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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토회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20년 전에 동생이 건네준 <월간정토> 덕분이었습니다. 책을 펼쳐보니 낯익은 눈빛의 한 스님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예전에 ‘북한동포돕기 운동’에 쓰일 성금 모금차, 조계사 근처 카페에서 일일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 한 분께 차를 드렸는데, 그분의 매서운 눈빛과 범접할 수 없는 자태가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책 속의 그분이 그때 본 법륜스님이었습니다.
어쩐지 <월간정토>가 가깝게 느껴지면서, 평생 구독 신청을 하고 읽다 보니, 법륜스님의 법문을 직접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법당에 갈 형편이 못 되어서, 법문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사다가 차로 이동할 때마다 들었습니다. 당시에 들었던 법문 중에 특히, 인연과보에 대한 말씀이 내리꽂히듯 다가왔습니다. 그간 세상의 이치를 인과응보로 이해해 오던 가치관에, 일종의 지각 변동이 일어난 듯했습니다.
<월간정토>가 이어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살다 보니, 이렇게 책의 한 페이지에 저의 이야기가 실리게 된 것 같습니다. 뭉클한 마음이 드는 한편, ‘잘 물든 단풍이 꽃보다 아름답다’ 하시던 스님의 말씀이 떠올라 주춤거려집니다. 과연 나는 잘 물들어 꽃보다 아름다워졌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갓난아이 때부터 잘 울지도 보채지도 않던 순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좀 모자라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 타고난 성격이 유순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와, ‘여자는 그저 남편 잘 만나 현모양처로 살면 된다’ 하시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영향인지, 저 자신을 ‘여자’라는 틀 속에 가두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경찰관 업무가 바쁘셨던지 귀가가 늦고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던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생전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딸도 공부해야 한다며 저희 자매를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말씀처럼 공부만 하고 있기에는, 가장의 빈자리가 컸습니다. 어떻게든 집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 아침에 신문 배달하거나 우유 배달 일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23살 무렵부터 어머니의 뜻대로 맞선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집안을 일으키는 일이 오롯이 저의 결혼에 달려 있다는 듯이 제 결혼에 매달리셨습니다. 맞선 자리에 나온 남자들은 안정된 직장에 경제력을 갖추었지만 하나같이 저보다 열 살은 훌쩍 더 많았습니다. 또 서로의 내면이 잘 맞는지 알아보려 하기보다는, 오로지 제 외모에 관심을 두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 남자들을 보면서 맞선으로 맺어지는 결혼에 대한 회의감이 들 즈음, 남편을 알게 됐습니다. 남편은 그간 만나왔던 맞선남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했는데, 예상대로 어머니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얼마나 반대가 극심했던지, 큰아이를 낳은 후에도 언제든 집으로 돌아오라고 할 만큼 어머니는 저의 결혼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습니다.
저는 단칸방에서 시작하는 신접살림일지라도, 제가 선택한 사람과 미래를 그려나가고 싶었습니다. 끝내 친정에 발길을 끊는 선택을 하면서, 그렇게 틀 밖 세상을 향해 한 발짝을 내디뎠습니다. 그때는 틀에 박힌 세상이든 틀 밖의 세상이든 모두 다 내 마음이 만든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1989년에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서초동으로 이사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집 근처 선원에서 불교 공부를 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한 도반과 친해졌습니다. 동네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만 돈을 끌어다 빌려주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도반은 부도를 내었고, 저는 제 빚에 더해서 저를 보고 돈을 빌려준 지인들의 빚까지 떠안아 순식간에 빚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업으로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던 저는, 자구책으로 식당을 하나 차려달라고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스스로 돈을 벌어서 빚을 갚아볼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왕 시작한 식당이고 어떻게 손님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식당이 되었습니다. 점점 식당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더 큰 가게 자리로 옮겨가게 되었고, 몸이 바빠진 만큼 빚은 줄어갔습니다.
빚을 갚고자 시작한 일이지만, 가게를 시작하면서 저는 한 가지 다짐한 일이 있었습니다. 매일 가게의 첫 번째 손님의 밥값은 모아서 좋은 일에 쓰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래서 카운터 앞에 저금통을 두고, 매일 첫 손님의 식대를 모았습니다.
저금통에 모인 돈은 처음부터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그 돈이 어디에 쓰여도 상관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소유 개념을 그때부터 어렴풋이 실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가게에서 주차 일을 하는 직원이 실수로 손님의 차를 긁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저 없이 저금통에 모인 돈으로 직원을 대신해서 배상했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도 서슴없이 기부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은 그저 필요한 곳에 쓰일 뿐’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식당은 어느새 어엿한 한정식집으로 모양을 갖춰갔습니다.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가 자식을 통해서 돌아올 때만큼 매서운 결과가 있을까 싶습니다. 첫째 아들은 어려서부터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대원외국어고등학교를 거쳐서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합격통지서를 받아 든 날, 아들을 그만 품에서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인이 된 만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그려보라는 생각으로 제 마음에서 아들을 놓아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제 생각과 달랐습니다. 아들에 대한 기대치가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높아져 갔습니다. 저 역시도 생각과는 다르게 아들에 대한 집착을 놓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영화 연출에 대한 꿈을 키워보고자 했습니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경험을 쌓아가던 중에, 지금의 며느리를 만났습니다. 며느리는 촬영장에서 분장 스태프로 일했는데 아들보다 4살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그런 며느리를 아들의 아내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에 강제로 아들을 등록시켜서 맞선을 보게 했는데, 착한 아이가 순순히 들어주는 듯했지만, 결국 맞선 자리에서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말로 아버지의 불같은 화를 키우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아들에게 부모와 여자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최후 통첩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렇게 아들은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자식은 결국 제 인생을 살아갈 테니, 곁에서 남편을 이해하는 마음을 내야겠다고 스스로 정리했으나 참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는데, 바로 20대 제 모습과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의 남편과 아들에게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내가 잘 살면 그게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미처 어머니의 마음을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남편 없이 갖은 고생으로 일궈낸 자식 농사가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아들을 통해 비싼 값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게 되었으니, ‘다 내가 지은 인연과보구나!’ 싶어집니다. 낳고 키워주신 감사한 마음을 잊고, 원망했던 어리석은 마음을 돌이켜 이제라도 참회할 수 있으니, 아들에게도 고맙습니다.
2011년 제 나이 60살에, 맹장수술을 하러 간 남편이 의료과실로 생을 달리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가게를 정리하고 세 아들과 함께 지내며 마음을 추스르다가, 2013년에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전법활동가 교육을 받고 행복학교의 돕는이 소임을 맡았지만, 컴퓨터를 다뤄야 하는 일이 부담스러워 곧 소임을 내려놓았습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정토사회문화회관 2층에 있는 환경제작방에서 재봉 일을 했습니다. 우연히 보리수 모집 공고를 봤는데,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한 마음에 방재실에 문의했더니, 그저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보리수 2기에 입재하고, 지금은 보리수 씨앗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보리수는 정토사회문화회관을 관리하는 일을,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해나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보리수 백일정진’이라는 수행 프로그램을 통해서 유수스님과 담당 법사님을 모시고, 소임과 일상 사이에서 자신을 점검하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백일정진을 앞두고 태국에 있는 둘째 아들이 도와달라고 내민 손을, 고민 끝에 거절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법사님 앞에 섰는데,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습니다’라는 명심문을 받았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무거워진 마음은, 사실은 내가 의지하고 싶어질 때 거절당하게 될 것을 염려한 내 안의 의지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또 다른 법사님은, 제 안의 교만심을 살펴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또한 평생 여자라는 굴레에서 당당하지 못하게 살아왔기에, 법사님이 오히려 제 말을 잘못 듣고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법사님이 내 말을 잘못 들었다고 짐작한 것이 ‘나는 절대로 교만한 사람이 아니다’ 하는,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을 방어하려는 교만함이 생긴 이치를 반 박자 늦게 알아갑니다.
늘 반 박자씩 늦게 알아가지만, 머무르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게 어딘가 싶습니다. 보리수 소임을 하면서 스스로 돌이킬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소임과 일상 가운데 늘 내 마음을 살펴서 자유로운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길 위에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습니다. 그동안 받은 도움을 이제는 되돌려서,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을 수행, 보시, 봉사하면서 잘 물든 단풍처럼 꽃보다 아름답게 그려나가고자 합니다.
글_김순혜(보리수 2기)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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