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01.16. 인도 성지 순례 6일째_라즈기르
“법문을 많이 듣는다고 깨달음을 얻게 될까요?”

안녕하세요. 인도 성지 순례 6일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라즈기르로 이동했습니다. 라즈기르는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로,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중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마중 나왔던 길인 ‘제띠안’, <묘법연화경>의 설법터로 알려진 ‘영축산’,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 그리고 부처님 열반 후 제1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을 참배했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새벽 3시 40분에 일어나 4시부터 차량에 짐을 싣고 4시 30분에 탑승을 마친 차량부터 라즈기르로 출발했습니다. 이동 중 차량 안에서 새벽 기도를 드렸습니다.

1시간 30분을 이동해 제띠안 근처의 넓은 공터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순례단은 걸어서 마을을 지나 제띠안으로 향했습니다.

제띠안에 도착해 스님의 법문이 시작될 무렵, 마침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제띠안의 역사와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자, 휴대폰 불빛을 모두 꺼 보세요. 여러분이 서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언덕이 있습니다. 저곳은 부처님께서 제띠안에 머무르셨던 걸 기념해 후대에 아쇼카왕이 세운 탑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섭 삼형제와 그 제자 천 명을 교화한 뒤 가야 쉬르샤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라는 유명한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후 천 명의 대중을 이끌고 약 80km 떨어진 라즈기르로 걸어가셨습니다. 당시 부처님은 하루 평균 15km를 걸어 5일 만에 이곳에 도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차를 타고 온 길은 부처님께서 가야에서 라즈기르로 교화를 위해 오신 길이자, 라즈기르에서 가야로 수행을 하러 갔던 길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야에서 산기슭을 따라 약 5일 동안 걸어오셨으며, 그렇게 도달한 곳이 바로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제띠안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고개 하나를 넘게 되고, 조금 더 가면 왕사성에 이르게 됩니다."

스님은 이어서 빔비사라왕과 부처님의 역사적인 만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성 서쪽 문에서 약 1유순(12km) 떨어진 이곳, 제띠안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부처님을 기다렸다고 전해집니다. 경전에는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기다렸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부처님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국사(國師)와 같았던 우루벨라가섭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당시 우루벨라가섭은 대중 천 명을 이끄는 지도자로, 마가다국에서도 매우 중요한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우루벨라가섭이 왕사성으로 천 명의 대중을 이끌고 오니, 빔비사라왕 역시 천 명의 신하를 이끌고 예법에 따라 마중 나왔습니다. 이곳에서 두 무리가 조우한 후, 우루벨라가섭과 부처님이 자리를 잡자 왕과 대신들 사이에 큰 의문이 생겼습니다.

‘젊은 수행자 고타마가 팔십이 넘은 노승인 우루벨라가섭의 스승이라니,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이러한 의구심이 대중의 마음속에서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때 빔비사라왕은 우루벨라가섭에게 물었습니다.

‘대사문이시여, 제가 들은 소문에 따르면, 대사문께서 젊은 수행자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것은 마치 세 살 된 아이가 80세 노인을 두고 ‘이는 내 손자입니다.’라고 하는 것 같아 믿기지 않는군요.’

이에 우루벨라가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세 바퀴 돌며 예를 표한 뒤,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며 말했습니다.

‘이분은 나의 스승이며,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내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을 만난 후, 그 씨앗을 버리고 해탈을 얻었습니다.’

우루벨라가섭의 이러한 신앙 고백으로 대중의 의심이 모두 풀렸습니다.

‘아, 정말 이분이 소문대로 우루벨라가섭의 스승이구나.’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 법을 청해 설법을 들었고, 그 결과 지혜의 눈을 떴습니다. 왕은 마음이 맑아지고 가벼워져 부처님을 세 바퀴 돌며 스승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빔비사라왕은 자신의 소원을 고백했습니다.

‘제가 왕자 시절, 다섯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왕이 되는 것이었고, 둘째는 내 나라에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제가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었고, 넷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모든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부디 왕궁에 드셔서 제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부처님은 왕의 청을 조용히 거절하셨습니다. 왕은 부처님과 대중이 머물 수 있는 적절한 장소를 고민하다가 자신이 아끼던 대나무 숲을 떠올렸습니다. 도시와 너무 가까워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탁발하기에 멀지도 않은 곳이었습니다. 왕은 다시 부처님께 청했습니다.

‘북문 밖에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대중이 그곳에서 머무르시면 어떻겠습니까?’

부처님은 침묵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이후 부처님은 왕사성 북문 밖에 있는 대나무 숲, 베누반 비하르(Venuban Vihar)에서 머무셨습니다. 오늘날 불교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진 ‘죽림정사’가 바로 그곳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 직후, 당시 인도에서 가장 큰 왕국의 왕을 교화하셨고, 이전에는 대제사장을 교화함으로써 법의 위대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빔비사라왕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이곳은 불교인들에게 교화와 전법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설명이 끝나고, 스님과 순례단은 잠시 명상을 하고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이후 제띠안을 떠나 다음 순례 장소인 영축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어두웠던 하늘은 완전히 밝아져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버스를 타고 왕사성 남문으로 이동했습니다.

왕사성 남문으로 들어가 빔비사라왕의 마차 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터, 부처님의 주치의로 알려진 지바카의 망고 공원을 지나 9시가 다 되어 영축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산길을 오르는 중, 부탄에서 온 성지 순례단과 마주쳤습니다. 부탄 사람들에게는 인도를 방문하고 성지 순례를 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를 본 스님은 순례단에게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오늘 영축산 정상에서 참배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부탄 사람들에게는 이곳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꿈같은 일이니, 우리가 정상은 양보하고 아래에서 참배합시다.”

예상대로 영축산 정상은 순례객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부처님의 설법 장소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고요히 명상하고 예불을 드렸습니다. 기도 소리와 산바람이 어우러지며 순례단의 마음이 더욱 차분해졌습니다.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영축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며 순례단에게 이곳의 역사와 불교적 의미를 전했습니다.

“이곳은 우리말로 독수리봉, 한문으로는 영축산이라 부릅니다. 부처님께서 자주 머무르며 중요한 법문을 설하셨던 장소입니다. 영축산에는 대승불교와 관련된 많은 설화가 전해지며, 우리가 매일 독송하는 반야심경도 이곳에서 설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어서 데바닷타(Devadatta)와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석가족 출신의 왕족이었던 데바닷타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카필라성을 방문하셨을 때, 일곱 왕자가 출가했는데 그중 데바닷타가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성향은 근본주의적이었으며, 사리푸트라도 칭찬할 정도로 데바닷타는 뛰어난 수행자였습니다. 그러나 데바닷타는 끝내 세속적 야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

스님은 부처님과 데바닷타 사이에서 벌어진 일화를 생생히 전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연로해지자, 데바닷타는 자신이 승단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여러 차례 제안했습니다.

‘부처님, 연세도 많으신데 제가 승단을 이어받아 이끌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승가는 깨달은 자들의 모임이니, 누군가 지도자라고 나설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사리푸트라나 목갈라나처럼 경륜과 인품을 갖춘 이들이 있지 않느냐.’

그러자 데바닷타는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부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행자라면 신자의 식사 초대에 응하지 않고 반드시 걸식을 해야 하며, 채식만 해야 합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어야 하며, 분소의만 입어야 합니다. 또한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만 자야 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데바닷타여, 수행자가 그렇게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신심 있는 재가자가 공양을 올리면 그것을 받아먹을 수 있다. 어린 사미나 환자는 하루 두 끼를 먹을 수도 있다. 걸식할 때 물고기가 섞인 음식을 받을 경우도 있다. 나무 밑에서 자는 것은 좋지만, 비 오는 날은 사람이 없는 빈집 처마에서 잘 수도 있다. 헌 옷을 구하지 못했을 때는 새 옷을 입을 수도 있다.’

부처님의 말씀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합당하다고 여겨지자, 데바닷타는 부처님과 대화를 통해서는 후계자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왕자가 반란을 일으키듯 승단을 장악하려는 생각으로 부처님을 살해하려 했습니다.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기도 했고, 성난 코끼리를 내몰기도 했고, 한 번은 이 영축산 꼭대기에서 큰 돌을 굴려 부처님을 해치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스님은 영축산과 관련된 다양한 설화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영축산에는 부처님의 생애와 대승불교에 얽힌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경전을 독송할 동안 탑터를 참배하지 못하신 분들은 참배를 하겠습니다. 탑터에 특별한 것은 없어요. 부처님이 바위 위에 앉아 설법을 하셨던 장소예요. 부처님 당시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지만, 지금은 후대 사람들이 이를 기념해 탑을 쌓아 표시한 것입니다.”

스님의 말은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흥미로웠고, 순례단은 이야기에 깊이 몰입했습니다.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스님의 제안대로 일부는 탑을 참배하고 일부는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영축산 참배를 마치고 다시 산을 내려왔습니다. 영축산 탑터가 보이는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오전 11시가 되어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일정을 시작했던 터라 모두 배가 고팠습니다. 도착 후 먼저 도시락으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잠시 명상을 한 후 스님이 죽림정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님은 잠시 명상을 하고 성지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며, 마하가섭이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 등을 자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왕사성 죽림정사입니다. 이 나라 말로는 ‘라자그라하 베누반 비하르(Rajagriha Venuvana Vihara)’입니다. 왕사성은 불교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불교 최초의 절이 지어진 곳이기도 하고,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인 제1제자 사리푸트라, 제2제자 목갈라나, 제3제자 마하가섭 등 쟁쟁한 분들이 다 이곳 출신이고, 이곳에서 부처님께 귀의를 했습니다. 또 코살라국의 사위성에 기원정사를 지은 수닷타 장자도 이곳에 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듣고 난 후 부처님을 사위성으로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불교 역사 속에서 불교 경전이 가장 많이 설해진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은 쉬라바스티 ‘사위성’입니다. 두 번째로 많이 기록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라자그라하 ‘왕사성’입니다. 사위성은 코살라국의 수도이고, 왕사성은 마가다국의 수도입니다. 마가다국은 전통문화를 가진 강국이고, 코살라국은 부처님 당시에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강국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왕사성과 사위성을 오고 가시면서 많은 전법 활동을 하셨습니다.

부처님 초기에 위대한 제자들이 출가를 한 곳, 왕사성

왕사성은 부처님께서 출가한 후 두 분의 스승을 이곳에서 만나 수행했던 곳이고, 또 깨달음을 얻은 후에 이곳을 방문해서 빔비사라왕을 교화했던 곳입니다. 또 죽림정사를 기증 받으시고 이곳에서 3년 가까이 머물면서 활발하게 전법 활동을 한 결과 무명의 인사에서 일약 유명 인사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 곳입니다.

가야 근교에서 우루벨라가섭 등 천 명의 수행자들이 부처님께 귀의한 것도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이곳 왕사성에서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가 부처님께 귀의함으로 해서 그들의 제자 250명이 따라 귀의하게 된 것도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타마는 남의 아들을 뺏어가고, 남의 남편을 뺏어가고, 남의 제자를 뺏어간다’ 하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하가섭이라고 하는 분도 이곳 왕사성에서 출가를 했습니다. 이분은 신분이 브라만이고 집안이 아주 고귀했으며 부자였어요. 집안이 고귀한 것과 부자인 것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반이지만 가난한 사람도 있고, 양반이면서 부자인 사람도 있고, 신분이 낮으면서도 부자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하가섭은 신분도 높고 아주 부자였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의 신분 질서에 따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7대로 다른 계급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브라만인 가장 고귀한 집안의 후손이었습니다.

마하가섭이여,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요

하지만 마하가섭은 세속에 관심이 없었어요. 결혼 생활이라든지 재물이나 지위 이런 데 별 관심이 없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청정하게 수행하기를 원했는데, 부모 입장에서는 아들이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당시 인도의 법은 집안에 남자가 없으면 모든 재물은 국가에 몰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재물과 여자는 분배가 되는 존재일 뿐이었던 거죠. 그러니 아들이 장가를 가서 손자를 낳아주기를 부모로서는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하가섭은 그런 일에 통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부모가 요청을 계속해서 부모에게 효도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속마음으로는 결혼을 하지 않을 심산으로 어느 예술가한테 향나무로 아주 아름다운 여성을 조각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조각을 부모님한테 드리면서 이런 여자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결혼을 안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 향나무 조각을 가지고 계속 여자를 찾아 다녔고, 요행이 그런 절세미인을 찾았어요. 이렇게 되니 마하가섭은 결혼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거예요. 결혼식을 하고 첫날밤에 마하가섭이 신부에게 이렇게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난 결혼할 생각이 없었소. 그런데 부모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지만, 나는 뜻이 없소.’

그런데 부인 또한 자기도 그렇다고 말하는 겁니다. 부인은 여자니까 특히나 더 저항할 형편이 못 되었던 거죠. 그래서 두 사람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동안은 부부 행세를 하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각자 자유의지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결혼 생활을 하는 척하니 아기가 안 생기잖아요. 아기가 안 생기니까 부모가 계속 안달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뜻이 분명했기 때문에 여전히 형식적으로만 부부 생활을 했어요. 이렇게 세월이 흘러서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마하가섭이 아내에게 ‘재산은 다 당신이 가지시오. 나는 집을 떠나겠소’ 하니, 아내도 역시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의논을 해서 재산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하고, 등을 딱 맞대고 서서 앞으로만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나 봅니다. 반대로 가도 어차피 만나게 되는데 말이죠. 아마 지구가 둥근 줄을 몰랐기 때문에 등을 맞대고 각자 앞으로 걸어가면 영원히 서로 만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마하가섭 존자는 고타마 붓다가 출현했다는 소식을 이미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로 부처님께 바로 찾아갔습니다. 마하가섭이 인사를 오자마자 부처님께서는 ‘마하가섭이여,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사람이 또 한 사람 더 있어요. 바로 수닷타 장자가 찾아왔을 때도 역시 부처님이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요’ 이렇게 말했다고 경전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만큼 중요 인물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거겠죠. 설령 부처님이 그런 말을 했다 하더라도 중요 인물이 안 되었다면 그런 말씀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웃음)

이렇게 해서 마하가섭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밥을 먹다가 부처님께서 옆에 앉은 마하가섭을 돌아보고 옷을 만지면서 ‘존자여, 옷이 좋구려’ 이렇게 말했어요. 그때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을 보니 부처님은 낡은 분소의를 입고 있는데, 자기는 비단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을 벗어서 부처님께 드리고, 자신은 부처님의 낡은 옷을 받아서 입었다고 해요. 그 이후로 마하가섭 존자는 가장 검소하게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밥은 반드시 거친 음식을 얻어먹고, 잠은 반드시 나무 밑에서 자고, 옷은 꼭 분소의만 입었다고 해요. 그래서 다른 비구들이 별로 안 좋아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자리도 잘 안 비켜주고 하는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하가섭 존자는 법문을 듣고 빨리 깨달았는지는 몰라도 고귀한 집에서 자라는 동안 몸에 밴 습관은 쉽게 못 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점을 부처님께서 어느 날 지적을 해준 것이죠. 마하가섭은 단 한 번의 지적을 받고 나서 두타 제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지적을 12번 해도 안 고치죠. 그런데 마하가섭은 한 번의 지적을 받고는 완전히 고쳐 버렸습니다.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가버린 거죠.

부처님께 지적을 받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목갈라나입니다. 목갈라나는 신통 제일이라고 불립니다. 승단이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부처님께 자기가 신통을 써서 해결하면 안 되겠는지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는 ‘신통을 쓰지 마라. 신통은 중생을 현혹시킨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런 지적을 받고 목갈라나는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했는데도 신통을 안 썼어요. 목갈라나는 일종의 순교를 하게 되는데, 신통을 썼다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통을 쓰지 않고 그냥 돌에 맞아 죽었어요. 이런 일화를 보면 붓다의 제자들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1제자 사리푸트라, 제2제자 목갈라나, 제3제자 마하가섭 등 초기 부처님의 대제자들이 이곳에서 출가를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셋 다 브라만 출신이었습니다.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는 부처님보다 연세가 많으니까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에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사후에는 이분들이 경전에 등장을 안 합니다. 하지만 마하가섭 존자는 부처님 사후에 상수 제자가 되어 교단을 정비하고 경전을 편집하고 계율을 정비하는 모든 일에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대제자들이 이곳 왕사성에서 출가를 했습니다.

무상한 도리를 깨치면 그게 바로 부처를 보는 것

이런 대제자들의 이야기 외에도 이곳에서는 다양한 일화도 아주 많습니다. 어느 비구가 병이 들어서 죽을 때가 다 되어 가는데도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직접 오셔서 그 병든 비구를 돌본 얘기가 나옵니다. 그 비구를 돌보면서 부처님께서 ‘너는 건강할 때 다른 환자를 돌본 적이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 비구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병문안을 간 적이 있느냐?’ 하니 역시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비구들이 수행 정진은 열심히 했지만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누가 죽든지 말든지 신경을 안 썼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집을 나와 출가해서 사는 사람들끼리 병이 들었을 때는 서로 돌봐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아픈 어떤 비구가 ‘죽기 전에 부처님을 한번 친견해 보고 죽는 게 소원이다’ 하고 친구한테 얘기했는데, 친구가 부처님께 이 말을 전하자 부처님이 그 비구를 병문안 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어떠냐?’ 하시니 그 비구가 ‘저는 아무 여한이 없습니다. 저에게 딱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죽기 전에 여래를 한 번 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몸은 무상한 것이다. 이 몸은 늙고 병들어 죽을 허망한 것인데 이걸 봐서 뭐 하려고 하느냐? 법을 보는 자가 여래를 보는 자이다. 무상한 도리를 깨치면 그게 바로 부처를 보는 것이지 여래의 육신을 보는 것이 여래를 보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제자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깨우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일들이 모두 이곳 왕사성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열반경의 두 번째 장면도 바로 이곳 죽림정사의 장면입니다. 첫 번째 장면이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 법에 대한 말씀이고 두 번째 장면 즉 상가가 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에 대한 설법이 바로 이곳에서 설해졌습니다. 이런 정도로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시는 경전에서 실제로 한번 독송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님의 성지 안내가 끝나자 모두 경전 독송을 하고 예불을 올렸습니다.

대중들은 더 있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칼란다카(Kalandaka) 연못 앞에서 차량별로 사진을 찍고 죽림정사를 나와 바로 칠엽굴로 올라갔습니다.

칠엽굴로 가는 길은 ‘온천정사’라는 목욕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온천정사의 맨 위쪽은 높은 카스트가 목욕하지만 맨 아래쪽의 더러운 물에서는 낮은 카스트가 목욕을 한다고 합니다.

산을 조금 오르다 뒤돌아보니 산으로 둘러싸인 라즈기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생각보다 멀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칠엽굴에 도착하니 동굴과 함께 탁 트인 풍경이 시원합니다. 스님은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산을 올랐습니다. 몇 번을 멈추어가며 겨우 칠엽굴에 이르렀습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스님은 칠엽굴에서 경전을 결집할 당시의 상황과 부처님 입멸 후의 불교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칠엽굴’이라고 합니다. ‘십따빠르니굽타’라고 해요. ‘십따’라는 것이 일곱이라는 수이고, 일곱 나뭇잎처럼 동굴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이유

부처님께서는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세상 나이로 말하면 팔십이고, 출가한 후로 말하면 51년이고, 성도한 후로 말하면 45년간 설법을 하시다가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고 하니까 모두 스승을 잃고 슬픈 마음을 가졌는데, 일부 젊은 승려들 중에는 ‘아이고, 그 노인 잘 죽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대요. 요즘으로 비유하면 MZ세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이건 하면 안 된다, 잔소리를 하더니 이제 잔소리도 안 듣고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제자가 수만 명이 되니까 그런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 있죠. 그런데 부처님이 열반하고 나서 제일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상수 제자였던 마하가섭 존자가 그 얘기를 듣고는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벌써 이런 소리가 나온다고 하면, 앞으로 십 년, 백 년이 지나면 전부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는 사람이 생길 것 아니냐? 그러니 부처님 살아생전에 부처님께 법문을 들은 우리들이 모여서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마하가섭 존자가 이렇게 제안을 하니 전부 다 ‘옳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제1결집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하나로 다 모으는 과정을 결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참가 기준을 정하기를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인정된 사람만 모인다’ 이렇게 됐어요. 그 당시 고승들만 참가하기로 정한 겁니다. 기준에 맞는 사람을 모아보니 약 오백 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법문을 많이 듣는다고 깨달음을 얻게 될까요?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곁에서 25년간 모시면서 법문을 들어서 모든 경전을 다 구술할 만큼 뛰어난 사람인데, 그때까지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집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아난존자가 용맹 정진해서 겨우 깨달음을 얻어서 결집에 합류했다고 해요. 그래서 벽화 중에 아난존자가 바위 끝에 앉아서 마지막으로 용맹 정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있어요. 법문을 많이 듣는다고 깨닫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오백 명이 모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백 명이니까 이 자리에 오백 명이 앉아질까요?”

“네!”

“빈 공간에 백 명이 더 앉아지겠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무슨 오백 명이 앉을 수 있느냐?’ 하고 의심을 하는데 몇 년 전에 실제로 오백 명이 순례를 와서 앉아 봤어요. 그래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곳에서 무엇을 결집했을까요?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부처님의 법문입니다. 무아, 무상, 연기, 이런 법문을 모으는 게 우선 필요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계율입니다. ‘이건 먹어도 된다’, ‘이건 먹으면 안 된다’ 하는 규칙이 바로 계율입니다. 다른 말로는 인격적인 가치와 실천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법문은 부처님의 사상을 말로 표현한 것이라면, 계율은 실제로 부처님이 행동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법문은 부처님을 25년간 시봉한 아난다가 제일 많이 들었습니다. 첫째, 부처님과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난다가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기억력이 좋고 실제로 가장 가까이에서 법문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아난다가 초안을 발표합니다. 초안 없이 오백 명이 모여서 의논할 수 없잖아요. 한 사람이 초안을 내면 그걸 가지고 ‘거기에 뭐가 빠졌다’,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서 한 얘기가 아니고 다른 데서 한 얘기다’ 이렇게 토론이 되는 거죠.

계율은 우파리가 초안을 발표했어요. 우파리는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석가족의 노예 계급 출신입니다. 출가하기 전에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 일을 했습니다. 아는 게 적으면 시킨 대로 잘하잖아요. 아는 게 많으면 자기가 알아서 이렇게 저렇게 변칙을 많이 쓰게 되는데, 우파리는 그냥 곧이곧대로 실천을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먹지 마라’ 하면 안 먹고, ‘먹어라’ 하면 먹고,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소소한 계율은 버려라’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부처님 당시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 규칙들이 생겼지만, 나중에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규칙이 너무 세세하면 조직이 경직되잖아요. 그래서 작은 것들은 버리라고 하신 거죠. 그런데 어느 게 작은 것이고, 어느 게 큰 것인지도 물어봐야 하는데 그건 안 물어본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떤 게 소소한 것이고, 어떤 게 중요한 것인지 구분을 지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 당시에 지키던 계율을 모두 그대로 지키자고 결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계율은 우파리가 초안을 내고, 경전은 아난다가 초안을 내었습니다.

모든 경전의 시작,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아난다가 대중에게 초안을 낼 때 항상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전의 시작은 항상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하고 시작을 했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부처님이 그렇게 말했는지 안 했는지는 100% 정확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문장을 ‘나에게 이렇게 들렸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법륜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하는 문장을 한문으로 표현한 것이 ‘여시아문(如是我聞)’입니다.

이렇게 아난다가 부처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내서 곡조도 그대로 얘기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세 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난다가 성불했는가? 부처님이 살아오셨는가? 타방에 계신 부처님이 오셨는가? 이런 생각이 들 만큼 부처님과 똑같이 되풀이를 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오백 명이 전부 이의가 없어야 최종 확정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각각의 제자가 전해 들은 얘기를 기록한 거잖아요. 그런데 불경은 오백 명이 중지를 모아서 편집을 한 거예요. 대신에 문자로 기록한 게 아니라 암송을 해서 전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암송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 당시에는 암송이 더 정확했습니다. 문자로 기록하여 전달을 할 때는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암송은 틀릴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절에 들어가서 계속 따라 듣고 같이 외우게 되면 곡조도 내용도 틀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백 명이 하나하나 점검을 했는데 하루 종일 점검을 했는데도 전체를 확정 짓는 데에 3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부처님이 말씀이 많았다는 거죠.

아무튼 바로 이곳에서 제1결집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처님 열반 후에도 불법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제자들이 이곳에서 결집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집을 해서 좋은 점은 우리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불법을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백 대중이 모여 경전을 읊는 모습을 상상하며 명상도 하고 경전 독송도 함께 했습니다.

칠엽굴 참배를 마치고 스님은 라즈기르에 있는 부탄절에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부탄절에 도착하니 어제 마하보디소사이어티 회장 스님과 같이 만난 부탄 사업가 다쇼 도르지 님이 스님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부탄절은 아직 불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대법당 공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태였습니다. 스님은 불사를 책임지는 스님에게 불사 보시금을 전달하고 법당에 들러 참배했습니다.

순례단이 기다리고 있어 서둘러 가려는데 도르지 님이 스님께 선물을 건넸습니다.

“귀한 향입니다. 스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르지 님은 스님에게 거듭 방문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부탄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제가 오늘 라즈기르에 머물렀다면 도르지 님과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400명의 순례객들과 함께 날란다로 이동해야 합니다. 부탄에서 뵙겠습니다.”

“네, 스님. 저도 곧 부탄으로 이동하니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라즈기르에서의 순례를 마무리하고, 오후 5시 30분에 숙소인 뉴타이절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내일 아침 도시락을 싸 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최초의 여성 출가지인 바이샬리로 갑니다.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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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부처님 열반 후 얼마 만에 제1결집이 이루어 졌나요?

2025-01-31 17:42:07

김유순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몸이 아프고 힘들었는데 마음 정리가 됩니다
빨리 좋아져도 저도 인도순례 하겠습니다

2025-01-29 14:41:06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1-25 03: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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