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01.26 상카시아 석가족 법회, 인도정토회 이사회
“이 세상이 연관되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안녕하세요. 오늘은 상카시아에서 석가족들을 위해 법회를 하고, 인도 정토회 이사회를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한 후 오전에는 휴식을 했습니다. 성지순례 끝무렵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그저께부터 목소리가 잠기더니 결국 감기가 심하게 걸렸습니다. 마침 오전에는 잡혀있는 일정이 없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석가족 사람들이 상카시아 담마센터에 한두 명씩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1층에 준비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서 사모사, 짜이, 바나나를 먹으며 석가족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상카시아 담마센터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담마빨 스님의 법당에서 12시 30분에 석가족을 위한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법당을 참배하고 자리에 앉자 석가족 사람들은 스님에게 부처님 액자와 꽃다발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어깨에 하얀 천을 덮어 드리고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인사를 했습니다.

상카시아 인근 지역에서 약 70여 명의 석가족들이 모였습니다. 석가족들은 빨리어로 예불을 한 후 스님께 법을 청하였습니다.


잠시 명상을 한 후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힌디어 통역은 인도JTS 활동가인 쁘리앙카 님이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불교만의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지 설명하며 연기법과 중도의 가르침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종교와 철학에는 전혀 없고 불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개념의 용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바로 ‘중도(中道)’와 ‘연기(緣起)’입니다. 첫째, ‘중도’란 어떠한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연기’란 깨달음을 얻고 눈을 떠서 보면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카르마, 윤회, 니르바나, 이런 용어들은 힌두교에서도 쓰고 있는 용어인데, 그 의미가 불교의 가르침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불교의 담마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기준은 그것이 연기법에 합당하느냐, 중도적 관점에 맞느냐가 기준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없고 불교만이 갖는 독특한 개념 두 가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한 내용은, 그 첫 번째가 ‘중도(中道)’이고, 두 번째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사성제란 괴로움(苦)의 원인은 집착(集)이고, 집착(集)을 소멸하면 니르바나(nirvana)에 이를 수 있으며, 다시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여덟 가지 바른 길인 팔정도(八正道)를 닦아서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알아차림’입니다. 사실은 부처님의 첫 설법이 이 말씀 외에 다른 무엇이 없습니다. 이 얘기만 듣고도 다섯 비구 중에 ‘콘다냐’가 제일 먼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설법을 했는데, 그 내용은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이 내용을 더 쉽게 예로 들어서 설명한 것 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부처님께 ‘브라만들이 말하기를, 강가 강에 가서 목욕하면 모든 죄가 다 없어지고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강가 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태어나겠구나.’

젊은이는 그 말을 듣고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의문이 풀려 버렸습니다. 부처님은 ‘하늘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하늘나라에 안 태어난다’, ‘그 말이 사실이다’, ‘사실이 아니다’, ‘강가 강에서 목욕해 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은 틀렸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다른 종교나 다른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다만 진실만을 말할 뿐입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다른 종교나 철학의 주장을 갖고 논쟁을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신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내용은 개인의 믿음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믿음의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내생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도 개인의 믿음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무엇을 믿느냐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옳으니 그르니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논쟁하지 마라. 다만 우리는 진실을 추구해 나가면 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나는 허황한 말이나 삿된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붓다 담마를 이해하고 스스로 직접 경험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불교는 종교로서도 아주 훌륭하고, 철학으로서도 아주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행으로서의 불교’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스스로 경험해서 괴로움 없이 살아가야 ‘부디스트(Buddhist)’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앞에서 불교의 핵심 사상이 연기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연기법은 시간적 개념과 공간적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적용할 경우 연기법의 공간적 개념은 사회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적 개념은 역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연기법은 인간 존재의 문제를 깊이 있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종교적으로만 믿거나, 불교를 학문적으로만 연구하게 되면, 사회성과 역사성이 없어집니다. 오늘날 불교가 사회성과 역사성이 부족해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한다면, 사회적 역사적 발자취를 가진 붓다라는 인물을 통해서 불교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담마를 공부하기에 앞서 반드시 부처님의 일생을 깊이 있게 공부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많은 돈을 들이고 시간을 내어 매년 500명의 인원을 데리고 인도성지순례를 하는 이유는 바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현장 학습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부처님이 설법한 현장에 가서 부처님이 이 장소에서 누구를 만나서 어떤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는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단순히 법당이나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과는 달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인도의 기후 환경과 사회문화 환경 속에서 실존 인물이었던 붓다가 어떤 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덜어주었는지를 알아야 부처님의 인격이 구체적으로 가슴에 와닿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 당시에는 천민과 여성은 출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왜 출가할 수 없었을까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자유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남자는 자유인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결정을 해서 출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에는 주인인 남자를 두고 출가하게 되면 주인인 남자가 다시 여자를 잡으러 왔습니다. 천민도 주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돈을 주고 천민을 사 왔는데 천민이 도망을 가서 출가해 버리면 주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곧장 출가한 천민을 잡으러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천민 계층과 여성은 출가수행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부처님은 여성에게 출가를 허용하고, 천민 계층에도 출가를 허용했습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여성 해방이자 계급 해방이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누구나 출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붓다는 이것을 단행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은 불교를 단순히 종교적으로 믿거나, 담마를 학문적으로 연구만 해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석가족과 꼴리족 사이에는 로히니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강물이 많이 줄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양쪽 농민들이 서로 물을 가져가려고 하다가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말싸움이 주먹 다툼이 되고, 주먹 다툼이 돌팔매가 되어 싸움이 점점 커졌습니다. 마침내는 군대가 서로 전쟁을 벌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붓다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저들을 말려야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은 피를 흘리겠구나.’

부처님은 양쪽 군대의 대장을 불러 말했습니다.

‘이 강에 흐르는 물이 귀한가? 아니면 사람의 몸에 흐르는 피가 귀한가?’

그러자 양쪽 장군이 똑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의 몸에 흐르는 피에 비하면 강물은 하찮은 것입니다.’

다시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너희들은 하찮은 강물을 위해서 그 귀한 사람의 피를 강물처럼 흘리려고 하느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감정이 격해져 전쟁을 벌이려고 하던 두 종족은 전쟁의 무익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싸울 힘을 오히려 물을 관리하는 데에 쏟아서 그해의 가뭄을 잘 넘겼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평화롭고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는가

부처님은 이렇듯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직접 행동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45년을 살다가 열반에 드셨습니다. 45년 동안 부처님은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문제를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과 떠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온갖 문제로 인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가르쳐준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오늘날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도 당시에 때로는 많은 비난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는 평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시기와 질투,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부처님을 해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부처님마저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비난을 받은 적이 있는데, 부처님보다 인격이 못한 우리가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남이 비난하면 억울해하고 분노합니다. 이럴 때 과연 부처님은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경전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다 나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과 사회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사회 속에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전해 받은 불교는 주로 승려 중심의 불교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법하신 실제의 불교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평화롭고 괴로움 없이 사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그저 불교를 믿는 것을 넘어서서 담마를 이해하고 실천하여 스스로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갖고, 궁금한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시간 동안 다섯 명이 다양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연기법에 대해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이 연관되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스님께서 연기법에 대해 얘기하셨는데, 이 세상이 모두 연관되어 있다고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에 대해 말씀하실 때 주로 우리의 정신 작용을 중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물질적 존재입니다. 물질적 존재를 기초로 생명의 존재가 있으며, 생명의 존재를 기반으로 정신적 존재가 있습니다. 즉, 물질 작용이 있고, 생명 작용이 있으며, 정신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옥상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질 작용이고, 내가 밥을 먹는 것은 생명 작용이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고 판단하는 것은 정신 작용입니다. 우리는 물질 작용, 생명 작용, 정신 작용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돌멩이는 물질 작용만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은 물질 작용과 생명 작용, 두 가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나 동물은 물질 작용과 생명 작용에 더해 정신 작용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신 작용은 사람에게만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 작용은 동물에게도 있지만, 사람이 가장 발달된 형태로 가지고 있습니다. ‘괴로워 죽겠다’ 하는 것은 정신 작용에 속합니다. 누군가 침으로 찌르면 ‘아야!’ 하고 반응하는 통증은 생명 작용입니다. 그러나 찌른 사람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은 정신 작용입니다.

부처님께서 주로 연구하신 것은 정신 작용입니다. 괴롭다고 하는 것은 정신 작용입니다. 인도의 전통 사상은 괴로움이 전생에 지은 나쁜 업의 과보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괴로움이 본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생긴 원인을 찾아 없애면 괴로움도 사라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니르바나(열반)’라고 부르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전생이 어땠는지에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앙굴리말라가 칼을 들고 부처님께 다가왔을 때도 부처님은 니르바나에 이른 상태였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 연기법, 그리고 모든 가르침은 이런 인간의 정신 작용을 분석해서 도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학은 물질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의학이나 생명공학은 생명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첫째, 물질세계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연구했습니다. 물 한 방울을 쪼개면 여전히 물이고, 또 잘라도 물입니다. 그런데 계속 잘라 들어가다 보면 어떻게 될까요? 한 번만 더 잘라보면 더 이상 물이 아닌 상태가 됩니다. 그 마지막 물의 알갱이, 그것이 바로 물의 본질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물의 본질이 모여서 세상의 모든 물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물은 수소와 산소가 결합한 것임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산소 하나와 수소 두 개가 결합하여 물 분자가 된다는 것이지요. 물은 단독의 알갱이가 아니라 산소와 수소의 결합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산소와 수소를 분해해 버리면 더 이상 물이 아니게 되고, 다시 결합하면 물이 생깁니다. 즉, 물은 물이 아닌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을 구성하는 산소와 수소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일까요? 돌턴의 원자설에서는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독적인 알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원자 역시 내부에 무언가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원자의 중심에는 핵이 있고, 그 핵을 전자가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핵을 또 들여다보니까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립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원자 역시 단독자가 아니고 소립자의 결합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단독자일까요? 소립자도 단독자가 아니라 쿼크의 결합이라는 것이 발견되었어요. 물질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단독자가 없고, 다만 결합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 무상, 연기법은 단독자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물질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자들 중에는 ‘불교는 과학이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둘째, 생명세계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생명에는 종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개, 소, 감자, 토마토 같은 것을 종이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감자를 심으면 반드시 감자가 나옵니다. 아무리 심어도 감자에서 고구마가 나올 리는 없잖아요. 그래서 과거에는 종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만든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명과학 연구에서는 ‘이게 감자다’라고 하는 것은 유전자(DNA)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유전자의 배열을 바꾸면 감자가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종이라는 것도 불변하는 게 아니고 바뀌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는 정신 작용, 생명 작용, 물질 작용, 모두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셋째, 정신세계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나다’하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누구일까요? 내가 택시를 타면 사람들은 나를 승객이라고 부릅니다. 가게를 운영하면 주인이라고 부르고, 학교에 가면 학부모라고 부릅니다. 아내를 만나면 남편이라고 부르고, 엄마를 만나면 자식이라고 부르죠. 이처럼 연관되어서 누구라고 불리는 것이지 단독으로는 누구도 아닙니다. 관계를 맺으면 무언가가 되지만,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이름이 사라져 버립니다.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무엇도 아니지만, 인연을 따라 관계를 맺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고, 인연을 따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과학적 지식을 사용해서도 충분히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브라만 계급과 노예 계급이 있었습니다. 브라만의 아들은 브라만이고, 노예의 아들은 노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노예가 없어져 버리면 브라만이라는 게 있을까요? 반대로 브라만이 없어지면 노예라는 것도 없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브라만도 없고 노예도 없습니다. 만약 브라만과 노예가 모두 사라지면, 그 이름도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관계 맺음으로 이루어지고, 관계가 흩어지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며, 신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인연에 따라 형성되기도 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가르침을 붓다는 2600년 전 그 시대에 사람들에게 이해시켰어요. 이것이 붓다의 위대함입니다. 첫째, 아무도 모르는 것을 깨닫고 알았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도 이 사실을 깨우칠 수 있도록 가르쳤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비록 세상 전체에는 실현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상가 안에서는 이를 실현시켰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는 4개의 계급이 있다. 그러나 내 법 안에는 그런 차별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는 브라만 출신이고, 우빠리는 수드라 출신이고, 아난다는 크샤트리아 출신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상가 안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는 친구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너는 그 부정한 사람들과 같이 있다며?’ 하거나 ‘그 더러운 사람들과 함께 산다며?’ 하는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자면 ‘너는 돼지와 함께 산다며?' 하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급의식은 허위의식입니다. 스스로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버려야 하고, 스스로 부정하다고 여기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나는 고귀하다’, ‘나는 높다' 하는 교만심을 버리면 겸손해집니다. ‘나는 부정하다’, ‘나는 낮다’ 하는 비굴함을 버리면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 수행자들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이 말씀은 수행자가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태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담마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담마의 핵심은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을 다른 용어로 표현한 것이 무상과 무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더라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상대가 가난하고 여자라 할지라도 그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만약 모두가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좋아질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첫째, 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 법을 내가 실제로 경험해야 합니다. 하지만 법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법을 이해하더라도 실천하기는 더욱 어려워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꾸준히 정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잘 되다가도 다시 안 되고, 다시 잘되다가 또 안 되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마치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꾸준히 정진해 나갔으면 합니다.”

낮 12시 30분에 시작한 법회는 오후 4시 30분에 끝났습니다. 4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법문을 설해 준 스님에게 석가족들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님은 석가족 법회를 모두 마치고 다시 담마센터로 이동했습니다.

이어서 오후 5시 30분부터는 인도정토회 이사회를 진행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삼귀의를 하며 이사회를 시작했습니다.

스님 인도정토회 이사들을 위해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지난 1년 동안 수고들 하셨습니다. 우리가 담마센터 건축을 위한 기공식은 했지만 아직 시작은 하지 못했습니다. 준비를 잘하려고 하다 보니 시작이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가능하면 건축을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쁘리앙카 님의 진행으로 2024년 인도정토회 사업 보고를 하고, 담마센터 건축과 관련하여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을 주고받은 후 저녁 6시 20분에 이사회를 마쳤습니다.

이사회를 마치고 스님은 대중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후 숙소에서 원고 교정과 업무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수레스 님이 운영하는 학교를 방문하여 격려를 하고, 점심에는 깐노즈로 이동하여 아쇼카 석주 건축 기공식에 참석한 후, 저녁에는 이따와로 이동하여 기차를 타고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는 가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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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민일

합장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5-02-10 22:59:54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5-02-06 06:28:09

윤선우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건강 관리 잘 하십시요 스님
두손 모읍니다.

2025-02-03 2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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