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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큰 시누이가 부산 KBS홀에 유명한 스님이 오니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폭우를 뚫고 찾아간 곳에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본 스님은 남다르고 특이했습니다. 질문자에게 때론 핀잔을 주고, 또한 직설적인 표현으로 대중의 폭소를 터트렸습니다. 그날 특별한 감동은 없었지만, 스님은 제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그 후 유튜브로 즉문즉설을 자주 듣고 남동생에게 권했습니다. 남동생은 이미 불교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평소 불안한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라며 제게도 불교대학을 추천했습니다. 저는 남편과 집 근처 절에 다녔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동생의 권유에 마음 내어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챙겼고, 동네에서 천리교 교회를 운영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철부지 아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니, 저를 지켜주던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진 기분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중학교 때 어머니마저 사고로 잃었습니다.
고아가 된 저와 남동생은 친척 집에서 살았습니다. 동생은 작은집, 저는 큰집으로 갔습니다. 큰집에서는 저를 돌봐줄 뿐 학교에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얼마 후 저는 큰집의 친척이 사는 부산으로 가 아이 돌보는 일과 가사 도우미를 했습니다. 그 집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정작 학교에 못 가는 저는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그 집 아저씨가 운영하는 신발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열여섯이었습니다.
저에겐 나이 차가 많은 언니가 있습니다. 언니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시집갔습니다. 언니는 동생들과 함께 살고 싶었지만, 시어머니를 모셔 쉽지 않았습니다. 2년 후, 제가 공장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데리러 왔습니다. 언니는 다시 학교에 갈 것을 권했지만, 그동안 공장에 다닌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기 싫어 계속 언니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학교가 아닌 마산의 수출자유지역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마음은 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할 일 없는 밤이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 조금씩 병이 들었습니다. '검정고시 준비를 할까?'라고 생각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작은집에 살던 고등학생 남동생이 '회비가 밀린 채 학교에 다닌다'라는 담임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언니가 곧장 동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형부는 무척 따뜻한 분으로 아버지처럼 우리 형제를 잘 챙겼습니다. 삼 남매가 함께 사는 그때가 참 행복했습니다.
언니 지인의 소개로 24살에 남편을 만났습니다. 눈빛이 따뜻한 첫인상에 반해 3월에 만나 10월에 결혼했습니다. 결혼 초부터 시골의 시댁을 오가며 두 집 살림했습니다. 결혼할 무렵, 중풍을 앓기 시작한 시어머니를 이십몇 년간 보살폈습니다. 아침에 눈 뜨면 시댁부터 찾아가 청소하고 빨래하고, 시어머니 운동 시키고, 소문난 한의원에 다녔습니다. 시어머니는 혼자서 씻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목욕하면 늘 진심 어린 눈빛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의지하던 시아버지마저 치매에 걸리자, 그때는 저도 무척 힘들었습니다. 자상하기 그지없던 시아버지가 시도 때도 없이 ‘벌컥, 벌컥’ 화를 내니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성을 다해 끝까지 보살폈습니다. 그런 저를 이웃 주민들이 효부상에 추천했습니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부끄러웠지만, 나의 정성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위로되고 감사했습니다.
눈 돌릴 틈도 없이 고되게 사는 중에도 마음 한구석은 학업에 대한 열망이 여전했습니다. 아이들과 시부모님까지 부양하면서 남편에게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틈틈이 다른 것을 배웠지만,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검정고시를 치고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소망을 이루었지만, 왠지 모를 마음속의 답답함과 우울함이 있었습니다.
원인 모를 마음의 병은 정토회를 다니면서 조금씩 치유되었습니다. 불교대학에서 스님의 가르침으로 불법을 배운 것은 기대만큼 좋았습니다. 불법의 이치를 배우고 날마다 정진하니 마음속에 자리한 것들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학습 후 나누기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순간순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는데, 그걸 말로 표현하려니 어려웠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아! 이건 이래서 이랬고 저건 저래서 저랬구나’라고 이치를 알 것 같았습니다. 막상 가르침을 나에게 적용해 표현하려고 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고 눈물부터 났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말은 못 하고 눈물로 대신했던 그때의 나누기가 저를 치유했습니다.
경전대학 졸업 후, 전법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졸업 후 일상으로 돌아가면 무언가에 끌려다녀 주춤거릴 것 같아 ‘이왕 시작한 거 계속 해 보자’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소임을 맡은 후, 저녁에 사람 만나고 싶은 유혹에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스님의 하루’를 보면서 저를 돌이켰습니다. ‘스님처럼 못해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모둠장 요청은 하기 싫은 마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싫다고 거절해도 마음은 여전히 불편할 것 같았습니다. ‘어떤 선택이든 둘 다 불편하면 도반들이 반기는 선택을 하자’라는 마음으로 모둠장을 맡았습니다.
모둠장은 예상했던 대로 힘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주변의 도반들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모르면 가르쳐 주고, '이걸 할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면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된다"라고 얘기해 주고,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있으면 도반들이 나서서 챙겨주었습니다. 오히려 모둠장인 제가 배려받았습니다. 주말이면 도반들과 으뜸절 죽림정사에서 정기적으로 봉사합니다. 봉사하면서 따뜻한 말과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돈 들여가는 여행보다 더 힐링합니다.
모둠장은 정토회 사무처에서 내려오는 여러 소식과 실천 과제, 불교대학과 행복학교 홍보, 각종 안내자료를 모둠원에게 알려야 합니다. 놓치지 않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르침의 내용을 알게 됩니다. 소금 장수가 소금을 나르면서 몸에 소금물이 배이듯 매일 불법을 실어 나르니 어느새 제 몸에도 불법의 향기가 스며듭니다. 집에서 쉬거나 다른 일상이라면 이런 경험은 힘들었을 겁니다.
저는 군청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조리사입니다. 식당 일을 직장 언니와 둘이 합니다. 일이 많고 힘들면 언니에게 화가 올라와 한동안 말하지 않거나 쌓인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시작하고 백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식단의 메뉴는 많고 조리 과정도 복잡했습니다. 정신없이 일하면서 손발이 맞지 않는 언니에게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짜증이 났습니다. 설거지하며 짜증을 마구 냈습니다. 그러다 순간 짜증 내는 내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마치 나를 또 다른 내가 지켜보는 느낌이었는데,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내게 이런 못된 구석이 있구나.’ 저를 볼 수 있는 이러한 알아차림은 그동안 꾸준히 했던 천일결사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수행하면서 내 업식의 뿌리를 알았습니다. 어릴 적 걸핏하면 짜증 내던 엄마 모습 그대로 제가 하고 있었습니다. 걸핏하면 짜증 내어 딸과 자주 부딪혔습니다. 딸도 제 업식을 닮아 서로가 불편했습니다. 딸은 저의 권유로 불교대학에 다닙니다. 그 덕분인지 요즘 딸의 말엔 저를 향한 존중이 있습니다. 저와 딸이 도반이 된 은혜! 그저 부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제 수행의 거울은 <스님의 하루>입니다. 하기 싫을 때는 '스님의 천 분의 일이라도 따라서 하자'라고 마음을 내고, 하고 싶을 때는 스님과 함께 가는 제 모습을 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불교대학에 다니는 딸에게 말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업식을 바꾸기 힘들다. 엄마가 그랬다. 너는 엄마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시작했으니, 참 좋은 일이 아니냐. 아무렇게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지만, 업식을 바꾸면 첫째 너에게 좋고 다음은 네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좋다.”
아들이 어릴 적 암으로 치료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저의 모든 것을 걸고 아들을 살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아들에게 집착이 강했습니다. 건강에 조금만 이상한 징후가 보여도 과민반응했습니다. 이제는 공무원이 되어 지방에 사는 아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기주장이 강해졌습니다.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고 "이래라저래라"하니 어느 날은 정색하고 말했습니다.
“엄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이제 제게 그만 신경 쓰고 엄마 건강이나 챙기면서 사세요.” 그 순간 너무 서운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낳은 자식도 스무 살이 넘으면 지 인생은 지꺼다.’라는 법문을 들으며 아들에 대한 집착을 놓는 연습을 했습니다. 이제는 아들이 서운한 말을 해도 예전만큼 서운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내 고집대로 따르지 않으면 들들 볶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남편도 나의 이런 점이 참 싫었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나에게 짜증도 내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면서 살아온 남편에게 새삼 고맙습니다. 정토회가 없었다면 제게 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작지만 큰 변화입니다.
저는 하기 싫음이 많은 사람입니다. 처음 천일결사 입재 후, 백일 동안은 '하기 싫다'라는 생각이 자주 올라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님의 ⟪기도⟫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책 속에는 제가 하기 싫은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아 있으니까 그냥 하면 된다.’
백팔 배를 하면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에너지가 솟았습니다. 정일사 때 하는 삼백 배는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안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도반들과 공동 정진을 하니 더욱 좋습니다. 제가 정토회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간지러움이 사라지면 긁는 것이 싫어진다. 수행도 간절함이 사라지면 하기 싫을 때가 찾아온다.'라는 내용이 와닿았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새벽 2, 3시에 잠들어도 새벽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 날은 회사에서도 무척 피곤했습니다. 그래도 “피곤하다는 생각 때문에 더 피곤한 것”이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한번은 어깨 수술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실이 좁아 비상계단에서 수건 한 장 깔고 절했습니다. 코로나에 걸렸어도 수행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백팔 배하는 그 순간은 정말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하니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도해야 오히려 아픈 몸이 낫는 것 같습니다. 수행하기 싫은 순간이 있지만, '하고 싶을 때 하는 수행보다 하기 싫을 때 하는 수행이 훨씬 더 나를 단단하게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수행 목표 중 하나는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입니다. 지난 시절 나의 우울함은 내 과거를 문제 삼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일이든 현재 일이든 일어날 만했기에 일어난 일이고 문제 삼을수록 문제가 더 커진다'라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수행하지 않는다면 저는 또다시 과거를 문제 삼을 것입니다. 꾸준한 수행이 따라야 늘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만족하고 수행을 멈춘다면 우울했던 과거의 감정 속에 다시 빠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살기 위해 수행합니다.
박신영 님과 인터뷰 후, 기대보다 기삿거리가 없을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녹취 본을 정리하며 박신영 님의 수행담에 집중하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박신영 님의 수행 의지도 감동이었고, 평범한 일상을 가르침 대로 사는 박신영 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최근 바쁘다는 핑계로 좋아하는 죽림정사 안내 봉사에 불참하려 했습니다. 박신영 님의 수행담을 정리하며 저를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불참햐려 했던 죽림정사 봉사를 다녀오고 느슨했던 공동 정진도 다시 고삐를 잡아 쥐었습니다. "도반이 스승이다." 희망리포터를 하면서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새벽마다 공동 정진 방에서 박신영 님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배병갑 희망리포터(경남지부 거제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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