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우리 집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앞니를 갈고 있어서 넓적하고 끝이 까슬까슬한 대문니 두 개가 계단처럼 자라 나오고 있습니다. 2주 후면 1학년 겨울방학인데 저희 가정은 맞벌이라 방학 내내 돌봄교실을 가야 하는데, 방학 특강을 신청하지 못해 아이가 종일 돌봄교실에서 지내려면 얼마나 지루할까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토회 부모법회(구 아기엄마법회)를 다니며 아이를 기르고 있습니다. 돌부터 만 3살까지 매주 한 번 아이를 데리고 법회에 나갔습니다. 복직한 후에는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법회가 한 달에 한 번 열렸습니다. 지난해 오프라인 법회가 재개되자 다시 아이와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정토회와 만났습니다. 대학교 교양필수 과목이었던 기독교 문학 수업 시간에 명상을 짧게 경험하고 불교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인생의 가장 어둡고 후미진 구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울증 상태였어요. 제 안에는 우울증 씨앗이 있어서 어떤 특정한 조건이 되면 싹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취약성입니다. 스물세 살 때 수계를 받으면서 법륜스님이 하셨던 말씀을 저는 깊이 명심하고 있습니다. ‘삶의 1순위가 바뀌더라도 0순위는 자신을 지키는 수행으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제사 지내는 장남에게 물려주는 논 너 마지기, 밭 두 마지기 가진 형편에서 살림을 일으킨 분들입니다. 육이오전쟁 유복자였던 아버지는 광산촌에서 광산을 10년 다녔습니다. 엄마는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 대신에 친정 살림을 살다가 일찍 결혼하신 후 억척스럽고 알뜰하게 사셨습니다. 부모님은 뽕밭을 사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나무뿌리를 뽑고 개간하여 사과나무를 심었고, 지금도 사과 과수원을 하십니다.
남동생이 3명 있는 맏딸인 저는 막냇동생을 업고 놀러가고, 초4부터 중3까지 농번기에 저녁밥을 해놓고 부모님이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공부하고 싶었지만, 초등학교만 졸업하게 된 부모님은 자식 넷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20대 초반, 저의 우울감은 자식을 서울대에 보내고 싶어 했던 아버지의 희망을 이뤄드리지 못한 데서 왔습니다. 그것이 좌절되자 저의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20대에서 30대를 정토회와 함께 보냈습니다. 민달팽이 같던 제 가치관의 뼈대가 정토회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제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버지의 꿈이었습니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홍제동 정토포교원 기도대중, 정토대학생회, 청년정토회를 거쳤습니다. 동북아 역사기행, 깨달음의 장, 나눔의 장, 일체의 장,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매주 법당에 가서 듣는 법문이 너무나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에는 백일기도 중 30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입재식, 회향식에만 간신히 참여했습니다. 서른 살 전후해서 북한동포돕기 24시간 천일정진에서 새벽 시간을 맡는 소임을 계기로 천일기도 성공률이 90% 이상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우울감이라는 취약한 씨앗을 가진 상태에서도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정토회 덕분에 저의 삶은 출렁거리면서도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고, 출렁거림 역시나 깊이가 얕아지고 폭이 단축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특수교육을 전공해서 특수교사로 ‘잘하지는 못해도 좋아하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학업을 지속하기가 어려웠지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특수교사로 일하고 있는 내가 이 일을 하지 않는 나보다 행복하다고 끄덕이면서 일하고 있는 것은 모두 정토회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 법회’ 자원활동을 하면서 <스님의 주례사> 책에 나온 법문을 현장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들었습니다. 부모가 될 부부가 정진하고 정화하면 두 사람의 인연 중 좋은 인연으로 자식이 깃들 수 있다는 말에 설렜습니다. 아이가 잉태되어 두 심장이 한 몸을 쓰다가 탄생하여 젖을 먹으며 만 3살이 되기까지의 시기가 아이의 성격 형성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꼭 아이를 잉태하기 전에 정성을 들이는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또 임신기간, 생애 초기 3년간 일을 쉬고 천 일간 정진하면서 아이를 기르는 데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30대의 어느 해 비전보드를 만들다가, 아이 젖먹이는 그림을 여러 장 붙인 것을 보고 저는 엄마가 되는 것, 또는 모성을 표현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설레는 소망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흔 넘어 결혼해 마흔다섯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난임 휴직 1년 반 동안 난임 병원에 다녔고, 저는 여러 번 시험관아기 시술에 실패하면서 낙담했습니다. 하다 보니 임신에 집착하곤 했습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아이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사라지면서 아이 없이 우리 부부는 잘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생물학적인 친자가 없어도 모성애를 직업에서 충분히 표현하면서 잘 지낼 수 있다는 마음이 진심으로 들었던 때에 자연스럽게 아이가 깃들었습니다. 산전 육아휴직을 해서 임신 유지를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덕분에 남편과 저는 아이와 나눌 이야기를 풍부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북한산에 갈 때마다 절에도 안 다니는 사람이 불상 앞에서 108배를 드리며 좋은 인연의 아이와 만나고자 정성을 들였고, 아이가 태어나면 같이 와서 인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매일 300배를 하고, 좋아하는 인문학 공부 모임에 들어가 잘 놀면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만혼에다 난임인 덕분에 임신 전후에 직장을 쉬면서 몸과 마음을 정비할 수 있었고, 태교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직장을 쉼 없이 13년을 다녔는데 난임 휴직을 통해 아이가 엄마에게 안식년을 선물한 셈입니다.
산전 육아휴직을 썼기 때문에 만 3살까지 쓸 수 있는 휴직 기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교사가 재직 기간 동안 단 한 번 쓸 수 있는 자율연수휴직을 썼습니다. 24개월까지만 육아휴직을 하고 나머지는 워킹맘의 무덤이라는 초등학교 1학년을 위해 남겨놓으라고 조언하는 이들이 많았고, 엄마가 쉬려면 오전에라도 어린이집에 보내라고도 할 때는 솔깃했습니다. 결국 법륜스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만 3살까지 가정보육했습니다. 복직이 보장되어 휴직하고 지낼 수 있는 여건에 감사했지만, 아이와 집에서 지내는 것이 갇혀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아이 또래 엄마들보다 나이가 10살에서 15살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친정과 시댁과의 거리가 멀었고 조리원 동기 모임이나 동네 엄마 모임이 없어서 고립되기 쉬웠는데, 이 시기에 아기엄마법회에 나갈 수 있어서 숨통이 트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아기를 안고 법회에 갔습니다. 열 명 정도 또래 아기들이 있었고 아기엄마들은 모두 정토회와 인연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바리바리 싸들고 아기띠로 아기를 안고 법당에 갔지만 법문은 하나도 못 들었어요. 하지만 그 공간에 함께 머무는 것 자체가 힐링이었습니다. 아기를 낳으면 엄마가 3년간 키운다는 신념을 공유한 분들과 만나는 것이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선광법사님이 아기엄마들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정진할지 방향을 잡아주셔서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엄마로서 우리 집 아이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이 안정애착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획득된 안정 애착’도 쓸모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나는 취약성이 있는 엄마고 이런 취약성을 우리 아이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간절함으로, 나를 지키기 위해 아이 세 돌까지 매일 300배를 하려 노력했습니다. 시간을 맞추든 못 맞추든 저를 행복하게 하는 정진이 안정감과 안전감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 과제는 남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저와 다른 점을 수용하고 맞추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특히, 남편이 술을 좋아해서 새벽에 만취 상태로 들어오거나, 아이와 둘만 지내야 할 때 힘들었습니다.
만 3살까지 엄마가 키우는 것뿐 아니라 엄마 마음이 편안해야 아이가 잘 자란다고 법륜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제 마음이 편안했나 살펴보면 항상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아이에게 미안합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저는 고군분투하며 나름 애썼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이가 만 3살이 지나도 육아는 계속됩니다. 우리 아이가 엄마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아이와 함께했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큰 위안과 자랑이 됩니다.
복직 후 보직을 학생 집으로 찾아가되 출퇴근 시간이 조금 융통성 있는 순회교사로 지원했습니다. 제도가 좋아져 2년간은 육아시간을 써서 2시간 일찍 퇴근할 수 있어서 등원은 남편이, 하원만 제가 했습니다. 육아시간과 순회교사 보직이 종료되자 직장이 멀어 주 양육자를 할 수 없어졌습니다. 남편이 주 양육자를 맡고, 저와 시어머니가 부 양육자를 맡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하루 4시간 가까운 장거리 출퇴근을 하면서 직장과 가정생활을 균형 있게 해 나가려 종종댑니다. 아이보다 남편을 우선하라고 들었지만, 제 마음은 저절로 아이에게 갑니다. 저는 부 양육자로서 주 양육자인 남편에게 낮추고 숙이는 것이 아이를 편안하게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원하지 않은 상황을 만나면 섭섭함이 들 때가 자주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육아를 통해 저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늘이 저에게 엄마라는 소임을 주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엄마 소임을 좋은 수행 계기로 삼아 계속 정진할 것입니다.
글_권윤정(서울제주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전체댓글 11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