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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43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2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강의를 들으면서 궁금했던 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 분들이 다양한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한 분 한 분의 질문에 모두 대답을 한 후 금강경 강의 일곱 번째 시간을 이어 나갔습니다. 금강경 제11분, 제12분, 제13분을 읽고 나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으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일체의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수많은 공덕을 쌓아 자재천왕이나 대범천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 하여 복이 다하면 다시 이 세상에 떨어지게 되므로 그러한 복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괴로움의 씨앗이 잉태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속 가능한 행복이 아닙니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을 수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이 말씀은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히 깨닫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자꾸만 복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 중생의 마음인데,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복을 받는 것이 중심이 아닙니다. 무위복승(無爲福勝)에서 무위(無爲)란 ‘함이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런 바람이나 분별이 없는 행을 '무위의 행'이라고 합니다. 그 무위로 얻어지는 복이 그 어떤 복보다도 수승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불교의 종교적인 측면에 치우쳐서 불상 앞에 공양 올리고 절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바로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치는 일입니다. 깨우쳐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제11분 무위복승분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읽고 또 중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번에는 불상을 치워 버리고, 절도 안 하고, 참선도 안 하려고 합니다. 그저 사구게만 중얼중얼 외우면 된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공(空)에 집착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또한 공에 집착하지 않도록 늘 중도를 지켜야 합니다.”
이어서 제12분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을 읽고 설명한 후 제13분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제13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은 ‘법대로 받아 지녀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며, 저희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하라"고 하시면서 그 이름에 상을 지을까 염려되어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법을 말한 바가 있느냐?’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수보리가 그 뜻을 이해하고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가히 설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하는 뜻입니다. 정함이 있음이 없는 법을 얻고 설하셨다고 해서 이름하여 ‘얻는다’, ‘설한다’ 하고 말하지만 ‘이것이 법이다.’ 하고 정할 수 있는 법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여! 모든 가는 티끌은 여래가 가는 티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가는 티끌이니라. 여래가 세계를 말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이니라.’
여기서 ‘세계’란 가장 큰 것을 의미하고, ‘티끌’이란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티끌에 비하면 세계가 ‘크다’라고 말할 수 있고, 세계에 비하면 티끌이 ‘작다’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티끌이 있어서 티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티끌이고, 세계가 있어서 세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의 모습이 아닌 우리의 인식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마음에서 상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여기에서 ‘여래는 삼십이상(三十二相)을 가지고 있다.’ 하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서른두 가지 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는 말은 맞지만, ‘삼십이상이 부처님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륜성왕도 삼십이상이거든요. 부처는 ‘깨달은 자’를 말합니다. 몸의 상호로써 정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마침 석가모니 부처님은 서른두 가지 몸의 특징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깨달으면 ‘이 부처님은 이러이러한 특징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라고 하니까 특별한 모양을 가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 뿐이에요. 가령 코가 높은 사람이 깨달으면 부처님은 코가 높은 것이 특징이 되고, 돼지코 모양이라면 부처님은 돼지코가 특징이 되겠죠. 그래서 부처님이 이러한 몸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런 몸의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부처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양이 눈에 익으면 어떤 사람이 법륜스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나왔을 때, ‘어, 법륜스님 오셨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상에 집착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법륜스님이 이렇게 생겼다.’ 하는 문장은 참인 명제입니다. 역으로 ‘이렇게 생긴 사람이 법륜스님이다.’ 하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긴 사람’과 ‘법륜스님’은 동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짐승이다.’ 이 말은 참이지만, ‘짐승은 사람이다.’ 이 말은 맞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짐승과 사람은 동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보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반대로 다시 '없다.'는 데에 집착합니다. ‘이렇게 생기면 무조건 부처님이 아니다.’라든지, ‘삼십이상을 가진 사람은 부처가 아니다.’라고 해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상이 없다.'는 데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삼십이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부처라고 할 수가 없다.’ 하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부처님이 계속해서 이렇게 비유를 드는 이유는, 제법이 공한 도리, 즉 본래 정함이 없는 도리를 확연히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함이 없는 도리만 알면 될까요? 아닙니다. 없는 데서 인연을 따라 있는 도리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있고 없음의 관계, 즉 공과 색의 관계를 알 때 세상에 걸림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함이 있는 도리도 알아야 하고, 정함이 없는 도리도 알아야 합니다.
본래 사람이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한다고 정해 놓은 규칙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할 때는 웨딩드레스나 한복을 입고, 장례식장에서는 검은색 옷을 입습니다. 이렇게 대충 어떻게 입는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사람이 꼭 옷을 입어야 된다든지, 벗어야 된다든지, 이렇게 정함은 없지만, 사람이 있을 때는 옷을 입고,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벗는 도리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한쪽으로 치우친 나머지, 있는 도리만 알아서 경직되거나, 없는 도리만 알아서 무질서해집니다. 그래서 수행을 잘못하게 되면 막행막식(莫行莫食)으로 함부로 행동할 수가 있습니다. 공(空)에 빠져서 공병에 걸리는 겁니다. 반대로 법에 집착해서 고지식하게 원칙을 고집할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금강경을 읽는 것이 어떤 공덕보다 크다.’라는 글자에 사로잡혀서 보시도 안 하고, 봉사도 안 하고, 그저 금강경만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혼식이나 어떤 행사에 가면 돈으로 보시하지 않고 그저 금강경만 보시해요. 금강경을 보시하면 공덕이 한없이 크다는 데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가르침은 있고 없음, 즉 색과 공의 중도적 관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인연이 정해지면 가는 길이 딱 정해집니다. 인천에서 출발하면 서울 가는 길은 동쪽! 이렇게 딱 정해져요.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연이 바뀌면 어떻게 될까요? 인천에서 서울로 가려고 동쪽으로 가다가 중간에 안산에 잠깐 들렀어요.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안산에서 출발하면 어제처럼 동쪽으로 가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 위치에서는 북동쪽으로 가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시공간이라는 인연 속에서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가 딱 정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그때의 중도’라고 합니다. 어떤 인연에서의 중도라고 해서 ‘시중(時中)’이라고 합니다. 중도가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연에서의 중도가 각각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인연에서의 중도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가령 어떤 여자가 울고 있어요. 너무 슬퍼 보이고 가엾어서 안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자를 안았어요. 그리고 성추행범으로 몰렸다고 합시다. 이렇게 나에게 욕망이 있으면 그 인연에서의 중도를 자기 멋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살펴야 하는데,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 있으면 중도가 안 되는 겁니다. 이렇게 중도는 온갖 오류를 합리화할 수 있는 위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초심자일수록 중도를 먼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바른 길’을 먼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중에 ‘바르다’라고 하는 것에 치우쳐서 너무 경직되면 다시 융통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막행막식으로 흐르지 않도록 늘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상에 집착하니까 공한 도리를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다시 공에 집착하면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도리를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금강경 제9분부터 제13분까지를 목탁 소리에 맞춰 함께 독송하며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본 후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1층 식당으로 이동하여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며 저녁에 있을 불교사회대학 강의 준비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7강 강의를 했습니다. 지난 여섯 번의 강의를 통해 불교의 세계관, 실천론, 우주론, 생명관, 인생관 등 불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에 대해 큰 틀에서 공부했습니다. 오늘 일곱 번째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강의 주제는 ‘불교적 사상에 근거한 인생의 가치 기준’입니다.
“만약 사람이 혼자 산다면 특별히 지켜야 할 규칙이 있을까요? 없다고도 할 수 있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굳이 규칙이 있다면 자기를 해치거나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 게 규칙일 테죠. 그러나 자기를 해치는 일이거나 괴롭히는 일이라고 해서 비난이나 처벌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규칙이 없다고도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혼자 살면 옷을 벗고 다니든지,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 다니든지,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규칙이나 기준을 마련하려면 적어도 사람이 두 명 이상 모여야 합니다. 두 사람이 방 하나를 나누어 쓰게 되면 기상 시간이나 취침 시간, 청소 등의 역할 분담과 규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윤리나 도덕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모두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무엇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니 이것을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의 범위에서 개인이 지켜야 할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문제를 개개인이 알아서 좀 지켜줬으면 하고 마련한 것이 윤리와 도덕입니다. 그러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강제성을 두고 지키게 하는 것이 법률입니다.
이러한 윤리나 도덕, 법률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거나, 그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면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 제도나 문화, 관습 등 사회적인 문제는 그때그때 바꿀 수가 있습니다. 즉, 사회를 개선하거나 개혁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윤리나 도덕, 법률 등의 가치관은 나라, 지역, 민족, 종교에 따라 다릅니다. 같은 사회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조선 시대에 악으로 치부되던 것이 지금은 선인 것도 있고, 반대로 선이 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선악이 다를 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나는 이 지역에 살면서 이런 관점을 갖고 있고, 상대는 저 지역에 살면서 저런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둘이 같이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갈등이 심합니다. 힌두교에서는 소를 신성시해서 소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이슬람교는 돼지를 부정하게 생각해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이슬람교 입장에서는 힌두교에서 돼지고기를 먹으니까 너무나 부정하게 느껴지겠죠. 반대로 힌두교에서 볼 때는 이슬람교에서 어떻게 신성한 소를 먹을 수가 있냐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많은 사회적인 갈등이 유발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보편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종교나 지역, 시대가 달라도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온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에 의해서 진리는 검증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옳고 그름을 주장할 때 윤리적 기준이나 도덕, 관습, 계율, 경전 등에 의지해서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진리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나라나 지역, 시대마다 각기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사실이고 어떤 것은 거짓이라고 딱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이 불교의 기본 관점입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전 세계와 전 시대를 꿰뚫는 굉장한 통찰력입니다. 만약 무슬림이면 알라의 성전에 기록된 대로, 기독교인이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불교인이면 불경에 기록된 대로 진리의 기준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것으로 진리를 검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부처님은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 생태계입니다. 자연 생태계를 윤리적으로 제로 베이스로 보는 관점을 가진 겁니다. 자연 생태계보다 나으면 좋고, 떨어지면 나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생태 윤리를 바탕으로 해서 인간 윤리를 설정한 것은 아마 불교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요. 옛날에는 다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 윤리만 생각했으니까요.
오늘날은 환경 파괴 문제와 기후 위기로 인해 인간 윤리만으로 세상을 바람직하게 만들기가 굉장히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생태 윤리를 중요시하는 관점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불교의 가치관은, 첫째, 생태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둘째, 나와 남을 동시에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나만 보고 얘기하지 말고, 상대만 보고 얘기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그건 하지 마라.’ 하고 상대에게 말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 편만 보지 말고 나와 남을 동시에 보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결혼해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지.’라고 말하려거든, 내 배우자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관점에 서야 합니다. ‘물건을 훔칠 수도 있지.’라고 말하려거든, 다른 사람이 내 물건을 훔쳐가도 괜찮다는 관점에 서야 합니다. ‘화가 나면 때릴 수도 있지.’라고 말하려거든, 상대가 화가 나서 나를 때려도 괜찮은지를 같이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 위에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사람이 아닌 것까지도 함께 고려해서 살펴보라는 것이 불교의 가치관입니다.”
이어서 스님은 불교의 다섯 가지 실천덕목인 오계에 대해 하나씩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오계가 현대사회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첫째,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 적어도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
둘째, 도둑질을 하지 말라.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함부로 뺏거나 훔치지 말라. 적어도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뺏지 말라.
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함부로 하지 말라. 적어도 남을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사실이 아닌 것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적어도 남을 속이거나 욕설하지 말라.
다섯째, 술을 먹지 말라. 중독성 물질을 함부로 섭취하지 말라. 적어도 술 먹고 취하지 말라.
“이 다섯 가지가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을 보는 기본적인 가치입니다. 만약에 이 다섯 가지만 잘 지켜진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이 거의 없어집니다. 만약 깜깜한 밤에 낯선 남자와 무인도에 둘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절대로 나를 해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절대로 나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절대로 나를 성추행하는 등 괴롭히지 않는다.’, ‘이 사람은 절대로 욕설하거나 사기를 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절대로 술을 먹고 취해서 행패 부리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두려울 일이 없겠죠. 이 다섯 가지만 보장이 되면 사람을 만나서 두려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남편이라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성추행하거나 술을 먹고 취하면 두렵습니다. 그게 내 자식이나 부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다섯 가지는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지켜진다면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법률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전국의 범죄자를 대상으로 종교를 조사해 보면, 과연 불교 신자가 없을까요? 인구 전체로 비교해 봤을 때 범죄자 중에서 불교 신자나 기독교인이 현저히 적을까요? 그러니 불교인이냐, 기독교인이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소한 이 다섯 가지를 지키느냐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가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사회적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전 세계인들에게 얘기했을 때도 종교, 지역, 사회를 넘어 인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계를 지키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믿어서 내가 복을 받거나, 사상 논쟁이나 하기를 좋아하지, 실제로 세상에서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기본 오계는 특정한 종교의 계율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울려 살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사회가 어떻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오계입니다. 그래서 이 가치를 지키는 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다섯 가지에 덧붙여서 세 가지가 더 있습니다.
여섯째, 꽃다발을 쓰거나 향을 바르지 말라. 돈이 많더라도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아라.
일곱째, 높은 평상에 앉지 말라. 지위가 높더라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라.
여덟째, 가무를 즐기지 말라. 마음이 들뜨는 향락에 빠지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라.
내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그 돈을 낭비하거나 함부로 해선 안 됩니다. 계율에는 ‘사치하지 말라, 꾸미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많이 가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소비를 많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기후 위기 시대에는 얼마나 소비를 줄이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재산이 많더라도 쓰지 않으면, 이름만 그 사람 앞으로 되어있을 뿐이지 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나중에 남을 나눠주든 공공재로 남아있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득이 많은 사람의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거나 소득을 평준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소비를 일정 선 이상 못 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는 소비를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게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엄청난 중범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이 소비하는 것을 부러워하면 안 돼요. 돈을 많이 갖고 있다고 다 나쁘다고 봐서도 안 되고요. 그런데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검소하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덧붙인 세 가지 중에 첫째 계율이 ‘사치하지 말아라.', ‘검소하게 살아라.’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과소비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계율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입니다. ‘겸손하라’는 것을 그저 다른 사람에게 숙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항상 오랜 친구를 대하듯 똑같이 대하면, 내가 지위가 높을 때는 상대가 나를 겸손하다고 하고, 내가 지위가 낮을 때는 당당하다고 합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은 허상일 뿐입니다. 지위에 관계없이 두 사람이 평등하게 만난다면, 지위가 높은 사람은 겸손하다고 말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당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위가 높으면 교만하기가 쉽고, 지위가 낮으면 비굴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아,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겸손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셋째 계율은 ‘가무를 즐기지 마라.’입니다. 이것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라는 거예요. 들뜨는 즐거움은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수행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들뜨는 즐거움은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들뜨는 즐거움은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수행이란 마음을 항상 고요히 간직하는 것입니다. 좋으면 그냥 빙긋이 미소 한번 짓는 겁니다. 이것이 ‘평정심을 유지하라.’,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라.’ 하는 계율의 의미입니다.
이 세 가지를 더해서 팔계(八戒)라고 합니다. 여덟 가지를 지키면 굉장히 고상한 인격체가 됩니다. 돈이 많아도 검소하게 살고, 지위가 높아도 겸손하고, 항상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앞의 다섯 가지는 남에게 해가 되거나, 손해가 되거나, 괴롭히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고, 뒤의 세 가지는 스스로 자신을 청정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뒤의 세 가지는 남을 해치지 않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는 행동입니다.
계율을 항상 지키면 좋고, 또한 지키려고 늘 노력하지만, 찰나에 무지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감정에 치우쳐서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가고, 손이 가고, 추행을 하고, 욕설이 나오고, 술을 마시게 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잘난 척하고, 사치하고,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기가 쉽습니다. 그럴 때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참회를 할 때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계율을 어겼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 뉘우쳐야 합니다. 세 번째, 다시는 어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뉘우치고 다짐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혼자서 참회하고 자각하고 뉘우쳐도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저 사람은 수행자가 계율을 어기네?’, ‘수행자가 맨날 화를 내네?’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 앞에 드러내어 고백해야 합니다. ‘제가 계율을 어겼습니다.’, ‘제가 화를 내서 죄송합니다.’ 하고 대중 앞에서 드러내서 참회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포살’이라고 합니다. 혼자서 자각하고 참회하는 것을 ‘참회’라고 하고, 그것을 대중 앞에서 드러내어 참회하는 것은 ‘포살’이라고 해요. 그런데 대부분 자기가 화를 내고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욕심을 낸 줄도 잘 모르고요. 그래서 도반들에게 나를 위해 얘기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제가 혹시 계율을 어긴 게 있습니까?’ 이렇게 청하면 도반들이 지적을 해줍니다. 이렇게 타인의 지적을 통해서 내가 나의 잘못을 자각하고 참회하는 것을 ‘자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참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참회를 통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앞으로 사회문제를 풀어나갈 때도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오계와 팔계를 기준으로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회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중도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오계의 기준에서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관점에 서야 지혜로운 해결책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기준이 없으면 다짜고짜 ‘그건 안 됩니다.’ 하고 자기주장만 하기가 쉬워서 논란이 더욱 커집니다. 제가 북한에서 식량난이 발생했을 때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니까 어떤 사람은 ‘북한에 식량을 주면 안 됩니다. 그거 먹고 힘내서 총 들고 쳐내려 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교적 관점에 서서 북한의 실제 상황이 어떤지를 살펴야 합니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려 있다면 먹어야 하고, 목말라 있다면 마셔야 하고, 헐벗고 있다면 입어야 하고, 병들어 있다면 치료 받아야 합니다. 이런 기본 관점을 갖고 우리가 모든 문제를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은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불교적 관점에서 본 정의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불교의 정의론에 대해 배우기로 하고 7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음 나누기 속에서 오늘 배운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44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주간반 정토불교대학 4강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JTS 활동가들과 미얀마 지진 피해 긴급 구호단 파견에 대해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저녁반 정토불교대학 4강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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