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6.30 베트남 2일째, 푸옥손 사원, 꽝덕 사원
“선불교의 수행 방법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베트남 불교상가위원회 초청으로 베트남을 방문한 지 2일째 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6시 20분에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7시 30분에 숙소를 나와 호찌민시의 동쪽 외곽에 위치한 푸옥손 사원으로 향했습니다. 오늘도 출근길에는 오토바이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차로 1시간 20분을 달려 8시 40분에 푸옥손 사원(Phuoc Son Monastery)에 도착했습니다. 푸옥손 사원의 승려들이 꽃과 종을 들고 나란히 걸어와 스님을 반겼습니다.


푸옥손 승려들의 안내에 따라 법당으로 걸어갔습니다. 법당에서는 종과 북을 치며 스님 일행을 반겼습니다.


먼저 법당을 참배했습니다.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로서 54개의 민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습니다. 그중 베트남 전체의 86퍼센트를 차지하는 최대 민족이 비엣족(월족) 또는 킨족(경족)입니다. 푸옥손 사원은 크메르족이 아닌 킨족이 세운 테라밧다 사원입니다.

법회를 하기에 앞서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먼저 주지 스님의 시자인 푸옥 트리(Phuoc Tri) 스님이 양해를 구했습니다.

“원래 법륜 스님께서 7월 3일에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오늘은 주지 스님이 출타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스님은 푸옥순 사원의 전반적인 운영에 대해 질문했고, 시자 스님은 자세히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사원 곳곳에서 보이는 비구니 스님들에게 특히 관심을 보였습니다.

“테라밧다에서는 비구니 스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 사원에는 비구니 스님들이 많이 보이네요. 이 사원에서는 비구니를 인정하나요?”

시자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주지 스님께서는 금지한다고도 허락한다고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고자 하는 모든 여성들이 와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계십니다.”

“현명하시네요.”

차담을 마치고 자리를 옮겨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비구 스님들이 자리하고, 왼쪽으로는 비구니 스님들이 자리했습니다. 정말로 비구, 비구니, 테라밧다, 마하야나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승복을 각각 다르게 입은 스님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과 함께 불교를 만난 계기와 한국 불교에 대해 소개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일정이 바뀌어서 방문했는데도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가 아주 좋습니다. 비구니 스님도 있고, 비구 스님도 있고, 테라밧다도 있고 마하야나도 있고요. 또 한국 사람도 있고, 베트남 사람도 있고요. 아주 세계적입니다. (웃음)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제가 소속된 불교는 선불교입니다. 세상에는 네 가지 불교가 있습니다. 테라밧다, 마하야나, 바즈라야나, 선불교가 있습니다. 한국 불교는 마하야나 불교를 계승했고, 다시 그것을 계승한 선불교가 중심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불교도 대부분이 마하야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은 크메르족 테라밧다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킨족 테라밧다가 있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크메르족 테라밧다 불교 사원은 지난번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킨족도 이렇게 큰 절을 짓고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는 줄은 오늘 여기 와서 처음 알았습니다. 테라밧다 불교에서는 비구니 스님을 인정하지 않는데, 여기 오니까 비구니 스님들이 아주 많아서 보기가 좋네요. (웃음)

제가 속해 있는 정토회는 선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테라밧다 불교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2,600년 전에 우리의 스승으로 오신 고타마 붓다의 삶과 그 가르침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인도 성지순례를 많이 가고 있습니다. 인도 현지에 가서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태어나셨다, 여기에서 수행하셨다, 여기에서 설법하셨다, 이렇게 현장에서 학습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여러분들도 가능하면 인도와 네팔에 가셔서 현장 학습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사회 실천 활동을 많이 합니다. 환경운동도 하고 있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구호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또 한반도에는 전쟁의 위기가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수행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 실천활동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의문이 있거나 고민이 되는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을 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다섯 명이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비구 스님은 손을 번쩍 들고 선불교의 수행 방법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선불교의 수행 방법은 무엇인가요?

“법륜 스님은 선불교에 속해 있다고 하셨는데 선불교의 수행 방법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틱낫한 스님이 하신 수행과 비슷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선불교에도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고 해서 일곱 가지 다른 종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는 화두선이라고 해서 ‘이것이 무엇인가?’(이뭐꼬) 하는 것을 탐구하는 임제종 계열입니다. 우리는 늘 ‘나는’, ‘나는’, ‘내가’ 이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이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탐구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Who am I?’입니다. 여기서 ‘I’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로 ‘What is this?’ 이렇게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국말로는 ‘시삼마?(是什么?)’ 이렇게 표현하고, 한국말로는 ‘이 뭐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나라는 것은 이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번뇌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생각이 끊어진 상태, 즉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리를 배우거나 지식을 외우거나 경전을 읽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을 탐구하는 겁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 번이나 네 번만 질문하면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 번뇌입니다. 그것은 생각이고 지식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모르겠다’라고 할 때부터 공부가 시작이 됩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질문을 받기 때문에 이제는 탐구를 해야 합니다. 아는 것 가운데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탐구를 하게 되면 생각이 끊어지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원리는 위파사나와 같습니다. 위파사나 수행을 할 때에도 생각을 하면 망상이 됩니다. 숨이 들어올 때 숨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숨이 나갈 때 나가는 줄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해도 그것은 번뇌입니다. 다만 지금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것을 팔리어로 ‘사띠’라고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는데. 그 생각이 끊어진 상태에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처럼 화두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멈춘 상태에서 오롯이 탐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지식을 배우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이것은 무엇인가’ 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YES!”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 스님은 출가를 했지만 많은 사회 실천을 하십니다. 저는 출가를 했지만 시를 씁니다. 주위 사람들은 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까요?

  • 대승불교에서는 극락왕생에 가기를 기도한다고 하는데 극락왕생이란 무엇인가요?

마지막으로 질문한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사회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어서 불교 공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며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저는 불교를 공부하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회에서 충분한 배움이 없었기 때문에 지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에 대해서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내가 배운 것이 별로 없는데 도대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자기 의심이 있습니다. 제가 불교 공부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여기 불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있습니다. 제가 물어볼 테니 대답해 보세요. 불상이 더 큽니까? 종이 더 큽니까?”

“불상이 더 큽니다.”

“종은 불상보다 작습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이번에는 시계와 종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종이 큽니까? 시계가 큽니까?”

“종이 더 큽니다.”

“그러면 종은 불상보다 작고 시계보다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이제 불상도 치우고, 시계도 치우고, 이 종만 가지고 제가 물어볼게요. 이 종은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이 크다’ 혹은 ‘종이 작다’ 하고 말할 때 ‘실제로 종이 크기 때문에 크다’ 혹은 ‘실제로 종이 작기 때문에 작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종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인식할 때 어떤 때는 크다고 인식이 되고, 어떤 때는 작다고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크다 혹은 작다는 것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 상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마음이 짓는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보고 ‘크다’, ‘작다’, ‘좁다’, ‘넓다’, ‘길다’, ‘짧다’, ‘새것이다’, ‘헌것이다’, ‘비싸다’, ‘싸다’, ‘귀하다’, ‘천하다’,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인식 상의 문제입니다. 사실은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말합니다. 인연을 따라서 이런 인연일 때는 크다고 불리고, 저런 인연일 때는 작다고 불리는 것입니다. 본래는 그 무엇도 아니지만 인연을 따라서 이것이 되기도 하고 저것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합니다.

질문자는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더 낮은 사람도 없고, 더 귀한 사람도 없고, 더 천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그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평등합니다. 본인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본인이 너무 잘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잘나고 싶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그대로 완전합니다. 모든 존재는 다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소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노력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부처입니다. 그러나 번뇌에 휩싸여서 자신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 속에 헤매고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니르바나이고 열반입니다.

불교 수행의 목표는 죽어서 극락 가는 것도 아니고,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여기 있으면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불교 수행의 목표입니다. 번뇌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 상태는 누구나 다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렵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가능하지만 어렵고, 어렵지만 누구나 가능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꾸준히 정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믿고 꾸준히 정진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지식들은 나의 괴로움을 없애는 데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을 돕는 데는 필요합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는 데는 지식이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교화하거나 다른 사람을 돕는 데는 온갖 지식이 다 필요합니다. 법륜 스님이 많은 교화 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들은 교화하는 데에 필요할 뿐입니다. 내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데에는 세상의 어떤 지식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정진을 하시기 바랍니다.”

스님의 답변이 끝나자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스님들 모두가 큰 감동을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님이 다음을 기약하며 닫는 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대화의 시간이 짧았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 여러분과 더 많은 대화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부처님도 이렇게 대중들과 대화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 대화록을 모아서 기록해 놓은 것이 경전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이미 하셨던 방법입니다. 다 같이 붓다를 예경 하며 마치겠습니다.”

스님들 모두가 빨리어 예경문을 함께 염송 했습니다.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법회를 마치고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양한 색깔의 승복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마치 화단에 핀 꽃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서 푸옥손 사원에서 준비해 준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스님들은 모두 발우를 들고 차례대로 신자들의 보시를 받은 후 식사를 했습니다.



이어서 사원을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사원이 워낙 넓어 시자 스님이 직접 전동차를 운전하며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1인실도 있고, 다인실도 있고 다양했습니다.



아주 큰 법당도 있고 야외에서 명상을 할 수 있는 곳도 아주 많았습니다.



사원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혹시 제가 스님을 맞이하는데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어요. 고마워요.”

“다음에 베트남에 오셨을 때도 꼭 저희 사원에 들러주세요. 그때는 1인 수행 공간을 스님께 드리겠습니다.” (웃음)

다시 차를 타고 다음 법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차로 한 시간을 달려 오후 1시 30분에 호찌민 시내에 위치한 꽝덕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꽝덕 사원에서는 현재 베트남 불교상가위원회의 부사무총장인 틱 푸옥 응우엔(Thich Phuoc Nguyen) 스님이 출가 스님들의 하안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년 가을에 정토회가 베트남 불교상가위원회를 초청했을 때 한국을 방문했던 분입니다. 스님이 차에서 내리자 부사무총장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꽝덕사원은 베트남 불교상가위원회의 제2사무국이 있는 곳입니다. 접견실로 이동하여 제2사무국 책임자급 스님들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먼저 부사무총장 스님이 환영사를 했습니다. 베트남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갑자기 법회가 축소가 되고 변경이 되었습니다. 부사무총장 스님이 거듭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하안거를 하고 있는 스님들을 위해 법담을 나누어 주십사 법륜 스님을 초청했습니다. 법륜 스님께서 베트남에 오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최근 베트남 불교에 안 좋은 일이 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종교에 대한 문제들이 발생하여 불교와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계획했던 홍보와 자원 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법륜 스님께서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법륜 스님이 한국에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법륜 스님의 공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법륜 스님이 하신 일들을 저희 승려들과 젊은 수행자들이 본받고 싶어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러 스님들이 한국에 다녀왔지만, 법륜 스님은 실내에서만 업무를 보시는 게 아니라 몸을 써서 밭에 들어가 직접 채소를 심고 재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항상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하시는 분입니다. 스님의 삶과 사상을 저희도 항상 따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환영해 주신 부사무총장 스님 이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계획이 조금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약간의 변경일뿐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부처님처럼 훌륭하신 분도 비난과 비판을 받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우리는 부처님보다 못한데 어찌 비난과 비판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비난이나 비판이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가고 있다면 좀 기다려 보면 된다. 기다리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환영하든 배척하든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공양을 주지 않으면 빈 발우를 들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환영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뿐입니다. 100명이 모일 계획이었지만 10명이 모일 수도 있고, 비가 와서 모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법의 길을 계속 걸어갈 뿐입니다.

이틀 전에 대규모 법회를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 때문이든 그것은 그들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저도 그냥 이곳에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났습니다. 많이 만나든 적게 만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게 만나니까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저는 항상 바쁜데 이렇게 여유가 생기니 오히려 좋습니다. 그러니 미안해하거나 섭섭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로 기뻐합시다.” (웃음)

스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트남 스님들이 크게 박수를 치며 스님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차담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오후 2시부터 하안거를 하시는 스님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안거 중인 스님 50명이 강당에 자리했습니다. 19개 지방을 대표하는 50명의 스님들이 하안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대부분 젊은 스님들이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하안거 중인 스님들을 격려하면서 수행자가 행해야 할 세 가지 활동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을 한분 한분 찾아가서 만나려면 19개 사찰을 방문해야 하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더더욱 반갑습니다.

‘안거(安居)’는 부처님 당시에 시작이 됐습니다. 수행자는 집착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집을 떠나야 합니다. 집을 떠나서 생활을 하더라도 장소를 한 군데 있지 않고 계속 옮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인도는 우기(雨期)가 있습니다. 여름에 3개월은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서 다니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3개월 동안은 한 마을에서 머무르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때는 돌아다니지 않고 한 마을에 머무르면서 3개월을 보냈습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하안거(夏安居)가 됐지요. 불교가 중국과 한국에 전래되면서 날씨가 많이 추워졌기 때문에 겨울에도 3개월 동안 동안거(冬安居)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우안거 한 번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베트남에서도 과거의 전통을 따라서 이렇게 안거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안거 기간에는 이렇게 말을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침묵하면서 명상을 해야 합니다. 제가 여기 와서 여러분과 대화를 하는 바람에 혹시 안거의 규율을 깨뜨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베트남 불교승가위원회에서 저를 초대하여 여러 법회를 마련했는데 모두 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대규모 법회는 취소가 되었지만 저희들은 소규모로 조정해서 계획대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뜻대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칭찬을 받을 때도 있고, 비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다만 갈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안거 기간에 명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차림이 여실히 유지될 때도 있고, 때로는 번뇌가 많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된다’, ‘안 된다’ 하면서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계속할 뿐입니다. 그러면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고, 번뇌가 많이 생기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행은 꾸준히 해나가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해야 하는 세 가지 활동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세 가지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수행입니다. 수행이란 자신의 마음속에 번뇌가 없고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수행의 목표는 열반을 증득하는 겁니다. 언제나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괴로움이 있다면 ‘괴로움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리면 다시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겁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육체는 조금 피곤할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됩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으면, 우리는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도 이 좋은 법을 만나서 괴로움이 없이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내가 이 법을 만나서 괴로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 좋음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을 ‘전법’ 또는 ‘홍법’이라고 말합니다. 불교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전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전법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인연을 소중히 여기든, 여기지 않든, 그들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쳐서는 안 됩니다. 전법을 하는 방법은, 내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방법도 있고, 책이나 글로 전하는 방법도 있고, 요즘은 영상으로 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방법들을 가지고 이 좋은 법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셋째, 사회적 실천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처님의 법과 관계없이 생존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식량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도 있고, 아픈데 약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된 사람도 있고,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먼저 물을 줘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줘야 합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약을 줘야 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법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또 지금은 인간의 욕망이 지나쳐서 기후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욕망이 우리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검소하게 살면서도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소비를 줄이고 재활용을 하는 환경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국이나 베트남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컸습니까?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쟁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화가 사라져야 합니다. 탐진치 삼독 가운데에 두 번째가 성냄입니다. 성냄은 폭력을 불러오고, 폭력은 전쟁을 불러옵니다. 수행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운동 차원에서도 평화를 가져오도록 해야 합니다. ‘나만 편하면 된다’ 이렇게 너무 소극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 세상 사람들이 둘이 아니다’ 하는 관점에서 우리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관점을 갖고 수행하고 전법하고 실천 활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안거 중이니까 우선 수행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안거가 끝나시면 전법과 실천 활동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 무엇이든 여러분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우리는 비록 나라와 국적은 다르지만 일 불 제자(一佛弟子)입니다. 우리는 한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반이고 법의 형제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스님이 답변을 하고 나서 다시 부사무총장 스님이 추가 질문을 하고, 다시 스님들이 궁금한 점을 묻고, 자유롭게 대화가 오갔습니다.

그중 한 스님은 한국의 불교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며, 어떻게 불교를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점점 줄어드는 불교 인구, 어떻게 불교를 발전시켜야 하나요?

“저는 아직 한국에 가 보지 못했지만 SNS를 통해 한국 불교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을 불교를 거의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한국 불교를 꾸준히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젊은이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불교가 해결해 주지 못하니까 불교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불교 인구를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젊은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불교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 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은 주로 학업, 취업, 연애, 결혼, 이런 것들로 인해 많은 고민을 합니다. 그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을 때 상담을 받거나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 주고 해결책을 찾아야 됩니다. 결혼을 하면 아이 키우는 문제, 직장 문제, 부부갈등 문제 등 많은 어려움이 생기는데, 그럴 때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어느 종교든 청년들이 모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사람들은 그 종교를 점점 떠나갈 것입니다.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좀 잘 살아보려고 종교에 의지를 했습니다. 절이나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면 복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종교로 유인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큰 이점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종교에 의지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준다든지, 천도재를 지내준다든지 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절에 오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것도 큰 이점을 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오던 전법과 포교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게 출발해야 합니다. 저는 부처님 당시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시에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해서 고민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대화의 방식이 매우 필요합니다. 제가 즉문즉설을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대학에 찾아가서 학생들의 고뇌를 듣고 친구처럼 대화를 나눕니다. 그냥 위로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깨우침으로 해서 그들이 고뇌에서 벗어나게끔 해줍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을 해야 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 즉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수행의 최종 목표는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열반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면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뇌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본래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세상의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우리가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어떻게 살아가셨는가, 이렇게 그분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그분의 삶을 닮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그분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하게 닮아가기라도 해야 합니다.”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오후 4시가 되어서 법회를 마쳤습니다.

강당을 나와 참석한 스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대화에 참석한 스님들께 베트남어로 번역한 스님의 책을 한 권씩 선물한 후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꽝덕 사원을 나왔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차로 50분을 달려 오후 5시에 숙소에 도착한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내일 일정에 대해 의논하고, 스님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베트남 호찌민에 살고 있는 정토회 회원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저녁에는 각오사에서 수행자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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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승

네, 고맙습니다.

2024-07-04 16:54:54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4-07-04 16:18:23

신지섭

스님께서 훌륭하신 분이란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제 눈에는 스님께서 본인을 칭할때 법륜스님이라고 존칭을 사용하시는 것은 바르지 않은 표현이라 보여집니다.

2024-07-04 07: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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