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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동북아역사기행 6일째입니다. 오늘은 용성 조사님의 독립운동 흔적을 둘러보고, 발해진으로 가서 발해의 역사를 살펴보는 날입니다.
새벽 4시 20분에 기상하여 5시에 연길을 출발하여 안도현으로 향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스님이 오늘 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이제 역사 기행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발해의 역사입니다.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가 있었던 지금의 발해진을 둘러본 후 숙소가 있는 통화까지 먼 길을 가는 것이 오늘의 일정입니다.”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 아침 6시에 안도현에 도착했습니다. 안도현은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처하기 위한 명월구회의가 열렸고, 조선인 청년 중심의 친일 군사 조직인 간도특설대가 활동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용성 조사님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명월촌과 봉녕촌에 대규모 농장을 마련합니다.
버스는 명월촌의 옛 이름인 ‘옹성납자’라고 불리는 바위 앞에 도착했습니다. 정말로 도심 한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안도 시장에 잠시 내려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각자 삼삼오오 모여서 입맛에 맞는 음식을 사 먹은 후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명월구회의와 간도특설대는 도시 가운데 덩그러니 비석으로 남아 있었고, 명월촌 선농당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국도로 가면서 봉녕촌 선농당을 보려고 했는데 길을 막아 놓아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은 버스 안에서 왜 용성 조사님이 1922년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급하게 이 땅을 구입했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 당시 이곳은 ‘명월촌’과 ‘봉녕촌’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두 곳에 용성 조사님께서 각 700 정보(町步)씩, 즉 210만 평씩 땅을 사서 선농일치의 뜻을 담아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스님이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보통은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선농일치를 외치면서 선농당을 만들었지만, 실제 목적은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용성 조사님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셨고, 그로 인해 형을 받아 감옥에 수감되셨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해가 1921년인데, 출소 후 자유시 참변의 소식을 들으시고 자금을 모아 몰래 이곳에 와서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할 땅을 구매하셨다고 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선농일치’라는 전통이 있는데, 명목상으로는 농사와 참선을 함께 한다는 기치를 내걸어 위장한 겁니다. 이 땅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한쪽으로는 전라도 만석꾼들에게 모금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왕궁과 연결해서 모금을 했습니다. 당시 순종의 비가 특별 보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은 돈을 가지고 이곳에 왔습니다.
여기는 백두산 자락입니다. 지금은 도시가 되어 있지만, 그때는 사람이 안 살던 곳이에요. 이곳은 백두산에서 연해주로 연결되는 산맥입니다.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 영토라 독립운동을 하기에 안전했습니다. 반면 만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이 아주 강해서 활동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독립군들은 백두산 정글에 들어가거나 연해주 쪽으로 피신을 했어요. 요즘처럼 차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다 걸어 다녔습니다. 백두산으로 갈 수도 있고 연해주로 갈 수도 있었던 이곳에 농장을 구한 것입니다.
당시 여기는 정글 속의 황무지였지만, 갑자기 땅을 구하려고 하니까 비싸게 살 수밖에 없잖아요. 팔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깎을 수가 있지만, 안 팔려고 하는 사람에게서 사려면 돈을 더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어떤 스님이 사기당해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땅을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수십억에 해당하는 큰돈이었습니다.
이렇게 마련된 농장은 선농일치를 실현하는 ‘선농당’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에 들어와서 개간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산물을 70대 30으로 나눴습니다. 당시에는 보통 땅을 빌리면 50대 50이 일반적인데, 경작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 집을 지을 자금을 지원해 주는 등 다른 여러 가지 지원도 했습니다. 무상으로 주면 독립운동가를 지원한다고 들킬 수가 있으니 세상의 규칙에 맞춘 형식을 취하면서 사람들을 도왔던 겁니다. 공개 모집 형식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독립군 가족들이 주로 왔습니다. 이렇게 선농당을 건설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하고 양성했습니다.
‘북간도’라는 소설을 아시나요? 작가 안수길의 유고집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소설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는 용성 조사의 이름도, 위치도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참선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농사짓는 이상촌 이야기가 나옵니다. 몇 년 전에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저희들이 자세히 조사를 해보니까, 그 소설가가 이 땅을 관리한 총책임자의 아들이었고, 용성 조사님이 운영하는 대각교당에서 일요 불교 학교 교사로 활동하신 분이었어요. 즉 그 소설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농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별다른 근거가 없었는데, 그 소설을 조사하면서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일본의 감시가 아주 심했기 때문에 용성 조사님은 용정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숨겨야 했습니다. 겉으로는 스님이 안거 결재에 들어가서 두문불출하시고, 외부와 관계를 안 한다는 식으로 포장을 해 놓고, 실제로는 중국에 오셔서 이런 활동들을 하고 가셨다고 합니다.
봉녕촌에 가면 ‘절단 부락’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일제 말기에 일본이 탄압을 강화하면서 거기 있는 농장에 불을 질러 하루아침에 전소해 버리고 주민들을 다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이 절단 부락이 된 것입니다.”
용성 조사님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뒤로 하고, 이제 기행단은 발해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는 발해진으로 향했습니다.
안도현을 벗어나 고속도로 위를 한참 달리자 돈화시가 나타났습니다. 차창 밖을 바라보며 스님이 설명했습니다.
“돈화는 매우 큰 벌판입니다. 발해는 이곳에 첫 수도를 세웁니다. 이후 국가가 안정되자 화룡 지역인 중경 현덕부로 수도를 옮기고, 그다음에 상경 용천부로 옮겼습니다. 상경 용천부는 돈화 분지보다 훨씬 더 넓은 벌판으로,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적을 방어하기에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평지에 크고 넓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외세의 침공 위험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보다 훨씬 동북쪽에 수도를 정했기 때문에, 주변에 쳐들어올 만한 외적이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방만하고 안일한 태도가 결국 거란의 침입에 순식간에 무너진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버스는 발해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만주 벌판을 쉼 없이 달려갔습니다. 고구려 영토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갖고 동북아를 누볐던 발해인들의 기상을 상상해 보며 발해진으로 향했습니다.
안도현에서 발해진까지 고속도로 위를 3시간 동안 달렸습니다. 오전 10시 무렵 발해진에 들어섰습니다.
"이 고개만 넘어가면 발해진의 넓은 들판이 전개가 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부르면 제일 좋은 노래가 '광야에서'입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넓은 들판을 보며 함께 '광야에서'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다 보니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의 왕궁터 유적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발해 박물관으로 이동해 발해의 영역 지도와 궁성 조감도, 각종 유물들을 관람했습니다.
5년 전만 해도 허름했던 낡은 발해 박물관이 웅장한 새 건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승용 님이 유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후 스님이 다시 한 번 주요 지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음은 발해 시대의 절인 흥륭사로 향했습니다. 저 멀리 백양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져 있는 곳이 바로 외성벽이었습니다.
상경 용천부 외성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흥륭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일주문, 사천왕문을 지나 법당에 모셔진 발해 시대의 대불을 참배하고 정성껏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을 마친 스님이 기행단을 위해 축원 기도를 했습니다.
“우러러 바라옵니다. 우리 한국에서 온 대중은 발해의 상경 용천부 흥륜사 대불 앞에서 이와 같이 참배하고 발원하오니 참배 대중들에게 가피를 내려 주시옵소서. 이곳을 참배한 공덕으로 남북이 평화롭고, 고통받는 모든 중생의 고통이 덜어지며, 참배 대중 모두가 건강하게 이 역사 기행을 마칠 수 있도록 천룡팔부 신중님들께서 옹호하여 주옵소서.”
법당을 나와 발해 시대의 석등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석등은 한국에서 국사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발해를 대표하는 유물입니다. 현무암을 깎아 만든 거대한 석등인데, 발해 시대에 만든 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현재 동북 지역에서 제일 큰 석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륜사를 나온 기행단은 이제 상경 용천부의 궁성으로 향했습니다. 외성 안에 내성, 내성 안에 궁성이 있었습니다.
상경 용천부는 발해 3대 문황 때인 755년부터 785년까지 30년간, 그 후 잠시 동경 용원부로 갔다가 발해 5대 성왕 대화여 시기에 수도를 다시 상경 용천부로 천도하여 망할 때까지인 132년간, 모두 162년 동안 발해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궁성의 정문인 오봉루 앞에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궁성 입구에 있는 모형도를 살펴보았습니다. 모형도를 통해 실제로 궁궐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궁성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 성문의 특징은 정문이 없다는 겁니다. 사람은 옆으로 다니도록 해 놓았는데, 아마 적이 정문으로 뚫고 들어올 것을 대비해서 정문을 없앤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위에 누각이 없지만, 1800년대까지 누각이 남아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통로는 성문 중앙의 양쪽에 있었고, 마차나 말이 다니는 문은 동궁과 서궁 쪽에 따로 있었습니다.
이 궁성은 크게 가운데를 기준으로 왼쪽은 서궁, 오른쪽은 동궁으로 나뉩니다. 서궁에는 주로 왕비들과 아이들이 살았고, 동궁에는 다음 왕이 될 사람인 태자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동궁 태자라는 말이 있죠. 외성이 있고, 외성 안에 내성이 있고, 내성 안에 궁성이 있는 삼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제1궁전, 제2궁전, 제3궁전, 제4궁전, 제5궁전이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습니다.”
오봉루에 올라가자 제1궁전부터 제5궁전까지가 일직선상으로 보였습니다.
“성문보다는 제1궁전이 좀 더 낮고, 제1궁전보다는 제2궁전이, 제2궁전보다는 제3궁전이 조금씩 낮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제5궁전은 손님 접대를 하는 장소이며 온돌이 있는 제4궁전이 왕의 침실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1궁전과 제2궁전은 왕과 신하가 회의를 하며 공무를 집행하는 공간이고, 제3궁전은 왕의 개인 집무실입니다.”
오봉루 위에는 누각이 있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주춧돌이 많았습니다. 스님이 설명했습니다.
“여기 주춧돌을 보면 동그랗게 깎인 게 있습니다. 이렇게 동그랗게 깎인 것은 기둥만 있고 그 주위는 텅 비어 있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반쪽만 동그랗게 깎인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동그랗게 깎인 쪽은 바깥 면이라는 뜻이고, 깎지 않은 쪽은 벽이라는 뜻입니다. 벽 안쪽은 밖에서 보이지 않으니 굳이 깎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지혜일 수도 있는데, 혹시 당시 주춧돌 만드는 사람들이 게을렀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웃음)
오봉루를 지나 궁성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궁터가 나타났습니다. 가운데로 난 길도 있고, 양쪽 끝에서 이어지는 회랑도 있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농담을 했습니다.
“궁전과 궁전 사이는 건물로 연결되어 있어서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설계가 되었어요. 양쪽에 사람이 다니는 통로인 회랑이 있습니다. 회랑의 규모도 엄청 큽니다. 가운데 길은 왕과 귀족이 다니던 길이고, 양쪽 회랑은 왕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이 걸어 보고, ‘나는 가운데로 걸으니 좋다.’라고 느낀다면 예전에 왕족이었을 확률이 높고, ‘양쪽 옆길이 좋다.’라고 느낀다면 무수리 출신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웃음)
스님의 안내에 따라 1궁전에서부터 시작하여 2궁전, 3궁전, 4궁전, 5궁전 순서로 살펴본 후 궁성의 맨 뒤쪽에 위치한 북쪽 성문 앞까지 계속 걸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성문과 제1궁전의 높이가 차이나는 것이 느껴지지요. 계단식으로 이어져 있어요.”
성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성을 한 바퀴 다 도는 것이 만만치 않았지만, 맑은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다들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북쪽 성문에 도착해서 궁성 쪽을 바라보니 5궁성에서 1궁성 쪽으로 나아갈수록 궁터의 지대가 점점 높아져 궁터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계획되어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발해인의 지혜가 놀라웠습니다.
“이곳은 북쪽 성문입니다. 내성에 난 문이에요. 외성이 바깥을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 내성이 있고, 그 안에 궁성이 있습니다. 여기는 궁성의 뒤쪽 끝이니까 궁성의 성벽이면서 동시에 내성의 성벽이 됩니다. 저 뒤에 외성의 성벽이 하나 더 있습니다. 외성을 나가면 목단강이 있습니다. 목단강을 끼고 성벽을 쌓은 겁니다. 성을 쌓은 돌은 성벽 뒤쪽의 돌을 캐서 쌓았습니다. 돌을 캐낸 자리는 물이 고여서 호수가 되었는데, 호수 이름이 ‘현무호’입니다.”
북쪽 성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땀을 식혔습니다. 참가자 한 명이 ‘황성 옛터’를 불렀습니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청년 한 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를 불렀습니다.
언젠가 나의 작은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두 곡 모두 이 장소에서 부르면 알맞은 노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사가 너무나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한반도가 둘로 갈라져 있지만, 대륙을 호령하던 발해인의 기상을 이어받아 한반도의 평화를 간절히 기원해 보았습니다.
다시 궁성을 돌아 나오는 길에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팔보유리정을 지났습니다.
동궁 바깥쪽에는 왕이 배를 타고 놀던 어화원 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어화원 호수는 사람 얼굴처럼 만들었다고 합니다.
상경 용천부 궁성을 모두 둘러보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성벽을 돌아 나가는 길에 이곳에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캐내 오느라 생겼다고 하는 호수 '현무호'를 볼 수 있었습니다.
현무호를 지나자 목단강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기행단은 발해진을 출발해 발해가 시작된 동모산을 보기 위해 돈화로 향했습니다.
버스로 2시간을 달려 오후 4시에 돈화에 도착했습니다. 돈화시에 도착해서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강동 24개석 유적을 보려고 했는데 중국 정부에서 보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고 합니다. 아쉽지만 버스 안에서 간략히 설명하고 돈화시를 지났습니다. 스님이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우리가 이번 기행에서 볼 수 없는 발해의 유물 중 하나가 ‘24개석’입니다. 발해에만 있는 유물인데 실물을 못 봐서 좀 서운할 수 있습니다. 한 군데만 있는 귀한 것도 아니고 길 옆에 여러 군데 있는데도 현재는 봉쇄가 되어 있어서 못 보여 드리니 무척 아쉽습니다.”
동모산 입구로 들어가는 마을 진입로도 공안 차와 포클레인으로 막아 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우회하여 농로로 이동하여 동모산을 볼 수 있는 강 건너편으로 가 보았습니다.
잠시 후 버스 창밖으로 저 멀리 동모산이 보였습니다. 동모산은 고구려 유민이 된 대조영이 유배지를 탈출하여 먼 길을 달려와 새롭게 나라를 세운 발해의 첫 수도입니다.
“저 멀리 삿갓처럼 솟아 있는 봉우리가 바로 동모산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작아서 실망하셨나요? 고구려의 첫 수도인 오녀산성은 웅장한 멋이 있지만, 동모산은 너무 작죠. 발해의 역사는 여러분이 보고 있는 동모산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앞에 대석하가 흐르고 있어서 앞쪽으로는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으로 적이 올라오지 못하게 절벽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강이기 때문에 강을 끼고 성을 쌓은 겁니다. 봉우리의 뒤쪽에 7부 능선을 따라 성벽이 빙 둘러져 있습니다. 동모산은 고구려의 백암산성처럼 규모가 작지만 주위에 다른 산이 없는 넓은 벌판입니다. 그래서 저 산에 올라가면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이 다 보였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시작할 때는 볼품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오전에 상경 용천부를 보셨지요? 얼마나 크고 웅장했습니까. 처음 나라를 건국할 때는 준비된 것이 없기 때문에 작게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발해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는 동안에 적의 침입은 없었습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동모산이 잘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큰 평지에 삿갓을 덮어 놓은 듯한 모양새의 낮은 산이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성을 쌓기에는 좀 밋밋해 보이는 산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방이 평지인 지형 위에 있어서 조금만 올라가도 주변이 훤히 보일 것 같았습니다.
중국 공안이 대거 몰려와서 감시를 했습니다. 멀리서 사진을 찍는 것도 막았습니다.
“5년 만에 왔더니 중국 공안이 환영해 주러 많이도 나왔네요.”
성벽 가까이에 가보면 정말 좋겠지만, 중국 정부로부터 접근이 금지되어 있어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모산을 끝으로 역사 기행의 마지막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제 기행단은 통화까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합니다. 오후 5시에 돈화를 지나 통화까지 4시간을 쉼 없이 달렸습니다.
버스 안에서 소감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이 모범을 보이겠다며 먼저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법륜입니다. 이번에 안내를 맡았습니다. 이번에 다니면서 느낀 소감은 첫째, 북한의 국경 변을 자세히 관찰하려 했는데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몇 군데를 본 결과, 외형상으로는 건물도 들어서고 빛도 밝아져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둘째, 중국에 5년 만에 오니 교통, 호텔 등 모든 것이 많이 개선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통제는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물질적으로 개선되면서 정치적·사상적으로 통제가 심해질 때 어떤 일이 생길까, 그 모순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역사 기행을 진행할 때 어느 정도 선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검토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1호차, 2호차, 3호차, 차량별로 돌아가며 한 명씩 소감을 이야기한 후 노래를 한 곡씩 불렀습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 속에서도 공통된 울림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책으로만 보던 역사를 직접 밟고 나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고 말했습니다. 고구려와 발해의 옛 수도,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었던 땅을 걸으며, 우리의 역사가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요동까지 이어졌음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어떤 민족에서 시작된 사람인지조차 모른 채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걸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5대 문명의 한 축에서 시작된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민족적 자부심이 크게 생겼습니다. 남북 분단의 문제와 독립군의 치열했던 투쟁을 배우고 나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노력을 몰랐던 시간이 미안하고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는 정토회 활동에 더 열심히 참여해 작은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많은 참가자들이 독립운동 유적지에서 느낀 감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일송정에 올라 ‘선구자’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 이도 있었고, 해산을 바라보며 독립운동가들의 심정을 떠올린 이도 있었습니다.
“이번 역사 기행에서 역사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이 아직도 제 가슴 한편에 먹먹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분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활동했고, 어떤 정신으로 살았는지를 우리는 많이 잊고 살았습니다. 일송정에 올라 ‘선구자’와 ‘고향의 봄’을 부르는데, 그들의 마음이 전해져 눈물이 났습니다. 고구려·발해 역사보다도 이번 기행에서 가장 깊게 남은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번 기행은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참가자들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중국 공안의 통제로 인해 많은 유적지를 보지 못했지만,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에서 우리 동포의 작은 흔적이라도 찾으려 했던 제 마음을 발견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나간 역사도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고, 우리가 주인이 되어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역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이 되어 지켜야 한다는 말처럼, 통일을 위한 준비와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여러 소감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번 동북아역사기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나와 민족, 그리고 미래’를 잇는 시간이었습니다. 현장에서 느낀 감동이 우리 삶 속에서 통일과 평화를 향한 실천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보았습니다.
서로의 소감을 귀 기울여 듣다 보니 6박 7일간의 여정이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습니다. 소감 나누기를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난 후 무송현을 지났습니다. 창밖을 가리키며 스님이 무송현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송현을 지나고 있습니다. 무송은 백두산 정글 지대였습니다. 지금은 벌목으로 숲이 많이 줄었지만, 독립운동사를 보면 백두산 밀림에서 많은 독립 무장 투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독립 무장 투쟁의 역사를 많이 배우지 않기 때문에 무송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을 거예요. 백두산록의 서쪽인 무송현과 동쪽인 안도현, 그리고 왕청, 화룡 지역이 독립 무장 투쟁의 중요한 근거지였습니다. 여기가 다 백두산 산록에 속하는 지역입니다. 당시 독립군들은 일본군에게 발각되면 백두산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싸웠습니다. 백두산을 끼고 게릴라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정글 속에서 굳은 약속을 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바로 그곳을 우리가 지금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통화까지 한 시간쯤 남았습니다. 그동안 여러분 모두 질문이 많았을 텐데 질문을 많이 못 받은 게 가장 아쉬워요. 지금부터는 쉴 사람은 쉬고, 질문할 사람은 질문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한 청년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한국 정부의 대응이 없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투고를 하거나 다큐를 만들고 싶다며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조선족 청년들과의 역사 기행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도 하고, 홍익인간 제세이화라는 건국 이념이 과연 그 시대에 가능한 생각이었는지 묻기도 했습니다.
송수신기를 이용하여 스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통화시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밤 9시가 되었습니다.
곧바로 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통화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주를 한 잔씩 돌린 후 이번 역사 기행의 실무 담당자인 조신 님이 건배사를 했습니다.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역사의 숨겨진 진실이 알려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었습니다. 잠시 후 밤 10시 50분부터 강당에 모여 저녁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6박 7일 동안 가장 수고가 많았던 운전기사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이 선물을 전달하고 감사 인사를 하자 대중도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강의 시간이기 때문에 스님은 지난 여정을 돌아보며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배웠는지 총정리를 해주었습니다. 먼저 우리 민족의 뿌리가 무엇인지, 그 후 민족사가 근대까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설명했습니다.
“이번 역사 기행의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고구려·발해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는 것이고, 셋째는 백두산과 압록강·두만강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고구려·발해 유적지를 보면서 웅장한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고구려·발해의 독특한 문화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스스로 ‘나는 북부여의 후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는 ‘나는 단군의 후예다.’라고 했고, 단군은 ‘나는 환웅의 후손이다.’라고 했습니다. 환웅은 ‘나는 환인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환인은 자신이 누구의 아들이라고 말한 바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아들이긴 하겠지만 더 이상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이고 고구려는 부여의 후예, 부여는 단군 조선의 후예, 단군 조선은 배달의 후예, 배달은 한나라의 후예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 스스로 누군가의 후손이라고 말한 것이지, 누군가가 지어낸 것도 왜곡한 바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이 사실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고려는 누가 계승했습니까? 조선이 계승했지요. 왕의 성만 바뀌었을 뿐 같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역성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대한제국은 다시 대한민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는 대한제국이고, 대한제국의 뿌리는 조선 왕조, 조선 왕조의 뿌리는 고려 왕조, 그리고 고려 왕조의 뿌리는 고구려입니다. 그런데 왜 고려는, '영토는 신라를, 정체성은 발해를 계승'했으면서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말했을까요? 당시에는 신라와 발해로 나뉜 남북국 시대이기 때문에 둘 중의 하나를 계승했다고 말하면 다른 하나는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한 단계를 건너뛰어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즉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말은 신라와 발해 모두를 계승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앞으로 통일 대한민국이 된다면, ‘남한과 북한을 계승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렇게 말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대한제국을 계승했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남북을 모두 계승했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한국’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원래 ‘한국’은 ‘한나라’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다만 한문 표기를 하다 보니 ‘대한민국’이 되었고, ‘대한’이라고 한 이유는 ‘한’이 셋으로 나뉘어서 고구려·백제·신라인 ‘삼한’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뿌리가 한나라, 배달 나라, 조선 나라라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한나라의 경우 기록에 남아 있는 왕의 이름이 7명밖에 없습니다. 7명으로 긴 역사를 나누다 보니 한 왕이 500년씩 통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간 기록이 사라진 것입니다. 배달 나라는 1650년간 지속되었는데 기록이 남은 왕은 18명뿐입니다. 고구려도 태조왕의 경우 100년을 통치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아마도 몇 사람의 이름이 빠지고 태조왕으로 대체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역사적 뿌리는 그저 허황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박물관에 가면 관련 유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하면 신석기 시대부터를 말합니다. 그래서 세계 4대 문명의 역사를 5000년 정도로 봅니다. 그런데 최근에 유물 발굴이 고도화되면서 그 연대가 1만 2천 년 전까지 올라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통설로는 사람이 먼저 모여 살고, 모여 살다 보니 종교와 계급이 생겼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튀르키예에서 발견된 1만 2천 년 전 유물을 보면, 신적으로 보이는 웅장한 ‘거석 문화’는 발견됐는데 집단 거주 지역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인류 문명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즉, 종교가 집단 생활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먼저 생기고 그 이후에 종교 건축물을 짓기 위해 집단 노동과 집단 거주를 한 것이라는 가설로 문명사를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석기 문명의 기원을 1만 2천 년 전으로 올릴 수 있고, 전설처럼 전해지던 환인의 한나라도 역사적으로 가능한 이야기가 됩니다.
또한 지금의 중국 내몽골 자치구 오한기(敖漢旗) 일대에는 ‘소하서 문화(小河西文化)’로 불리는 약 9000년 된 신석기 유적이 있습니다. 이는 유물사·문명사적으로 한나라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신석기 문명이 동아시아 전역을 통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지역에서 가장 선진 문명을 이룩한 종족이나 문명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명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일부 집단이 환웅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환웅은 환인 하나님의 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자라면 기존 문명을 계승하고, 서자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환웅이 이어온 선진 문명이 동아시아 인근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멀리 튀르키예에서 이주해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톈산 산맥이나 바이칼호 근방에서 이주해 왔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한나라가 우리 문명의 뿌리인 것은 맞지만 위치나 문명의 수준에 대해서 남아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한나라’가 뿌리임은 분명하나, 직접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배달 나라’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미국의 뿌리는 영국이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곧 영국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환웅이 이끄는 약 3000명의 무리는 신석기 시대 기준으로 매우 큰 집단이었고, 동북아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토착 세력과 갈등하거나 협력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토착 세력들은 각자의 토테미즘이 있었는데 그중에 곰을 숭배하는 세력은 환웅 무리와 협력을 하고, 호랑이를 섬기는 세력은 갈등 관계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단군 신화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곰 종족이 선진 청동기 문명을 지닌 이주민과 함께 배달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선진 문명을 대표하는 징표가 청동기 문명이었습니다. 곰 종족은 신석기 문명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주민들은 선진 문명의 징표로서 청동 거울, 청동 검, 청동 방울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세 가지를 꼭 착용했습니다. 지금도 무당들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서 굿을 할 때는 반드시 청동 거울을 놓고 청동 방울을 흔들며, 청동 검을 휘두릅니다. 이렇게 해서 태백산 아래 ‘신시’를 건설한 배달 나라가 1650년간 지속됩니다. 당시 동북아에서 어디에 나라를 건설해도 백두산(당시 태백산) 아래가 됩니다. 동북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역사에서도 백인이 남아메리카에 가서 인디언을 통치할 때 대통령이나 총독 자리는 항상 백인이 차지했습니다. 이후 토착민과 혼혈이 이루어졌지만, 최고 권력자는 늘 백인이었습니다. 그러다 지금에 와서는 콜롬비아와 같은 나라에서 혼혈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배달 나라는 곰족과 혼혈이 일어났지만, 배달의 천손과 곰족 토착 세력 사이에 태어 아이는 같은 천손이라도 2등 신분이 되었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천손 여인과 혼인해야 1등 신분이 되고, 왕위 계승권도 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단군이라는 사람은 아버지는 천손인데 어머니가 곰족 출신이어서 2등 신분이었지만, 워낙 똑똑해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토착 세력과 혼혈인 사람으로는 첫 임금이기 때문에 단군은 명실상부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군은 나라 이름을 ‘배달’에서 ‘조선’으로 바꾸었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고조선’입니다. 조선 시대와 헷갈리지 않도록 옛날 조선이라는 의미로 ‘고조선’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렇게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조선 나라가 이어졌습니다. 환인과 환웅, 단군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임금의 직함입니다. 한나라에서는 임금을 ‘환인’이라고 불렀고, 배달 나라에서는 ‘환웅’, 조선 나라에서는 ‘단군’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환인의 자손 환웅, 환웅의 자손 단군’이라고 기록되어 마치 딱 세 사람이 각각 수천 년을 산 것처럼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분을 환인 하나님, 환웅 천왕님, 단군왕검님이라 부르며 조상신으로서 삼신으로 모십니다.
이 세 뿌리를 계승한 것이 북부여와 고구려입니다. 부여와 고구려는 ‘열국 시대(列國時代)’라고 해서 하나의 단독 국가라기보다 여러 나라가 경쟁하는 가운데 장손이 주도권을 이어온 형태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 아래에는 거란족, 여진족을 비롯한 여러 소수 민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류 왕권을 쥐고 국가를 유지한 세력은 부여족과 고구려족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후예들이 발해를 세우면서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구 구성의 다수가 말갈족으로 바뀌었고, 결국 말갈족이나 거란족이 정부의 주요 관료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중간 간부까지 모두 고구려족이었고, 하위층은 소수 민족이었지만, 발해 후기로 가면서 왕을 제외한 주요 직책을 소수 민족들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소수 민족들이 국가의 통치를 배우게 되었고, 발해가 멸망한 뒤 고구려족이 통치권을 계승하지 못하자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등이 차례로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고구려족인 우리 민족은 사촌과 형제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원나라는 중원을 제패했습니다. 남북조 시대에는 오호십육국이 중원을 차지했고, 그 이후에는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문명사적으로 보면 동아시아 역사에서 동북 민족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한 기간과, 한족이 지배한 기간은 딱 반반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역사를 크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원인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조선 나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부여·고구려·백제는 정통성 경쟁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소수 민족들이 성장했고, 그들이 오히려 중원을 제패하는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역사적 사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상고사 부분을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요하 박물관에 가면 이러한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을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독립운동사와 분단으로 이어진 근현대사에 대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비록 항일 독립운동이 결과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일제에 항거하며 투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의병 형태로 싸우다가, 독립군 조직을 만들어 싸우고, 또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중국 공산당 안에 들어가 싸우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적군에 합류하거나, 독자적으로 무장 투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항일 투쟁을 했지만 우리 힘만으로 독립을 쟁취할 만한 역량은 못 되었습니다. 치열함만 놓고 보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견줄 수 있었지만, 우리 이름으로 싸운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이름으로 싸운 경우가 많다 보니 전후 식민지 처리 과정에서 승전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어요. 결국 우리는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탓에, 승전국들의 관할권 분할에 휩쓸려서 분단을 맞게 된 것입니다.
당시 승전국이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어서 일본이 항복한 후 전후 처리를 논의하면서 미국은 일본 본토를, 소련은 만주를 관할하기로 했습니다. 대만은 미국이 맡기로 했습니다. 한반도를 두고는 소련과 미국이 서로 맡겠다고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33도에서 43도의 중간인 38도로 잘라서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맡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실제로 남북으로 나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냥 전후 영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결정된 거예요. 만약에 미·소가 동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기여한 비중이 비슷했으면 아마 일본이 분할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80%는 미국이고 20%만 소비에트의 영향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다 미국이 관할하게 되었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만 남북으로 분할해서 관할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북쪽은 경제적, 군사적 조건과 국제적인 위상에서 유리했기 때문에 분단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력 통일을 시도하며 6·25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참여하면서 계획이 실패했어요. 여기서 멈추었으면 좋았을 텐데, 남쪽이 통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승공 통일’을 목표로 밀고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북쪽에서 먼저 쳐내려 온 것만 생각하고 북한이 침략했다고 하는데, 북한과 중국은 그 이후에 우리가 밀고 올라간 걸 가지고 거꾸로 미국이 침략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침공 시점을 다르게 보는 거죠. 남한의 북진에 중국이 참전해서 다시 밀고 내려왔고, 전선이 밀고 밀리다 현재의 휴전선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분단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남북한이 외세의 영향 속에서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정부를 구성했고, 독자적인 정부를 세웠다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영향권 안에 있었어요. 이러다가 전쟁을 거치며 북쪽의 자유주의자는 남쪽으로 도망 오고, 남쪽의 사회주의 성향인 사람은 북쪽으로 넘어갔습니다. 서로 다른 이념 때문에 오해받고 탄압받으니까요. 이렇게 남북 분단은 외세가 만든 분단에서 시작해, 전쟁을 통해 내부적으로도 굳어진 ‘내부적 분단’ 형태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각 정부는 자신이 우리 민족사의 정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남한은 3·1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 정부를 계승했다는 게 제일 큰 명분이고, 두 번째는 UN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치렀다는 점을 내세웁니다. 북한은 독립운동의 세력이 주축이 되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했다는 것이 자기 정체성입니다. 과거에는 북한은 통일 국가를 건설하자고 하고 남한은 두 개의 국가로 가자고 하며 통일을 좀 금기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북한 세력의 균형이 바뀌니까 남한에서는 통일을 이야기하고 북한은 두 개의 국가로 가자는 상황이 되었어요.
중요한 건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첫째는 평화이고, 둘째는 유연성입니다. 마치 결혼을 앞두고 서로 유리하게 하려고 티격태격 싸우는 것과 같아요. 그때 상대가 ‘그러면 너하고 결혼 안 하겠다.’라고 하면,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숙여야 합니다. 비굴해서 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을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면 북한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이 당분간 따로 살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고,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다. ‘어제는 다르게 말하더니 오늘은 왜 이러냐?’라고 하면, 그건 이제 같이 살지 말자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그걸 비굴하다고 한다면, 사랑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정체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남북 모두 불편한 역사를 지워 버렸어요. 남한은 독립운동을 했지만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 빼 버렸고, 북한도 남한 정부에 기여했거나 북한 정부 수립에 도움이 안 된 사람들을 다 빼 버렸습니다. 그 결과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역사에서 빠지고 3.1 운동조차 대단하지 않은 사건처럼 취급하게 된 거예요. 이렇게 자기 정체성만 주장하다 보니 서로 인정하는 독립운동사는 극히 일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독립운동사가 매우 빈약해졌고, 빈약한데도 해방이 된 건 거의 미국의 힘이라고 인식하게 되었어요. 나라를 잃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되찾지 못했다는 큰 열등의식이 생긴 겁니다. 독립운동사가 제대로 정립이 안 되다 보니, 우리는 일제 침략에 대한 피해의식도 있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도 매우 부족합니다. 남의 도움을 얻어 겨우 이뤄낸 것처럼 지금 모든 교과 과정이 짜여 있으니까요.
물론 미국의 도움 없이는 독립이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도 충분히 독립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없는 걸 만들자는 게 아니라, 있는 걸 복원하자는 거예요. 하나는 남북 분단에서 오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결벽증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젊어서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말년에 조금 친일 행적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기록을 지워버리는 식이죠. 그러다 보니 젊어서 죽은 몇몇 사람을 빼고는 역사 속에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결국 만세를 불렀다가 죽은 사람이나 시를 쓰다 죽은 사람이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처럼 남게 됩니다. 물론 그분들도 독립에 기여한 건 맞지만, 독립은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수없이 많은 사람의 희생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유명 인물뿐 아니라 역사 속에 묻힌 수많은 무명의 희생 위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걸 안다면 겸손과 감사, 그리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공부하자고 이렇게 고생하며 역사 기행을 다니는 겁니다. 중국 공안이 이래저래 통제를 하니까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확인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성질을 내면서 ‘다시는 안 올 거다!’하고 안 오면 되지만, 우리는 관광이 목적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약간 역설적이지만, 이런 자극이 오히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됩니다. 원하는 대로 다 가는 것보다, 중간중간 못 가는 게 오히려 발심에 도움이 됩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역행보살’입니다. 못된 짓을 해서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가 더 분발하게 만드는 역할도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런 정도의 방해는 양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 유적지를 못 봐도 괜찮아요. 다 보는 것보다 때로는 이런 양념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는 게 아니라, 가서 기다리고 싸우고 설득하다 못 가기도 하는 겁니다. 이것도 하나의 역사 기행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역사 기행이 우리의 본래 목적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역사 기행을 통해 여러분 모두가 선조들의 노고를 기리고 역사의식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세계사 속에서 당당히 기여할 수 있는 젊은이가 되길 바랍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동북아역사기행의 마지막 밤입니다. 참가자들은 소감문을 작성하고, 조별로 소감문을 읽었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니 밤 12시가 넘었습니다. 내일도 어김없이 새벽 4시 20분에 기상을 해야 해서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심양으로 가서 첫째 날에 보지 못한 요녕성 박물관을 관람하고, 역사 기행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진 후 심양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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