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막다른 길이 아닌 새로운 길, 백일출가

김서인 님의 백일출가 수행담은 <월간정토> 지면에서 읽었을 때도 참 먹먹했는데, 온라인으로 옮기면서 다시 읽어보니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상처투성이 소녀가 수행을 하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감정의 파고가 높아지다가 뒷부분에서는 아주 훈훈하게 마무리 되어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자, 심호흡 한 번 하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보시죠.

나는 꼭 태어나야만 했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아버지가 때때로 술을 먹고 와서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할머니까지 때리던 모습을 봤던 때부터였나? 아니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새어머니와 살았을 때 나를 미워하던 새어머니가 내 머리채를 잡고 아파트 옥상까지 끌고 올라가 여기서 떨어져 죽으라고 소리치던 때였을까? 3살 때 가출했던 생모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찾아와 ‘너는 낙태하려고 했던 아이였다’고 말해주고 다시 연락을 끊었던 때였을까?

잘 모르겠다. 죽은 듯 꾸역꾸역 살아내던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진로를 찾아 눈을 반짝이던 친구들과는 달리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버린 나는 인생에 대한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깊이 원망하면서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적당히 살다 빨리 죽고 싶다는 소망뿐이었다.

고라니 밭에서(김서인 님)
▲ 고라니 밭에서(김서인 님)

감추고, 억누르고, 학대하고

내가 참 싫었다.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나를 괴롭혔다. 가정환경을 비롯한 나의 외모, 성격 등 모든 것이 싫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도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나를 감추기에 급급하면서 점점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어려웠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더욱 그랬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라든지 ‘로봇 같다’, ‘다가가기 힘들고 불편하다’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거의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스로 고립시키고 ‘나는 못났고 쓸모없다’라면서 학대했다.

그러니 삶이 답답했던 것 같다. 내가 가진 감정이나 의견은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표현하면 안 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한마디라도 말하려고 하면 목구멍에 말이 턱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하나둘 쌓여가면서 나를 짓눌렀다.

깃털처럼

시작은 <스님의 주례사>라는 책이었다. 단숨에 읽어내렸다. 참 희한한 스님도 다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다. 유튜브에서 스님의 즉문즉설을 찾아보면서 법륜스님과 정토회를 알게 되었다.

특히 즉문즉설에서 어떤 고민도 가볍게 답하시는 법륜스님의 태도는 무척이나 신선했다. 나에게 삶이란 한없이 무겁고 괴롭기만 한데, 스님은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워 보였다. 어떻게 저 스님은 저렇게 표정이 밝으실까?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기대감을 품고 지인의 소개로 불교대학에 갔고 깨달음의 장도 마쳤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큰 변화는 느끼지 못했다. 수업이나 수련에 참여하면서 그 순간에는 막연히 좋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대체로 심드렁했다. 여전히 내 눈앞의 삶은 무겁고 답답하고, 괴로웠다.

배수의 진, 백일출가

불현듯 위기감이 찾아왔다.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투명 인간처럼 살금살금 살다 조용히 죽자는 목표를 두며 사는 내가 답답하고 지긋지긋했다. ‘살고 싶지 않다’와 ‘살고 싶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마음을 끌어안고 하루하루 외줄타기하는 심정이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막연하지만 강하게 들었다.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백일출가’라는 프로그램은 알고 있었다. 당시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으나 호기심은 있었다. ‘도대체 100일 동안이나 절에서 뭘 하는 걸까?’ 하는 궁금함이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3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백일출가의 문을 두드렸다. 혼자서 틀어박힌 생활을 하던 내가 낯선 곳에서 처음 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하는 두려움은 매우 컸다. 하지만 물병의 물이 차올라 넘칠 듯한 심정으로 위태롭게 지내던 당시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백일출가 41기에 입방하게 되었다.

공양간에서(오른쪽 뒷줄이 김서인 님)
▲ 공양간에서(오른쪽 뒷줄이 김서인 님)

‘아버지가 참 외로웠겠습니다’

입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법사님께 기도문을 받았다. ‘아버지가 참 외로웠겠습니다’였다. 반발심이 강하게 들었다. ‘힘들고 외로운 건 나였고, 가장 불쌍한 사람도 나였고, 그러니까 동정받아 마땅한 사람은 나인데 아버지가 외로웠겠다니? 말도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한 짓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과거 비디오가 자동 재생되면서 마음을 어지럽혔다. 기도문에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싶은 정도였다. 하지만 몸부림치면서 고통스럽게 만 배를 한 것이 아까워 차마 박차고 나가지는 못했다.

사실은 아직도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극복하기 힘들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돌이켜보니 ‘나의 아버지’로서가 아닌 힘든 삶을 산 한 사람으로서는 이해되는 면이 분명히 있다. 아버지도 할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서 여기저기 애정을 갈구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아버지는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던 상황이 괴로웠을 것 같다.

그래도 딸이라고 내가 사는 집에 생활비도 보내줬었고, 서울로 데리고 가서 새어머니와 함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주려 했었다. 그런 일들이 단지 아버지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내 뜻대로 안 되면 답답하고 괴롭듯이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으로 똘똘 뭉쳐서 바늘 끝도 안 들어갈 정도로 내 마음은 꽉 막혀 있었다.

핑계꾼

몰랐는데 나는 참 핑계를 잘 대는 인간이었다. 백일출가 기간 내내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을 무기처럼 휘둘렀다. 도반들에게 ‘나는 가정환경이 불행했으니까, 몸이 아프니까, 가족도 없는 불쌍한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나에게 불리한 말이나 상황은 만들지 마!’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내던졌다. 사실 나는 내가 그런 줄도 몰랐다.

법사님이 지나가듯 하신 ‘서인 행자는 핑계를 잘 댄다’라는 말씀에 따끔한 침을 맞은 듯했다. ‘아, 정말 내가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불행의 서사를 펼치면서 내가 불행한 이유, 내가 동정받아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냈다. 이제껏 그런 쓰레기 같은 조각들을 모아 높은 담을 쌓거나 남에게 내던지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밤송이 인간

나는 아마도 백일출가 우리 기수에서 빌런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백일출가 기간 내내 밤송이같이 도반들을 찔러대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싫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들도 나를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도반의 모습에 아버지를 투영시켜 무척 미워하기도 했고, 남자에 대한 적대감을 남자 도반들에게 표현하기도 했다. 일은 못 하면서 욕심만 잔뜩 부리고, 일 잘하는 도반들을 질투했다. 나누기를 솔직하게 했을 뿐이라고 우겼지만, 지나고 나니 그것은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함이었다.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나를 위로해 주고 다독거려주는 도반들에게도 나를 동정하느냐고 비난하고 공격적으로 굴었다. 당시 고라니 밭에는 밤송이가 여기저기 묻혀 있어 농사일 수행을 할 때마다 손을 찔리곤 했는데,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그 밤송이처럼 나는 도반들을 무차별적으로 찔러대고 있었다.

두북 수련원에서 도반들과(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서인 님)
▲ 두북 수련원에서 도반들과(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서인 님)

나에게 도반이란

변명을 하자면, 그것은 나에겐 절실하게 필요한 과정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은 항상 나에겐 공포였다. 그렇게 하면 생모가 나를 버렸듯,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백일출가에 참여하는 동안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가능한 만큼 나를 드러내보는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드러내기가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계속 나를 드러내고 성질을 부리면서 나의 꼬락서니를 보려고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를 표현해도 내가 염려하는 만큼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굉장히 미움만 받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때로는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점점 마음이 열렸다. 그러면서 내가 조금씩 보였다. 나는 참 극단적이었다. 마음을 닫고 숨어버리거나 공격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이 없었다면 그런 내 모습을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부하는 기간 내내 도반들은 인내심 있게 나를 참아주고, 배려해 주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도반들은 내게서 엿보이는 어떤 절박함을 느끼며, 밤송이 인간 같은 나를 자비의 마음으로 참아준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도반들은 은인과 같다.

한낱 이벤트로 치부해버리기엔, 너무 특별한 백일

수련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법사님은 ‘이곳에서 생활하고 느꼈던 시간을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이벤트로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문경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벗 삼아 도반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부대끼고, 울고 웃으며 공부했던 그 백일은 나에게 너무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것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여기고, 어둡고 위태롭던 예전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실천 장소에서 봉사를 하거나 전법활동가로서 불교대 진행자 소임을 맡으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한 달에 한 번 백일출가 도반들이 문경에서 모여 정진, 일수행을 하는 파견 복귀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아버지가 참 외로웠겠습니다’라는 숙제와 같은 기도문을 풀어나가는 개인 정진의 시간을 가진다. 수련, 만배바라지 등 바라지장에도 참여하며 다양한 도반들과 함께하였다. 특히 수련 바라지장에 연속으로 참여하면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살면서 줄곧 ‘사람들이 싫고, 혼자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큰 소득이었다. 내가 나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회향 문화제(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서인 님)
▲ 회향 문화제(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서인 님)

새로운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괴로움은 수시로 올라온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많다. 하지만 자책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럴 수도 있지’하며 나를 다독인다. 또한 내가 괴로워하는 것의 대부분은 그 실체가 불분명하고 과대평가 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여전하다. 하지만 ‘나의 부모’라는 집착의 끈을 느슨히 하고, 부모님을 약하고 힘들었던 한 존재로서 바라보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에 대한 긍정성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겪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이런저런 일들이 내 인생에서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한때는 그런 일들의 부정적인 면에만 집착하며 나에게도 있었던 긍정적인 일들, 나에게 호의를 보였던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려고 하지 않았다. 망상에 빠져 두터운 피해의식으로 마음을 꾹 닫아버린 시간이 참 길었다. 배수의 진을 치는 비장한 심정으로, 막다른 길이라고 여기며 입재한 백일출가였다. 하지만 막다른 길이 아니었고, 비장할 필요도 없었다. 나에게 백일출가는 앞으로의 삶을 조금 더 낙관하며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만약 자기 삶에서 막다른 길이라고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거나 자기 변화가 절실한 사람이 있다면 백일출가에 참여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물론 나의 경험이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자기의 모습을 직시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진다면 지금과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본 스님의 천진난만하고 환한 미소가 참으로 눈부시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지만, 그때는 방법을 몰랐다. 백일출가 속에서 치열하게 나를 드러내보는 연습이 필요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나의 연습 과제가 되었다.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스님처럼, 부처님처럼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전해진 뿌리 깊은 외로움도 녹여버릴 만큼 환하게 웃을 날이 틀림없이 올 것이다. 더 이상 핑계를 댈 필요는 없다. 이미 나는 그것이 가능한 새로운 길을 따라가고 있다.


이 글은 <월간정토> 2023년 8월호에 수록된 백일출가 41기 김서인 님의 수행담입니다.

글_김서인(백일출가 41기)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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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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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자

수행담 감사합니다
저는 약하지만 예전의 내 마음, 지금의 내 마음 같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수도 있지 이럴 수도 있지
가볍게 행복하게 삽니다

2024-04-01 06:49:14

양승철

삶의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용기 내어, 스스로 체험하는 삶을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글을 읽으면서 내내 참으로 삶의 업식은 다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냅니다. 앞으로 조금씩 삶의 행복을 한 발 자 국 씩 건너가는 길이 훤히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2024-03-28 17:51:17

큰바다

님께서 환하게 웃을 그날이
머지 않아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아픈 마음, 귀한 경험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24-03-11 14:5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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