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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91일째 날입니다. 어제 자연 속에서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 스님은 다시 서울로 향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 해가 떴습니다. 차 안에서 도시락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8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업무를 보다가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10시 15분이 되자 3층 설법전에는 250여 명의 대중이 자리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일요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30분씩 세 번 명상을 했습니다. 포행할 때는 자세와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대중은 모둠별로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점심 식사를 한 후 지하 대강당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지하 대강당에서 백일법문 봉사자 만남의 날 행사를 했습니다. 이번 백일법문 기간 동안 경전 강의, 불교사회대학, 정토불교대학, 수행법회, 금요 즉문즉설, 1080배 정진, 명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많은 봉사자들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건물 운영과 관리, 청소, 공양 준비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애를 썼습니다. 총 337명의 봉사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봉사자 만남의 날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이번 백일법문 특별정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수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노고와 정성 덕분에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 주신 모든 분들의 노력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법륜스님께서 단 하루도 빠짐없이, 쉬지 않고 귀한 가르침과 법문을 들려주신 데 있습니다. 이번 백일법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새롭게 다가오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천일결사의 마지막 해인 3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시점이면 ‘지쳤다’, ‘그만해야겠다’ 하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지금은 그런 이야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런 말들이 사라진 이유는 백일법문의 공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정토회 회원들의 정성 위에 오늘 이 순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백일법문 동안 곳곳에서 봉사를 한 활동가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 속에서 길게만 느껴졌던 지난 백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다음은 이번 백일법문이 무사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음을 축하하며 봉사자 중 장정윤 님과 김라결 님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노랫말 속에서 수행의 향기를 가득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누구나 무대 앞으로 나와 자유롭게 발언하는 1분 스피치 시간을 가졌습니다. 100일 동안 봉사하면서 들었던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시간입니다. 다들 스님 앞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나 봅니다. 1분 스피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나섰습니다.
“갑자기 팀장을 맡게 되었지만, 지금 90일이 넘으니까 이제는 도반들이 가족 같습니다. 100일이 끝나면 앞으로 300일도 같이 해요.”
“부처님 말씀에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할 수 없다.'는 말귀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참가했는데 여러 사람들과 일하다 보니 재미가 있습니다. 봉사는 역시 보람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크게 느꼈습니다.”
“저는 건강이 안 좋아서 1080배 하다가 쓰러지면 어떡하지 걱정했습니다. 스님의 격려에 힘입어 ‘쓰러지면 정토회에서 제사라도 지내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했습니다.”
“청소는 아무리 깨끗하게 해 놓아도 표시가 안 납니다. 하지만 뭔가 지저분하면 지적받는 일입니다. 경전에서 바보 주리반특이 청소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이야기를 읽고 내 마음의 때를 벗기는 것이 청소라고 생각하고 내 집보다 더 깨끗하게 청소하고 했습니다.”
“저는 봉사하러 나오는 게 오히려 저를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는 화나고 짜증나고 증오하고 원망하는 목소리와 얼굴만 대했거든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분들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봉사 덕분에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공양간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가 스님이 내려오시면, '스님, 우리하고 사진 한번 찍어 주세요!' 이래도 사진을 안 찍어 주셨어요. ‘왜 신김치만 있고 맛있는 김치가 없냐.’ 그러셨어요. 그런데 저희들이 맛없는 걸 드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요, 하필 남은 김치를 내놓은 날에 딱 걸린 거예요.” (웃음)
봉사하면서 서운했던 일도 유쾌하게 말해서 모두에게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시간 관계상 더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마무리를 했습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문경수련원에서 진행하는 나눔의 장에서 펼치기로 하고 1분 스피치 시간을 마쳤습니다.
다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해 준 활동가들에게 선물을 증정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물 증정식에 앞서 스님이 먼저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백일법문을 진행하느라 다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정토회는 봉사한 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잖아요. 법륜스님도 원칙을 어기면 지적을 받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 두북수련원에서 거사님들이 무더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초기를 돌려 주어서 ‘국수라도 한 그릇 삶아 줍시다.’ 하고 제안하면, 옆에서 행자가 ‘스님, 그건 정토회 원칙에 어긋납니다.’ 하고 지적해요. 그래서 제가 ‘지도법사가 국수 한 그릇도 못 주나?’ 하고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작년에 두북수련원에서 벼농사를 지어 수확해 놓은 쌀이 있어 찹쌀 3kg이나 맵쌀 5kg를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봉사를 많이 한 사람은 염주 한 개 더, 책 한 권 더, 마지막으로 일주일 내내 봉사한 사람은 보드가야에서 가져온 불상 사진을 넣어 만든 액자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평등을 가르치는 불교에서 이렇게 차별을 하면 어떡합니까!’ 하고 항의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도 할 말이 있어요. 여러분도 봉사를 차별적으로 했기 때문에 저도 그에 맞게 차별적으로 선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웃음)
전체 337명의 봉사자를 대표하여 주 4일 이상 봉사하신 분들이 모두 앞으로 나왔습니다. 스님이 직접 염주를 목에 걸어 주고 선물을 증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봉사자들은 스님의 마음이 듬뿍 담긴 쌀 포대와 책 등을 받아 들고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선물을 한아름 받아들고 기쁜 마음으로 모두가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수행자가 어떤 마음 자세로 봉사해야 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백일법문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봉사자 여러분 덕분입니다. 오늘 참석한 330여 명뿐만 아니라 참석하지 못한 300여 명까지 합하면 봉사하시는 분이 600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분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기에 이번 백일법문이 가능했습니다. 모든 것이 바로 여러분의 노고 덕분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봉사’라는 말은 본래 없었던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은 자기 삶을 살아갈 때 ‘봉사한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얼굴을 씻고, 내가 입을 옷을 만들어 입고, 내가 먹을 음식을 손수 지어 먹고, 밭에 나가 농사를 짓는 일을 우리는 봉사라고 하지 않잖아요. ‘봉사’라는 말은 오히려 자신의 노동을 돈을 받고 파는 일이 생기면서, 그것과는 반대로 노동을 돈을 받고 팔지 않고 행하는 일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표현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으면 ‘노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임금 노동자’라고 합니다.
이런 기준으로 과거를 돌아보면, 노예는 일을 해도 대가를 전혀 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주인이 대가를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노예는 노동을 착취 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예는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을 빼앗긴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중세 시대에는 농노가 생겨났습니다. 농노는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특정한 땅에 속박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농사를 짓는 노예라는 뜻으로 농노(農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일반 노예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에서 자기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후 시대가 지나면서 일부 농노들이 영주에게 돈을 주고 신분을 사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입니다. 노동자는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노동을 하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얼마에 어디에 팔 것인가를 직접 선택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노예는 주인이 결정하고, 농노는 영주가 결정했지만, 노동자는 스스로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봉사’란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돈을 받지 않고, 즉 나의 재능을 팔지 않고 내 일처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돈을 받아야 하는데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직접 하겠다.’ 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가끔은 봉사를 강제로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이 부하에게 봉사를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노예나 농노는 아니지만, 그 일을 할지 말지를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대신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눈치를 보며 어쩔 수 없이 봉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와 달리 순수하게 자기가 봉사를 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자원봉사’라고 합니다. 자원봉사는 마치 내가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하듯 내 일을 스스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돈을 받고 무언가를 파는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원봉사는 곧 자기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그 행위를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노동을 한 대가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한 사람들은 ‘왜 굳이 돈도 안 받고 바보 같은 짓을 하느냐?’라고 말할 수 있겠죠. 여러분의 친구나 가족, 특히 배우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당연한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도와주는 행동을 ‘바보 같다.’ 이렇게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봉사는 자기실현의 길입니다.
수행자는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팔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돈을 받는다면, 저는 수행자가 아니라 노동자가 됩니다. 스님이라 하더라도 월급을 받는 학교 선생님이나 교수로 일한다면, 엄밀히 말해 수행자가 아니라 학자나 임금 노동자일 뿐이에요. 이것은 계율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 농산물을 팔아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계율에 어긋납니다. 출가 수행자가 지켜야 할 ‘일하지 말라.’는 계율은 단순히 노동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노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입고, 잠잘 수 있으려면 누군가의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빚을 지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남이 만든 옷을 입는 것도 빚을 지는 일이므로 남이 버린 옷을 입어야 하고, 남이 만든 음식을 먹는 대신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지어 놓은 집에 사는 것도, 설령 그 집을 보시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빚을 지는 것이기에 숲 속이나 동굴, 빈집 처마 밑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대신 이렇게 살아야 누군가의 노동에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건 괜찮아요. 그러나 그 일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출가자는 돈벌이를 못 하게 되어 있어요. 즉,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출가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받아들여서 노동은 하지 않으면서 남이 주는 돈이나 물건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원래는 버려진 음식이나 낡은 옷만 허용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고급 음식을 제공받거나 새 옷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겉보기에는 형식을 갖춘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은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에서 강의를 하더라도 돈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의 삶의 원칙에서 보면 결코 바보 같은 일이 아닙니다. 강의하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그 강의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은 계율에 어긋납니다. 농사도 마찬가지예요. 자급자족하기 위한 농사는 가능하지만, 수익을 내기 위한 농사는 수행자의 길과 어긋납니다. 즉, 자신이 먹고살기 위한 것이나 남에게 주기 위한 것은 괜찮지만, 그것이 돈벌이로 이어지면 계율에 어긋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선(禪) 불교에서는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반면에 남방 불교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 버려진 음식을 걸식하여 먹는 방식이 이어져 왔습니다. 겉으로 보면 노동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보시에 의존한 생활 방식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이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禪) 불교가 전해지면서, 걸식하는 방식은 버리고 ‘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자급자족의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는 가르침으로, 보시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보시는 무언가를 구매하듯이 돈을 내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대가를 바라고 돈을 냈다면 그건 보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매매한 것에 해당합니다. 여러분이 낸 돈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아야 온전한 보시가 될 수 있습니다. 보시와 마찬가지로 봉사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정토회에 오면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 해요. 밥을 먹으려면 밥을 해야 하고, 시설을 이용하려면 청소를 해야 합니다. 청소하기 싫으면 사용을 안 하면 되고, 밥 하기 싫으면 밥을 안 먹으면 됩니다. 그래서 밥 하기 싫은 사람은 도시락을 싸서 오라고 하는 거예요. 밥은 먹고 싶지만, 밥 짓는 일은 안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정토회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수행 공동체인 정토회에서는 아무리 특별한 직책을 맡고 있더라도 공양 당번이나 청소 당번은 반드시 돌아가면서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다 해 놓은 기반 위에 누리기만 하겠다는 태도는 곤란합니다. 각자 맡은 일이 있더라도, 밥 짓기나 청소, 빨래처럼 공동생활에 꼭 필요한 일들은 조금씩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 공동체의 기본 원칙입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정토회는 자원봉사 시스템으로 운영됩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수행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수행자는 누구를 고용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고용하게 되면 고용주와 피고용인이라는 불평등한 관계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회사 사장인데, 정토회에 수행하러 왔다고 합시다. 그때 비서를 데려왔다면, 비서는 밖에 두고 혼자 안으로 들어와서 수행자로 머무는 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비서도 정토회 회원이어서 함께 법당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도반 관계입니다. 더 이상 사장과 비서의 관계가 아니에요. 만약 여전히 사장과 비서의 관계로 머문다면, 정토회는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수행 공동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정토회 회원 자격이 없거나, 최소한 그중 한 사람은 수행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겁니다.
해외에 가 보면 부유한 한국 사람들이 현지에 정착하면서 가정부나 운전기사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이 운전사나 가정부를 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부처님도 바깥세상 일까지 일일이 관여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법당 청소를 집에 있는 가정부가 대신하거나, 법당에서 밥하는 일을 가정부가 맡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주인이 같이 가자고 하니까 따라와서 일을 하는 겁니다. 이런 일은 정토회에서 금지되어 있습니다. 법당 밖에서 하는 일은 상관없지만, 법당 안에서는 가정부가 청소하거나 밥 짓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밥을 먹으려면 직접 밥을 해서 먹어야 합니다. 집에서 음식을 가져오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법당 안에서는 스스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정토회가 수행자들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이 방식은 일반적인 사찰처럼 복을 빌어 주고 그 대가로 보시를 받아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며 운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정토회는 수행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구조로 운영됩니다. 여러분이 낸 보시금도 어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낸 것이기 때문에 그 보시는 온전히 공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봉사 역시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곳에 강의하러 가서 강사료로 100만 원을 받았다면, 저는 노동자로서 임금을 받은 것이 됩니다. 행사 주최 측에서는 100만 원을 지급했으니 서로 간에 거래가 있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거래만 있지 공덕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료로 강의를 했다면 봉사를 한 것이 되니 공덕이 됩니다. 또한 행사 주최 측에서도 JTS에 보시를 하면 그 또한 공덕이 됩니다. 그러니 이 관계는 매매 관계가 아니라 서로 공덕을 짓는 관계가 됩니다.
서로 공덕을 짓는 관계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대가를 주고받는 것은 매매이지만, 대가 없이 서로를 위한 마음은 사랑이라고 불러요. 정토회가 자원봉사에 기반해 어렵게 운영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정토회는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운영하냐고 반대하는 사람도 많아요. 사실 저도 이 방식이 과연 지속 가능할지 확신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이 원칙을 지켜나가 보자는 마음으로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원칙을 실제로 지키며 정토회가 지금까지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러분이 봉사를 해 주신 덕분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어서 봉사하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궁금한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정토회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봉사가 큰 일이라는 점도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정토회 회원이 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 그런지, 우리의 봉사가 정토회 내부에만 머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이 하는 봉사는 대부분 정토회 건물을 관리한다든가 정토회 내부를 운영하는 일에만 대부분을 할애하는 것 같습니다. 회원들이 하는 봉사가 사회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정토회 회원이 아닌 사람이 정토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토회는 밖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토회 내부의 일을 남에게 도움받는 것은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토회 회원이 아닌 사람은 일하면 안 된다는 권리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토회는 자립을 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정토회 회원이 아닌 사람이 정토회를 돕는다면 그것은 자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외부에 ‘도와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정부에도 지원을 요청하지 않아요. 물론 필요한 사업에 신청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먼저 요청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자발적으로 후원하면 받습니다. 그것은 보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토회가 먼저 지원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정말로 많이 어렵다면 요청하겠지만, 정토회는 자립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토회 회원이 아닌 사람이 정토회에서 봉사하고 싶다면, 정토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봉사하도록 안내를 합니다.
정토회도 여유가 생기면 당연히 주변에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하겠죠. 하지만 지금 정토회는 자립을 하기조차 버거운 상황입니다. 내부에서도 일할 사람들이 부족한데, 바깥으로 나가 봉사를 확대할 여력이 없습니다. 집안일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외부 일을 하겠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국내에서는 정토사회문화회관을 관리하는 일 외에도 으뜸절 운영, 농사일 등 다양한 일들이 있고, 지금도 인력이 크게 부족한 실정입니다. 사실상 외부의 도움마저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 보자는 것이 정토회의 자립 원칙입니다.
물론 국외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도, 필리핀, 시리아, 파키스탄, 캄보디아, 부탄, 스리랑카 등지에서 학교를 짓는 등 여러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벅찬 형편이지만, 국제적으로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꾸준히 자원봉사로 구호 활동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대만의 자제공덕회는 정토회와 달리 핵심 활동가들에게 월급을 지급합니다. 또한 외부의 자원봉사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전 세계에 100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만 내에서도 50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원봉사 조직이 촘촘하게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교 신자도 있지만 자원봉사는 별도의 조직이어서 독립적으로 운영됩니다. 이들은 자원봉사 훈련을 받고 자원봉사를 하며, 환경 실천 활동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수행자 모임이 아니기 때문에 월급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제 구호 활동을 할 때도 정토회는 현금 지원을 하지 않지만, 그곳은 현금을 직접 지원합니다. 자원봉사 시스템의 규모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갖춰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토회는 자원봉사보다는 수행의 원칙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앞으로 정토회 회원이 더 많아지고 자원봉사자의 수도 늘어나면, 당연히 외부에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도 더 활발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정토회 외부에서 하는 일들은 굳이 정토회 회원들만 참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동네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할 때는 그가 정토회 회원인지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정토회 내부의 일은 자립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정토회 회원이 맡아서 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을 하나만 받고 법문을 일찍 마쳤습니다.
이어서 봉사자 만남의 날을 마치며 다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백일법문 기간 동안 공동체에 입방하여 여러 분야에서 봉사해 온 청년붓다 팀들이 무대에 올라 가요 ‘터’를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해종 정토회 대표가 닫는 인사를 했습니다.
“6월 1일이 되면 백일법문을 회향하게 되고, 1차 천일결사는 200일을 남기게 됩니다. 남은 200일 동안에도 스님께서 닦아 주신 발판 위에 우리 모두가 정토사회문화회관에 모여 다시 한 번 영상을 통해 법문을 계속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귀한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 가면 좋겠습니다. 봉사자 여러분,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번 100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봉사를 꾸준히 이어 갈 것을 다짐하며 사홍서원으로 봉사자 만남의 날 행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행사를 마치면서 팀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회관관리팀, 불교대학팀, 수행법회팀, 경전강의팀, 불교사회대학팀, 수행정진팀, 즉문즉설팀, 마지막으로 팀장 그룹까지 차례로 앞으로 나와 오늘 이 순간을 기념했습니다.
행사가 마무리되자 유수 스님이 전체 봉사자에게 쌀을 한 포대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쌀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해가 저물고 스님은 실내에서 업무를 본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92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반야심경 7강 강의를 하고, 저녁에는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20강 강의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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