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02.01 인도성지순례 9일째, 룸비니
“부처님의 탄생 설화는 사실일까요, 상징일까요?”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9일째입니다. 오늘은 꼴리족이 쌓은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물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로히니강을 지나,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 마야데비사원을 순례했습니다.

네팔로 향하는 날은 늘 이른 새벽에 출발합니다. 국경을 넘는 데만 여러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새벽 1시 30분, 숙소 앞에 대기하던 버스들이 일제히 시동을 걸었습니다. 순례단은 잠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실은 뒤, 2시 20분 쿠시나가르를 떠나 네팔 국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매우 이른 시간이었지만 경찰이 순례단을 호위하기 위해 스님이 탄 차 앞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곧 버스 안의 불이 꺼졌고, 대부분의 순례단은 다시 잠들었습니다. 버스는 국경을 향해 어둠 속을 달렸습니다.

새벽 5시, 차 안에 불을 켜고 다 함께 예불을 올렸습니다. 예불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시 45분, 버스는 인도-네팔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앞서 호위하던 쿠시나가르 경찰도 스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5백여 명의 순례단은 차례로 내려 질서를 지키며 줄을 섰습니다. 인도 출국 수속을 마치고, 7시 35분부터 네팔 입국 수속을 진행했습니다. 오늘은 인도 국경 수비대가 버스에 실은 개인 짐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살피는 등 평소보다 훨씬 엄격한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8시 40분에 전체 상황을 확인한 결과, 버스 13대 중 9대는 국경을 넘어 네팔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나머지 4대는 인도 출국사무소의 네트워크 문제로 여전히 인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은 법사님들을 불러 이야기했습니다.

"네트워크가 언제 정상화될지 모르니, 일단 국경을 넘어온 차들은 랑그람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아직 인도에 있는 버스 4대는 상황이 해결되는 대로 따라오면 되겠어요.“

스님은 먼저 출발할 수 있는 차량을 인솔하여 랑그람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스님은 무전기를 통해 순례단이 인도-네팔 국경을 넘어 이동 중인 상황을 공유하고, 현재 네팔의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에 대해서도 전달했습니다.

오전 10시 20분, 랑그람에 도착했습니다. 자욱한 안개와 차갑고 습한 공기가 순례단을 에워쌌습니다. 순례단은 탑 한 쪽 공터에 자리를 펴고 앉았습니다.


"배가 고프죠? (웃음) 지금부터 도시락을 먹겠습니다. 어차피 뒤에 오고 있는 차량들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도시락을 먹고 참배 일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순례단은 어젯밤 쿠시나가르 숙소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도시락을 먹은 후, 가사를 수하고 자리를 정돈했습니다. 스님이 성지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여덟 기의 진신사리탑 가운데 하나인 랑그람 진신사리탑입니다. 이곳을 찾는 한국 순례객은 거의 없습니다. 일부 스님들이 개인적으로 방문한 적은 있지만, 단체 순례객이 이 진신사리탑까지 오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아쇼카 왕도 허물지 못한 사리탑

아쇼카 왕은 여덟 기의 진신사리탑 가운데 일곱 기를 허물어 그 안의 사리 일부를 꺼내, 부처님의 발자취마다 탑을 쌓고 그 곳에 봉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랑그람 진신사리탑만은 예외였습니다. 경전에 따르면, 이 탑을 지키던 용왕이 아쇼카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나보다 사리를 더 잘 모실 수 있느냐. 나는 이 사리를 잘 모시고 있으니, 손대지 말라.’

그 말에 인도 전역을 통일한 아쇼카 왕조차도 이 사리탑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꼴리족의 강한 저항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지역의 지형도 탑을 지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강물이 굽이치며 흐르다가 방향을 바꾸면서 생긴 지형을 ‘우각호’라고 부르는데, 이곳 역시 강물이 굽이쳐 흐르다가 섬처럼 남은 땅입니다. 실제로는 섬은 아니지만, 물길이 돌아가며 고립된 형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뱀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런 여러 조건 때문에 탑을 쉽게 허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에도 이 탑을 도굴하려다 병이 들거나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 탑에는 손대면 안 된다’는 속설이 굳어졌습니다. 그 결과, 다른 진신사리탑들과 달리 이곳은 발굴되지 않은 채 남게 되었습니다. ‘손대면 안 된다’는 속설 때문에 이곳은 발굴되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며 탑은 점차 허물어졌습니다. 흙 위로 풀이 자라나 지금은 마치 무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이 랑그람 진신사리탑은 진신사리탑 가운데 가장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사리탑들은 이미 사리가 옮겨졌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사리가 그대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으로 보자면, 이곳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도 가장 귀한 장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명이 끝난 뒤, 순례단은 탑돌이를 하고 진신사리탑을 향해 예불을 올렸습니다.

탑돌이를 하는 중에 1, 2, 3호차가 다행히 랑그람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참배 의식을 마친 후, 뒤따라 온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다행히 일찍 도착했네요. 랑그람에서 못 만날 줄 알았습니다. (웃음) 국경 넘어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여기에서 도시락 맛있게 먹고 룸비니에서 봅시다.“

참배를 마친 순례단은 가사를 접고 로히니강으로 이동할 채비를 했습니다.

랑그람 진신사리탑 앞에는 마을 아이들이 줄을 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사탕을 한 주먹씩 아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차로 30여 분을 달리자,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졌습니다. 로히니강이었습니다. 순례단은 버스에서 내려 강가로 걸어갔습니다.

강 건너에는 몇몇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순례단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경전에 나오듯이 강물을 두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두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스님은 강 근처에 자리를 잡고 로히니강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로히니강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석가족의 땅이, 강 건너편에는 꼴리족의 땅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면서 강물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석가족과 꼴리족은 모두 로히니강의 물에 의지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물이 줄자 양쪽 모두 농사를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꼴리족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강물을 우리 쪽 논에만 대면 수확하는데 큰 지장이 없겠다. 그러나 석가족과 나누면 둘 다 농사를 망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석가족에게 말했습니다.

‘물을 나누면 둘 다 농사를 망칩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 물을 쓰면 우리라도 제대로 수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물을 모두 우리 쪽으로 돌립시다.’

그러자 석가족도 맞받아쳤습니다.

‘그 말 잘하셨소. 그 물을 우리가 다 쓰는 것이 더 낫겠소!’

처음에는 의논처럼 시작되었지만,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결국 다툼으로 번졌습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네가 사람이냐!’ 하며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질까지 오갔고, 여기에 동네 사람들까지 가세하면서 개인 간의 싸움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의 분쟁으로 커졌습니다. 이윽고 양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돌멩이를 집어 던지며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돌을 들고 서로 공격하다 보니, 결국 양쪽에서 군대까지 동원되었고, 사태는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피와 물 중, 무엇이 더 소중할까요?

이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는 ‘저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대로 두면 반드시 전쟁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라고 여기셨습니다. 당시 양측은 언제라도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경전에는 그때 부처님께서 강 위 허공에 떠 계셨다고 전합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어느 한쪽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의 자리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계셨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모습에 양쪽의 시선이 모두 부처님께로 쏠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두 편의 장수를 불러 놓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피가 더 소중합니까, 흐르는 물이 더 소중합니까?’

장수들이 대답했습니다.

‘부처님, 어찌 피를 물에 비유하십니까? 물은 하찮은 것이고, 피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 고귀한 피를 저 하찮은 물처럼 흘리려 합니까?’

이 말씀에 감정에 휩싸여 있던 두 장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부처님의 중재로 양측은 전쟁을 멈추고 화해하였고, 서로 힘을 합쳐 강물을 정비하여 그해의 가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로히니강 물 분쟁’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평화를 중재하신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일화입니다.

지금의 남한과 북한의 상황도 이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언제든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는 위기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남한과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서나 반복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평화를 위해 힘쓰신 사례는 이 외에도 많습니다. 왕사성 영축산에서는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을 설하여 마가다국과 바이샬리 사이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풀어내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막지 못한 비극도 있었습니다. 코살라국이 카필라성을 공격했을 때, 부처님은 세 차례나 직접 나서 이를 저지하셨습니다. 코살라국의 왕은 잠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멈추는 듯했지만, 결국 분노와 원한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군대를 일으켰고, 그 결과 석가족이 전멸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설명이 끝난 후, 순례단은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로히니강을 떠나 한 시간가량 이동해 오후 1시 45분이 되어 룸비니에 도착했습니다. 부처님 탄생하신 성지였습니다. 스님은 먼저 도착한 스태프와 함께 자리를 정리하고 탑돌이 동선을 점검했습니다. 순차적으로 도착하는 순례단은 마야데비사원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후 2시, 스님의 성지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Lumbini) 동산입니다. ‘꽃 피고 새 우는 아름다운 룸비니 동산’이라는 노래 가사 때문에, 우리는 흔히 ‘동산’이라는 말을 듣고 언덕이나 작은 산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룸비니는 동산이 아니라 정원 또는 숲에 가깝습니다. 중국에서는 작은 산을 만들고 정원을 가꾸는 문화가 발달하다 보니, 정원이나 숲을 모두 ‘동산’으로 번역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산’ 하면 자연스럽게 언덕을 연상하게 된 것이지요. 앞으로 경전에서 ‘동산’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정원이나 숲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부처님은 왜 궁궐이 아닌 길 위에서 태어나셨을까요?

부처님 당시에는 친정에 가서 아이를 낳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야부인은 왕에게 허락을 받고 가마를 타고 친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카필라성 동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이곳 룸비니에 도착했을 때가 정오 무렵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카필라성에서 여기까지 거리는 약 28km인데, 한 시간에 4km 정도를 이동한다고 하면 출발한 지 7시간쯤 지난 시점입니다. 아침 5~6시경 출발해 정오쯤 도착했고, 다시 저녁 무렵 돌아올 예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정오 무렵 이 숲에 도착했을 때, 아쇼카 나무에 꽃이 만발해 있었다고 합니다. 쉬어 가기에도 좋고 꽃도 아름다워 가마를 세우고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마야부인이 오른손으로 꽃가지를 잡는 순간 산기를 느끼게 되어 천막을 치고 아이를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장면을 좀 더 아름답게 묘사한 경전의 기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마야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아기가 태어났다. 대범천이 황금 그물을 가지고 와서 아기를 받았고, 제석과 범왕이며 사천왕은 그의 권속들과 함께 와서 아기를 호위하였다. 석제 환인은 보배 일산을 들고 아기를 가려주었으며, 대범천왕이 흰 불자를 가지고 좌우에 시립하였다. 공중에서는 용왕의 형제 난타와 우바난타가 왼편에서 맑고 따뜻한 물을, 오른편에서 시원한 청정수를 토하여 아기를 씻겨드렸다. 아기는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고, 그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사자처럼 외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여기서 ‘천상’은 신들의 세계를 뜻하고, ‘천하’는 인간 세계를 의미합니다. 즉 부처님은 신과 인간을 아울러 이끄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삼계’란 욕계·색계·무색계, 곧 온 우주를 가리킵니다. 특히 뒤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장을 풀어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가운데에서 깨달은 이가 가장 존귀하다. 온 누리의 중생이 모두 괴로움에 놓여 있으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구제하여 괴로움을 없애고 편안하게 하겠다.’

이러한 이야기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수백 년이 지나, 부처님의 일생을 정리한 후대의 작가가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평생 보여주신 인격과 삶을 바탕으로, 출생의 순간을 찬탄하며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신 사실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45년 동안 중생의 고통을 덜기 위해 교화하신 삶을 ‘삼계개고 아당안지’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경전 속 탄생 묘사의 상징적 의미 해석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처럼 위대한 성인이 어떻게 여성의 사타구니를 통해 태어날 수 있겠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해석일 뿐, 역사적으로는 왕족 출신임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인도의 전통 설화에 따르면, 창조신 브라만이 인간을 창조할 때 신의 입에서 브라만 계급을, 옆구리에서 왕족인 크샤트리아를, 배에서 바이샤를, 발에서 수드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카스트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신화적 서사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부처님이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표현은 곧 왕족 출신이라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머니가 친정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즉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길 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길에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친정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고, 가마를 돌려 다시 카필라성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집니다. 위대한 붓다가 탄생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다만 부처님은 이곳에서 태어나기만 하셨을 뿐, 실제로는 카필라성에서 29년간 자랐습니다. 그의 인격과 삶의 토대는 모두 카필라성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은 출생의 상징적인 장소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태어나신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옵니다. 저는 이곳의 의미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동시에 카필라성에 가서 부처님의 성장기와 청소년 시절을 함께 살펴보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이 자리에서 부처님 탄생의 정황을 경전에 따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대중은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마야데비사원을 바라보고 예불을 올렸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이 축원을 해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아기 부처님을 씻기는 욕불 의식을 하며 부처님의 탄생을 기렸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룸비니 동산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다 함께 부처님 탄생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합창을 마친 뒤,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은 누가 쓴 거예요? 법륜스님이 썼어요? 인도 사람이 썼어요?”

“인도 사람이 썼어요.”

“요즘 사람이에요, 옛날 사람이에요?”

“옛날 사람이에요.”

“부처님의 일생은 아주 오래전에 쓰인 기록입니다. 부처님이 출현하신 시대가 있고, 그 뒤로 아쇼카 왕이 인도 전역을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 시대가 이어집니다. 이후 쿠샨 왕조를 거쳐 굽타 왕조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굽타 시대에 이르러 인도의 문화는 급속도로 발달합니다. 동시에 성차별과 계급차별이 가장 극심한 봉건 사회가 이 시기에 확고히 자리 잡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많은 조각과 탑, 불상 가운데 상당수는 마우리아 왕조 때 시작되어 쿠샨 왕조를 거쳐, 현재 남아 있는 형태는 대부분 굽타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예술 작품의 완성도 역시 굽타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경전 역시 대부분 이 굽타 시대에 문자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는 굽타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인도의 전통문화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설화는 사실일까요, 상징일까요?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인도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인도적이었다기보다는 보편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인도적’이라기보다는 ‘글로벌한 가르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요. 부처님은 특정 지역이나 문화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불교는 다시 인도 문화와 결합된 불교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 불교에는 한국적인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산신각이나 칠성각 같은 것들이 그렇지요. 불교가 한국 사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한국의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수용된 결과입니다. 중국 불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어느 지역에 자리 잡느냐에 따라 그 문화와 결합해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인도의 문화가 불교 안에 스며든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붓다가 설한 본래의 가르침이 문화적 요소와 뒤섞이면서 변형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종교 공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인류 문화사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종교와 과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인류 문화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표현했을까?’

고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표현에는 반드시 그 시대의 사회적·문화적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인도에서 ‘여섯’이라는 숫자는 육도윤회를 의미합니다. 육도란 여섯 개의 세계를 말합니다. 생명이 타의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받는 세계가 지옥, 타의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는 않지만 늘 굶주림에 시달리는 세계가 아귀,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어리석음으로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세계가 축생, 능력은 있으나 분노가 가득해 싸움과 파괴를 반복하는 세계가 아수라, 그리고 인간 세계, 마지막으로 신들의 세계인 천상입니다. 이 여섯 세계를 돌고 도는 것이 육도윤회입니다. 아무리 천상이 좋아 보여도, 그곳 역시 윤회의 세계이기 때문에 유한합니다.

그렇다면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육도윤회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즉, 부처님이 해탈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작가가 미리 예언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부처님이 해탈을 얻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렇게 묘사한 것일까요?”

“나중에 묘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해탈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 사실을 바탕으로 출생 장면이 이렇게 상징적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표현 역시 왕족 출신이라는 신분적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도 문화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신의 세계가 위에 있고, 인간의 세계는 그 아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세요?’‘깨달은 분이십니다.’

‘그럼 부처님은 인간이에요, 신이에요?’

‘인간입니다.’

‘그래봤자 인간이네요.’

‘그래봤자 인간’이라는 말에는, 인간은 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고정관념이 깔려 있습니다. 이럴 때는 불교적 관점으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신입니까, 붓다입니까?’

아마 ‘신’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봤자 중생이네요.’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신이라 하더라도, 해탈하지 못했다면 육도윤회하는 중생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입니다.

불교에서는 붓다만이 육도윤회를 벗어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신의 세계를 넘어선 존재입니다. ‘위’가 아니라 ‘너머’입니다. 그래서 붓다를 ‘삼계대도사’라고 부릅니다. 삼계란 인간과 신의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붓다는 신도 아니고, 신보다 위에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신조차도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그래서 붓다를 가리켜 ‘천인사’, 곧 신과 인간의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불교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문을 마친 후, 다 함께 사홍서원을 독송하며 룸비니 참배를 마무리했습니다. 약 3시간이 지나있었습니다.

마야데비사원을 나오려는데 반가운 얼굴을 만났습니다. 홍콩 불교신문 기자 크레이그 님이었습니다. 네팔 여행 중 성지순례 일정에 맞춰 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크레이그 님에게 대성석가사에서 함께 저녁 공양을 하자고 했습니다.

스님은 여러 법사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대성석가사를 향해 걸었습니다.


저녁 6시가 다 되어 대성석가사에 도착했습니다. 총무 보현스님이 스님과 순례단을 맞이했습니다. 스님은 대법당을 향해 서서 삼배를 드리고 보현스님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보현스님, 잘 지내셨습니까? 요즘 네팔 국내 상황이 어지럽던데, 대성석가사는 별 문제 없으셨습니까?“

"크지는 않지만 영향이 있긴 합니다.”

"혼자서 절을 살피시느라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순례단은 도착하자마자 대성석가사에서 준비해 주신 따뜻한 밥으로 공양을 했습니다. 저녁 식사 후 7시부터 법당에서 저녁 예불을 드렸습니다. 법당에는 부처님과 용성조사님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예불을 마친 뒤, 보현스님은 순례단에게 대성석가사의 역사와 불사가 이루어진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정토회 성지순례단이 매해 이맘때쯤 대성석가사를 찾아주는 것이 거의 25년째가 되어갑니다. 이렇게 한 번씩 들렀다 가주시면 저희도 힘이 납니다. (웃음) 정토회 순례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중은 보현스님께 진심을 담아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이 사원이 용성진종조사님의 유훈을 실현한 소중한 도량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묵묵히 불사를 이어온 주지 법신스님과 보현스님의 노고에 감사와 존경을 표했습니다.

밤 8시가 넘어 법회를 마치고 스님은 숙소에서 원고를 교정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2시에 출발하여 탄셴 지역을 방문하고, 부처님이 성장하신 카필라성을 순례할 예정입니다.


2026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3

0/200

견오행

늘 함께 합니다.고맙습니다.()()()

2026-02-04 08:37:49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6-02-04 08:24:55

월광( 달빛 사랑공경)

스님의 하루팀분들! 영상팀분들! 스님과 함께하신 모든분들! 부처님! 나라 선조님들 가족친지 일체중생 천지만물님 은혜속에 오늘도 살아있어 스님의 하루를 읽으며 행복한 시간을 맞이합니다. 임진각기도도 부처님께서 로히니강가에서 전쟁을 막은 것을 생각하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널리 널리 전하겠습니다.

2026-02-04 08: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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