을 위해 LA에서 일어난 산불과 기후 위기 문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 이야기한 후 왜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하는지 그 원리와 의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의 대부분을 내가 알고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과학자들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행하는 것은 10퍼센트도 안 되고 대부분은 나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이 위에서 소화가 되고 장에서 흡수가 되고 혈액으로 순환되는 과정의 대부분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이런 몸의 신진대사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 움직임도 거의 다 습관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전거를 처음 탈 때에는 ‘이렇게 탄다’, ‘저렇게 탄다.’ 하고 의식을 하며 긴장을 해서 자전거를 타게 됩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는 데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자전거를 타면서 어떻게 탄다는 의식을 거의 하지 않고 저절로 자전거를 타게 됩니다. 몇 번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화가 되고, 더 익숙해지면 자동화가 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좋은 점도 많이 있습니다. 에너지 소모가 줄어들어서 매우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생깁니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어떤 손실이 있을지 내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나도 모르게 행동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인도 전통 사회에서는 이것을 ‘카르마’라고 불렀습니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행위는 스스로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태어날 때 그렇게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전생에 한 행위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것은 운명도 아니고, 전생에 의해 주어진 것도 아니고, 다만 형성된 것이다. 형성된 것은 항상하지 않고 변화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우리는 이러한 카르마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행위를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집중해서 살피지 않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집중해서 살피면 그 행위가 일어날 징조를 미리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위가 일어날 징조 중에 하나가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입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를 관찰해 보면 몸에 열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장이 뛰는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현상을 보고 내 카르마가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몸의 감각이 먼저 반응합니다. 이어서 그것에 기반을 둔 기분 나쁨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내가 감지할 수가 있게 됩니다. 화가 점점 커지면 바깥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냈다.’ 하고 말하지만, 조금만 관찰해 보면 화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지나서 화가 나옵니다.
그런데 화를 내게 되면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상대가 기분이 나쁘다든지, 관계가 틀어진다든지, 많은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이런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화를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화를 내지 말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손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음속에서는 화가 일어나는데 바깥으로 표출을 하지 않으면 내부에 스트레스가 자꾸 쌓이게 됩니다. 내부에 압력이 계속 커지면 결국에는 바깥으로 터져 나오게 되듯이 몇 번 참았다가 화를 내게 되기 때문에 더 크게 화를 내게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또 반성을 하게 되고, 그래서 또 참게 됩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화를 참는 것은 화를 내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해결책은 아닙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화를 내지 말자’ 하고 참기 이전에 ‘내가 지금 화가 나 있는 상태구나.’ 하고 자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화가 날 때 ‘아, 내가 지금 화가 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편에게 내 상태를 알리면 됩니다. 화를 내지 말고 ‘제가 지금 화가 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알리는 거예요. 화를 낸다는 것은 상대가 틀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상대의 기분이 나빠집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화가 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상대를 탓하는 게 아니라 내 상태를 그냥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는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은 화를 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유용하지만 이미 화가 난 상태이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한참 유지해야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집중하고 예민하게 깨어 있어서 화가 날 징조를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몸에 열기가 난다든지, 심장이 뛴다든지, 기분이 약간 나쁘다든지, 이런 상태를 바로 알아차리면 조금만 지나면 화가 가라앉게 됩니다. 우리가 명상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감각을 알아차리고, 느낌을 알아차리고, 감정을 알아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도 모르게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일어나는 과정을 내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나의 카르마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가령 상대가 나를 비난하거나 내가 어떤 못마땅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 카르마가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지 예측이 됩니다. 그럴 때 ‘자기가 자기를 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알게 되면 원하지 않는 상황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가면 내가 이렇게 반응을 할 거니까 이런 상황에는 가능하면 안 가겠다.’ 이렇게 자기가 재앙을 예방해 나갈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나는 이런 반응을 할 것이다.’ 하고 예측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반응하는 강도가 매우 약해집니다. 또한 반응이 나도 모르게 일어났더라도 반응이 일어난 후에 상대를 탓하지 않습니다. ‘제가 화를 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바로 사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큰 지장이 없습니다.
이것만 해도 되지만 그다음 단계로 나의 카르마를 바꿔야 되겠다 싶으면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랫동안 반복된 행위에 의해 이미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형성된 것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째, 붓다 담마를 배워서 마음 작용의 원리를 알아야 하고, 둘째, 카르마를 변화시키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업식이 무엇인지 알려면 보통 백일 정도의 꾸준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기울여서 알아차림을 연습하면 백일 정도가 지났을 때 자기 업식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단박에 알 수도 있고, 백일이 지났는데도 모를 수 있어요. 그러나 평균적으로는 백일 안에 자기의 업식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카르마가 변화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략 천일, 즉 3년 정도는 꾸준히 수행을 해야 변화가 옵니다. 어떤 것은 자각하는 즉시 변하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3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요. 그러나 보편적으로 3년이 지나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주위 사람들도 나의 변화를 조금씩 알아차리게 됩니다. 같이 사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너 요즘 화가 많이 줄었다.’, ‘너 요즘 고집을 덜 부리네.’ 이렇게 감지할 만큼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더 꾸준히 해야 되지만 ‘아, 변했구나.’ 하는 최소한의 변화를 주위에서 느낄 수 있으려면 대략 3년은 수행을 해야 됩니다.
한국 속담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고 나서 삼일 하다가 그만둔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어떻게 백일을 하고, 어떻게 천일을 하겠어요? 그래서 함께 손을 잡고 서로 격려해 가면서 같이 수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서로 연락해서 ‘수행하자!’ 하고 깨워 주기도 하고, 누가 포기하면 전화해서 격려하기도 하고, 이렇게 함께 하면 혼자 하는 것보다는 어려움을 극복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함께 천일결사 프로그램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 입재하신 분들은 천일결사 프로그램의 취지가 이렇다는 것을 잘 알고 정진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렇게 마음을 내지만, 모레가 되면 벌써 하기가 싫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핑곗거리가 생겨납니다. ‘부처님이 절을 하셨나?’ 이렇게 의문이 듭니다. ‘꼭 절을 해야 되나?’, ‘굳이 아침에 수행을 해야 되나?’, ‘절을 한다고 깨달을 수가 있나?’, ‘깨닫는다고 뭐가 좋아지나?’ 이렇게 수많은 거부 반응이 일어나서 중간에 그만두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격려하면서 위기를 하나씩 넘어가야 합니다. 적어도 3년이 지나면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니 ‘3년은 꾸준히 해 본다. 나중에 그만두더라도 3년 하고 나서 그만둔다.’ 이런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이번 백일 기간은 세상이 무척 혼란스러운 만큼 나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정진한다는 관점을 갖고 정진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수행을 하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에 답변을 하다 보니 어느덧 오전 9시 30분이 훌쩍 넘었습니다.
뒤이어 열린법회가 예정되어 있어서 신규 천일결사자 입재식은 국제지부 활동가들에게 진행을 부탁한 후 스님은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곧바로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이동하여 3층 설법전으로 향했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올해 1년 동안을 특별 정진 기간으로 정하고 3층 설법전에서 매일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시예불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특별 정진 1일째 날입니다.
사시예불 기도가 끝나고 자리 정돈을 한 후 10시 15분에 백일법문의 첫 번째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강좌는 3월 10일부터 시작하고, 본 강좌 전에 3주 동안은 열린법회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열린법회 1강 ‘예불의 의미’에 대한 법문을 했습니다.
300여 명의 대중이 3층 설법전에 자리한 가운데 모두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이번 백일법문의 주요 내용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100일간 매일 법회가 진행됩니다. 오늘이 첫 번째 법회가 되겠습니다. 백일법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앞에 3주 동안은 ‘열린법회’라고 해서 그동안 우리가 절에 다니면서 또는 불교를 공부하면서 아주 기본적인 것인데도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강의를 합니다. 새로운 내용도 아니고,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불자라면 누구나 다 알아야 하는데 잘 모르고 있는 내용을 자세하게 다시 한번 얘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12주 동안은 불교사회대학, 경전 강의, 정토불교대학이 매주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에 열립니다. 수요일에는 기존에 정토회 회원들을 위해 하던 수행법회를 일반인들에게도 열어서 함께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금요일에는 누구나 다 자유롭게 참여해서 서로 대화하면서 자신의 의문을 풀고 고민을 해결하는 즉문즉설을 오전과 오후에 열게 됩니다. 토요일에는 1000배 정진을 하고, 일요일에는 명상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예불문 제1강을 시작했습니다. 예불을 하는 이유부터 불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체계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불자가 되면 부처님에 대해서 어떤 예를 갖추는 의식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불문’입니다. 즉 절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절을 해야 되는지 정의해 놓은 것이 예불문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불자라고 부르는데 ‘불자(佛子)’란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제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전 쿠시나가라에 도착해 사라나무 숲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아난다여, 여래는 오늘 저녁에 대열반에 들겠다.’ 이렇게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사라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꽃이 필 시기가 아닌데 꽃이 피니까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풍악 소리도 들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신기한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이것은 저 하늘의 신들이 여래의 열반에 임해서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이다. 이것은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숫자가 수없이 많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신이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말은 사람만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것이 아니고 신들도 부처님을 공경해서 공양을 올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부처님에 대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자는 수행자를 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수행자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있을까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합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 자가 수행자이다.’
그래서 예불문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아침저녁으로 법당에 와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 마음을 갖는 의식이 바로 예불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목표는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에요.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에요. 복을 받아서 출세하는 것도 아니에요. 복을 받아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니에요. 복을 받아서 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수행자는 복을 비는 자가 아닙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목표는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해탈이란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열반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빨리어로는 ‘니빠나’라고 하고,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발음을 따서 번역한 것이 열반이고, 그것을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해탈입니다. 요즘 말로 쉽게 표현하면 자유와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자유와 행복의 의미하고는 다릅니다. 그래서 앞에 ‘참’ 자를 붙여서 '참 자유'와 '참 행복'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수행의 목표는 해탈과 열반, 즉 '참 자유'와 '참 행복'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참 자유와 참 행복에 이르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느냐?’ 이런 것은 아예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 ‘죽은 뒤에 이런 세상이 있다.’ 이런 얘기도 일절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 대해 자꾸 궁금해하는 이유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죽은 뒤에는 이렇게 된다.’ 하는 얘기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두려움이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죽은 뒤에 대한 얘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얘기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현실에서 아무런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자가 왕위도 버리고, 부잣집 아들이 집도 버리고, 결혼한 사람이 가족도 버리고 출가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걸 얻으려고 부처님한테 빌잖아요. ‘결혼할 상대를 좀 구해주세요.’, ‘높은 지위에 올라가게 해 주세요.’,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이렇게 비는 것이 아니라 그런 걸 버려 버리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수행자에게 결혼, 지위, 돈, 인기, 명예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입니다. 수행자의 목표는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님은 부처님은 어떤 분인지, 부처님을 지칭하는 열 가지 명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정토사회문화회관을 나와 고(故) 김명혁 목사님 1주기 추모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강변교회로 향했습니다.
김명혁 목사님은 20년이 넘도록 평화재단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많은 활동들을 스님과 함께 해오신 분입니다. 스님이 강변교회에 도착하자 이미 추모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추모사를 경청했습니다.
종교인 모임 어르신들도 일찍 도착하여 함께 추모를 하고 있다가 추모식이 끝나고 스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1층으로 이동해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인도와 부탄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스님께서 워낙 강행군을 하시니 건강이 걱정되었습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50일이 지나니 좀 지치네요. 부탄은 난방 시설이 없다 보니 무척 추웠습니다.”(웃음)
식사를 하는 사이, 목사님의 제자, 지인들이 찾아와 스님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목사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은 목사님과 절친한 사이였던 손봉호 서울대 명예 교수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스님은 목사님을 추모하며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강변교회를 찾아와서 등불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목사님과 골목길을 함께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종교인 모임에서 지난 20년 동안 좌장 역할을 해오셨는데, 지난 1년 동안 목사님의 빈자리를 크게 느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스님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바쁘신데 귀한 걸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강변교회를 나왔습니다.
“법회와 일정이 겹쳐서 참석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늦게나마 오길 잘했어요.”
다시 정토회관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한 후 해가 질 무렵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저녁 5시 20분에는 미국 워싱턴 D.C. 방문 일정과 관련하여 법해 법사님과 회의를 하고, 저녁 6시에는 올해 7월에 열리는 국제화해학회의(IARS) 행사 준비와 관련하여 국제연대팀과 평화재단 대외협력팀 담당자와 함께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열린법회 저녁반 법문을 하기 위해 3층 설법전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250여 명의 대중이 자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저녁에도 오전반 법문과 같은 주제로 ‘예불의 의미’에 대해 법문을 했습니다.
“백일법문의 첫 번째 강의 주제는 ‘예불문’입니다. ‘예(禮)’라는 말의 의미는 절을 한다는 뜻입니다. 즉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해서 부처님께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며 인사를 할 때 악수를 하기도 하고, 절을 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우리가 공경하는 분이기 때문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예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를 갖추어 절하는 부처님은 어떤 분인지 알아야겠지요. 왜 우리는 그분께 절을 하며 예배를 할까요? 왜 부처님께 절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자꾸 절을 하라고 하면 ‘부모님한테도 잘 안 하는 절을 왜 부처님께 해야 하지?’ 하고 의문을 갖게 되겠죠.
부처님은 스스로를 지칭할 때 항상 ‘여래(如來)’라고 하셨어요. ‘여래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을 지칭할 때는 ‘세존(世尊)’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세존이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본인이 스스로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라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제자들이 부처님을 지칭할 때 항상 ‘세존이시여!’라고 불렀습니다.
붓다라는 말은 깨달은 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럼 깨달은 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모든 고뇌가 사라져서 의심이나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 붓다입니다. 이런 붓다의 특징을 표현하는 용어가 열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합니다.
첫째, 앞에서 말한 ‘여래(如來)’입니다. 인도말로 '타타가타(tatha-gata)'라고 합니다. ‘여래’란 오고 감의 흔적이 없는 부처님의 특징을 표현한 말입니다.
둘째, ‘응공(應供)’입니다. 이분은 아무런 번뇌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뭘 받는다고 해도 그게 업이 되거나 빚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노력하지 않고 얻어먹으면 당장은 옳을지 몰라도 다 빚이 됩니다. 빚으로 쌓여 있는 것은 나중에 다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떤 중생으로부터 무엇을 받아도 흔적이 없어요. 이걸 산스크리트어로 ‘아르하트(arhat)’ 또는 ‘아라한’이라고 부릅니다. 한문으로 의역하면 ‘응공(應供)’입니다. '응당히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셋째, ‘정변지(正徧知)’입니다. ‘정(正)’은 '바르다'는 뜻인 동시에 '객관적'이라는 뜻입니다. ‘변(徧)’은 '두루하다.'는 뜻입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적용된다.'는 의미입니다. '바르고 두루하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우리가 쓰는 말로 표현하면 ‘보편 타당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기는 한데 아무도 모르거나 돈 많은 사람만 알 수 있거나 지식인만 알 수 있다면 두루하지 못해요. 모든 사람이 두루 알고 있는데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면 죄가 없어진다.'는 말은 인도 사람들이 두루 알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진리가 되려면 두 가지 특징을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바르기도 하고, 차별 없이 두루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걸 한문으로 ‘정변(正徧)’이라고 하고, 바르고 두루한 것을 깨달은 사람을 ‘정변지(正徧知)’라고 합니다. 인도말로는 ‘삼먁삼보디(samyak-saṃbodhi)’라고 합니다. 한문으로 음역하면 ‘삼막 삼 불타(三藐三佛陀)’라고 합니다.
해탈주를 할 때 마지막에 ‘여래아라하삼막삼불타’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부처님의 명호가 들어 있습니다. ‘여래’는 오고 감의 흔적이 없는 분이라는 타타가타(tatha-gata)를 뜻하고, ‘아라하’는 응당히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아르하트(arhat)를 뜻하고, ‘삼막 삼 불타’는 바르고 두루한 것을 깨달은 분이라는 삼막삼보디(samyak-saṃbodhi)를 뜻합니다.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중에 세 가지를 붙여서 쓴 것이 ‘여래 아라하 삼막삼불타’입니다. 인도말로 하면 ‘타타가타-아르하트-삼먁삼보디’입니다.
넷째, ‘명행족(明行足)’입니다. ‘명(明)'은 '아는 것'을 의미하고, ‘행(行)’은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고, ‘족(足)’은 '충분히 갖추었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언행이 일치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여 아는 대로 다 행할 수 있는 분을 '명행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는 것도 많지만 알아도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합니다.
다섯째, ‘선서(善逝)’입니다. 이분은 '모든 고통과 번뇌의 바다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여섯째, ‘세간해(世間解)’입니다. 이분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알기 때문에 왕이 물어도 대답해 주고, 가난한 여인이 물어도 대답해 주고, 부자가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있어요. '제법이 공하다.'는 이치를 아는 것은 나의 괴로움을 없애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중생의 다양한 번뇌를 치유할 수는 없어요. 세상의 이치를 세세하게 알아야 듣는 사람의 상황에 맞춰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을 다 아는 것은 나의 번뇌를 없애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아마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왕자일 때 세상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대기설법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일곱째, ‘무상사(無上士)’입니다. '세상에 이분보다 높은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또는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인간과 신이 늘 교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상은 신들의 세계를 의미하고, 천하는 인간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들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통틀어서 이분보다 높은 사람은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덟째, ‘조어장부(調御丈夫)’입니다. ‘장부’는 '대장부'를 의미하고, ‘조어’는 '훈련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사나운 코끼리도 조련사가 막대기 하나로 훈련시키 듯이 일체중생의 번뇌를 모두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조어장부’라고 합니다. 성난 코끼리도 부처님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되었고, 앙굴리말라 같은 살인자도 부처님은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살인마가 옵니다. 그쪽으로 가지 마세요.’라고 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여래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하면서 피하지 않으셨어요. 앙굴리말라가 칼을 들고 ‘사문아, 거기 섰거라!’ 하면서 쫓아왔지만 부처님은 천천히 걸어가셨습니다. 부처님이 멈춰 서자 앙굴리말라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멈추라고 했는데, 왜 안 멈추고 가느냐?’ 하고 따져 물었어요. 그러자 부처님은 ‘여래는 오래전에 멈추었다. 멈추지 않는 자는 바로 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앙굴리말라가 ‘계속 가다가 이제야 멈췄으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하고 성질을 내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래는 사람을 해치는 행위를 멈췄다. 그런데 너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지 않느냐.’
그러자 앙굴리말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원래 앙굴리말라는 공부도 잘하고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을 잘못 만나서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살인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요즘과 비교하면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상대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해서 그의 어리석음을 제어했습니다. 이런 특징을 표현한 말이 ‘조어장부’입니다.
아홉째, ‘천인사(天人師)’입니다. ‘천(天)’은 신을 뜻하고, ‘인(人)’은 사람을 뜻하고, ‘사(師)’는 스승을 뜻합니다. 즉 신과 사람들의 스승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신에게 빕니다. 신이 위에 있고, 그 밑에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신과 사람의 위에 있습니다. 신과 사람들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존귀한 분입니다. 그러니 수행자들이 자존심을 가질 만하죠. 수행자들은 신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호법선신이여, 불법을 보호하라.’ 이렇게 말하지 ‘호법선신님,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웃음)
열째, ‘불세존(佛世尊)’입니다. '깨달은 자이기에 가장 존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인도에서 제가 법문 할 때 통역하는 사람이 부처님을 ‘바가반 붓다’라고 번역합니다. ‘바가반(婆伽梵, bhagavat)’이 세존이라는 뜻이니까 ‘바가반 붓다’는 ‘불세존’ 이런 의미가 되겠죠.
그럼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를 다시 정리해 봅시다.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 이것이 여래십호입니다. 이런 열 가지 특징을 가진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러니 충분히 절할 만한 분이지요? 누구나 공경할 만한 분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을 가지고 절을 한다는 내용이 담긴 글이 예불문입니다. 오늘은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강의 시간이 끝나버렸네요.” (웃음)
오늘은 ‘예불문’이라는 제목에 대한 설명을 하고 나니 법회를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평소에 무심하게 읽고 외우는 짧은 문구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는지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열린법회 참석자들은 모둠별로 모여서 마음 나누기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2일째 날입니다. 오전과 저녁에는 열린법회 두 번째 순서로 예불문 2강을 이어나가고, 오후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연달아 미팅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5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