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2.7. 델리대학교 강연, 인도성지순례 평가회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진짜 행복이 오나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델리대학교에서 현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인도성지순례 평가회의를 한 후 상카시아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명상과 수행을 마치고, 오전 6시부터 부탄 주민 틀니 지원사업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부탄에서 활동하고 있는 실무자 2명과 의료인 정토회 회원 2명은 지난 1월 23일부터 2월 4일까지 트롱사주와 젬강주의 6개 치옥에서 172명을 진료하고, 3개 병원을 답사했습니다. 오늘은 그 결과를 점검하고 향후 방향을 세우는 자리였습니다.

치과의사 추희숙 님이 먼저 답사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시골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주민들의 구강 상태는 매우 열악했습니다. 치아가 나쁜 사람이 찾아오긴 했지만, 172명 중 28개 치아가 온전한 사람은 없었고, 대부분 잇몸에 염증이 있었습니다. 또,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치과의사가 해야 할 업무를 치위생사가 대신하고 있었고, 그나마 있던 인력마저 점점 호주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양치를 거의 하지 않았고, 씹는 담배 때문에 치아 상태가 더욱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수도 팀푸에 있는 병원은 한국 병원에 견줄 만큼 수준이 높아, 부탄 자체의 의료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치기공사 심재정 님은 틀니 제작 여건이 열악했고, 주민들의 잇몸이 녹아내리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어느 수준까지 지원해야 할지가 핵심 고민이었습니다.

약 30분간의 답사 보고를 들은 후 스님이 말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국도 옛날에는 시골 면 단위에 틀니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치과의사 없이도 기술자가 틀니만 만들었어요. 부탄에 가서 노인들의 치아를 보니, 이가 아예 없거나 머리 부분만 조그맣게 남아 있더라고요. 저 이로 밥을 씹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밥이라도 드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겠다 싶어 틀니 지원을 구상했던 겁니다."

스님은 이 사업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짚었습니다. 부탄 중앙정부는 팀푸 수준의 치료를 지역에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준으로 하려면 병원을 하나 차려야 합니다. 처음 생각했던 '정말 어려운 사람을 조금 도와준다'는 개념과는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JTS가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한 사람에게 공을 들여 높은 수준으로 잘 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1명 도와줄 것을 10명, 20명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잘했다는 소리를 듣는 데 초점을 둘 것인지, 정말 급한 사람들을 돕는 데 초점을 둘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스님은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아예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JTS 현실에 맞게 낮은 수준이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는 관점에서 많은 이에게 혜택이 가도록 진행하는 것입니다. 셋째, 한 동네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먼저 시범 사업을 해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답사팀에서 가장 열악했던 장비치옥에서 시범 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스님은 우선 장비치옥에서 시험해본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확대 여부와 수준 조정을 판단하자고 했습니다.

“정말 어려운 사람들은 그냥 참고 살아요. 우리가 수준을 낮추되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방향을 잡는다면 다수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을 제대로 치료해 주겠다고 하면, 왜 우리 마을은 안 해 주고 그 마을만 해 주냐는 소리를 듣게 되는 거예요. 이러나 저러나 욕을 먹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저희는 해 보고 싶습니다."

스님은 한 분에게는 트롱사 주 병원에 필요한 치과 장비 목록 조사를 부탁했습니다. 다른 한 분에게는 틀니 제작 과정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계획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8시에 회의를 마치고 스님은 서둘러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델리대학교에서 강연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8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하여 9시 45분경 델리대학교에 도착했습니다.


강연장에는 교수진과 학생, 동남아시아의 스님들 약 30명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성지순례에 참가했던 태국 스님도 도반 스님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강연 준비가 늦어져 시작 시간이 10시 30분으로 미루어졌습니다. 스님은 잠시 교내를 산책한 후 강연장으로 돌아왔습니다.

10시 30분부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기후 위기와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커다란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변화는 기후·환경 위기의 시대입니다. 인류는 지난 약 5천 년 동안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는 관점 속에서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부작용으로 인해 기후 위기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방식으로는 이 문명을 계속 유지해 나가기 어렵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우리 후손들에게도 지속적인 삶이 가능할지, 그 방향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인공지능의 발전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데 늘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생산량이 문제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생산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할 사람이 부족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극소수의 사람만으로도 충분한 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과거의 기준에서 보면, 내가 일하지 않아도 생산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세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와 매우 가까운 시대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만약 우리가 일하지 않고도 기본적인 생존 물품만 제공받는 삶을 살게 된다면, 과연 그것이 행복한 삶일까요. 이 질문은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많은 이야기는 더 이상 충분한 해답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와 AI 시대에,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2600년 전에 생겨난 불교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이유는, 2600년 전과 지금의 시대 상황이 놀랍도록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도 대륙은 천 년 이상 브라만 문명, 아리안 문명이라 불리는 전통 문명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출현하던 시기에 이 전통적인 시스템은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브라만 사상만으로는 변화된 세상을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변화된 세상을 설명하려는 새로운 사상가들, 즉 신흥 사상가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가족, 집, 지위와 명예 같은 기존의 생활방식을 내려놓고 숲속으로 들어가 사색하며,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변화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서로의 사상은 달랐지만, 이러한 흐름을 인도에서는 ‘사마나’라고 불렀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역시 그 흐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 브라만의 길이나 사마나의 길 모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 길을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그가 이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어떤 해답이나 힌트를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대화는 불교나 불교사상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적·세계적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그 길을 모색하기 위해 부처님의 경험에서 힌트를 얻어보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의 대화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어떤 이야기든 좋습니다. 다만 이 대화의 목표가 이러하다는 점을 알고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특정한 불교 교리나 사상에만 집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고뇌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고뇌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뇌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문제든 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던지는 질문과 대화는 모두 불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교리나 용어를 말해야만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모든 진지한 질문과 탐구가 곧 불교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궁금했던 것, 고민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이 대화의 장에 자유롭게 내놓아 주기 바랍니다. 저는 답을 주는 사람이기보다는,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고 대화하는 사람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손을 들고 궁금한 점이나 자신의 고민에 대해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1시간 15분 동안 이어진 강연에서 8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불교에서는 감정적 애착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지만, 애착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며 왜 불교에서는 이런 감정적 애착을 가지지 말라고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애착이 주는 안온함과 그 이면에 따르는 속박의 구조를 집에 비유해 설명했습니다.

애착이 안정감을 주는데, 왜 놓아야 하나요?

“Buddhism teaches that in order to attain peace of mind, one should let go of attachment. However, attachment gives us a sense of stability—so why does Buddhism tell us to abandon it? I’m curious about the reason.”
(불교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애착심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애착심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데 왜 버리라고 하나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선 이 건물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안에 있으면 우리는 바깥 환경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건물의 바닥은 땅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을 막아줍니다. 외벽은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지붕은 햇볕이나 비를 막아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안에서 안온함을 느낍니다. 즉 집이라는 것은 우리를 바깥 환경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집은 우리를 구속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방이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은 ‘안식처’라는 성격과 ‘감옥’이라는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온함을 추구하면 그에 따른 속박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 속박을 버리면, 안온함도 동시에 사라지게 됩니다.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애착심도 이와 같습니다. 애착심은 안온함을 주지만, 동시에 속박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집을 불살라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애착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집에 있으면 속박을 느끼다가 답답해져서 뛰쳐나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다시 외로움이나 위협을 느끼게 되면, 또 다른 집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러면 다시 안온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윤회’란, 바로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되풀이되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윤회하는 삶에서 벗어나려면, 그 ‘집’ 자체를 불살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I understand now. Thank you.”
(이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질문자는 도덕과 정의의 기준은 문화, 종교, 지역마다 서로 다른데 어떻게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세울 수 있을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스님은 서로 다른 문화와 도덕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평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불법의 관점으로 설명했습니다.

도덕의 기준이 나라마다 다른데, 평화가 가능한가요?

“What is the truth that applies equally to everyone when different cultures and religions disagree? If morality changes depending on where a person is born, on what basis can we say that something is just and apply it equally to all people?”
(다른 문화와 종교에서 동의하지 않을 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진실이 무엇인가요? 만약에 도덕성이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면 어떤 것이 정의라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다고 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인 정의는 없고, 서로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 ‘그들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인정과 이해가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을 더 해도 됩니다.”

“Since morality differs by country, nationality, culture, and religion, how can we say, on a global level, ‘This is what peace is’?”
(도덕은 나라, 국적, 문화, 종교에 따라 다 다른데, 어떻게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평화가 이렇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숲에 가보면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나무도 있고 저런 종류의 나무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숲을 이룹니다. 화단에 가보면 여러 가지 종류의 꽃들이 있습니다. 꽃의 크기와 색깔, 모양이 다 다르지만, 그들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꽃밭을 이룹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서도 서로 다른 인종, 민족, 종교, 이념, 문화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면 서로 다른 꽃들이 화단을 이루듯 조화를 이루어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법입니다. 어떤 한 가지로 통일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종교를 넘어서 불법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연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법은 불교인만의 재산이 아니라 온 인류의 재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불법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인류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연구하고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했지만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는 불교의 가르침이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인종, 민족에 갇혀 있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교에 관한 연구가 과거에 대한 연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평화의 문제나 환경 위기와 같은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불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미래를 위해 매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기존의 불교 국가들에는 그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불교를 믿을 뿐이지, 현재의 문제를 풀기 위해 불교를 연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는 믿음만 가지고 주장을 할 뿐, 현실에 기초해 불법을 활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다릅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가 안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말 도움이 되는가, 그 점에서 접근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도의 젊은이들이 불법을 좀 더 연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대학에 오게 된 것입니다.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불법은 과학과 매우 비슷합니다. 항상 ‘왜 그렇지?’ 하고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처음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열세 살 때 농경제에 참여하면서였습니다.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소년은 ‘왜 하나가 살려면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할까, 같이 사는 길은 없을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물어봤지만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르침은 ‘어떻게 싸워서 이길 것인가, 어떻게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로부터도 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이 바로 진리를 찾아 나서는 첫 출발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탐구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의문을 가질 때 그것이 비로소 자기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는 항상 ‘왜 그러냐?’라고 질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권위도 그대로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 역시 스승을 따라 공부했지만, 스승으로부터 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답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연구할 때 단순히 종교를 연구하거나 과거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말고, 미래에 인류가 가야 할 길의 해답을 찾는 데에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 아이디어를 얻겠다는 관점으로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꼭 불교학과에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인류가 가야 할 길은 이 길이다.’라고 어느 누구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지금부터 함께 찾아 나가야 합니다.

제가 올해 일흔셋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고 사회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70년 만에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제가 경험한 불법은 인간의 창조성을 발휘하고 새로운 길을 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근대 서양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절에 들어와 그 이후로는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경험으로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학교 교육보다도 더 창조적인 것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종교라고 해서 과학을 배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류가 과거로부터 쌓아 온 종교, 철학, 학문, 과학까지 모두 종합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Thank you. I understand well.”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세상에서는 돈과 지위를 성공이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의 평화나 행복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스님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성공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등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인류가 함께 행복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 기후위기 시대에 환경을 보호하면서도 기술 발전과 지속 가능한 개발을 동시에 추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명상이 이런 물질주의적 삶의 방식을 바꾸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 미국이 그린란드를 매입하려 하는 등 강대국들이 국제 협약을 무시하고 힘의 논리로 세계를 재편하고 있습니다. 무상(無常)을 가르치는 불교의 관점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마지막 질문자는 의미 있는 삶을 곧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스님은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을 때 왜 괴로움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지속 가능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즐거움을 포기해야 진짜 행복이 오나요?

“Which is more important, a pleasurable life or a meaningful life? Can a meaningful life be called a happy life? What is sustainable happiness in Buddhism? Do we have to give up pleasure in order to attain true happiness?”
(즐거운 삶과 의미가 있는 삶 중에서 어떤 삶이 더 중요한가요? 의미가 있는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지속 가능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즐거움을 포기해야 진짜 행복이 오나요?)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는다면, 어떤 행복이든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라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반복되는 윤회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것은 즐거움을 포기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욕망을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욕망이 욕망인 줄 다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억누르지도 않고, ‘아, 이것이 욕망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 이것이 윤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지속 가능한 행복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식의 즐거움이든,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는다면 반드시 괴로움이 따라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괴로움마저도 감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의 과보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을 더 하고자 하는 대학생들이 많았지만, 강연을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음에 스님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11시 45분에 강연을 마쳤습니다.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스님은 교수진들에게 '혁명과 붓다', '행복'의 영문판 책을 선물했습니다.

강연장을 나서자 오늘 강연을 초청한 분이 인사를 건넸습니다. 작년 모리야족 3만인 법회에 스님을 초대하기 위해 가야까지 찾아왔던 분이었습니다.

"스님, 이번 강연 초대에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다음에 인연이 되면 다시 봅시다.“

스님은 강연을 준비한 분들과 사진을 찍고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1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교통 체증이 심하여 2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습니다.

오후 2시에 숙소에 도착하니 스태프들이 식사를 하지 않고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함께 점심 공양을 하고 이어서 성지순례 평가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기억에 남는 사항부터 짚었습니다.

"내년에는 첫째, 2022년 이후로 생산된 버스만 계약하도록 합시다. 둘째, 비자 도장을 찍고 나올 때 반드시 도장이 찍혔는지, 날짜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도록 안내를 하면 좋겠어요.”

순례 시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올해는 1월 하순부터 2월 초까지로 잡았더니 날이 따뜻했고, 예년보다 환자도 적었습니다. 내년도 비슷한 시기로 잡으려고 확인해 보니 설과 겹쳤습니다. 스님은 일정을 다시 고민해 보자고 한 뒤, 각 성지의 숙소 상황도 세세하게 확인했습니다.

회의를 마무리하며 스님은 성지순례 담당자에게 부탁했습니다.

"한국에 가면 한국 대사관, 네팔 대사관, 인도 대사관에 감사 편지를 보내 주세요. 이번에 대사관에서 대사님이 신경 많이 써 주셨다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평가회의까지 마치니 성지순례가 비로소 끝난 것 같았습니다. 스태프들은 저녁에 한국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스님은 오후 4시에 상카시아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차를 타고 약 5시간 30분을 이동해 밤 9시 35분에 상카시아 담마센터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상카시아에서 인도 정토회 이사회와 석가족 법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2026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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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연우

부처님의 생각을 한번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도 다만 알아차릴 뿐! 그것에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집착을 내려 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스님 조심히 귀국하셔요🙏🙏🙏

2026-02-10 08:16:53

전창희

감사합니다
즐거움만을 추구하지 않도록 잘 살피겠습니다

2026-02-10 07:38:36

김애자

감사합니다

2026-02-10 0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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