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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다문화가족과 함께하는 즉문즉설 강연과 워싱턴 D.C 방문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업무를 보다가 오전 10시 30분에 손님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공동체 대중들이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스승의 날은 아직 며칠 남았지만, 스님이 오늘 저녁 미국으로 출국을 하기 때문에 스님께 인사드릴 수 있는 시간을 미리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손님과의 미팅을 마치고, 오전 11시 30분에 정토사회문화회관 4층 중강당으로 갔습니다. 공동체 대중 60여 명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경, 두북, 인도, 필리핀, 부탄에서 활동하는 해외 공동체 성원들은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공동체 대중들은 스님께 감사의 삼배를 드리고, 공동체 성원 한 명이 스님께 감사의 카네이션을 달아드렸습니다. 대중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스승의 은혜’를 다 함께 불렀습니다. 이어서 지난 5월 7일 설법전에서 진행되었던 행자대학원 입재식에 대해 행자반장이 스님께 보고했습니다. ‘미래 문명을 이끌어 갈 보디사트바 양성’을 목표로 출발하는 19기 행자대학원 3년 과정에 10명의 행자가 입재를 하게 되었고, 입재한 행자님들은 스님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준비한 공연이 있었습니다. ‘무조건’이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스님에 대한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재미난 가사와 율동에 스님을 포함한 모든 대중이 크게 웃었습니다. 언제든지 스님의 부름에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공동체 성원들의 마음이 잘 담겨있는 공연이었습니다.
스님은 스승의 날 행사를 준비해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며 새롭게 입재한 행자대학원 행자님들과 공동체 대중들을 위한 법문을 했습니다.


“먼저 이렇게 축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해외에 계신 분들, 또 온라인으로 참여하신 분들까지 이렇게 얼굴을 뵈니 참 반갑습니다.
사실 우리가 5월 15일에 따로 스승의 날 행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스승이라는 것이, 큰스님이 계시고 그리고 제가 있고, 다시 법사님들이 있는 이런 구조일 때는 제일 웃어른을 중심으로 행사를 하면 됩니다. 단계마다 따로 모시고 행사하는 게 아니라, 한 집안에 있을 때는 가장 웃어른만 모시고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거죠.
마침, 불심 도문 큰스님 생신이 음력 3월 20일이다 보니, 날짜로는 보통 4월 말이나 5월 초쯤 됩니다. 그래서 큰스님 생신을 기해서 행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스승의 날까지 함께 기념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저는 따로 스승의 날 행사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생일도 제일 큰어른 생신만 준비하면 되지, 그 외에 개별적으로 생일잔치를 벌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행사를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위에 어른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자리가 마련됐으니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행자대학원에 열 명이 입학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여러 활동을 하고 또 수행도 하겠지만, 행자 교육에 있어 가장 핵심은 수행이에요.

정토행자들은 여러 사회 실천 활동을 하고, 해외에도 나가 있고, 또 그 외 많은 일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행자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밖의 일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에요. 그러나 수행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수행자이기 때문이에요. 정토회를 표현할 때도 신앙 공동체라고 하지 않고, 수행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은 수행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수행자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이 괴로움이 됩니다. 화나 짜증이 나기도 하고, 근심과 걱정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나 원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부정적 감정들이 일어나면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하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괴로움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는 것입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누군가가 욕해서 내가 화가 났다면 이 괴로움의 원인은 ‘상대가 욕을 한 데 있다.’라고 봅니다. 또 주식을 샀는데 주가가 내려가서 괴롭다면, 그 괴로움의 원인을 ‘주가가 떨어진 데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세상의 관점이에요.
그렇다면 이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가 욕을 안 해야 하고, 내가 산 주식이 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식이 오르지 않을 수도 있고, 상대가 계속 나를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내 노력만으로는 이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겠죠. 그래서 우리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에게 부탁하게 됩니다. 부모든 친구든 또는 힘 있는 사람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 부탁의 방식도 여러 가지인데, 인맥을 통해 부탁하기도 하고 때로는 돈을 건네며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탁할 때는 ‘좀 도와주세요.’ 하고 늘 사정을 하게 되죠. 이런 구조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더 힘 있는 존재, 무엇이든지 다 알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인 신에게 빌어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행이란 무엇일까요? 괴로움의 원인이 상대가 나를 욕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 말에 끌려가 반응했기 때문이라는 데서 출발합니다. 누군가 ‘야, 이놈아’라고 했을 때, 그 소리를 욕이라는 상(相)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부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는 겁니다. 주식은 떨어질 수도 있고 오를 수도 있는데, ‘반드시 올라야 한다.’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비는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데, ‘비가 와야 한다.’라고 집착하면 안 오면 괴로워집니다. ‘소풍 가야 하니까 비가 오면 안 된다.’라고 집착하면 비가 올 때 괴로워집니다. 문제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 내 마음에 있다는 겁니다. 즉, 어리석음 또는 집착에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집착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다시 말해 무지를 깨치면 됩니다. 사실대로 알면 되는 거예요. 이런 관점을 가지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행복해지는 것은 종교이고, 나의 무지를 깨쳐서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에 이르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 관점에 한번 서 보겠다고 발심했다면, 그 관점을 늘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이래서 괴롭습니다, 저래서 힘듭니다.’라고 말하면 저는 다 이해합니다. ‘주식이 떨어져서 괴롭다.’, ‘애인과 헤어져서 괴롭다.’라고 하면 그럴만하다고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안 묻는 거예요. ‘아, 힘들겠구나.’ 하고 받아주죠. 그런데 수행자라면 그때는 ‘왜 괴롭습니까?’ 하고 묻는 겁니다. 머리를 깎았든 안 깎았든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냥 세상 사람일 뿐입니다. 그럴 때는 스님도 그저 세상 사람의 이야기를 듣듯이 ‘그래, 힘들겠다.’ 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수행자라면, 역시 수행적 관점에서 ‘그게 왜 괴로운데?’ 하고 되묻게 됩니다. 다만 이 질문을 아무한테나 던지면 큰일 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성폭행을 당했다면, 그럴 때는 ‘아이고, 얼마나 힘들겠냐?’ 하고 세속적으로 위로해 주는 거예요. 수행적 관점에서는 ‘그랬구나. 그런데 왜 괴로운데?’라고 물어야 맞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그 가해자를 처벌한다고 해서 내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처벌받는 것과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내가 그 고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만으로도 억울한데, 왜 내가 계속 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 사실을 탁 깨우쳐 거기서 자유로워져야 해요. 그리고 상대방이 또 다른 피해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면 고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해서, 더 많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수행자가 되겠다고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위로받을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위로받고 싶다는 것은 ‘저를 중생으로 여기고 잘 보살펴 주세요.’라는 말과 같아요.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 수 있습니다. 힘들다고 하면 맛있는 것도 사 먹으라고 하고, ‘아이고, 힘들지.’하고 다독여 줄 수도 있어요. 그러면 눈에 눈물이 날 만큼 고맙겠죠. 그런데 그것은 주변 환경 덕분에 내가 괴롭지 않은 것일 뿐이지, 내가 깨우쳐서 괴롭지 않은 것이 아니잖아요.
수행자라면 스스로 괴롭지 않아야 합니다. 일이 잘되든 안 되든 괴롭지 않아야 해요. 수행자에게는 되고 안 되는지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에요. 되어도 괴롭지 않고, 안 되어도 괴롭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 되어도 괜찮으니, 노력을 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지나치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 힘을 얻기 위해서 행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행자가 북한 돕기를 하든, 인도에 가서 활동하든, 청소나 빨래를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이것 때문에 힘들다, 저것 때문에 힘들다.’ 하는 중생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돌이켜 수행적 관점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능히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가 핵심이에요. 처음에는 열 번 가운데 한 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두 번, 세 번으로 늘어나다가 나중에는 가끔 놓치는 정도가 됩니다. 이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다음에야 그 바탕 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할 수도 있고, 목탁을 칠 수도 있고, 절을 할 수도 있고, 명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수행적 관점을, 중심을 잡고 살면 수행자로서 하는 것이 되고, 이것을 놓치면 그냥 세상 사람으로서 살게 되는 거예요. 세상 사람으로서 남을 돕는 일을 열심히 하면, ‘참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건 선행이죠.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남이 뭐라고 평가하느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리를 듣는 게 더 낫기는 하지만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관점을 끝까지 가지고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렇게 입재식 때 분명히 듣고도 좀 지나면 언제 들었냐는 듯이 잊어버리고 다시 ‘네가 문제다, 이것 때문에 못 살겠다, 저것 때문에 못 살겠다.’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스님이 크게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밖에 있을 때보다는 낫고, 어제보다는 나아졌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3년이라는 시간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한번 되돌아보면, 과연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입재를 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사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좋다니까 들어온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행자 교육에서 설거지하라든지 밥을 하라든지, 인도로 가라든지 한국에 있으라든지, 이런 일들을 주는데 사실 그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살펴서 점점 여일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크기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 가라고 해도 괜찮고 저기 가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깨달음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건 수행이 아니라 노예가 되는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느냐가 본질이 아니에요. 일을 하루 종일 하든, 하루 종일 쉬라고 하든 그건 별로 안 중요해요. 놀고 있을 때는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욕구가 어떻게 올라오는지를 보면 되고, 바쁘게 움직일 때는 또 그 속에서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모든 상황은 마음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는 하나의 연구 대상일 뿐이에요. ‘아, 이럴 때는 이렇게 일어나는구나.’, ‘저럴 때는 저렇게 반응하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겁니다. ‘나는 이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저쪽으로 가라고 하니까 기분이 나빠지는구나.’ 이렇게 스스로 살피는 것이 수행입니다.

스승이라는 존재는 바로 그 점을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합니다. 수행자가 무엇인지, 수행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때때로 짚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수가 되기 쉬워요. 괴롭다고 하소연했는데 위로는 안 해주고, 오히려 ‘왜 괴로운데?’ 하고 묻는다면 편한 관계는 아니겠죠.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사실 둘 중 하나입니다. 원수가 되든지 아니면 진짜 스승과 제자가 되든지, 그 관계를 떠나버리면 그냥 친구가 되는 거예요. 원수도 아니고 스승도 아니고, 그저 좋은 친구로 머무르는 것이죠. 그래서 스승과 제자가 되려면 서로 원수가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스승도 그 각오를 해야 하고, 제자도 그 각오를 해야 해요. 관점을 바로 잡아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해서 깨우치려면 그 관점을 딱 가지고 해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3년이라는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도 있어요. 물론 3년을 그렇게 보낸다 해도,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세상에 도움이 돼요. 최소한 밖에 나가서 나쁜 짓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밖에 가서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지구 환경을 지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지내는 것 자체도 의미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기왕 하는 것이라면, 정말로 내가 나답게, 내가 주인이 되어 살고 싶다면 이 관점을 단단히 붙잡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입학한 열 명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 있는 모든 수행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장판에 때 묻히듯이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수행자다, 수행자다.’ 말해도, 그 말은 염불 소리처럼 지나가는 말일 뿐 실제 삶에서 수행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점을 딱 잣대로 삼아서, 그 기준으로 늘 자기 마음을 살피고 점검해야 합니다. 백 번 해서 안 되더라도, 살피는 것과 아예 살피지 않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살피면 수행자이고, 안 살피면 수행자가 아니에요. 되고 안 되고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한 번 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공동체 성원들은 함께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다 함께 손하트를 만들며 외쳤습니다.
“스님 사랑합니다”
간소한 스승의 날 축하 행사를 마치니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스님은 오후 12시 20분에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점심 공양을 했습니다. 이어서 바로 지하 대강당으로 다문화인들을 위한 즉문즉설을 위해 이동했습니다.
오늘은 JTS 다문화센터의 나들이 날입니다. 시흥, 안산, 일산 지역에 살고 있는 미얀마인들이 오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방문했습니다. 오전 10시경에는 한국의 대표 문화 시설인 예술의 전당을 방문하여 가족들과 나들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나들이 후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돌아와 김밥, 샐러드, 감자튀김, 스프 등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늘 행사를 위해 여러 봉사자들이 행사 준비와 식사 준비를 해주었습니다. 오늘 나들이 프로그램의 마지막 일정은 스님과 함께하는 즉문즉설 시간입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 70여 명의 미얀마인들이 자리했습니다. 스님과 대화를 시작하기 전, 창작 음악그룹인 ‘거문고 자리’의 거문고 공연이 있었습니다. 연주자들은 ‘플라이투더문’과 ‘아리랑 연곡’을 한국의 전통악기인 거문고의 깊은 선율로 현대적인 비트와 함께 연주하여 들려주었습니다. 거문고의 따듯한 선율이 다문화인들을 환영하는 듯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을 함께 본 후 스님이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 위로 걸어 나왔습니다. 스님은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전에 산책 잘하시고, 점심도 맛있게 드셨어요? 한국 음식은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절이다 보니 여러분 입맛에 잘 맞는 음식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스님은 JTS에서 진행하고 있는 만달레이, 사가잉 지역의 지진으로 피해입은 지역에 대한 학교 복원 및 난민 지원과 태국과의 국경 지역인 매솟에서의 식량 및 학용품 지원활동, 방글라데시에서의 로힝야 난민 지원에 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미얀마의 내전 상황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러분의 나라가 하루빨리 안정을 되찾아, 내전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이 평화를 되찾고, 난민들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인도는 불교가 시작된 곳이고 스리랑카는 불교학이 발달한 나라입니다. 미얀마는 위파사나 수행 등 수행 전통이 매우 잘 이어지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미얀마의 수행법이 세계로 더 널리 전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정작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 국가에서 평화가 유지되지 않는 현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사 겸해서 여러분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총 6명이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중 타국살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질문자의 질문을 소개합니다.

”서툴지만 한국어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살며 매일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지치고 힘들지만 아무도 저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봐 쉽게 약해질 수가 없습니다.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아는 사람도 적은 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려움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내가 이 환경을 이겨내겠다고 각오하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을 질문자가 ‘강해져야 한다.’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이것은 불교적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방식입니다. 이것을 이겨내면 성공이라고 말하고, 이겨내지 못하면 실패로 평가합니다.
둘째, 수행적 관점으로 어려움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실제로 무엇이 어려운지를 자기 안을 살핍니다. 일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그 일을 대하는 내 마음이 어려운 것인지를 들여다보는 것이죠. 마음이 어렵다는 것은, 그 일을 거부한다는 뜻이에요. 싫어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새로운 일을 맡았다면, 잘 모르는 일을 하려니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때의 어렵다는 것은, 사실 모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럼에도 꾹 참고 계속해 나가는 것이 세속적인 방식이에요. 그러나 수행적으로는 모르는 일이면 물어서 배우고, 익숙하지 않으면 반복해서 연습하면 됩니다.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어요.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익숙해집니다.

그런데 빨리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조급해지고, 그때 괴로움이 생깁니다. 질문자는 지금 자신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을 맡긴 사람은 결과를 빨리 원하기 때문에 재촉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죄송합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하면 됩니다. 왜 독촉하느냐고 따지고 저항할 필요는 없어요. 그 또한 일이 빨리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속담에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먼 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합니다. 세상에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 번 연습하면 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질문자 자신에게도 조금 기다리라고 말해 주고, 상대방에게도 기다려 달라고 말하면 됩니다. 굳이 강해지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싫은 것을 억지로 참고할 때 강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수행은 ‘강해져야지.’ 하고 각오하는 게 아니라, ‘아, 내가 싫어하는구나.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꾸준히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패라거나 성공이라는 판단 없이 꾸준히 연습하는 과정만 남게 됩니다. 지금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지 예를 들어 말하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해 보세요.”
“제가 원래는 눈물이 잘 안 나는 사람인데, 좀 전에는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은데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젊었을 때 꼭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게 있을까요?”
“그런 건 따로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연을 지으면 과보가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연은 지어놓고, 그 과보는 안 받으려고 하니까 어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불교적으로 보면 인연을 지었으면 과보를 받으면 됩니다. 과보를 받기 싫다면 애초에 인연을 짓지 말아야 하죠. 예를 들어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내가 그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부처님이 ‘거기에 독이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질문자는 어떻게 하겠어요?”
“안 먹습니다.”
“독이 들었다고 하면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예요. 그런데 이 음식을 먹으면 죽게 된다면 아무리 먹고 싶어도 안 먹겠지요. 그런데 너무 먹고 싶어서 그냥 먹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죽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후회는 언제 생길까요?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게 되었는데, ‘나는 안 죽겠다.’라고 버티면 그때 후회가 생깁니다. ‘아, 그때 안 먹을걸.’ 하는 이게 바로 후회예요.


후회는 무지, 즉 모르는 데서 발생합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볼게요. 내가 생활이 아주 어려워요. 돈을 빌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빌렸습니다. 그러면 이자를 붙여서 갚아야 하는데 막상 갚으려니 너무 힘들어요. 그러면 다음부터는 아무리 어려워도 돈을 빌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연을 지었으면 과보를 받는다.’라는 뜻입니다. 과보를 받기 싫으면 그런 인연을 안 지으면 됩니다. 그런데 인연은 지어놓고 과보는 안 받겠다고 하면, 그때 후회가 생기는 거예요. ‘그때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이렇게 후회하는 것입니다.
인연과보를 아는 사람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놀고 싶으면 놀면 돼요. 대신 돈이 없는 과보가 생기는 거예요. 돈이 없으면 밥을 안 먹으면 되고 집이 없으면 길거리에서 자면 됩니다. 일을 꼭 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습니다. 일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지만 그 대신 굶고 길거리에서 자는 결과를 받아들이면 되는 거죠. 집에서 자고 밥도 먹고 싶다면 하기 싫어도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인연과보의 법칙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후회라는 건 없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질문자가 자기 나라를 떠나 한국에 오면 언어도 다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문화도 다르면 어려움이 예상되어요, 아니면 좋은 일만 있을까요? 월급을 많이 받는 좋은 점이 있지만 이런 어려움이 따라붙습니다. 월급은 많이 받고 싶고 어려움은 겪기 싫다고 하면 거기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이런 어려움이 싫다면 미얀마에 가면 되고, 여기서 돈을 벌려면 그 어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선택하면 저런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 결과를 원치 않으면 이 선택을 안 하면 됩니다. 이것이 인연의 법칙입니다. 이 인연의 법칙을 알면 후회 같은 것은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인연과보의 법칙을 알면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사전 신청한 질문자 2명의 질문과 즉문즉설이 이어진 후,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미얀마에서 온 가수 나이치누누 님이 6살의 귀여운 딸과 함께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고 무대에 올라 미얀마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노래를 들은 후 스님은 참가자들과 단체 사진을 찍고 다시 즉문즉설을 이어갔습니다.

오후 2시 50분, 큰 박수와 함께 다문화 가족 즉문즉설 시간을 마쳤습니다. 이후 스님은 업무와 미국 출장 준비를 하였습니다. 오후 6시에 스님은 인천공항에 가기 위해 차에 올랐습니다. 스님을 배웅하러 법사님들과 공동체 실무자들이 왔습니다.

“스님 잘 다녀오세요.”
“잘 다녀올게요”

오후 7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수하물로 보내는 캐리어에 짐이 많이 실려 무게가 많이 나갔습니다. 공항에서 짐 정리를 다시 한 후 체크인을 했습니다. 스님은 체크인 후 과일로 간단히 요기했습니다.

한국 시각 오후 7시 40분 스님은 행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스님은 13시간을 비행하여 뉴왁(Newark) 공항에 내려서 승용차로 워싱턴 정토회관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내일부터 미국 일정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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