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어릴 적 부처님 오신 날이면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갔습니다. 어머니가 알려주는 대로 3배를 하기도 하고 7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익숙함에 종교가 뭐냐 물어보면 자연스럽게 불교라고 했습니다. 대학교 때는 월정사에서 2박 3일이나 3박 4일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월정사에서 머리를 깎고 들어가는 한 달 단기 출가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나중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20대 중반에 교통사고로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얼 하며 살아야 하지? 이전에 '열정 페이(정당한 대가를 지불해 주지 않으면서 열정만을 요구한다는 뜻)'로 했던 일이 정말 내가 원하던 일인가?'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퇴원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던 중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과 함께 삶의 전환점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때 단기 출가 프로그램이 생각나 인터넷으로 찾아보았고, 검색화면 맨 위에서 정토회 백일출가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한 달보다 백 일이 더 좋아 정토회 홈페이지로 들어갔더니 그날이 마감일이었습니다. 고민없이 바로 신청했습니다.
사회 초년생이 겪을 법한 연애나 진로에 대한 고민이라 지금 생각해 보면 배부른 고민이지만, 당시엔 크게 느껴졌습니다. 이전까지는 정토회나 법륜스님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깨달음의장〉수료와 백일 출가를 통해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았습니다. 남자친구 때문에 괴로웠던 마음은 금방 없어졌고, 젊은이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부모님에 대해 쌓였던 감정이나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제는 괜찮다 싶었습니다.
유수스님께서 행자 대학원을 추천해 주시면서 3년 더 지내보라고 하셨지만,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딱 3년이 지나자 다시 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잘 먹고 잘 자던 제가 직장 상사와의 갈등으로 거의 매일 체하고 잠꼬대도 했습니다. 내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불교대학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백일 출가 후 3년 만인 2015년에 봄 불교대학을 등록하였습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며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프리랜서로 몇 년 일한 후 들어간 직장이었지만, 회사가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동북아 역사 대장정〉을 다녀왔습니다. 아마 불교대학 덕분에 제2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불사팀 봉사와 역사 공부 그리고 마음공부를 하며 편하게 지냈습니다. 그때 예기치 않게 새로운 직장 제의를 받았고, 하나를 내려놓으면 다른 기회가 오는구나 싶었습니다.
불교대학을 마치고 불교대학 담당 소임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해 9차 천일 결사를 시작하며 서울제주지부 선임팀장 소임을 맡았고, 10차 천일 결사에서 지부장 소임을 맡았습니다. 정토회 소임과 직장을 병행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정토회 관련해 소통할 것이 많아 전화도 많이 오고, 근무 중 텔레그램을 할 때는 눈치가 보였습니다. 심지어 회사 대표와 회의 중 졸기도 하였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기 전 한 달을 고민했습니다. 법사님과 상담도 하고 혼자 생각하기도 했지만, 눈물만 나고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전에는 '또 일할 거 없겠어?'라며 가볍게 그만두고 필요하면 바로 다시 직장을 구했는데, 10차 때 다니던 직장은 30대의 첫 정규직 직장일 뿐 아니라 맡은 분야나 보수, 복지, 심지어 직장동료들까지 좋았기에 그만두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직장에서 하는 일이 회사 구성원들에게는 도움되는 일이었지만, 세상에는 도움되는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일 많은 돈을 받았던 직장이고, 그만두면 경력 단절이 되는데 이렇게 쉽게 그만두는 것이 맞는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만두는 결정은 정말 한순간이었습니다. 그 한순간 탁 알아차리니 이렇게 좋은 정토회에서 활동하는데 회사를 바로 그만두지 못하고 고민하는 제가 보였습니다. 다른 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어서 가볍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니, 세속적인 것을 가볍고 또 멋있게 내려놓지 못하는 나에 대한 답답함이 제일 컸습니다. 제 업식은 저에 대한 상이 지나치게 높은 것입니다. 제가 정해 놓은 기준에 맞게 멋있는 사람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 답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회사도 그만두고 활동하는 게 대단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온라인 화면에서는 밝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스스로 미진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청년특별지부장 소임을 처음 제안 받았을 때는 담담하고 편안했습니다. 〈동북아 역사 대장정〉에 참여해 청년들과 함께 으쌰으쌰 하거나, 역사 기행 등 다양한 활동에 대한 부푼 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임을 맡고 곧이어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해 현장 활동이 전면 중지되었고 온라인 실무가 많아졌습니다.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계속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소임 시작할 때 마음과 달리 답답하고 처지는 마음이었고, 몸 상태가 안 좋은 때도 많았습니다.
뭘 해야 할지 잘 모르면서도 새롭게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상으로 재밌고 활기차게 활동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계속 가라앉았습니다.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청년들과 재미있게 활동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데 매일 컴퓨터 앞에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년들이 너무 방치되고 있는 것 같아 무언가를 해야겠는데 그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습니다.
정토회 청년특별지부의 장(長)이었기에 누구보다 행복해야 하고, 정진도 열심히 해야 하고, 원력도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실제와 이상의 차이 때문에 힘들었고 자책도 했습니다. 왕좌에 앉은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봐야 할 문서도 많고 회의도 많았습니다. 소임을 편안하고 가볍게 수행자의 관점에서 하지 않고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일에 집착하니 소임이 무거운 무게로 느껴졌습니다. 진짜로 일로 했습니다. 밀려드는 일정으로 나누기나 정담회 등 도반들의 마음을 챙기는 것들을 미루고 일을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저 스스로도 채근하고 다른 사람들도 채근하였습니다. 엄한 아버지 같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청년특별지부장 소임 전에는 자책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소임이 많아지니 부딪히는 지점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경계에 부딪힐수록 제 모습을 볼 기회는 더 많아지고 공부거리가 더 생겼습니다. 공부를 해보니,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상이 높았기 때문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제가 편안하지 않으니, 최선을 다해 잘 하고 있는 도반들에게 분별심이 나기도 했습니다.
일도 중요하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을 더 믿고 더 맡기고 좀 더 살펴주며 같이 어울려 잘 노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모든 일이 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도반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또 나를 사랑해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2022년부터 현장 활동이 조금씩 시작되었습니다. 저 스스로는 활동이 미진하다고 생각했지만, 전체를 되돌아보면 발전하였습니다. 온라인 시작할 때보다 활동가들의 수가 조금은 늘어 소임을 마치는 지금, 홀가분한 마음입니다.
김나영 도반은 못했다고 지적받으면 받는 대로, 모르면 도와달라 물어가며 주어진 소임을 가볍게 그냥 하는 것이 수행과제라고 합니다. 또 힘들면 도반을 믿고 솔직하게 내어 놓고 함께 활동하는 것도 수행과제라고 말합니다. 저도 이것을 저의 수행과제로 하려 합니다. 정토회 청년 도반들과 함께한 붓다하우스 4년의 공동체 생활에 관해 물었습니다. 공동체 생활은 건강한 긴장감과 함께 서로 맞춰가는 법을 배움으로써 자신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합니다. 이미 남편, 아이들과 30년 넘게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답변이었습니다. 저를 일깨우는 모든 이가 스승입니다. 고맙습니다.
글_최미영 희망리포터(국제지부 아태지회)
편집_이혜수(서울제주지부 성동지회)
전체댓글 37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청년특별지부’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