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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2005년 처음 정토회에 온 고경녀 님. 지금은 죽림정사 큰일을 척척 해냅니다. 그 와중에도 편찮은 어머니를 뵈러 의령 시댁으로 동분서주합니다. 한때는 내가 한 일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말이 무색하게 불교대학에서 느낀 환희심과 꾸준한 새벽 정진의 힘으로 어떤 일이든 내가 좋아서 그냥 했을 뿐이라며 별일 아닌 듯 말합니다. 그 활약이 대단했던 고경녀 님의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사회는 왜 이렇게 부조리할까?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약자, 도시 빈민 문제에 관심이 있던 저는 고등학교 때 YMCA에서 농아를 위한 봉사를 했습니다.
수화를 배우고, 공연과 일일 찻집으로 생긴 수익금을 후원하고, 졸업 후에는 농아의 고교진학을 위한 장학금 모금 활동도 했습니다. 평소 불교와 사회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두 개가 양립하여 함께 가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불교는 항상 '중생을 구제하라'고 하는데 제가 본 불교는 산속에만 있고 스님들은 명상만 하는 것 같아서 불만이었습니다.
2002년 남편 따라 30년 살던 고향 제주도를 떠나 마산으로 이사 왔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 산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부부는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6개월의 월말 부부 생활을 접고 올라왔지만, 무척 외로웠습니다. 남매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던 중 언니가 1년간 정기구독해 준 정토지를 통해 정토회를 알았습니다.
평소 생각했던 이상 세계가 정토지 안에 있었습니다. ‘내가 바라던, 늘 생각하고 꿈꾸던 곳이구나! 나와 찰떡궁합이다.’라는 생각에 마산 정토회에 전화했습니다. 당시 직장인으로 토요일 만 시간이 되어 법당에 가면 항상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20년 전에는 활동가가 많지 않아 주말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얼마 후 저녁반이 생겨 퇴근 후 수행법회에 참여했습니다.
직장과 거리가 멀어 힘들었지만, 수행법회에 가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6개월 후 불교대학 주간 반에 입학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저의 고지식한 면이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깨지는 것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불교대학 시절을 떠올리면 울컥하고 눈물이 납니다. 정말 ‘환희롭다’는 단어 그대로 너무 좋았고 자신도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습니다.
불교대학 재학 동안 매일 법당에 갔습니다. 도반들의 권유로 100일 동안 사시예불도 맡아서 했습니다. 당시 참여하는 사람이 없어 재미를 잃고 100일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돌아보면 ‘혼자라도 기도에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꾸준히 할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 부족하고 욕심이 많아서 잘하고 싶고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늘 앞섰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말이 무뚝뚝해 상처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부드럽게 대화하는 사람들이 부러워 그렇게 변하고 싶었습니다. "백일기도 하면 나를 알고 천일기도 하면 내가 바뀐다."는 스님의 말씀에 '새로운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00일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저는 늘 그 자리로 더 짜증이 나고 자책했습니다.
그러던 중 스님 법문에서 못과 솜에 관한 내용이 와닿았습니다. '늘 솜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그냥 못이구나! 못은 솜이 될 수 없지만, 못은 못으로의 역할과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스스로를 밀어내는 마음이 풀어지면서 편안했습니다. 드디어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게 되었구나' 싶어 좋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의 알아차림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다시 올라오는 자신의 부정성에 ‘나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걸까?’ 생각하며 계속 정진했습니다. 이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온전히 압니다.
정토회를 다니면서 남편과 십여 년 넘게 매일 싸웠습니다. 남편은 밥도 안 주고, 늦게까지 돌아다닌다고 불평하고, 저는 '자기가 해 먹으면 되지. 그거 하나 이해 못 하냐?'며 맞섰습니다. 저도 나름 할 만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숙이지 않으니, 갈등이 심했습니다. 낮에는 스님의 강연과 외부 활동에 참여한다고 나가고, 밤늦게는 집에 와 새벽까지 스님 법문 녹취록을 들으며 받아 적고 있으니, 남편이 싫어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 내 재미에 빠져 남편이 힘들다, 외롭다고 할 때 그 마음을 받아주며 같이 있지 못한 점이 미안했습니다. 남편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죽자 살자 다니니 "조심하라" 하고, 행복학교 진행할 때는 자동차도 바꿔줬습니다. 며칠 전엔 의령으로 이사했는데, 남편이 “이젠 여기에 사람들 데려와 명상도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합니다. 정토회 활동을 못 하게 하는 남편을 '마구니'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묵묵히 지지해 주는 훌륭한 지원자였습니다.
남편은 이제 동반자입니다. 저는 수행자의 길을 가고 남편도 같이 가는 것 같습니다. 휴대전화에 ‘부처님입니다’로 저장했던 남편을 ‘동반자’로 바꿨습니다. 가끔 남편이 짜증을 내도 ‘남편 마음이 그렇구나.’ 하고 편안하게 볼 수 있습니다. 숙인다는 것은 상대에게 엎드려 절하고,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줄 알고 마음을 받아주고 함께 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아이들에게 참 고맙습니다. 20년 전 퇴근 후 남매를 데리고 저녁 수행법회에 다녔습니다. 법회가 끝나면 9시가 넘었지만, 택시비가 아까워 아이들과 버스를 탔습니다. 잠에 취해 눈 못 뜨는 아이들을 깨우면서 조금 전 좋은 법문을 듣고도 짜증 내는 내 모습을 봤습니다. 그때의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유치원 때부터 함께 한 수행법회, JTS 거리모금, 빈 그릇 운동, 경주남산순례, 동북아역사기행 등의 여러 가지 봉사와 활동을 통해 아이들도 저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엄마의 열렬한 정토회 활동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앞가림을 잘하는 독립적인 성인이 된 아이들 역시 최고의 지원자입니다.
저는 대학을 못 가선지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학원을 끊임없이 다녔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직장을 다니면서도 출근 전에 어학원, 퇴근 후에 미용과 요리학원을 다녔습니다. 쉬지 않고 뭔가를 배우고, 나를 개발할 수 있는 걸 찾았지만 한 가지를 오래 못했습니다. 그런 제가 정토회를 다니면서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싹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정토회에 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사회도, 진행도, 기획도, 마음껏 뭔가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학원에서 배움의 갈증을 해소하는 대신 정토회에서 신나게 활동했습니다. 환경담당, 법당총무, 불교대학 담당, 행복학교 진행, 통일특별위원회 구역장, 모둠장, 지부장 등 다양한 소임을 거쳐 지금은 죽림정사 실행위원장 역할을 하면서 전국 보리수 회의 진행도 하고 있습니다. 경전대학 때 창원 컨벤션센터에서 빈 그릇운동 홍보 캠페인이 열렸습니다. 직장 다니며 처음 맡은 환경담당 소임에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서명도 받고, 자료를 만들어 빈 그릇 운동 강사로도 활동했습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300강 강연 이후 전국적으로 법당을 개설하던 시기엔 신바람이 났습니다. 경남에서 열린 강연 중 두 곳을 제외하고 후속 강좌가 열리고 법당도 만들어졌습니다. 보람 있고 뿌듯했습니다. 법당 청소나 관리를 활동가가 아니라 그날 법회 참석자, 학생들이 수업 끝나고 구역과 역할을 나누어 같이 청소하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도반들과 함께 나누어 하니 법당 관리도 수월하고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역설적인 일화도 생각납니다. 정토회 환경 소임을 맡고 평소에도 환경에 관심이 많아 가족들의 옷을 3벌로 매일 빨아 입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즉문즉설 300강을 하면서 집을 자주 비우니 빨래를 제때 못해 가족들의 속옷과 양말을 여벌로 많이 사 짐이 늘었던 어이없이 웃긴 일도 있었습니다.
행복학교를 진행하는 동안은 활동하면서 사람들과 부딪힌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법사님이 "사람을 봐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보였는데 과정이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행복학교 프로그램 기본 틀을 만들기 위해 스님 법문과 EBS 프로그램도 열심히 찾고, 한 달에 한두 번 서울로 회의도 다녔습니다. 행복학교 소통 채널로 텔레그램을 이용하자는 제안도 하고, 카페나 공공장소 등 모임 장소 찾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에 정토회는 제게 직장과 같았습니다. 일을 맡으면 '책임감 있게 해야 하고 성과도 어느 정도 나와야 한다.'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봉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에 상대에게도 그렇게 요구했습니다. 제가 불교대학 다닐 무렵은 대중이 주체가 되어 조직이 꾸려지는 시기로 도반들과 함께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런 마음이 활동할 때도 여지없이 드러나 도반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회사도 아닌데 직장 상사가 하듯 이래라저래라 시키느냐."는 도반들의 불만과 툭툭 던지는 말투에 상처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너나 나나 똑같은 봉사자인데 내 마음 같지 않은 도반에게 분별심이 났습니다. ‘이제 말하지 말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 자책도 했습니다. 그런 날들에 멈춤 없이 지금에 이르니 많은 것이 이해되고 그만큼 편안합니다. 20년 동안 꾸준히 봉사와 수행할 수 있었던 모든 날과 인연에 감사합니다.
이사한 지 3일째 날, 인터뷰하느라 부산스럽고 분주했을 텐데, 담담히 인터뷰하는 여유로운 모습에서 20년 차 수행자의 내공이 느껴졌습니다. 귀촌한 의령 집에서 든든한 남편의 외조를 받으며 도반들과 명상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늘 새로운 역할을 맡아 멋지게 해내는 고경녀 님의 활약을 응원합니다!!
글_손해경 희망리포터(대전충청지부 충주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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