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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세계 100회 강연 중 102번째 강연이 미얀마 양곤( Yangon)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미얀마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라고 불렸습니다. 미얀마의 군사 정권이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도 아우른다는 차원에서 미얀마(Myanmar)로 국호를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도 민주화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군사 정권에서 붙인 국명인 미얀마와 현 국기를 거부하고, 버마라는 호칭과 옛 국기를 고집하고 있기도 하다고 합니다. 1962년, 네윈 장군의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집권하였고, 네윈은 거의 26년간 버마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버마를 통치하였습니다. 1990년 자유 선거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야당세력이 압승하자 군부는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아웅산 수치를 무기한 가택연금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11월 7일 미얀마 군사 정권은 총선을 통해 민간에 정권을 이양했지만, 군부의 지원을 받는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압승으로 끝났고, 2010년 총선은 관제 야당들을 들러리로 내세운 사실상 관제선거였다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인구는 5600만명 정도이고, 전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 신자이기 때문에 승려들은 국민들로부터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히 강력한 편입니다.
▲ 미얀마 양곤 Yangon
양곤( Yangon)은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옛 수도입니다. 원래의 이름은 랑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랑군의 명칭을 양곤으로 바꾸었습니다. 2008년 5월에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양곤을 강타했고, 도시의 사상자는 별로 없었지만, 양곤의 도시기반시설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고 피해액은 8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2005년 11월에 군사 정부는 양곤에서 북쪽으로 322km 떨어진 네피도로 행정 수도를 이전하였지만, 어쨌든 양곤은 지금도 미얀마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남아있습니다. 최근 양곤은 토지 가격이 치솟고 있다고 합니다. 현지 교민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작년 보다 올해 집값이 10배 이상 오른 곳도 있다고 하니 변화의 물결이 실감나기도 했습니다. 미얀마 사회에 불어닥칠 변화의 물결은 아마 한국이 20년 동안 변화해온 과정을 2년 안에 모두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합니다.
콰알라룸푸르에서 윤금주 한인회 부회장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6시30분에 부회장님이 정성껏 차려주신 아침을 먹고 7시에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니 어제 강연을 정성껏 준비해주신 반야원 회장님을 비롯한 신도님들이 스님을 배웅하러 나와 있었습니다. 짐을 부칠 때까지 시간 여유가 생겨서 스님께서는 반야원 신도님들과 잠시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 공항 배웅을 나온 반야원 신도님들
게이트를 통과하고 나서 대기하고 있는데 비행기가 25분 연착되었다고 해서 스님께서는 명상을 하시며 시간을 더 보내셨습니다. 콰알라룸푸르 공항을 오전 11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현지 시간으로 12:00에 미얀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입국 수속을 밟고 나오니 미얀마 강연준비 총괄을 맡은 아쿠아랜드 한윤복 대표님과 한승국님, 강연준비 봉사자 강영애님과 김진동님, 현지인 우멍주윈님이 스님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비자를 전산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조금 생겼지만, 미얀마 현지 분들의 발빠른 대응으로 무사히 공항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 미얀마 공항에 마중을 나온 분들. 왼쪽부터 한윤복 대표님, 강영애님, 김진동님, 현지인 우멍주윈님
공항에서 곧바로 오늘 숙소인 Pearl Condo로 이동했습니다. 숙소에 도착하여 미얀마 강연 준비팀 봉사자들이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김근영님과 이근숙님이 점심식사를 준비해 주셨는데 구수한 된장국부터 손수 만드신 반찬들을 보며 많은 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약간의 편두통이 있으시고 감기 기운이 있으셔서 오후에는 숙소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신 후 원고 교정 업무를 보시다가 오후5시 30분 무렵 강연장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양곤 북부 Inya 호수가에 위치한 Inyalake Hotel입니다. 호텔에 도착하니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수가가 보였습니다.
▲ 호텔에서 바라본 인야 호수 전경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십여명의 봉사자들이 일찍부터 곳곳에 안내 포스터와 현수막을 장식하고, 마이크를 테스트하고 의자를 배치하고, 책 판매대를 꾸미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오후6시 무렵 강연장에 도착한 스님께서는 대기실에서 지역 인사 분들과 차담을 나누셨습니다. 코트라 안재용 과장님을 비롯하여 권성혜님, 강영애님과 민주평통에서 유진 사장님, 최용석님, 대사관에서 정병배 참사님, 김평회 소장님, 정분자 회장님 등 많은 분들이 자리해 차담을 나누며 스님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함께해주신 분들게 직접 사인한 책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저녁7시가 되자 소개 영상에 이어서 큰 박수를 받으며 스님께서 무대에 오르셨습니다. 오늘 강연은 120명 정도가 참석하여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현지 교민 분의 설명에 따르면 미얀마 전체에 한국 교민이 2천명 산다고 하니 120명이면 그 중에 5% 정도나 온 것이니 많은 분들이 참석한 것이라고 합니다.
먼저 강연에 앞서 오늘 강연 준비 총괄을 맡아주신 한윤복 대표님의 인사말씀이 있었습니다. 대표님은 "스님의 설법을 듣고 좀 더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며 참석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 인사말씀을 하고 있는 한윤복 대표님
스님께서는 미얀마에 부는 변화의 바람에 대해 이야기하시며 오늘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길이 많이 막힌다고 주최하신 분들이 걱정이 많으셨는데, 다들 시간 맞춰서 잘 오셨네요. 미얀마에서 다들 잘 살고 계세요? 연세 드신 분들은 한국의 70년대와 80년대에 한참 변화를 가져왔던 그런 기분을 느끼실텐데 그런 기분 느끼세요? 우리도 이런 사회적인 변화를 거쳤다는 것을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거예요. 아까 전에 여기 오다보니까 트럭에 사람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타고 옆에는 사람이 조롱조롱 메달려서 가는 걸 봤습니다. 70년대에 한참 농촌이 붕괴되고 도시 변두리로 빈민들이 모여들고 할 때 우리나라 버스들도 정말로 김밥 옆구리 터지듯이 차가 가득 찼어요. 그래서 버스 기사가 사람이 많아서 더 이상 안 들어가면, 마대에 물건 담을 때 흔들면 더 들어가듯이 버스를 커브길에서 오른쪽으로 한번 기울게 하고 왼쪽으로 한번 기울게 해서 사람을 더 태우고 그랬어요. 여기 상황을 보니까 그 때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이곳 미얀마에 99년도에 구호활동을 하기 위해 답사를 하러 한번 왔었구요. 4,5년 전에는 태풍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서 저희 JTS가 들어와서 무너진 다리를 놓고 학교를 복원하는 일을 했었어요. 그래서 준공식 하러 몇 번 왔었어요. 그러다가 한윤복 사장님을 만나서 작년에는 강연도 했었습니다.
즉문즉설은 강연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과 대화를 하는 자리입니다. 자신이 궁금한 걸 물으면 그걸 갖고 대화를 하는 겁니다.
보통 설교나 설법은 경전에 있는 얘기를 먼저 하고 해석해 주고 생활에 적용하고 즉 하늘에 있는 얘기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방식인데, 오늘 우리는 우리의 고뇌나 의문 등 사람 얘기를, 즉 땅의 얘기를 먼저 하고, 대화를 하다보면 결국 하늘로 올라가서 진리에 대한 얘기로 귀결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얘기를 먼저 시작해 봅시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로 나아가는 방식이 좀 다릅니다. 전제를 먼저 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끌어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얘기를 먼저 해보고, 그리고 그 좋은 길을 찾아 가다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도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도달하고 즉 행복과 자유의 길로 한발 한발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고뇌가 곧 진리로 가는 문이예요. 이것을 불교에서는 ‘번뇌 즉 보리’ 라고 부릅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리를 오늘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자, 그럼 누구든지 질문이 있는 사람은 시작해보세요.“
그러면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총 7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꿈이 제벌 2세인데 부모님이 안 따라 줍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린 학생의 당돌한 질문에 모두가 크게 웃으며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 책을 읽었는데 건전한 인간관계를 가지려면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살다보면 어떻게 기대감을 가지지 않고 사람 관계를 맺을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부조리들을 보고 있는데 과연 이 문제들을 지나쳐야 하는지 저런 부조리를 먼저 지적을 해야 하는건지 알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의 불이익을 떠나서 남을 위한 지적도 필요한지 알고 싶습니다.”
“스님 말씀을 듣고 깨우친 점도 많지만 혼란스러운 점도 많습니다. 항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살지만, 어쩌면 길들여져서 살아가는 건 아닌가 싶어요.”
“나이가 들다보니 사람의 인관관계에 대해서 고민이 생깁니다. 어릴 때는 사람들을 더 알아간다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슬슬 관리를 벗어나는 대인관계를 만나면서 스스로가 점점 대외적으로 나빠지는 이미지를 얻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구를 더 알아가기도 좀 겁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를 계속 관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얀마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데, 이곳 아이들은 항상 꿈이나 비전없이 경직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줄수 있을까요?”
이렇게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지혜로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미얀마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속상하다며 아이들을 위해 어떤 교육을 해워야 하는지 묻는 여성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이곳이 아직 문화적으로 미흡한 곳이다 보니 미얀마인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한국인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많이 잃고 있습니다. 어린 딸 아이에게도 한국인으로서 어떠한 자긍심을 심어줘야 할까요? 그리고 미안먀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중국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요. 그런 분들을 보면서 많이 속상했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가끔씩 창피할 때도 있었고요. 자라는 아이들에게 제가 어떻게 얘기를 하고 한국인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외국에 나와서 한국인으로 어떻게 사느냐? 이런 생각 너무 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이 사는데 무슨 한국인과 미얀마인이 다르겠어요? 그러니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서 어떻게 할 것이냐 이렇게 보편화 시켜야 해요. 자꾸 특수화시키지 말고요.
사람으로서 진실에 근접하려면 생태계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됩니다. 개가 강아지를 낳았는데 새끼가 까만 것도 있고 흰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어미개가 까만 것, 노란 것, 흰 것을 차별합니까? 안 합니까? 안합니다. 사람들도 개털 색깔이 다른 것을 가지고 차별해요? 안해요? 안하지요. 그런데 개도 차별을 안하면서 인간이 피부가 까맣고 노랗고 하얗다고 왜 차별을 해요? 이것은 한국인이고 아니고에 관계없이 진실이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고양이나 개를 봤을 때 질문자가 흰털이 좋다, 까만털이 좋다, 노란털이 좋다. 이것은 질문자의 취향이잖아요. 그러니깐 나는 백인이 좋다, 나는 흑인이 좋다, 나는 황인이 좋다 하는 이것을 차별이라고 보면 안 돼요. 이것은 그의 기호이기 때문이예요. 이것은 인종차별하고는 성격이 다릅니다.
내가 백인을 좋아하는 것은 괜찮은데 흑인이라고 괄시해서는 안 되죠. 그러니까 우리가 미얀마에 살면서 미얀마인을 괄시하는 것은 안 되지요.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사람이 서로 태어난 나라가 다르거나 인종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차별을 하면 안된다는 거죠. 무슬림이다 하면 벌써 ‘저 사람은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보면 안된다는 거죠. 또 여자라고 차별해서도 안되고, 신체장애라고 차별해서도 안되고, 더 나아가서는 성적 지향이 다르다고 차별해서도 안되고, 그 태어남에 의해서 주어진 것을 가지고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죠.
그런데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끼리만 살아왔고, 한국사람들은 한국사람들끼리만 살아왔고, 일본사람은 일본사람끼리만 살아왔고, 서양사람은 서양사람끼리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만 옳다,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생각하고 있지요. 이렇게 살아온 환경의 영향이 큽니다. 한국사람들은 인종이 다른 사람, 민족이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 본 경험이 없어요. 경험이 없다 보니 한국사람이 아닌 것은 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에 2가지가 있어요.
우리가 서양문화를 모방하고 있다보니까 서양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어요. 이것은 모방하다보니깐 형성된 거요. 그다음에 우리가 조금 동남아시아에있는 사람들 보다는 잘사니까 자기도 모르게 목에 자꾸 힘을 주게 되는거요. 좀 낮춰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서양사람들에게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듯이 동양사람에 대해서도 우월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열등감을 가지면 우월감이 생기고, 우월감을 가져도 열등감이 생겨요.
예를 들면, 돈은 그냥 돈일 뿐이지요. 돈을 그리 중요시 안 하면 나보다 돈 많다고 해서 내가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고, 나보다 돈이 적다고 해서 내가 멸시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내가 돈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면 나보다 돈많은 사람한테는 기가 팍 죽고, 나보다 돈 적은 사람한테는 나도 모르게 목에 힘을 주게 되요. 내가 지위에 집착하면 나보다 지위가 높으면 그냥 자기도 모르게 기가 죽고, 나보다 지위가 낮으면 자기도 모르게 반말이 나와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첫째 자기 열등 의식의 발로예요. 두 번째는 경험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예요. 그러니 여기 나와 있는 한국 사람의 대다수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어요. 하나는 서양에 대한 열등 의식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동남아에 대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서양 사람이나 미국 사람 한테는 굽신거리면서 여기와서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좀 잘 산다고 큰소리 치니까 동남아 사람들은 우리가 더 얄미운 거예요. ‘너가 언제부터 잘 살았다고?’ 하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이런 것보다는 한국 사람이 외국인하고 살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식으로 살고 있는데 외국 사람이 느낄 때는 굉장히 차별의식을 느끼는 거예요.
조선족들은 상담을 해보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참 많거든요. 한국의 노가다 판에 가보면 한국 사람끼리도 주고 받는 언어가 욕설이 절반이예요. 그런데 중국에 있는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20년 전부터 일하기 시작했잖아요. 옛날에 한국에 오는 사람은 전부 중국에서는 괜찮은 사람들이였어요. 학교 선생님하다가 오거나, 판사하다가 오거나, 공무원하다가 오거나, 보통사람들은 올 수가 없으니까 주로 이런 사람들이 오는데요. 그런데 한국에 오면 다 하는 일이 노가다 일을 해요. 그런데 거기서 쓰는 언어가 모두 쌍소리예요. 지식인이다 보니 모두 다 엄청난 모멸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막 사고가 나는 거예요. 그럼 이럴 때 이 사람들이 차별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 습관대로 살았는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차별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오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오류가 여기에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조금 더 지식인이고 배운 사람들이 차별을 덜 하고요. 한국의 시골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만 나와서 시골에서 유지하는 사람들이 더 심한 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동남아로 여행을 오면, 자기도 고생을 했으니까 여기 사람들을 더 존경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되고 오히려 더 식당이나 술집에 가서 행패를 피우고 그래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해요. 의도적인 것이 아니예요. 그런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할 때 너무 나쁘게만 보면 안되요. 업식이기 때문에요. 그것을 불교에서는 카르마라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그러지 않겠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하지만, 남이 그러면 그런 점은 이해를 해야 해요. 그러나 이해하는 것 하고 그것이 옳은 것 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화가 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이해는 하지만 개선은 해야 할 일이예요. 그래서 스님이 ‘화 내지마라, 화를 내는 것은 내 문제다’ 라고 하는 거예요.
한국 분들이 이렇게 함으로해서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한국 사람에 대해 저항감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거나 사업을 할 때 좀 유의를 해야 해요. 한국에도 중소기업을 하시는 분들이 사정이 어려워서 그렇긴 한데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에 돈 벌러온 노동자들에게 일 시키고 월급 안 주고,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잖아요. 여성 노동자들에 대해서 성추행이 있고요. 요즘 한국 여성 분들에게 그랬다가는 신문에 나고 난리가 나잖아요.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게 더 심하단 말이예요. 또 한국에 결혼하러 온 베트남 여성 분들이 시골에서 인격적으로, 인권적으로 받는 모욕감이 굉장하거든요. 한국은 앞으로 이것이 큰 문제예요. 이것은 한국 국민이 나빠서가 아니라 첫째 역사적으로 남과 살아본 경험이 없고, 두 번째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데려올 때 대부분 돈을 좀 지불하고 데려오거든요. 말이 결혼이지 좀 지원을 하고 데려오니까 부인이라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조금 우월의식을 갖고 마치 하녀처럼 취급하는 이런 개념이 있어요. 그래서 인권침해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나빠서 그런 것은 꼭 아니예요. 이것은 무지로부터 오는 건데, 자기도 잘 인식을 못하고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대사관 같은 곳에서나 또는 학교 교육에서 우리 한국의 어린 아이들에게 굉장히 새로운 교육을 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자랄 때에는 이런 교육을 못 받았는데요. 요즘 학교에는 혼혈아가 많아졌잖아요. 다문화 가정이라고 해서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다 경험하고 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교육도 시켜야 되고, 종교가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로 생활하는 것에 대한 훈련도 많이 받아야 해요.
이런 것은 시간이 좀 걸려요. 우리가 노력도 해야 되지만,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므로 기다려 주어야 해요. 금방 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첫째는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두번째는 그러나 개선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계획을 세워서 학교에서는 어떻게 교육하고, 시민사회에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지 차분하게 준비해나가는 것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이런 것이 개선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같이 노력을 해나갑시다.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돌입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창조입니다.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융합할 수 있어야 해요. 문호를 활짝 열고 정말 내가 갖고 있는 문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인류적 과제에 있어서 그것이 기독교적 아이디어든, 불교적인 아이디어든, 과학적인 아이디어든,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제한을 두면 결국은 창조성이 안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신앙에 갇혀 있고, 민족에 갇혀 있고, 관습에 갇혀 있잖아요. 그런 것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갇혀 있지 마라는 거예요. 그래야 여러분들이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왜 스님이 서양에 가서 통역해서 강의하는데 서양 사람들하고 대화가 되느냐 하면, 새로운 시대를 이야기 하기 때문이예요. 여기에 오면 이 나라 문화를 존중해야 돼요. 내 문화를 존중하듯이 이 나라의 문화를 존중해줘야 해요. 그러나 우리는 그 장벽을 넘어서서 다음 세계로 나아가야 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문화를 무시하면 그것은 아까 얘기한대로 현대인이 되기 어려운 거예요. 현대인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용인하고 용납하고 수용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자 이것이 이제 세계 평화의 길이예요.”
“감사합니다.”
질문자는 스님의 답변에 크게 공감하면서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질문한 분에게 찾아가 소감을 물어보았더니 “너무 공감이 가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존중은 상대에 대한 이해라고 강조해 주시면서 이렇게 닫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딱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70억 인구 중에 한명도 없어요. 나와 DNA가 같은 사람이 한명도 없듯이요.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맞춰 가야 합니다. 공통점이 많지만 똑같아 질려고 하니까 거기에 맞는 사람은 한명도 없게 되는 겁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인식을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은 그 사람의 의견을 다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존중은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존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해해 나간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가 있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무리 말씀을 마치자 청중들은 2시간 40분 동안 열강을 해주신 스님께 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2시간이 넘어가자 조금 무리를 하셨는지 목소리가 갈라지고 하셨지만 한분이라도 더 고민이 있으면 도움을 주시려고 추가 질문을 2명 더 받으셨습니다.
강연을 모두 마치고 스님께서는 로비로 이동해서 스님의 사인을 받고자 길게 줄을 선 청중들에게 사인을 해주시며 반갑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미얀마 현지에서 사업을 하시는 40대 50대 남자 분들도 많이 참석했는데, 한 분은 스님께 사인을 받으면서 “질문을 정말 하고 싶었는데 차마 용기를 못냈었다”고 하면서 “내년에 오시면 꼭 질문을 하겠다” 고 해서 스님께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습니다. 오늘 강연은 개인의 구체적인 고민이 담긴 질문이 많이 나오지 않아 조금 아쉬웠는데, 이곳 미얀마의 교민사회는 규모가 작아서 개인 고민을 질문하기에는 조금 꺼려지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어서 강연장 곳곳에서 소임을 맡아 수고해준 봉사자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봉사자들 모두에게는 스님께서 직접 한국에서 가져 온 단주를 손목에 걸어주셨습니다.
특히 미얀마 강연 전체를 총괄하여 주신 한윤복 아쿠아랜드 대표님에게도 스님께서 직접 사인한 책을 선물로 드리고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뒷정리를 모두 마치고 자원봉사자들은 묘덕 법사님과 함께 마음나누기를 하였습니다. 사회자 소임을 맡은 분은 “행사는 준비가 70이고 행사는 30이라고 생각하는데 준비 과정에서의 노력들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고 하고, 강연 실무를 맡은 김진동씨는 “작년 스님 강연 때는 참석자였는데, 올해는 자원봉사자로 참여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연 실무 전반을 총괄한 한승국씨는 ”미얀마는 온라인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한인들이 모이는 곳에 직접 발로 뛰어서 홍보했다“ 면서 ”처음에는 능력이 부족해서 잘해보려고 욕심을 부렸는데, 일을 하나씩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부탁하는 연습을 해보는 경험을 가질 수 있어 참 좋았다”고 합니다. 봉사자 한 분은 “미얀마의 교민사회가 좁기 때문에 자기 고민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은데, 질문하는 방식에 대해 더 연구하면 좋았을 것 같다”고 아쉬움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봉사자 한 분은 “이번 스님 강연을 계기로 앞으로도 미얀마에서 봉사활동을 계속 이어나가는 모임을 새로 만들어야겠다는 뜻을 가져 보았다”고 하여 함께한 봉사자들 모두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 묘덕 법사님과 함께 마음나누기
또 한분은 “미얀마 교민사회는 생업으로 바쁘신 분들이 많은데 주말이 아니라 평일에 강연 시간을 잡아서 오고 싶지만 못 오신 분들도 많았던 것 같다”면서 “다음에 강연을 하게 되면 주말에 꼭 강연 시간을 잡아주면 좋겠다”고 바램을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오늘 강연 전체를 총괄한 한윤복 대표님은 “우리가 한 노력에 비해서 사람들이 많이 온 것 같지 않아 섭섭한 점도 있었지만, 준비 과정에서 모든 기쁨을 누렸다” 면서 밝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교회와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도 많이 오셔서 무척 놀랐다”고 했습니다. 묘덕 법사님은 봉사자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마음나누기를 마치면서 “홍보를 적극적으로 했던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참여 숫자에는 신경쓰지 않으시면 좋겠다”고 당부하면서 수고한 봉사자 모두에게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표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숙소로 이동하셔서 간단히 내일 일정에 대해 의논한 후 밤12시가 넘어서 일과를 모두 마치셨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많은 분들의 자원봉사와 정성으로 102번째 미얀마 강연을 잘 마쳤습니다. 내일은 미얀마 양곤에서 태국 방콕에서 강연이 열립니다. 내일은 방콕에서 또 생생한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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