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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에는 형제들과 함께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산소를 참배하고 얼마 전에 형님의 산소를 옆에 모셨는데 주변 정리가 잘 되었는지도 점검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12시 30분에는 경주 불교학생회 동문회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경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불심 도문 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불교에 입문하여 고등학교 2학년 때 경주 불교학생회와 영남 불교연합학생회의 회장을 맡아 청소년들의 불교 수련을 진행했습니다. 이후에는 영남불교교육원을 설립하여 후배들의 교육과 수련을 지도했습니다. 그때 인연이 된 동문, 선후배들이 매년 동문회를 열고 있습니다.
경주 불교학생회 동문들은 오전 10시부터 경주 남산 순례를 한 후 오후 1시에 스님과 만나기 위해 경애왕릉 앞에 모여 있었습니다. 스님이 도착하자 모두 반갑게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아이고, 스님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동문들 중 한 분이 대표로 환영의 마음을 담아 꽃다발을 건넸습니다.
이어서 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 한 후 청법가를 부르며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청소년 시기에 동문들과 함께 불교 중흥의 원대한 꿈을 꾸었던 때를 떠올리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선배님들과 동료들, 또 후배님들도 많이 오셨네요. 동문회 모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셔서 운문사를 방문하는 일정이 있어, 여기에 참가하지 못하고 주차장에서 인사만 하고 가겠다고 했는데, 일정을 보니까 운문사에는 굳이 안 가도 될 것 같아 이렇게 동문회 법회에 참가했습니다.
경주 불교학생회는 법장사에서 창립되어 오랜 역사를 가지고 활동해 왔습니다. 제가 경주에서 처음 불교 활동을 한 곳도 법장사 였습니다. 당시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경주 분황사에 계셨기 때문에 영남 불교연합학생회 본부를 분황사로 옮기게 되면서 저도 분황사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공부를 안 하고 불교 활동에만 전념하게 됐는데, 이 부분에 대해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한국 불교를 좀 더 현대화시키고 사회화시키는 일은 우리들이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일이기 때문에 제가 이 활동에 참여한 것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심 도문 큰스님을 만나 거의 반강제적으로 용성 조사님의 유업을 계승하게 됐는데, 제가 처음부터 원했던 일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55년이 지나 놓고 보니까 이 길을 선택한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늘 사람들에게 ‘저는 제가 선택을 안 한 것도 이렇게 잘하고 사는데, 여러분들은 자기가 선택해 놓고 왜 자꾸 그렇게 죽느니 사느니 아우성입니까’ 하고 말합니다.
마침 여기가 삼릉골이지 않습니까? 저희들이 바로 이곳에서 불교 중흥과 민족중흥의 원을 세우고 불교학생회 활동을 시작했고, 또 졸업한 뒤에 동문회 활동을 할 때도 이곳 경주 남산을 가꾸고 순례하는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이 삼릉골에는 마애관음보살상 앞에 머리 없는 불상이 있습니다. 당시 이 골짜기에서 불상의 머리를 찾아내서 복원하자는 것이 우리들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제가 그 불상을 보면서 ‘이 불상의 머리를 찾아서 복원하는 게 진짜 복원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불상을 볼 때마다 저는 그 불상이 한국 불교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보통 머리는 지혜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고, 두 손은 자비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없고 손발이 파괴되어 몸뚱이만 덜렁 남아있는 그 불상이 제 눈에는 마치 불교라는 이름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지혜와 자비행도 없는 현재 한국 불교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이 불상의 머리를 찾아서 다시 갖다 붙이고 손발을 복원하는 게 한국 불교의 복원일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봤을 때 그것은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우리가 이 세상에 실현해 내는 것이 바로 머리를 복원하는 것이고, 지금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손발을 복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 올라가서 불교 활동을 시작했던 초기에는 늘 이 불상을 표지 모델로 사용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한국 불교는 조선조 500년 동안 탄압을 받다 보니까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복이나 비는 종교로 전락한 불교를 어떻게 다시 부처님의 법을 중심으로 해서 일으켜 세울 것인가? 저는 이것이 한국 불교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보다 먼저 용성 조사님께서 ‘불교의 지성화’라는 이름으로 이미 주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국 사회는 독재 정권의 억압과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민중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불교가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마치 부처님의 손발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는 좀 더 사회적인 실천을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용성 조사님의 가르침으로는 이것을 ‘불교의 대중화와 생활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삼릉골은 제가 한국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은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같이 이 삼릉골에서 대화를 하니까 다시 그 옛날 불교 중흥을 발원할 때 생각이 나네요. 지금도 그 불상은 머리와 손발이 잘린 채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한국 불교가 우리 사회에 희망이 되도록 하는 일을 함께 함으로써 그 불상을 복원하는 일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경주 불교학생회와 영남 불교연합학생회는 단순히 불교를 믿는 학생들의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불교 중흥을 위해서 한 생을 한번 바쳐보자’ 하고 원을 세웠습니다. 이 사실을 저는 여러분께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청소년의 나이에 벌써 그런 큰 꿈을 가졌지만, 세상을 살다 보니 지금은 자기 살기도 바빠져서 언제 우리가 그런 꿈을 꾸었나 싶을 겁니다. 그러나 어릴 적 꿈을 잠시 잊어버리고 정년퇴직을 해야 하는 나이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앞으로 80세까지는 활동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 어릴 때의 꿈을 그냥 한때의 꿈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발심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아무런 능력이 없는 조건에서도 그런 큰 꿈을 가졌는데, 지금 여러분들은 곳곳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어릴 때의 꿈을 다시 한번 품고 활동해 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여서 불교 중흥의 꿈을 실현해 보자고 발심하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인생 고민에 대해 대화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다양한 질문에 대해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경주불교동문회 파이팅!”
전체가 함께 사진을 찍은 후 이어서 졸업 연도별로 동기들끼리도 스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 오랜만에 오셨는데 몸살나시겠어요.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 하는데, 바빠서 못왔어요. 미안해요.”
동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여성 INEB 정토회 스터디 투어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여성 INEB 참가단은 오후 내내 덕생 법사님의 안내로 비구니 사찰인 운문사를 방문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예불을 한 후 7시부터는 여성 INEB 정토회 스터디 투어 프로그램 참석자들과 대화 시간의 가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이 3일째인가요? 일주일이 된 기분이죠? (웃음) 오늘 이 시간은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지난 3일 동안 여러분들이 정토회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을 좀 들으셨을 텐데, 정토회 활동을 보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또 평소 여러분이 활동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질문해도 좋습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여섯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로 손을 들고 질문한 분은 라다크에서 온 비구니 스님인데요. 먼저 지난 3일 동안 한국 불교에 대해 보고 들은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I had heard the name Jungto Society, but I didn't know much about their activities in Korea. In Ladakh, Korean cuisine and clothing were introduced due to the Korean Wave, but there was no mention of Buddhism. However, after coming to Korea, I was amazed to learn how Korean Buddhism has influenced people. I felt blessed to actually see how Buddhism has been so well maintained despite being oppressed for 500 years during the Joseon Dynasty.”
(이곳에 오기 전에 정토회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라다크에서도 한류로 인해 한국 요리나 옷이 소개되었지만, 불교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보니 한국 불교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 알게 되어 아주 신기했습니다. 불교가 조선시대에 500년 동안이나 억압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유지가 잘 되었는지를 실제로 볼 수 있어서 축복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어서 법륜 스님과 같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누구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자기의 맛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스님의 한 줄 답변에 모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웃음을 띠었습니다. 라다크에서온 비구니 스님은 질문의 초점을 분명히 하여 다시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남을 위해서 일한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냥 ‘남을 위해서 일하겠다’ 이런 관점을 갖고 활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배가 고프다고 하면 음식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가 물이 없다고 하면 물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가 정신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의 얘기를 들어줘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누구를 도우려고 할 때는 상대의 필요가 전제되지 않고 나의 필요가 먼저 전제되기가 쉽습니다. 그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부탄에서도 한국에서처럼 사회 참여와 봉사활동을 활성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과 어떻게 협력해야 참여를 유도할 수 있나요?
젊은 층 사이에서 우울증이나 자살, 마약 중독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불교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스님께서는 문경 수련원의 감나무 아래에 처음 앉으셨을 때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서암 큰스님이 주신 가르침이 스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대화를 마칠 무렵 라다크에서 온 또 다른 비구니 스님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참된 나를 발견한다고 할 때는 ‘참된 나’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This is a question about the part where you mentioned in the first question that one should find their own taste."
(첫 질문에서 자신의 맛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참된 나’를 찾는다고 할 때는 ‘참된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된 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You said, ‘Be yorself.’ Dosen't it imply that there is something to be my true self?”
(스님께서 ‘스스로 자신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뭔가 저 자신이 되는 무엇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요?)
“우리가 그런 용어를 쓸 때 전제가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나를 찾는다’ 할 때는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나’를 중심에 놓는다고 할 때도 ‘나’가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그런데 과연 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모순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불교에서는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고 해서 ‘아나따(anattā, 無我)’ 이렇게 표현합니다. ‘참된 나’를 찾으라는 말은 실제로 ‘나’가 있어서 ‘나’를 찾으라는 뜻이 아니에요.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나’라는 용어도 쓰고 있고, 또 실제로 ‘나’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데 불교 수행이란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는다’ 하는 말에는 ‘나’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나’라고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 ‘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법륜 스님처럼 되겠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선(禪) 불교에서는 ‘Who am I?’라고 하는 화두를 참구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What is this?’라고도 합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국말로는 ‘是什么(시삼마)?’ 이렇게 표현합니다. 테라밧다 불교의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다만 알아차릴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어떤 것도 단정하지 않고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다 보면 마음의 성질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하지 않고 늘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즉 ‘나’라고 하는 것이 어떨 때는 이런 게 나 같고, 어떨 때는 저런 게 나 같고, 늘 이렇게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아니짜(Anicca, 無常)’라고 합니다. 마음, 느낌, 생각은 모두 무상하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인연을 따라 이렇게 저렇게 작동할 뿐이에요.
우리는 보통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면 딱 그것을 붙잡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갈등하게 되고, 화도 내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그 순간에 일어난 하나의 감정일 뿐이지, 조금 있으면 또 바뀌어 버립니다. 이 사실을 늘 자각하고 있으면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감정에 휘둘리고 감정에 영향을 받습니다. 감정은 늘 일어납니다. 그러나 감정은 이랬다 저랬다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이 이렇게 일어나는구나’, ‘감정이 저렇게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위파사나 수행과 선 수행은 방식이 좀 다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Thank you. I understand."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밤이 깊어서 내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 모임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성 INEB 정토회 스터디 투어 참가단은 세 조로 나누어 나누기를 한 후 사용한 방석을 정리하고 각자 자신의 이부자리를 깔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여성 INEB 정토회 스터디 투어 참가단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고 참가자 소개 시간을 가진 후 주간반 전법회원 법회 생방송을 하고, 오후에는 다시 여성 INEB 정토회 스터디 투어 참가단과 대화의 시간을 가진 후 공동체 지부 공청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전법회원 법회를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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