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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동북아역사기행 4일째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날입니다.
어젯밤 12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한 기행단은 잠시 눈을 붙인 뒤,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서 이도백하를 출발해 백두산 천지로 향했습니다.
대중이 모두 버스에 탑승하자 송수신기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
버스가 백두산을 향해 쉼 없이 올라가는 가운데 스님은 백두산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백두산은 화산입니다. 화산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끈끈한 마그마가 솟아올라 종 모양으로 형성되는 종상 화산, 그리고 묽은 마그마가 흘러나와 멀리 퍼져 솥뚜껑이나 삿갓 모양을 이루는 순상 화산이 있습니다. 울릉도는 종상 화산, 백두산과 한라산은 순상 화산입니다.
화산이 폭발하면 먼저 가스와 함께 엄청난 양의 먼지가 분출되고, 그다음에 마그마가 흘러나옵니다. 마그마가 묽으면 멀리까지 흐르기 때문에 완만한 경사면을 형성합니다. 마그마 분출이 멎으면 화산체가 형성되는데, 이때 식은 분화구에 물이 고인 것을 화구호 또는 화구원호라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분화구에서 재차 폭발이 반복되면 분화구가 점점 커져 산봉우리가 사라지고, 넓은 함몰 구조가 됩니다. 이렇게 크고 넓은 분화구에 물이 고인 것을 ‘칼데라호’라고 합니다.
한라산은 ‘화구원호’ 혹은 ‘화구호’이고 백두산 천지는 ‘칼데라호’입니다. 칼데라호의 일반적인 모양은 필리핀에 가면 볼 수 있는데, 큰 화산 폭발이 일어난 분화구에 물이 고이면 호수가 생기고, 또 화산이 폭발해 호수 안에 화산이 하나 생깁니다. 그러면 그 화산에도 분화구가 생겨나고, 그 분화구에 물이 고이면 또 호수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화산 안에 화산, 호수 안에 호수의 형태가 여러 개 생겨납니다. 한국인들에게 관광지로 유명한 필리핀 마닐라 남쪽의 타알 화산도 두 번의 화산 폭발로 인해 생긴 경우입니다.
백두산은 순상 화산이고, 호수는 칼데라호입니다. 만일 우리가 ‘백두산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한다면, 이것은 성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분화구가 워낙 커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긴 곳은 지름이 4.5킬로미터, 짧은 곳은 3.5킬로미터 정도 되기 때문이에요. 화구를 쭉 둘러싼 봉우리들을 연봉이라고 하는데, 등선의 높이는 평균 2,300미터이고 중간에 번쩍 솟은 2,5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16개 정도 됩니다. 제일 높은 장군봉은 2,750미터 정도 되는데 북한에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교과서에는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병사봉’이라고 낮춰서 표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해방 이후 다시 장군봉으로 바뀌었습니다.
천지인 칼데라호에서 물이 1킬로미터 정도 흘러 내려가서 폭포가 되는데, 옛 이름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해서 ‘비룡 폭포’라고 불렀습니다. 비단을 두 필 떨어뜨려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비룡 폭포는, 지금은 ‘장백 폭포’로 불리고 있습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영산으로, 전통적으로 산머리가 하얗다고 해서 백두산(白頭山) 혹은 그냥 백산으로 불렀는데,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합니다.”
역사와 과학을 넘나들며 백두산에 대해 요모조모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백두산' 노래를 힘차게 불러 보았습니다.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
신선한 겨레의 숨소리 살아 뛰는 백두산으로 ♬
함께 노래를 부르는 사이 새벽 5시 50분에 백두산 황송포 환승 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스태프들이 두 번째 매표소까지 바로 올라갈 수 있는 표를 미리 끊어 두어서 첫 번째 매표소를 가볍게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매표소는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백두산을 찾는 사람이 하루 평균 3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백두산 정상에 오를 수 없기 때문에, 관리소에서는 시간별로 끊어서 관광객을 들여 보내 주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린 끝에 7시 10분에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다음 정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셔틀버스를 타고 30분쯤 오르자 백두산 천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전 7시 45분에는 승합차로 갈아탔습니다. 이 지점부터는 경사가 가파르고 길이 굽이져 있어 승합차를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해발 2,600m가 넘는 산 정상까지 꼬불꼬불한 도로가 나 있었습니다. 운전자의 곡예에 가까운 운전 실력으로 아찔한 재미를 느끼며 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8시 10분에 백두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백두산 정상에 내리니 완전히 구름에 휩싸여 있고 빗발까지 날렸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서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백두산 정상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습니다. 흐릿한 속에서 한 발 한 발 능선 위로 가 보았습니다.
구름이 가득했지만 스님은 해발 2,660미터 높이의 천문봉 앞에 도착해 송수신기로 간단하게 안내를 했습니다.
“백두산 천문봉 정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 천지 바깥쪽은 바람이 불 때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데, 천지 안쪽은 안개로 뒤덮여 전경이 보이지 않네요.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려면 다른 것 보는 것을 포기하고 여기 계속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1시간 정도만 기다렸다가 내려가서 비룡 폭포와 다른 경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천지가 보이는 위치에는 발을 디디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조별로라도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있는데 너무 많은 인파 속에서 도저히 자리를 점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 찍는 것은 포기하고, 혹시 안개가 걷힐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기다려 보았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정상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천지는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거센 바람뿐이었습니다. 모래가 날아와 얼굴을 때렸습니다. 춥고 힘든 사람은 먼저 내려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 시간쯤 더 기다려 보았습니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니 사람들은 가지도 못하고 능선에 붙어 서서 천지를 구경했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더 높은 하늘로 쑥 올라가더니 옥빛 천지가 살짝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우와! 보인다.”
천지가 살짝 보일 듯 말 듯 했습니다. 다시 안개가 짙게 끼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시시각각 날씨가 변했습니다.
또 한참을 기다리자 이번에는 구름이 아주 많이 걷혔습니다. 천지의 전체 모습이 아주 잠깐 보였습니다. 또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야! 천지가 보인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습니다. 맑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부는 백두산 정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은 어쨌든 천지를 봤다며 좋아했습니다.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마음속에 담고 9시 30분부터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야생화가 산 곳곳에 피어 있었습니다. 눈 속에서 이미 싹을 틔우고 눈이 녹자마자 일시에 꽃이 폈다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에 생을 마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피어나는 모습이 참 경이로웠습니다.
다시 승합차를 타고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가파른 고개를 요리조리 꺾어가며 내려갔습니다.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을 보니 마음이 탁 트였습니다.
다음은 비룡 폭포로 향했습니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나무 계단을 따라 길을 걸어가니 군데군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온천물이 보이고, 저 멀리 회색빛의 화산 지형 사이로 새하얀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비룡 폭포가 보였습니다.
비룡 폭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소천지까지 걸어서 내려갔습니다.
“자, 이제부터는 동요를 부르며 원시림을 천천히 걸어가 보겠습니다.”
숲길을 내려오며 동요를 함께 불렀습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니 졸음이 가시고 눈까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숲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소천지에 도착했습니다.
소천지는 정말 맑고 투명한 호수였습니다. 소천지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작은 호수는 ‘소천지’입니다. 기생 화산이 용암을 분출해 흘러내리고, 그 화구호에 물이 고인 것이 소천지입니다. 그런데 이 용암이 굉장히 끈끈해서 흘러내리지 않고 불쑥 솟아서 그냥 굳어버리기도 합니다. 제주도에 가면 수많은 오름이 있는데, 그것도 기생 화산입니다. 소천지에 있는 기생 화산은 펑 터져서 용암을 분출한 것이고, 제주도 오름은 땅에서 끈끈한 용암이 푹 솟아 올라와 그냥 굳어버려서 생겨난 겁니다. 소천지는 바람 없는 맑은 날에는 주위 풍경을 거울처럼 비춰서 산과 호수가 구분이 안 되고 똑같아 보여요. 또 둥근 거울 같은 호수라는 뜻으로 ‘은환호(銀環湖)’라 부르기도 합니다.”
다시 숲길을 걸었습니다. 스님은 이곳 백두산 천지 주변의 산림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 하얀 색 나무는 자작나무입니다. 옛날에는 종이를 대신해서 자작나무 껍질을 종이로 많이 사용했어요. 경주 천마총 그림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져 있습니다. 연모하는 이에게 자작나무 껍질에 연서를 써서 보내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땅은 전부 용암으로 된 현무암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나무가 멀쩡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밑이 전부 용암이라서 나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옆으로 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탁 넘어지면, 아랫부분이 구운 빈대떡 모양처럼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뿌리째 뽑힌 나무를 이용해 조각하기도 합니다. 수십 개의 뿌리가 얽혀 있는 것을 용 모양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위 위에 나무가 자랄 수 있을까요? 현무암은 용암이 분출해서 갑자기 식어서 생긴 거잖아요. 그 돌에는 구멍이 많이 있고, 그 구멍에 수분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위 위에 이끼가 자라고 나무들도 잘 자라는 거예요. 용암이 땅 위에 흘러가면서 그대로 굳었기 때문에 땅 위에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친 것과 마찬가지죠. 대지 전체를 용암으로 포장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용암이 굳으면 어떻게 될까요? 시멘트 포장이 굳으면 갈라지는 것처럼 용암이 굳으면 쩍 갈라지는데, 그 틈서리 깊이가 5미터에서 10미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개울물이 내려오다가 갈라진 틈으로 다 들어가 버리겠죠. 위에는 벌어진 틈이 1미터 정도로 아주 좁은데, 그 아래로 내려가는 물의 양은 엄청나게 많은 거예요. 그래서 큰 개울물이 내려오다가 땅속으로 들어가니까, 위에서 보면 갑자기 물이 없어져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땅에 스며든 것이 아니고 그 틈으로 물이 지나가는 거예요.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내려오는 넓은 개울이 이곳에서는 용암이 갈라진 틈바구니로 들어가 버린 겁니다. 비룡 폭포에서 흘러 내려오는 강이 여기에는 없잖아요. 강물이 용암이 갈라진 틈바구니로 전부 흘러 들어가 버린 겁니다.”
한참을 걷자 녹연담(綠淵潭)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지금 도착한 곳은 녹연담입니다. 해가 비치면 물 색깔이 녹색으로 변한다고 해서 ‘녹연담’이라 불립니다.”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연못에 녹색 에메랄드빛이 가득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빛깔이 나는 것인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폭포를 배경으로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녹연담을 나오자 지하 산림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계속 지나가고 있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지하 산림까지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녹연담을 끝으로 오후 1시에 백두산 관람을 마치고 산문의 출구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 30분에 이도백하에 도착해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어제는 밤 11시에 도착하여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이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오늘은 최대한 제 시간에 식사를 하기 위해 지하 산림을 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지하 산림을 갔다 온 사람들이 있어서 그분들을 기다리느라 전체적으로 일정이 늦어졌습니다. 스님은 시시각각 변경되는 일정에 맞춰 음식을 준비한 식당 주인과 직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님의 책을 선물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 3시 40분에 이도백하를 출발해 청산리 전투터가 있는 화룡으로 향했습니다.
“백두산 구경 잘 하셨어요? 백두산 천지를 바늘구멍만큼이라도 본 사람 있어요?”
“네, 봤습니다.”
“천지가 두 번 열렸는데요. 첫 번째는 정말 손톱만큼만 보였고, 두 번째는 호수의 절반 이상이 드러났습니다. 그 정도면 백두산 천지를 본 거예요. 못 봤다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예전 같았으면 ‘이게 다 내 덕이다.’ 했을 텐데 요즘은 아니에요. 역사 기행을 거의 30년 가까이 하면서 천지를 세 번이나 못 봤기 때문에, 이게 제 공덕은 아닌 거예요.”
누군가 밤새 기도를 했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어제 밤새 기도한 사람이 있었다고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지, 천지를 보여 달라고 기도해서야 되겠어요? (웃음)
이제 우리는 백두산을 쭉 내려갑니다. 많이 걷고 밥도 먹었으니 지금부터 한두 시간 쉬고 나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푹 주무세요.”
오전 내내 2만 보가 넘게 걸었더니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특별한 설명 없이 모두 버스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청산리 마을이 가까워져 오자 스님이 다시 대중을 깨웠습니다. 스님은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당시의 정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잠시 후에 청산리 전투터에 도착합니다. 바로 옆에 혜란강의 상류가 흐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혜란강을 따라 이동 중입니다.
1905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곳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간 것입니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국운이 기울자, 뜻있는 우국지사들이 사유 재산을 팔아 그 돈을 가지고 건너가서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심는 운동을 시작한 거예요. 이것이 씨앗이 되어 이곳 이민 사회가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 북간도,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입니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 국내에서는 의병 전쟁이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의병으로 나라를 구하지 못했고, 1910년에 강제 합병이 이루어졌죠. 이후 1919년까지는 독립을 향한 저항 운동이 다소 잠잠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다 1919년 3·1 운동이 불길처럼 번져나가자,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지사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고 상해 임시 정부를 수립합니다. 북간도, 연해주, 서간도를 비롯한 해외 각지와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모여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꿈꾸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모든 약소국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이 지배하던 발칸 반도를 해체해서 독일의 세력을 꺾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당시 일본은 승전국이었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 선언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어요. 둘째, 각 지역의 우국지사들이 모였지만 견해가 제각각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라의 독립을 위한 종합적인 계획은 세우지 못하고 자리다툼만 벌어졌죠. 결국 3·1 운동은 무참한 탄압 끝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평화적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가 없으니, 무력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1919년 말부터 1920년대 초까지 본격적인 무장 투쟁 준비가 급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모금을 하고, 총기를 구매하고, 훈련을 시키고, 일본군과 유격전, 이른바 게릴라전을 펼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 등 무력 충돌이 잦아졌고, 일본군은 점점 압박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1920년 봄, 함경북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독립군 근거지를 소탕하려고 만주로 진격했고, 4월에는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일본군이 두만강을 넘어 독립군 근거지인 봉오동 계곡으로 진입했지만, 홍범도 장군이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격파하며 첫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일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천하무적이라 자부하던 일본군이 오합지졸로 보던 조선의 게릴라 부대에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니까요.
그러자 일본은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고 탄압하기 위해 일본군을 만주에 진출시키겠다고 강하게 압박합니다.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해 ‘훈춘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일본군이 만주에 대규모로 파병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10월, 대대적인 독립군 소탕 작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등 여러 부대가 따로따로 백두산 쪽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흩어졌고, 도망가며 반격을 한 것이 바로 ‘청산리 전투’입니다. 전반적으로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이 근방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를 통칭해 청산리 전투라고 합니다.
그중에 김좌진 장군의 부대가 혜란강 상류에서 백두산으로 철수하던 중, 추격하던 일본군을 반격해 승리를 거둔 ‘백운평 전투’ 또는 ‘직속택 전투’는 좁은 의미의 청산리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우리의 민병이 승리한 것입니다.
일본군 한 개 사단이 만 2천 명 정도였는데, 청산리 전투에서 그중 3,300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사단의 4분의 1이 피해를 입은 것이니 일본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었겠죠. 이 사건으로 인해 독립군은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어 러시아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을 당하고 거의 괴멸이 됩니다. 또한,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을 명분으로 이 산 저 산의 골짜기마다 조선족 마을을 불태우고 세간을 약탈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민간인의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이것을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합니다. 이민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청산리입니다. 청산리 입구에는 한국 사람들이 돈을 모아 지방 정부의 허락을 받아 세운 ‘청산리 전투 승리 기념탑’이 있습니다. 건립 과정에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기행단은 오후 5시 45분에 청산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공안이 와서 길을 막았습니다.
스태프가 아무리 말해도 길을 비켜 주지 않자 스님이 스태프를 불러 조용히 말했습니다.
“노래도 안 부르고, 절도 안 하고, 사진만 찍고 오겠다고 말해 보세요. 만약 사진 찍는 것도 안 된다고 하면 조용히 보고만 오는 것도 안 되는지 물어봐 주세요.”
스태프가 다시 이야기를 해보고 돌아왔습니다.
“곤란하다고 합니다.”
스님이 한 번 더 요청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한 번 더 이야기해 보세요. 80년 전에는 한국과 중국이 다 같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해서 싸웠고, 그걸 기념하는 전적지를 참배하는 것은 중국과 한국이 함께 협력하고 공감하기에 좋은 일이 아니냐고 말해 보면 좋겠어요. 올해가 항일 투쟁 승리 80주년이기 때문에 이곳을 참배하는 것은 조선 백성과 중화인민이 함께 항일 투쟁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한 번 더 이야기해 보세요.”
스태프가 다시 한 번 설득하고 여러 제안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비로 인해 길이 패여 위험하다는 이유로 중국 공안은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기다리는 중에도 자재를 실은 트럭은 버스 옆을 유유히 지나 청산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면 걸어서라도 가겠다고 해보았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아쉽지만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돌아갑시다.”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버스가 방향을 돌리자 스님이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제안을 했습니다.
“자, 기분도 전환할 겸 누가 독립군가를 불러 봐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 함께 독립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숙소가 있는 화룡으로 향했습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 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마을들이 보였습니다. 스님이 지붕의 모양을 가리키며 이야기했습니다.
“저기 건너편에 조선족 마을을 한번 보세요. 지붕이 다 팔작(八作)지붕이죠. 여기는 조선 사람들만 사는 마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족은 어쩌다 한두 명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다 조선족이 개척한 곳입니다. 중국 동북 지방에 벼농사, 논농사를 정착시킨 것도 다 조선족이에요.
저기 보이는 집은 민자 지붕을 올린 한족의 집입니다. 같은 동네에 오래 살아도 집 짓는 방식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생활 습관도 다릅니다. 그래도 같은 동네에서 어울려 잘 살아갑니다. 그런데 통치자들이 민족 감정을 자꾸 부추겨 적대적으로 만드는 것이죠. 그러나 주민들은 어느 지역 사람이든 같이 일하며 사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통치자들이 민족 감정을 이용해 갈등을 유발하곤 하죠.”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 화룡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8시 30분에 모두가 강당에 모였습니다. 스님이 ‘독립운동사’를 주제로 1시간 30분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전쟁 규모로 보면 큰 성과가 아닐 수 있지만, 게릴라 부대가 정규군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큰 승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전투는 우리 국민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3.1 만세 운동을 하다 많은 사람이 죽고 재산도 잃으면서 실패와 좌절 속에 있었는데, 무장 투쟁으로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리니 우리 국민들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 사상자가 3,300여 명이나 나왔습니다. 독립군에게는 아주 큰 승리였지만, 전략적으로 보면 꼭 승리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 관동군 병력이 백만 명이라고 한다면, 그중 만 명이 죽더라도 큰 타격은 아니잖아요. 결국 화가 난 일본은 독립군 섬멸 작전을 벌였고, 독립군은 더 버틸 수 없어 중국에서 러시아로 넘어가게 됩니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혁명이 성공했지만, 변방에서는 황제의 군대인 백군과 혁명군인 적군이 계속 전쟁을 하고 있었어요. 시베리아 쪽은 아직 적군이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었고요. 러시아에 있던 우리 독립군 안에서도 두 가지 입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중국에 있어도 중국 군대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그저 중국 땅에 있는 조선 독립군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들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기 때문에 작전권 같은 모든 권한을 우리가 가진다는 입장이 있었어요. 그러나 러시아 적군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모든 군대는 적군 안에 편입돼야 한다는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 입장이었기 때문에 조선 독립군이라는 별개의 군대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이 두 입장 차이로 인해 연해주에서는 적군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과 독립군 입장에 선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도움을 받기 위해 러시아로 넘어갔지만, 그 안에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당시 독립군 몇천 명이 전부 러시아로 갔는데, 정작 거기서는 누가 지휘권을 가질지를 놓고 다투고 있었던 거예요. 두 입장을 모두 들어 보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는 쪽이 우리 독립군의 입장에서는 더 타당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쪽에 힘을 실어 주었는데, 이 소식을 알고 결국 적군이 독립군을 포위하여 공격했고,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독립군이 러시아군과 싸워 이길 수는 없었죠. 큰 피해를 입고 흩어졌고, 그로 인해 초기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은 일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입니다. 이 일로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은 급격히 힘을 잃게 됩니다.
이후에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성향의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민족주의는 ‘우리가 독립하자.’라는 것이 중심이라면, 사회주의는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을 동시에 추구합니다. 특히 계급 해방에 대한 비중이 높다 보니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과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자유시 참변 이후 민족주의적 독립운동도 계속되긴 했지만, 큰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연해주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가 약소국의 독립을 돕겠다고 하자, 공산주의가 뭔지 잘 모른 채, 우리의 독립을 위해 일단 러시아의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다른 제국주의 나라는 식민지를 삼는 제국주의의 입장을 옹호하지만, 러시아 혁명 정부는 피지배 민족의 해방을 옹호하니까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주의는 일국 일당 주의였기 때문에 한 나라에 하나의 당만 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에 있으면 조선 공산당 소속이지만, 중국에 가면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야 했고,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공산당에 들어가야 했어요. 그런 점에서 당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다른 나라에 간 사람들과 공산당 중심 입장이 잘 맞지 않았던 겁니다. 중국 공산당은 여러 민족이 사는 동북 지역에서 항일 연군을 만들었고, 조선족도 여기에 참여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였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우리 독립군은 아니었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볼 때는 한국 이름을 걸고 독자적으로 독립 투쟁을 해야 인정해 줄 수 있는데, 이들은 중국 공산당 소속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도 러시아 군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싸웠더라도 그것을 한국을 위한 투쟁으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개인적으로 보면 엄청난 참여를 했지만, 국제 사회에서 보기에는 한국이 일본의 일부였던 거예요. 그래서 일본이 패망하고도 우리는 승전국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패전국의 고통을 감수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로 인해 결국 분단을 낳게 된 것이죠.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크게 나누어보면, 독립운동의 초기에는 의병이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좌절되자 그다음에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중심이 되었는데, 그 핵심 사상은 대종교(大倧敎)였습니다. 대종교는 단군을 국조로 삼는 종교로, 나철(羅喆)이 세웠습니다.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의 일부는 괴멸되었고, 일부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 사이 잠시 공백기가 있었고, 이후의 독립운동은 성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이 동북 항일 연군에 많이 참여했고, 조선 의용군처럼 약간 좌파적이지만 중국 공산당에는 들어가지 않은 부대도 있었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무장 투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윤봉길 의사는 일종의 의거 투쟁을 했죠. 1940년 이후에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광복군을 조직했지만, 제대로 활동하기 전에 해방이 되어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장제스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그 덕분에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장제스의 회담 참여를 스탈린이 반대하면서, 국제 사회에서는 조선의 독립이 논의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 통치 이야기가 나오며 분단으로 이어진 거예요.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이 한 번 언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제스를 포함한 중국의 위상을 높이려는 연합국의 전략적 판단과 일본 제국주의 해체 구상 속에서 조선의 독립이 논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구 사회는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보았고, 우리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는 인정받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요. 국내의 조선 공산당은 무장 투쟁을 할 수 없었고,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도 각각 중국과 러시아 공산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독립운동 세력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주독립이 가능한지 여부는 독립운동을 어떤 방식으로, 또 얼마만큼의 역량을 갖추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는 많은 투쟁을 했습니다. 역량이 부족했다기보다는 투쟁 방식이 하나로 모아진 독자적인 저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국제 사회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의 일부를 어떻게 전후 처리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이렇게 어떤 일을 할 때는, 첫째, 역량이 중요하고, 둘째,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영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을지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물론 미국과 상해 등 국내외 여러 지역에서도 많은 독립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서간도, 북간도, 연해주가 우리 독립운동의 주된 근거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립투사들은 국내에서도 싸웠고, 국외에서도 싸웠습니다. 윤봉길과 안중근처럼 의거를 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중심은 서간도, 북간도, 연해주, 이 세 군데였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는데요. 그중 한 명은 왜 중국 정부는 한국 사람들의 항일 유적지 방문을 못 하게 하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동북아 역사 기행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중국 당국이 우리의 여행에 대해 통제를 너무 심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어제는 국동대혈(國東大穴)에도 가지 못했고, 오늘은 청산리 전투터를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고구려나 발해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쳐도, 항일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를 방문하는 것까지 왜 이렇게 제한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방문을 막는 이유는 중국 당국이 무엇을 우려하기 때문인가요?”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중국 공안에게 제가 설득하려 했던 이야기 역시, 이것이 항일 독립운동 유적이라는 점이었어요. 오히려 ‘항일’이라는 문제에서 보면 한국과 중국 간에도 협력할 수 있는 공감대가 생기잖아요. ‘항일’이라는 주제를 빼 버리면, 한국과 중국 사이에 공감대가 사라지고 수천 년간 우리를 침략했다는 피해 의식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한중 관계가 자연스럽게 기분 나쁜 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어요. ‘항일’이라는 문제의식을 함께 가질 때에만, 한국과 중국은 서로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왜 그런 기회를 막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올해는 중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일본으로부터 승전한 광복 80주년이잖아요. 이런 해에는 오히려 항일 유적지 방문을 더 권장해서 많은 사람이 찾게 해야 할 일인데, 왜 그걸 꺼리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웃음)
그런데 중국 당국은 저희한테 ‘여행이라는 건 문화 관광인데, 청산리 같은 곳을 왜 가느냐?’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런 역사적 유적지를 방문하는 것도 문화 관광의 일부거든요. 그런 질문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광개토 대왕비를 보러 가면 ‘왜 관광을 와서 고구려를 보려고 하느냐?’라고 묻는데, 그렇다면 광개토 대왕비에서 입장료는 왜 받고 공원은 왜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현장은 분명한 역사적 유적지이고, 문화 관광지 안에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대종교 3인묘도 항일 독립운동사와 깊이 관련된 유적지입니다. 그런데 중국 정부 관계자가 ‘관광 왔으면 먹고 마시고 놀아야지, 무덤에는 왜 가느냐?’ 하며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항의를 하게 되면, 중국 정부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사를 못살게 굴어요. 여행사 등록을 취소해 버린다든지 이런 식으로요.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을 괴롭히니까 결국엔 못 버티게 되는 거죠. 저 혼자야 괜찮지만 도와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잖아요. 그런 점에서 저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대종교 3인은 모두 항일 운동의 핵심 인물들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의 행적이 갖는 의미를 중국 정부에서 제대로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싶어요.
처음부터 금지한 것도 아니에요. 지금까지 늘 방문했던 곳인데, 오히려 중국이 발전하고 개방되면서 더 제한을 하거든요. 이전에 금지했던 것까지 넓혀 줘야 할 텐데, 지금은 지난 30년간 해오던 것도 막고 있습니다. 물질적 인프라는 천지개벽할 만큼 발전했지만, 정신적 자유, 창의성, 다양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가면 발전에 한계가 올 수밖에 없어요. 한국이 발전하는 데에는 민주화라는 과정을 거친 것이 매우 컸어요. 민주화는 초기에는 혼란을 불러오지만, 일정 수준의 발전 이후에는 개방이 뒤따라야 발전이 가속화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한류도 개방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폐쇄적인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도 지금 중국의 관광 정책에 의문이 듭니다. 우리는 관광 정책을 세울 때 새로운 관광 상품을 계속 개발하려고 하잖아요. 어떻게든 관광객을 끌어들이려고 반딧불이 축제, 나비 축제 같은 것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중국은 이렇게 역사적 근거가 분명하고 의미 깊은 유적지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 유적지가 자신들의 미풍양속이나 문화 정서에 어긋난다면 조정을 통해 풀어 나가면 되거든요. 그래서 저는 질문자보다도 더 궁금한 입장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웃음)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스님은 이번에 역사 기행에 참가한 일부 참가자들과 담소를 나눈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동북아역사기행 5일째 날입니다. 아침 일찍 대종교 3인묘를 참배하고, 오전에는 용정에서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점심에는 도문에서 두만강 건너편 북한 땅을 가까이에서 보고, 오후에는 한반도 최북단을 돌아 연길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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