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0.24.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온라인 경주 남산 순례, 농사일
“지속 가능한 행복을 유지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한 후 국내외 2천여 명의 정토불교대학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경주 남산 순례를 했습니다.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 4시 30분, 맑은 종송 소리와 함께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예불을 정성껏 한 후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정토행자 만일결사 중 제10차 천일결사 제3차 백일기도 34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먼저 같이 정진을 한 후 함께 대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새벽 5시 정각에 삼귀의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어서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 독송을 차례대로 했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친 후 스님이 다시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오늘 읽은 경전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기도 잘하셨습니까? 우리가 3차 백일기도에 들어와서 같이 정진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네요. 백일기도 기간 중 3분의 1이 지나고 있습니다. 이번 백일기도에는 신규 참가자가 많아서 하루하루 잘 따라오는지, 아니면 중간에 포기한 건 아닌지 늘 궁금합니다. (웃음)

새로 참가하신 분들은 중간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100일 정도는 기도를 해봐야 합니다. 백일 정진을 해야 나를 조금 알 수 있고, 천일 정진을 해야 삶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를 변화시키려면 바짝 마음을 내서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너무 애쓰거나 긴장하지 말고,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게으름 피우거나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그저 한 발 한 발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에 우리가 읽고 있는 경전에는 설산에 사는 ‘야차’라는 신들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면서 부처님을 의심했다가 다시 믿었다가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중에 한 야차는 부처님을 의심하는 질문을 하는 반면 다른 야차는 부처님을 직접 뵙고 나서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런 문답을 통해 우리는 부처님의 인격이 어떠했는지, 더불어 어떻게 자기를 점검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행복을 유지하는 방법

자기를 점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괴로운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범부 중생이라고 하는데, 범부 중생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도 피곤하고 괴롭게 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도 피곤하고 괴롭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둘째, 돈을 가져가는 등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멀쩡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에게는 잘하는데 자기 자신은 너무 괴로워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 번째 사람처럼 자기는 잘 살아가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들에게는 욕을 하는 반면, 세 번째 사람처럼 남에게는 잘하는데 스스로는 힘들어하는 이들에게는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수행적 차원에서 보면 세 가지 모두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상대가 복수를 하게 되고, 내가 손해를 보면 참다 참다 결국 터져서 오래 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나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거나, 나는 안 괴로운데 남을 괴롭히거나, 남에게는 좋은데 나를 괴롭히는 삶은 모두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삶입니다.

지속 가능한 삶은 우선 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나아가 나만 괴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정신적으로 도움을 받는 등 어쨌든 다른 사람에게 손해 끼치지 않고 덕을 주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이 지속 가능한 방식입니다.

우선 내가 깨달아서 괴로움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을 ‘자각(自覺)’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깨달아서 그들도 괴로움이 없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각타(覺他)’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전법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도 남도 모두 깨달아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깨달음이 원만하게 두루 갖추어졌다고 해서 ‘각만(覺滿)’이라고 합니다. 보살의 일상은 내가 깨닫는 ‘자각(自覺)’, 다른 사람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각타(覺他)’, 그래서 나와 남이 같이 두루 원만하게 깨달음을 얻는 ‘각만(覺滿)’, 이렇게 세 가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산의 야차 신과 부처님과의 대화에는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마음속에서 괴로움이 없는가?
마음속에 번뇌가 없는가?
마음속에 방황이 없는가?
마음속에 근심이 없는가?
마음속에 걱정이 없는가?
마음속에 짜증이 없는가?
마음속에 화가 없는가?
마음속에 슬픔이 없는가?

부처님은 번뇌가 없는 열반의 삶을 증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본인만 이러한 삶을 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다른 이를 해치거나, 다른 이에게 손해 끼치지 않고,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말로도 거짓말을 하거나 욕설을 해서 괴롭히지 않고, 술에 취해서 누군가를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어가는 이를 살려주고,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괴로운 이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고, 진실을 말해주고, 늘 부드러운 말로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스스로는 검소하게 사시고, 타인에게는 겸손하고, 늘 마음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셨습니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길

야차 신과 부처님의 문답 내용을 보면 수행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말고 늘 검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교만하거나 남을 무시하거나 잘난 척하지 않고 늘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이러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수행자라면 늘 이런 삶을 목표로 정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수행자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즉, 내가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주변에서 함께 활동하는 도반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자꾸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한 분 한 분이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한 분 한 분이 있기에 이렇게 법을 만나고 수행 정진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걸 알면 사람이 귀한 줄 알게 됩니다.

정치인들을 봐도 고위직에서 오래 일하다 온 사람들을 보면 사람이 귀한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할 때도 뻣뻣합니다. 그런데 선거에서 몇 번 떨어져 보면 사람 귀한 줄 알게 됩니다. 한 표가 얼마나 귀한 줄을 알게 되면 저절로 시민들에게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소중함을 알게 되면 일부러 숙이는 게 아니라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자기 귀한 줄을 알면 좋겠어요. 행복학교를 진행하는 분들은 거기에 오시는 한 분 한 분이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런 감흥도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거 참 좋다’ 하고 아는 것도 참으로 커다란 지혜입니다.

경전에 나오는 문답의 내용을 읽어보면 결국 부처님은 본인 스스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사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행복하다는 것은 기분 좋음이 아니라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루 원만한 인격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수행 정진해서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고, 타인을 위한 보시와 봉사를 해서 그들도 행복하도록 작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한 보시와 봉사를 하면 상대에게 좋은 건 알겠는데, 그때 나에게는 무엇이 좋을까요?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나에게 보람이라는 기쁨이 생깁니다. 보람이라는 기쁨이 생기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아, 나도 이렇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나도 괜찮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는 것이 바로 ‘보람’입니다. 보람은 맛있는 걸 먹었을 때 생기는 기쁨과는 비교가 안 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위한 보시와 봉사는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결국 나에게도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합장으로 인사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9시부터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경주 남산 순례를 안내해야 하기 때문에 스님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9시 정각에 다시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온라인 경주 남산 순례

이번 가을에 입학한 국내외 2천여 명의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오늘은 다 같이 경주 남산에 갈 계획이었습니다. 함께 남산을 순례한 후 다 같이 모여서 대화를 나눴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아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이렇게 온라인 상에서라도 만날 수 있게 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어쩌면 여러분들은 따뜻한 집에서 경주 남산을 구경하게 되어서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이어서 경주 남산의 유래와 역사, 유적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스님은 유명한 불국사나 석굴암이 아닌 경주 남산을 순례하는 이유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여서 불교와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있습니다. 특히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죠. 관광객들은 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구경하는데, 정토불교대학에서는 왜 유독 경주 남산을 순례하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경주 남산을 순례하는 이유

황룡사가 왕과 왕족을 위한 절이었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귀족을 위한 절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절들은 일반 서민들이 출입도 할 수 없던 곳이었습니다. 반면에 경주 남산에 있는 절들은 담장도 없이 모두 개방되어 있어서,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불상들은 전문적인 예술가가 큰 예산을 들여서 만든 것이라면 경주 남산에 있는 불상들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 속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할 수 있었기에 탄생된 작품들입니다. 누가 시키거나 돈을 줘서 만든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적 측면에서는 경주 남산의 불상들이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술적 측면에서는 불국사나 석굴암의 불상에 비해 조금 부족한 면도 보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작품이 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큰 예산은 없었을지 몰라도 오히려 자발적으로 조각한 것이기 때문에 정교함에 있어서도 불국사나 석굴암 불상에 버금가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경주 남산은 우리 민중불교의 산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주 남산을 순례하는 겁니다.

경주 남산은 신라인들의 생활 가까이에 있었고, 민중들과 함께해 온 신앙의 요람입니다. 특히 정토회는 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생활불교’, 출가한 스님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일반 시민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쉬운 불교’, 복을 비는 기복 불교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체험하고 수행을 통해 깨달아가는 ‘바른 불교’를 추구하는 만큼 불국사나 석굴암보다 정토회의 설립 취지와 잘 들어맞는 경주 남산을 순례합니다.

이런 이야기만 하면 졸리기 시작하니까 오늘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 중 경주 남산과 관계가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결국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어렴풋이 떠올리는 환상이나 관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형상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어느 날 경주 남산의 동남산 지역에 있는 망덕사라는 절에서 큰 재를 지냈는데, 왕도 참석하는 큰 행사였습니다. 왕이 행차를 해서 절 입구에 당도하니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초라한 승복을 입은 늙은 출가자가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왕이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에게 왜 승려가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아직 신분이 확실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왕이 그 승려도 참석하도록 해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늙은 승려가 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재를 마쳐가는 와중에 왕이 주변을 보니까 방금 자기가 들어오게 해 준 늙은 승려가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승려를 불러서 오늘 재가 어땠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오늘 재가 어땠습니까?’

‘좋았습니다.’

그러자 왕이 농담을 섞어서 다시 말을 건넸습니다.

‘스님, 오늘 왕이 직접 참여한 재에 같이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다른 곳에 가서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러자 그 승려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도 석가의 진신이 참여한 재에 같이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어디 가서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 승려는 이 말만 남기고 돌연 지팡이를 짚더니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왕은 깜짝 놀라 옆에 있던 병사를 시켜 승려가 날아가는 쪽으로 쫓아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재가 열린 곳은 경주 남산의 동남산 지역 끝자락인데, 승려는 서남산 지역 끝자락으로 날아가더니 산 중턱에서 사라졌습니다. 말을 타고 쫓아간 병사가 산 중턱에 올라가 보니 주장자와 발우대는 바위 위에 놓여져 있는데 승려는 사라진 후였습니다. 주변을 수색했는데도 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작은 불상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 불상의 모습이 사라진 스님의 모습과 똑같았다고 합니다. 왕은 참회를 하며 그 자리에 절을 짓고 부처님이 사라진 곳이라 하여 무불사(無佛寺)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결국 형상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전부가 아닙니다. 즉,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눈에 보이고 내 귀에 들리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가 겉에 입는 옷은 그저 옷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옷을 잘 입고 가면 대접을 받고, 옷을 못 입고 가면 대접을 못 받습니다. 그 이유는 형상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고승도 한순간 상(相)에 사로잡히면 성인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설령 수많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들 나에게 부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나로선 부처님이 오신 줄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부처님인지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고, 나에게 부처님이 오셨을 때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최소한 상에 대한 집착은 넘어서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모양과 형상을 넘어서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눈이 있어야 부처님이 오시면 부처님인 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짧은 소견과 내 기준을 가지고 ‘이건 아니다’, ‘저건 맞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첫 구절은 무릇 형상화되어있는 것은 다 허망하고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곧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다음 구절은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즉 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면 곧 부처를 본다는 뜻입니다. 망덕사 이야기는 금강경에 나오는 말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변에 성인이 나타나도 누가 성인인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눈이 열려야 누가 성인인지를 비로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승려이고, 무엇이 절이고, 무엇이 불교인가

신라시대 당시에도 승려가 중국에 유학을 다녀오고, 경전을 많이 알고, 계율을 지키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대단한 승려로 인정을 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행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것은 불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정한 자가 승려입니다. 그런 사람이 머무르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심지어 논두렁 밑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이 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이것이 정토회의 출발점입니다. 승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청정한 자가 승려입니다. 여러분도 마음이 혼탁하면 중생이고, 마음이 청정하면 스님입니다. 지금 이 영상을 보는 순간에도 마음이 청정해지면 이 순간 여러분은 스님입니다. 그 순간 여러분이 머무르고 있는 방이 곧 절입니다. 기와집을 짓고 불상을 모셔놓고 승복을 입고 앉았으나 그 자리에서 자기 이익을 더 차지하려고 다툼을 하고 있으면 그곳은 절이나 아니라 시장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앉아있는 방에서 여러분이 청정한 마음을 내면 그곳이 곧 법당입니다. 여러분의 집이 곧 절입니다.

우리는 우선 나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든 어디든 공간이 있으면 그곳에서 명상하고 정진하면 됩니다. 그래서 정토회의 시작은 대부분 가정집, 방, 응접실, 식당, 사무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정토불교대학에서 순례를 할 때 불국사, 석굴암, 통도사, 해인사보다 경주 남산을 먼저 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마음을 맑게 가져서 먼저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사는 방이 곧 법당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집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작은 법당에서 지금 법문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 시간 동안 스님의 안내를 들은 후 다 함께 온라인으로 경주 남산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온라인으로 경주 남산의 모습을 한 번 둘러보겠습니다.”

스님이 직접 경주 남산의 곳곳을 찾아가 설명하는 모습을 모두 영상으로 촬영해 와서 보여주었습니다. 삼릉골로 올라가 목 없는 불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바위에 새겨진 선각육존불을 보고, 불상이 많이 새겨진 칠불암과 부처 바위의 동서남북 면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듣고 보았습니다. 스님도 함께 영상을 보면서 편집이나 자료화면이 부족한 점을 점검했습니다.

온라인으로 경주 남산 순례를 마친 뒤 반별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조별 소개와 더불어 법사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불교대학 학생들은 그동안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궁금한 점에 대해 법사님께 질문하고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일정이 없었습니다. 스님은 작업복을 갈아입고 텃밭으로 나가보았습니다.

가지, 고추, 들깨로 무성했던 뒤쪽 텃밭도 다시 빈 땅이 되었습니다. 삽으로 밭을 뒤엎어 뿌리를 다 걷어내고 거름을 골고루 섞은 뒤 땅을 고루 펴주었습니다.


다시 겨울채소를 심기 위해 물을 흠뻑 주었습니다.

텃밭 주변에 굴러다니던 부서진 시멘트 벽돌은 망치로 부수어 길 한쪽에 뿌렸습니다.

제피나무는 가지를 쳐주었습니다. 숫나무라 열매는 없고 잎만 조금 남아있었습니다.

“여기를 지나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제피나무 가시에 찔려서 가지치기를 해야겠어요.”

가지를 친 나뭇가지는 따로 모아 장작더미에 쌓았습니다. 암나무에는 제피 열매가 많이 달려있었습니다. 이미 껍질이 바짝 마른 제피도 많았습니다.

“아이고, 제피 딸 시기가 늦었네요. 열매가 빨갛게 익었을 때 따야 하는데 벌써 말라버린 것도 많네요.”

나무에 가시가 많아 조심조심하며 가위로 열매를 땄습니다.

가시 사이사이 제피를 따다 보니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어쩌다 손등이 긁히면 다른 나무 가지보다 더 후끈합니다. 가시에 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피를 다 따고 함께 딸려온 큰 잎들은 가려내 주었습니다. 작은 소쿠리 가득 제피를 수확했습니다.

누렇게 잘 익은 호박도 한 덩이 수확했습니다.

키가 큰 국화가 고개를 자꾸 떨구어서 묶어주었습니다.

텃밭에 물이 어느 정도 마르자 비닐을 깔아주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울력에 스님의 건강이 염려되어 행자가 물었습니다.

“스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세요?”

“놀기 삼아 일을 시작해도, 일이란 게 시작을 하면 무리를 하게 되네요.”(웃음)

사용한 도구에 묻은 흙을 닦고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창고로 도구를 옮기는데 터질 듯 잘 익은 홍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홍시를 따서 참으로 나누어먹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업무를 보았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농사일을 한 후 오후에는 통일특별위원회 모둠장들과 온라인 화상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 명상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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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

시시때때로 내마음이 혼탁한지 청정한지 살펴서
"먼지를 털고,때를 닦아라ㅡ주리반특"

2022-01-25 17:44:52

김민선

스님. 마음정화되는듯한 법문 잘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냅니다~

2020-11-13 10:15:15

김영례

감사합니다
스님 건강하세요^^

2020-11-01 00: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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