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2.19 발우공양, 좋은벗들 이사회, 금요 정기법회
“딸이 자꾸 가출을 해요,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오늘도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6시 30분에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계공다소량피래처(計功多小量彼來處) 촌기덕행전결응공(忖己德行全缺應供)
방심리과탐등위종(防心離過貪等爲宗) 정사량약위료형고(正思良藥爲療形姑)
위성도업응수차식(爲成道業應受此食)”

마스크를 쓰고 소심경을 음원으로 들으며 발우를 펴고 공양을 했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서울 공동체 대중들은 스님에게 말씀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공동체에서 수행하고 있는 대중들을 위해 수행의 자세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수행자가 상대에 대해 감정적인 집착이 생긴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립하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과 자립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세상 사람들 중에도 부부가 상담하는 내용을 보면 좋아하는데 싸우잖아요. 전부 좋아하기 때문에 연애하고 결혼까지 해놓고 결국에는 괴롭다고 하잖아요. 그 이유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의지심이 괴로움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수행자는 세속 사람들과 조금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괴로운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 때문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의지하면 자기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수행자 자격이 없는 거예요. 누구나 어려움이 있으면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중생이 갖는 가장 큰 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의지하는 까르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 놓여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하려는 심리가 일어난다는 것은 인정하되 의지심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특히 여러분은 수행자로 출가하여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이 친하다고 해서 회의를 할 때 둘이서만 속닥속닥해서 결정을 내려 버린다면 이것은 패가 형성되는 겁니다. 둘이서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절친이든, 그것은 개인의 감정 문제이기 때문에 친한 것을 문제 삼는 건 아니지만 공동체에서 패를 형성하는 것은 계율에 어긋나는 거예요. 그런데 두 사람이 친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패를 형성할 수가 있어요.

공과 사를 구분하는 자세

그래서 지도자가 되려면 공공성을 지키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다 보면 누구나 더 친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성향일 뿐입니다. 그것을 공공적인 사업의 평가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음식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고, 운동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이 있듯이, 사람에도 기호가 있는 것은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취향까지 통제하는 것은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개인적인 취향이 공적 활동에 영향을 끼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을 알아야 해요. 서로 좋아서 연애를 하더라도 그것이 공적 활동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개인 시간이 주어져서 둘이서 같이 지내는 것은 주위에서 간섭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니까요. 그러나 공적인 시간에 진행되는 활동에 사적인 친분으로 장애가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승려생활을 하다가 속퇴한 사람 중에 불교 신자가 되어 절에 착실하게 다니는 사람은 열에 한 명이 안 됩니다. 그런데 스님까지 했으면 결혼을 했더라도 일반인보다 더 열심히 불교 활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정토회 실무자로 살다가 밖으로 나가면 일반 회원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활동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열에 한 명도 안 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공동체에서 매일 함께 정진하다가 정토회 활동을 그만두고 나가면 아침 기도조차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법에 귀의해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에요. 스님일 때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머리를 기르니까 아무도 안 알아주기 때문에 이 무리에 다시 오는 게 창피한 겁니다. 혼자서라도 정진을 하면 되는데 그런 사람이 거의 없어요. 물론 속퇴하고 결혼하고 살면서도 부지런히 정진하는 훌륭한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드물다는 거예요. 승려로 아무리 오래 생활했어도 자기 체면을 더 강하게 갖고 있는 겁니다. 이걸 버리려고 수행을 하는 것인데 아직도 안 버려졌다는 얘기에요. 껍데기만 수행자의 모습이지 속은 변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겁니다.

수행자라면 지켜야 할 공적인 원칙을 잘 지키며 생활하면 다른 것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방에서 혼자 자든, 둘이 자든, 잠만 잘 자면 되지 그것을 간섭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아침 예불에도 참석하지 않고, 공동체 회의에도 나오는 않는 건 문제라는 겁니다.

이것은 연애를 하기 때문에 문제를 삼는 것이 아니에요. 생활 규칙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를 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꾸 연애와 결혼을 문제 삼고 있다는 생각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부럽습니까

또한 건강을 위해서도 환경을 위해서도 먹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안 됩니다. 건강을 위해서 먹는 것과 집착을 해서 먹는 것은 다릅니다. 수행자는 집착을 끊는 것이 더 중심이니까 이런 관점을 조금 더 분명하게 잡았으면 좋겠다 싶어요.

만약 여러분들이 이렇게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혹시라도 활동을 그만두고 밖에 나갔을 때 어떤 기억을 갖는 게 좋을까요?

‘내가 어느 곳에서 생활했을 때보다 정토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을 때 힘들긴 했지만 가장 배운 게 많았다’

이런 기억을 갖는 게 좋지 않을까요? 등산을 하면 다리도 아프고, 땀도 나고, 배도 고픕니다. 하지만 나중에 등산을 갔다 오면 ‘그때 추워서 얼어 죽을 뻔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이런 기억을 갖게 되잖아요. 그것처럼 여러분이 공동체 생활을 했던 경험을 나중에 돌아봤을 때도 그렇게 기억이 되도록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졌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은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부럽습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돈을 주면 어디에 쓸려고 그래요? 검소하게 사는 게 수행자의 생활인데, 수행자가 돈이 생기면 쓸 곳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필요한 사람한테 주는 것 빼고 쓸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필요한 사람한테 나눠주는 건 있으면 주고, 없으면 안 주면 되는 것이니까 집착할 필요가 없잖아요. 기본 생활비를 제외하고 그 외에 공적으로 필요한 물건은 공금으로 사면 되고요.

수행자는 생활을 검소하게 한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돈을 쓸 데가 없습니다. 돈을 쓰지 말라는 게 아니라 돈이 있다고 막 쓰면 그건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돈이 있어도 사치하지 않는 게 수행이고, 지위가 높아도 교만하지 않는 게 수행입니다. 목에 힘 줄 일이 없는 사람이 수행자인데 높이 올라가 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높은 지위나 명예를 추구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것이잖아요. 그러지 못할 바에야 지위와 명예를 얻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죠. 이런 관점이 분명히 잡히면 삶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이럴 바에야 나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어제 대중공사 때 어떤 분이 성질을 부렸다고 참회를 했는데, 참회를 하니까 괜찮긴 해요. 그러나 삶이 너무 긴장되어 있어 보여요. 너무 긴장을 하고 살면, 잘하려고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게 됩니다. 포기하는 마음이 들 때는 ‘욕심으로 수행을 했구나’ 하고 알아야 해요. 너무 잘하려고 하다가 ‘에이! 이럴 바에야 나가서 살아야겠다’ 이렇게 딱 생각이 바뀌는 거예요. 포기는 욕심으로 어떤 일을 했을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포기라는 게 없어요. 안되면 또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거문고에 비유했습니다.

‘거문고 줄이 너무 탱탱해도 소리가 안 나고, 너무 느슨해도 소리가 안 난다.’

잘 관찰해보면 게으름과 긴장감이 늘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으르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고,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어떤 냄새에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있습니다. 느낌이 좋고 나쁨이 없다면 목석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과거의 인연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까르마(karma)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기분 나쁨에 구애받지 않는 것부터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싫어도 필요한 일이면 하고, 좋아도 불이익이 오면 멈출 줄 알아야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기분이 좋고 나쁨에 너무 구애받아도 안 되지만, ‘기분이 좋고 나쁨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과거에 지은 인연의 과보를 안 받겠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방향은 ‘이제 더 이상 구애받지 않겠다’ 이런 관점을 딱 가지고 정진을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이 봤을 때 삶이 게을러 보이지도 않고, 초조하고 긴장해 보이지도 않는 속에 여유를 가지면서 생활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못하게 한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의논을 해서 뭐든지 해보라는 거예요. 다만 임의로 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기본은 정해진 대로 하되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의논을 해서 예외로 인정을 받아도 된다는 겁니다. 인생에 예외가 왜 없겠어요? 세상도 돌연변이라는 게 있어서 기후가 바뀌면 다 예외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원칙을 지키되 약간 여유 있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기계가 잘 돌아가면서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삶을 살아보자는 겁니다. 저도 부족하고 우리 모두가 부족합니다. 부족한 가운데도 꾸준히 해나가 봅시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발우공양을 마쳤습니다. 공동체 대중은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각자 자신이 일하는 부서로 출근을 했습니다.

두북 수련원으로 방송 장비를 싣고 트럭이 출발할 예정이어서 스님은 잠시 시간을 내어 대중과 함께 짐을 날랐습니다. 이제 3월부터는 두북 수련원에도 온라인 방송 시설이 갖추어질 예정입니다.

오전 10시부터는 좋은벗들 이사회가 온라인 화상회의 방식으로 열렸습니다. 이사님들이 화상회의에 전원 참석한 상태에서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직접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영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계획했던 많은 일들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온라인 시대에 사회 활동은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아직 방침을 못 정했어요. 많은 연구 과제가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남북 관계는 북한이 문을 닫아 놓고 있으니까 인도적 지원조차 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습니다. 동북아 역사기행도 못 가고 있고, 연해주에 발해박물관을 짓는 일도 중단된 상황이에요. 대신에 국내에서 새터민 아이들을 돕거나 새터민들과 즉문즉설을 하는 사업들은 온라인 방식으로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온라인 시대에 맞게끔 새로운 사업들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이어서 작년 사업보고와 올해 사업계획에 대해 보고 받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사님 한 분은 올해 북한의 식량 상황이 더욱더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지금 세계의 식량 안보에 위기가 오면서 북한의 식량 사정도 많이 어려워질 것 같아요. 좋은벗들에서 북한의 실정에 더욱더 예의 주시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님도 이에 공감하며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네, 맞습니다. 기상 이변 때문에 파종이 제대로 안 된 문제도 있고, 수확량도 적어진 문제도 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각국 정부에서 돈을 많이 풀다 보니까 통화 팽창이 되면서 국제적으로 금, 은, 동 등 원자재를 비롯해 식량 자원까지 투기 자본이 몰려 식량 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재작년에 북한에 옥수수 1만 톤을 보낼 때는 40억이 들었는데, 올해는 60억이 들게 생겼습니다. 제안해 주신 대로 북한 식량사정의 어려움에 대해 예의 주시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사님들과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이사회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11시부터는 JTS 총회, 좋은벗들 총회, 에코붓다 총회를 연이어 진행했습니다. 모두 온라인 방식으로 이뤄지다 보니 총회 구성원 모두가 각자 자기 집에서 노트북 화면으로 손쉽게 참여했습니다.

“안건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찬성하시는 분은 손들어 주세요.”

거수로 의사를 표시하고 안건을 처리한 후 총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한 후 12시 30분에 서울을 출발해 문경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어제 새벽 3시까지 반야심경 원고 교정을 했더니 졸리네요.”

잠시 눈을 붙이는 사이 괴산 소금강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이 마치 금강산 일부를 옮겨놓은 것 같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여기서부터 걸어갈게요. 이 계곡을 쌍곡이라고 해요. 쌍곡 계곡을 따라 1시간 정도 걸어 봅시다.”

요즘 스님은 매일 시간을 내어 걷습니다.

“요새 자꾸 두드러기가 나는데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해서 운동을 챙겨서 하려고 해요.”

한 시간 정도 걸은 후 다시 차를 탔습니다. 차를 타고 선유동 계곡까지 가서 다시 차에서 내려 30분 정도를 더 걸었습니다.

“저기 저 땅도 수련원 부지로 생각했었어요. 예전에 도시락 싸들고 여기까지 걸어 다니면서 수련원 지을 땅을 보러 다녔거든요. 저기가 양지바르고 평평해서 좋은데, 좋은 땅을 사면 후대에 땅 가지고 싸울까 봐 안 샀어요. (웃음)

결국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땅에 문경 수련원을 지었습니다. 지금 문경 수련원이 있는 땅은 아무런 활용 가치가 없어서 후대에 팔아먹겠다고 싸울 일은 없을 거예요.”

5시가 넘어 문경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산 너머로 지고 있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1100여 명의 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스님은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이야기를 나누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국내외에서 6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자꾸 가출을 하는 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딸이 자꾸 가출을 해요

“올해 19살 된 딸이 가출을 쉽게 합니다. 최근 9일 동안 가출했다가 돌아와서 한 달여 만에 또 친구 문제로 힘들다며 연락이 두절되어 경찰에 신고하는 소동도 있었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아이가 돌아올지 궁금합니다.”

“질문자는 불교대학을 졸업했어요? 아직 안 했어요?”

“불교대학은 졸업했고 경전반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 우리가 불교인 즉 종교인이 되는 게 목적이에요, 수행자가 되는 게 목적이에요?”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딸을 고쳐서 내가 편안해지는 게 수행이에요, 나를 고쳐서 편안해지는 게 수행이에요?”

“예. 나를 고쳐야 합니다.”

“그럼 가출하는 아이, 장애가 있는 아이, 말 안 듣는 아이, 게임만 하는 아이, 정신질환이 있는 아이 등 이런 아이를 키우는 엄마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이런 아이를 가진 엄마는 평생 아이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살아야 해요?”

“네, 행복할 권리 있습니다.”

“질문자는 질문자의 권리를 찾고 싶어요, 포기하고 싶어요?”

“저의 권리도 찾고, 아이한테 올바른 방향을 제시를 해주고 싶어요.”

“아이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고 싶다는 말은 아이를 고치고 싶다는 얘기잖아요. 그러면 갓바위에 가든지 다른 절에 가든지 교회에 가든지 가서 빌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제발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하나님, 부처님께 도와달라고 빌어야 해요. 그건 제가 이루어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아이를 가진 엄마라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제가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길이 있어요. 그런데 ‘아이가 가출을 안 하게 해 주세요, 남편이 술을 안 먹게 해 주세요’ 이렇게 비는 건 수행과 거리가 먼 이야기예요. 수행이란 아이가 공부를 잘해도 좋고, 공부를 안 해도 좋고, 집에 있어도 좋고, 가출을 해도 좋은 거예요. 가출이 좋다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이 와도 내가 구애를 받지 않는 게 수행입니다.

처음에는 불교대학을 다녀서 수행 관점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더 해보니 헛것을 공부했네요. 남을 고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어요. 만약 제가 아이들이 가출을 못하게 할 수 있고 정신질환을 고칠 수 있다면 제가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이를 고쳐줄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세요. 저는 애초에 그런 능력도 없고, 설령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 능력을 질문자의 딸을 고치는데 쓰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능력이 있다면 미국, 일본, 북한, 중국의 지도자들이 정신을 차려서 세상이 똑바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그 능력을 먼저 써야죠. 아이가 집을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고 전쟁이 나는 것도 아니고, 나라 경제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코로나19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제 능력을 그런 곳에 쓰겠어요? 제가 능력이 없어서 쓸 수도 없지만 설령 능력이 있더라도 쓰지 않을 거예요.

질문자가 얼마나 답답해서 이렇게 질문하는지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어요. 남을 고칠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는 사람들한테 가보는 게 좋겠어요. 저는 팔만대장경을 아무리 읽어봐도 부처님이 그런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내용은 보지 못했어요.”

“스님, 아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았는데요. 처음에 아이가 가출했을 때 300배 기도를 하면서 남편에게 참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돌아왔을 때, 너희들 앞에서 아빠와 싸워서 미안했다고 사과했어요. 이번에 또 아이와 연락이 두절되고는 아이가 3살 때부터 제가 장사를 하느라 잘 돌보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어요. 기도를 하는 동안에는 ‘그래 네가 힘들어서 가출을 했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은 들지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것도 다 자기 짐작일 뿐이에요. '아이가 어릴 때 내가 잘 돌봐주지 않아서 가출을 하는구나, '부부가 싸워서 그렇구나.’ 이것도 다 자기 생각입니다. 아이가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는 모릅니다. 아이가 집을 나갈 때는 집안에 있으면 뭔가 답답하기 때문에 나간 거잖아요. 부모가 싸워서 답답한지, 자기가 해 달라는 걸 안 해줘서 답답한지, 어쩌면 집하고 아무 관계없이 자기 속이 그냥 답답해서 뛰쳐나가는 건지 그 이유를 지금은 알 수가 없어요. 알 수 없는 일을 자기 혼자 이렇게 저렇게 추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쨌든 아이는 뭔가 집에 있는 것보다는 집 밖으로 가는 게 더 좋으니까 나갔을 거예요. 집 안에 있는 게 더 좋은데 집 밖에 나갈 리는 없잖아요. 그 정도의 사실을 확인하고 아이가 가출한 이유는 지금 알 수 없으니까 단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그 이유를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법륜스님이 아는 것도 아니고, 아빠가 아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아는 것도 아니에요. 아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어요. 그럼 본인한테 물어봐야죠.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왜 나갔냐고 추궁하라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집 안보다는 집 밖이 좋아 보여서 나갔다가 막상 나가보니 밖이 별로 안 좋고 집이 더 좋아 보여서 들어왔는데, 또 집에 있어보니까 답답해서 나갔겠지요. 아이에게도 저에게 물어보듯이 정말 몰라서 아무런 선입견 없이 물어보세요.

‘아이고 어디 가서 있었니? 나가면 무엇이 좋으니?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물어보되, ‘집을 나가면 안 된다’, ‘집에 들어와야 한다’는 이런 전제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가 집을 나가는 게 더 좋다고 하면 나가서 살 수도 있고, 집에 들어와서 사는 게 좋다고 하면 들어와서 살 수도 있는 거예요. 질문자는 ‘집 밖에 나가서 살면 안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어요. 질문자가 아이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싶다고 하는 것은 아이가 집을 나간 것이 잘못됐다고 전제하고 있는 겁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잘못이 있어서 고치려고 하지만 아이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자기는 답답해서 나갔지 잘못을 하기 위해 집을 나간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이에게 물어봐야 해요. 그래서 아이가 ‘엄마, 집에 있으니까 답답해. 나도 왠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면 전문가에게 심리상담을 받든 지,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해야 합니다. 몸에 이상이 있어서 마음이 답답해지는 거라면 약을 먹고 치료를 해야 합니다. 또는 부모가 싸워서 트라우마가 생겼거나 엄마 잔소리가 트라우마가 됐다면 그 때는 아이를 위해서 질문자가 자기를 고쳐야 합니다. 부부 갈등이 문제라면 남편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아이를 위해서 무조건 남편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야 됩니다. 잔소리 때문에 집을 나갔다고 하면 잔소리를 하지 말아야 지요. 즉 원인을 규명하고 그 원인에 따라서 행동을 해야지 원인 규명도 하지 않고 지레 짐작해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불교대학에서 사성제(四聖諦)를 배웠잖아요. 지금의 괴로운 현실, 고(苦)를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이 괴로움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에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어서 생겨났기 때문에 그 원인을 규명해야 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집(集), 즉 집착입니다. 이 원인은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멸(滅)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원인을 소멸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아서 실천하라는 것이 도(道)입니다. 이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식으로만 배울 게 아니라 현실에 적용을 해보세요. 아이가 가출한 것이 현실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 아이가 뭔가 괴로워서 집을 나갔다는 건데 무엇 때문에 괴로울까? 신체적인 이유 때문일까, 정신적인 이유 때문일까, 환경 때문일까? 그 이유를 지금 알 수 없다면 아이와 대화를 하거나 전문가의 진료를 받아서 원인을 규명해야 합니다. 원인을 정확히 알고 나서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알맞은 실천을 해야 해요. 환경을 개선하든지, 약물 치료를 받든 지, 상담을 받든 지, 부부가 노력을 하든지,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든지 이렇게 순서를 밟아가야 합니다. 관점을 그렇게 가져야지 괴로워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내년에 딸이 스무 살이 되면 내가 잘 키웠든 못 키웠든 법적으로 보호자로서 부모의 책임은 끝이 납니다. 지금은 내가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해 원인을 찾아서 아이를 도와주는 게 필요해요. 아이가 스무 살이 넘어도 내가 도와주면 좋지만, 만약 도와주기 힘들다면 내년부터는 이유를 불문하고 도와주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를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면 내년까지 기다렸다가 아이가 나가든지 들어오든지 신경을 꺼버리면 됩니다. 그래야 질문자도 행복할 수가 있어요. 가출하는 자녀를 둔 부모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가 집에 들어오면 좋고, 나가면 괴로운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만약 아이가 집에 있다가 답답해서 자살이라도 한다면 마음이 어떻겠어요? 아이가 죽을 바에야 나가서 돌아다니는 게 훨씬 좋잖아요. 그러니 집을 나가는 게 반드시 나쁘다고 단정할 수가 없어요. 부모들은 자꾸 아이가 공부를 잘해야 한다거나 아이는 이래야 한다고 집착하는데 아이들은 정작 부모의 집착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다 아이가 죽고 나면 후회막심하게 됩니다.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니 아이가 가출을 하는 것은 큰일이 아니에요. 담담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부부 갈등을 줄이거나 내가 잔소리를 안 하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능히 그 일을 해야 해요. 내가 할 수 없는 치료는 전문가에게 위탁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반드시 아이에게 동의를 구해야 해요. 이때, 아이와 대화를 잘하고 싶으면 자꾸 내가 가진 목적의식을 쥐고 대화를 끌고 가면 안 됩니다.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 된다거나 그래도 졸업은 해야 된다거나 하면 대화가 잘 안 됩니다. 아이가 그런 걸 몰라서 가출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흥분하지 말고 아이를 기다려 주세요.

아이가 집을 나가면 기도하면서 기다렸다가 돌아오면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세월이 흘러서 내년에 아이 생일이 지나 만 19세가 되면 ‘이제 너 알아서 살아라.’ 하고 관계를 끊어도 아무 잘못이 없어요. 아이가 19살이 넘었는데도 내가 도와주고 싶다면 도와줘도 됩니다. 그때는 부모로서 의무가 아니라 과외로 하는 거예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될 일을 내가 선택해서 하는 거니까 만약에 괴롭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가출하는 아이를 두고도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자기중심을 잡고 사세요.”

6명과 대화를 마치고 질문자들에게 소감도 들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어떤 상황이 와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관점을 이야기하며 방송을 마쳤습니다.

“추운 겨울이 따뜻한 봄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추운 겨울이라서 살 수 없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남편이나 자식이 잘할 때는 따뜻한 봄과 같고, 내 뜻대로 안 될 때는 추운 겨울이라 할 수 있어요. 추운 겨울이 와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어요. 창문을 잘 닫고, 옷을 잘 입고, 난방 살피고 조금만 채비를 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나한테 일어나더라도 추운 겨울을 지나가듯이 나는 잘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조건만 해결되면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행복하다는 관점을 가져야 나날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으로 하고 오전에는 온라인으로 경전반 졸업식이 열립니다. 오후에는 온라인으로 2차 만일준비위원회와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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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효

의지하려는 마음이 중생의 삶이라 우리는 늘 아내나 남편에게 의지하고 자식이나 부모에게 의지하고 살아감을 알았습니다.
긔 의지심이 갈등과 미움 원망이 생기는 원인임을 알아 의지심을 내지 않고 스스로 홀로 서겠습니다.(아침밥 내가 차려먹고..)

2021-02-28 07:58:14

이수정

좋고 나쁨에 구애받지 않겠다.
고 진 멸 도
평정심유지가 수행자의 자세인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2021-02-28 06:56:29

무진

감사합니다.

2021-02-23 20: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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