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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는 총무님을 비롯한 모든 활동가들께 전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총무의 역할이 뭐지? 일을 전혀 모르는 나에게 왜 이 소임이 주어졌을까? 내가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인가?' 이런 고민이 있다면 오늘 이야기를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장사를 접은 후 돈이 없어 찬거리를 살 수 없었습니다. 저녁때쯤 시장에 가면 야채 껍질을 벗겨 놓은 시래기가 있었습니다. 그걸 주워 와서 삶고, 볶아서 아이들 도시락 반찬도 챙겨주고, 국도 끓여 먹고, 그렇게 돈은 벌지 않고 최소한의 경비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은 자재법사님이 제 삼보수호비 내역을 보시더니 6개월 정도 대신 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모든 걸 다 내려놓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무슨 남자가 사업을 망하냐' 이것에 꽂혀서 아무것도 안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괴로우니까 정토회를 휘젓고 다니면서 몸을 혹사하고 그래도 안되면 절을 막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안정 되어가는 걸 느꼈습니다.
어느 날 큰딸이
"엄마, 오늘은 정토회 좀 늦게 가고 아빠를 좀 봐."
"왜?"
"하여튼 좀 늦게 가 봐."
"알았어."
내가 정토회 갈 시간인데 안 나가니까 남편이 자꾸 나가라며 재촉했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은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회사 연구원으로 있다가 회사 CEO 였는데, 겨우 아파트 경비원이 된 것에 저는 또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남편이 불쌍하기도 하고, 내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어 울고불고 난리를 쳤습니다. 스님께 가서 물었더니
"보살님이 수행하러 다니더니 수행자는 집에 계시네." 하셨습니다.
그 힘든 시기에도 정토회 봉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타계하신 변정법사님과 법당에서 재를 진행한 지 3년쯤 지난 2003년에 서울정토회 총무부장이 되었습니다. 재만 지냈지 회의에 들어가 본 적도 없고, 회계고 뭐고 일 자체를 몰랐습니다. 중앙사무국(지금의 행정처)에서 하는 회의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몰라서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총무가 되니 회의 진행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회의 때 한 마디 하면, 사람들이 ‘모르면 제발 가만히 계세요.’ 그랬습니다. 몰라도 너무 모르니까 상대도 너무 답답해서 그랬겠지만 그때는 서러워서 화장실에 가서 울었습니다. 울고 오면 회의가 끝났을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 2층에 유수스님이 계셨는데, 유수스님한테 가서 힘들다고 울면 스님은 다 받아주셨습니다.
그게 한 달 지나고, 일 년 지나고 하니까 스님이 "총무님, 총무님 일 못 하는 거 정토 사람 다 알아요. 총무님만 몰라요."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근데 왜 나에게 총무를 시켰어요?" 했더니 “총무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다 다이아몬드예요. 다이아몬드는 낱개로 보면 빛이 나는데 뭉쳐지지가 않아요. 보살님의 역할은 아우르기만 하면 되는데 뭘 하려고 버둥거려요.” 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을 듣고 그 후로는 회의 진행을 안 했습니다.
회의 진행은 잘하는 팀원들에게 맡기고 함께 회의를 하는데, 그게 또 기분이 나빴습니다. '내가 회의를 알아서 진행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왜 기분이 나쁘지?'라는 생각에 회의 내내 집중을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 "아휴, 총무님이 하시죠." 이 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유수스님께 쫓아가서 이래저래 이야기를 쭉 했더니 스님이 "아이고, 욕심은 많아 가지고..." 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제가 "저 보살 때문에 너무 힘들다. 저 사람만 없으면 총무 하겠다."고 그랬더니 픽 웃으시면서, "그러면 그 보살이 없는 부산으로 이사를 가세요." 하셨습니다. 지금 상대가 그 보살일 뿐이지, 부산으로 가도 제2의 그 보살, 제3의 그 보살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울며 불며 봉사하면서 내 업식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어려웠습니다. 제가 말만하면 사람들이 그거 아니다, 틀렸다 하니 정토회에 가기 싫어서 날 밝는 것이 싫을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변정법사님께서 “허보살이 있으면 정토회가 망한다.” 하는 소리를 듣고 또 얼마나 울고불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만히 관찰해보니 변정법사님께서는 편안한 사람한테만 그러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뒤에서 법사님을 딱 끌어안으면서 "법사님, 법사님 저 좋아서 그러시는 거죠?" 라고 했더니 "아이고, 어떻게 알았댜?" 하며 웃으셨습니다.
제 별명이 울보일 정도로, 울면서 못하겠다고 하면 자재법사님은 관점이 잘못 잡혔다는 말씀은 안하시고 '일은 못해도 좋으니 나가지만 말고 있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돼? 안하면 되지! 밖에서 살던 대로 내 맘대로 살면 되지.'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곧 자재법사님의 말씀이 뒤따라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지내고 보니 내가 편안해지고, 다이아몬드들을 함께 아우르는 역할도 하나씩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나가지만 말고 있어라'가 지금의 저를 법사로 만들었습니다.
딸 셋과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졸업식은 딱 네 번 가봤습니다. 수능시험 보는 날은 따라가 본 적이 없고, 대신 시험 시작 시간부터 끝날 때까지 아이들을 위해 정진했습니다. 집에 돈이 없으니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해서 용돈을 벌어 썼고 학원 한번 간 적이 없이 스스로 공부해서 대학에 갔습니다. 대학에 합격했는데 입학금 한 번 줘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난 엄마라고 나설 자격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미안한 것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서 후회는 없습니다.
내가 계속 돈을 벌었다면 남편 무시하고 짓누르며 괴롭게 살았겠지요. 또한 그런 마음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불안한 가정환경을 만들었다면 지금처럼 잘 자랄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스스로 잘 커준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 말고는 더 말할 게 없습니다. 돌아보면 ‘참 잘 살았다. 불법 만나 참 잘 살았다.’는 생각뿐입니다.
힘든 시절 스승님께 의지하고 물어가며 뚜벅뚜벅 걸어오신 법사님
스승의 말씀이라면 두 말 않고 무엇이라도 내려놓으신 모습에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뜨거운 불덩이가 무엇인지 돌아봐집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선광법사님의 행자 시절 이야기가 찾아옵니다.
낭독_고정석
글,사진_인천경기서부지부 희망리포터
편집_온라인.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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