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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는 나에게 신세계이다.
e실천활동 마이두엄에서 이심교 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차분하고 편안하게, 세심하고 따뜻하게 진행하는 모습이 듬직했습니다. 정토행자의 하루 주인공으로 다시 만나 반가웠습니다. 연애, 결혼은 관심 없고 주말마다 산에 오르던 아가씨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특별한 아이 덕분에 부처님 법을 만나고 신세계를 경험합니다. 산처럼 우직하게 세상을 품는 대구경북지부 동대구지회 이심교 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아버지는 나르시시즘, 어머니는 관세음보살 아버지는 올해 88세로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했고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손이 귀한 집의 장남으로 사랑을 많이 받고, 귀하게 자라 당신밖에 몰랐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아버지한테 맞춰야 하고, 뜻대로 안 되면 화내고, 고함치는 호랑이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오후 4시 반쯤 귀가하면 저는 4시부터 심장이 벌렁거렸습니다. 아버지가 말하면 정신이 멍해졌고, 무서웠던 마음은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도 남자가 소리치면 얼고, 주눅이 듭니다. 2025년 4월 동대구지회의 날, 아도모례원 마당 잡초 뽑기 어머니는 관세음보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야야, 세상에 공짜가 없다.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거는 네가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라고 상황을 설명하고 친절하게 가르쳤습니다. 육 남매가 비뚤어지지 않고 그나마 바르게 자란 건 엄마의 공덕입니다. 21세에 시집온 엄마는 어린 삼촌과 고모를 챙기느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 자다가 눈을 뜨면 엄마가 안방구석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기도는 시끄러운 일상에 마음을 진정시키는 힘이었습니다. 5년 전, 교통사고로 엄마가 돌아가셨습니다. 사고 후 두 시간 만에 돌아가셨는데, 너무 갑작스럽고 충격이 컸습니다. 그때 경전대학을 졸업했고, 어차피 일어난 일은 다 좋은 일이다.라는 스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인지 다른 형제보다 담담했습니다. 엄마가 생각나면 ‘우리 엄마를 엄마로 만나 복이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엄마, 잘 가세요.’라고 했습니다. 살면서 좋을 때는 엄마 생각이 나지 않는데 명절 때, 힘들 때는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엄마는 살아있든 아니든 내 마음속에 있구나. 엄마도 그 세월을 살았는데 난들 못 살겠나?’라며 힘을 냈습니다. 엄마는 영원히 내 마음속 관세음보살입니다. 2023년 5월 JTS 거리 캠페인 간절한 기도 남편은 결혼 전 10년 정도 다녔던 회사 사장님입니다. 1년 반 동안 밥 한 번만 먹자라고 했고, 바쁘다고 거절하다 밥 한번 먹고 코가 꿰여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저와 12살 차이고 장남이었습니다. 언니, 오빠들은 미쳤냐, 정신 차려라라고 했고 엄마는 “네가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냐?”라고 했습니다. 혼자 도망치듯 대구에서 울산으로 가 큰아이와 둘째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큰아이가 89개월이 되었는데, 사람을 보고 웃거나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17개월쯤 추석에 시댁 식구들이 놀아주는데 아무 반응이 없고 밖으로만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거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떨리는 손으로 검색하니 자폐 진단 10가지 중 56가지가 해당했습니다. 둘째를 임신한 지 8개월이었는데 공포, 불안, 충격으로 눈물도 안 났습니다. 둘째를 낳은 후 큰아이는 검사를 받고, 치료센터를 다녔습니다. 감각 통합 치료실, 인지 치료실, 미술 치료실 등 각종 치료 센터를 다녔습니다. 좋아질 거라 여겼는데, 더 심해졌습니다. 동생이 태어나자 더 까칠하고 예민해져 밤에 두세 시간 간격으로 깨서 울고 업어 달라고 보챘습니다. 아이만 보면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엉덩이도 때렸습니다. 이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시어머니와 용하다는 보살집에도 가고, 유명하다는 절에도 갔습니다. “아이가 눈을 안 맞추지요? 사람하고 눈을 안 맞출 겁니다.” “예, 예” 귀신에 씌어 산신제, 천도재, 용왕 제를 지내 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이만 좋아지면 다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기적처럼 낫는다라고 생각했지만,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습니다. 2021년 12월 연화회 회원들과 송년법회 공연 준비 ‘내가 닦아야겠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아파서 누워 있지 않는다면 108배를 하고, 천수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읽으면서 기도하겠다.’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108배하고, 천수경, 반야심경을 읽었습니다. 작은 아이 모유 수유할 때여서 절하다 아이가 울면 뛰어가 젖먹이고 다시 절했습니다. 그렇게 백일, 또 백일... 1년 반을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이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원망스럽고 회의가 들었습니다. 문득 ‘내가 아는 불교가 이게 아닌가? 내가 기도를 잘못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세계를 만나다. 미용실 잡지에 《엄마 수업》 책으로 인터뷰한 법륜스님 기사가 있었습니다. 기사를 읽으며 법륜스님에게 푹 빠졌습니다. 나름 이 스님, 저 스님 책을 읽었는데 법륜스님 책은 완전히 실생활에 와닿았습니다. ‘이분이 진짜 스님이다.’ 법륜스님이 누군지 궁금해 스님 책을 거의 다 찾아 읽었습니다. 울산 KBS방송국에 법륜스님이 강연을 온다고 했습니다. 스님 책 중 읽지 않은 《새로운 100년 》에 스님 사인을 받았습니다. 스님의 강연도 좋았지만, 봉사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천사 같았습니다. 2015년 3월, 둘째가 어린이집에 입학하고 울산법당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첫 수업 후 나누기를 하면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수업에서 ‘알아차리기와 내려놓기’에 관한 법문을 듣는데 완전히 신세계였습니다.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되는 이렇게 쉬운 걸 모르고 기도하면서 내내 망상과 싸웠습니다. 그러면서 나누기 때는 큰 애 때문에 힘들다. 작은 애 때문에 힘들다. 어머니 때문에 힘들다. 남편이 내 마음을 몰라 준다.라고 마음을 알아차리지도, 내려놓지도 못하고 투덜거렸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었는데 자존심 상하지 않으면서 마음껏 말할 수 있는 나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아이고, 심교 님 많이 힘들겠네. 안타깝네 안타까워. 진짜 힘들었겠다.”라며 들어주는 도반들의 표정에서 제 마음의 반은 씻겨 나가는듯 했습니다. 저는 나누기 덕분에 살았습니다. 2024년 부처님 오신 날 아도모례원에서 울산법당에서 노란색으로 된 《기도》라는 책을 처음 보았습니다. ‘내가 기도를 잘못하고 있나?’라는 의문이 있던 터라 책 내용이 궁금했습니다. 책 제목이 ‘기도였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기도를 거꾸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저의 기도는 ‘우리 큰아이 좋아지게 해 주세요. 우리 남편이 제 말 잘 듣게 해 주세요. 시어머니가 간섭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바라는 기도를 했는데 책에서는 내려놓기가 기도라고 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한 구절 한 구절 너무 와 닿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분당에 발달 학교가 있다는 걸 알고 큰아이를 치료하고자 분당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9월 말에 이사를 가는데 울산법당 도반들과 정이 들어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정토회 법당이 전국 곳곳에 있어 연계되니 너무 좋았습니다. 10월부터 분당법당 산하 서현법당에 다녔습니다. 분당은 아는 사람도 없고 아이 둘만 데리고 이사를 하니, 정토회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큰아이를 치료하러 왔다고 하니 도반들이 도와주고 예뻐했습니다. 화요일은 불교대학 영상 봉사, 수요일은 수행법회 집전, 목요일은 경전대학 수업을 들었습니다. 울산법당에서 부총무님 권유로 집전을 배웠고, 분당 수행 법회에서 처음으로 목탁을 쳤습니다. 금요일은 365일 통일 기도를 한 시간하고, 서현법당 순번이 되면 서초법당에 가서 한 시간 목탁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의 황금기였고 환희심에 불타 행복했습니다. 2025년 7월 대현모둠 활동 전법카페 분당에서 2년 반 살고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대구로 이사했습니다. 대구에 오니 집 근처에 남산법당이 있었습니다. 울산, 서현, 남산법당에서 받은 혜택 중 하나가 선배 도반입니다. “아이고 심교 보살님, 아까 나누기를 들어보니까 둘째가 엄마 관심 받으려고 하네.” 자식을 키워 본 선배들의 조언이 현실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경전대학 수업 중 금강경을 들으며 ‘어머님과 나는 다르다.’라는 것을 알았고, 어머니를 한 여자로 이해하면서 미운 감정이 씻어졌습니다. 남산법당에서 경전대학을 청강했습니다. 법당 총무님은 청강하면 뺀질뺀질 분위기 흐린다며 좋아하지 않았지만, 성실하게 수업 듣는 것을 보고 다음 해 경전대학 담당을 맡겼습니다. 경전대학 학생으로 법문 듣고, 청강하면서 듣고, 경전대학 담당하면서 듣고,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하여 돕는 이로 듣고, 스님 직강 할 때 돕는 이로 들어 경전대학 법문을 5번 들었습니다. 환희심이 절로 생겼습니다. 2024년 10월 오도일 투어 봉사 새물정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100일 동안 매주 금요일 이 법당, 저 법당 다니며 법당을 순회했습니다. 다른 법당에 가서 새로운 도반들을 만나는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정진 마지막 날 영주법당에서 행사를 마치고 팀장이 미션을 줬습니다. 미션은 배우자에게 ‘여보, 나 사랑해?’라고 메시지를 보내 누가 빠르게 답장을 받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집집마다 부부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산법당에서 저를 포함해 두 명이 갔는데 미션 결과 남산법당에서 간 우리 두 명만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 기도를 마치고 법당에서 나누기하는데 남산법당 두 명만 남편에게 답장을 받지 못했다는 말에 도반들은 배를 잡고 웃으며 마음이 짠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괜찮다. 그 시간도 다 지나간다.라고 격려했습니다. 10년 넘게 꾸준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남편은 이제 정토회 활동을 지원합니다. 입재식이 있는 날, 으뜸 절에서 실천 활동이 있는 날, 남편이 큰아이를 챙깁니다. 지금은 남편이 저를 믿고 더 의지합니다. 날씨 같은 아이 2023년 4월 큰아이와 팔공산 주말 산행 올해 16세인 큰아이는 차 타는 걸 좋아합니다. 눈만 뜨면 차에 가자하고 밤낮이 바뀌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새벽 3시에 깨어 네 시간씩 세 번 하루 동안 12시간을 운전했습니다. 2025년 6월, 입재식 때 이번 백일은 큰아이에게 감사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아이가 차에 가자고 하면 짜증 내지 말고 그냥 해 보자.라고 마음먹었습니다. 큰아이 덕분에 부처님 법을 만났고, 지금까지 10년 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살 길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가끔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만, 기도 덕분인지 생각에 빠지지 않고 ‘아이고 심교야, 네가 또 힘드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그래, 당연하다. 남들은 봉사하려고 일부러 시간 내서 하는데 너는 집에서 봉사하잖아.’라고 알아차리고 격려합니다. 고급 인력이 봉사한다.라고 생각하면 부정적인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고 자존감도 좀 올라갑니다. 큰아이가 3일 동안 밤에 잘 자서 저도 진짜 잠 같은 잠을 잤습니다. 아들의 상태는 날씨와 같아 늘 좋을 수도 늘 나쁠 수도 없습니다. 욕심으로 더 바라고 기대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이심교 님은 큰아들이 어느 정도 자립을 하면 전법회원이 되고, 명상수련, 나눔의 장, 수련바라지, 동북아역사기행, 인도성지순례, 백일출가를 다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날이 오도록 가까이에서 응원합니다. ‘모두 우리 아이입니다.’ 아이 걸음에 맞추어 나가도록 함께 지켜보고 응원합니다. 글김정림 희망리포터 편집박선희
평화 통일의 염원을 꽃피우다_임진각 평화 통일 14주년 특별 정진
임진각을 향해 가는 동안, 누구와 인터뷰를 해야 할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해 새로운 만남과 소중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음은 점점 밝아졌고 설렘으로 가득 찼습니다. 8월 15일 새벽 5시,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임진각 망배단에는 최종 리허설을 위해 광명, 부천, 안양, 인천, 일산 지회 회원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회원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따뜻한 인사와 짧은 당부를 나눴습니다.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가운데, 사회자와 발원문 낭독자, 만세삼창자의 위치를 확인하는 목소리가 오갔고, 음향 장비의 울림은 새벽 공기를 가르며 퍼져 나갔습니다. 행사를 꼼꼼히 챙기는 손길은 경건하면서도 분주했습니다. 그 속에서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5시 40분이 되자, 광명지회 지회장 박희준 님의 안내 멘트는 행사장의 첫 울림으로 모두의 시선을 모았습니다. “올해는 제80주년 광복절입니다. 광복절은 1945년 잃었던 국권을 되찾은 날을 기념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며, 독립 정신을 계승해 국가 발전을 다짐하기 위해 1949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이처럼 뜻깊은 날에 평화 통일 기도에 함께해 주신 도반 여러분,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새벽 공기를 타고 망배단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힘 있고 또렷했지만 따뜻함이 묻어 있었고, 듣는 이들의 표정에는 서서히 경건함과 기대감이 스며들었습니다. 순간, 행사장의 분주했던 발걸음도 잦아들고,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자리에 집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전 6시 정각, 대중들은 각자 준비해 온 방석 위에 서서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합송했습니다. 이어 JTS 안산 다문화센터 담당법사인 월광 법사님의 여는 말씀이 있었고, 곧바로 일산지회 통일의병 박복두 님과 안양지회 통일의병 박영희 님의 선창으로 통일 기도 발원문을 낭독했었습니다. “……한 마음에서 일어난 욕심이 서로를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게 했습니다. 한 마음에서 일어난 분노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갔는지 보았습니다. 한 마음에서 일어난 어리석음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왔는지 보았습니다……” 그 울림은 새벽 공기를 가득 메우며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날의 아픔을 떠올렸고, 어떤 이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손끝으로 조용히 눈물을 훔쳤습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살아온 이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같은 슬픔과 같은 바람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울컥함과 동시에, 다시는 같은 고통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자연스레 자리 잡는 듯했습니다. 그 마음을 간직한 채 대중들은 약 60분 동안 300배 정진과 평화 명상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영가들을 떠올리며, 그분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마음이 절마다 담겼습니다. 합창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선율이 임진각 하늘을 가득 메웁니다. 멀리 보이는 북녘에도 이 노래가 닿기를,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이어 부천지회의 김기준 님과 안영민 님의 힘찬 선창에 맞춰 “대한 독립 만세”의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순간, 대중들도 일제히 목소리를 모아 크게 외쳤습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진 함성은 지난 세월의 아픔을 딛고 다시 하나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었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서로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는, 통일을 향한 희망이 뚜렷하게 비쳐 있었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제1부 ‘8천만 겨레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8·15 임진각 평화통일 기도’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모두가 숨을 고르며 서로의 눈빛을 마주했을 때, 그 자리에 흐르던 공기는 경건함 속에서도 묘한 벅참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곧이어 시작될 제2부 행사는 축제와도 같은 자리였습니다. 대중들의 얼굴에도 설렘과 기대가 번져, 무대 위에 펼쳐질 다음 순간을 기다리며 저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한글 발원문은 일산지회 박복두 님이, 영어 발원문은 광명지회 김혜윤 님이 낭독하며 제2부의 막이 올랐습니다. 곧이어 각 지회 회원들이 모여 부른 ‘홀로아리랑’ 합창이 울려 퍼지면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습니다. 애국가에 맞춰 펼쳐진 플래시몹은 감동의 물결을 더했습니다. 집에서 영상을 보며 연습을 이어왔고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처음으로 함께 동작을 맞추었습니다. 얼굴마다 환한 미소가 가득했고, 서로를 바라보며 느껴지는 기쁨과 설렘이 현장을 따뜻하게 물들였습니다. 약 30분간의 2부 행사가 끝나자, 대중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망배단 앞에 모였습니다. “한반도 평화 통일 만세”를 힘차게 외치며 단체 사진을 남기는 순간, 새벽의 긴장과 설렘이 한껏 고조되었던 2부의 감정이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제3부는 각 지회마다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부천지회는 전통놀이인 제기차기와 통일된 미래와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 작성, 안양지회는 평화 모자 만들기, 인천지회는 사진전, 광명·인천지회는 페이스 페인팅, 일산지회는 역사 퀴즈와 북한말 맞추기 등으로 현장을 분주하게 꾸몄습니다. 임진각 망배단을 찾은 일반 관광객들도 함께 어울리며 웃음과 호응을 보내, 새벽부터 이어진 긴 여정 속에서도 즐거움과 따뜻한 연대감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며 회원들의 인터뷰 속에서 오늘 ‘80주년 8·15 광복 특별정진’ 임진각의 의미와 감동을 다시 느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느낀 설렘과 감사, 그리고 통일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모여 소중한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염원과 다짐이 더욱 단단하게 자리 잡기를 바라며, 오늘의 임진각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으로 마무리 합니다. 부천지회 김인화님 부천지회는 여름 특별 정진으로 7월과 8월 매주 정진을 이어왔습니다. 덕분에 오늘은 어느 날보다 익숙하게 정진에 임할 수 있었고, 준비 과정도 회원들과 함께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 날씨가 도와주어 감사한 마음이 컸습니다. 저는 새벽 3시쯤 출발했는데, 처음에는 깜깜하고 안개가 끼어 길이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도반들의 차량을 하나둘 발견하며 안심할 수 있었고, 현장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조용히, 또 여법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 새벽부터 정진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정성과 마음을 다해야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통일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양지회 신정화 님 이번 8·15 임진각 행사에서 저는 2부 특별 프로그램인 플래시몹 준비를 맡았습니다. 합창 ‘홀로 아리랑’과 이어서 김장훈 애국가 노래에 맞춘 플래시몹으로 광복의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플래시몹 프로그램은 한 달 전 선정되었고, 각 지회 꼭지들을 통해 준비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행사라 섭외나 준비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회원들이 짧은 기간 동안 연습하며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회원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며, 누가 춤을 잘 추는지 알아가며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또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겼습니다. 이렇게 함께 준비하고 즐기며, 광복의 의미를 몸과 마음으로 되새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광명지회 김혜윤 님 저는 이번 8·15 임진각 행사에서 실무 총괄 전령을 맡았습니다. 이번 행사는 80주년 광복을 맞아 회원들이 더 관심을 가지고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참여형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특히 임진각에는 새벽부터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아, 관광객이 참여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이번 행사는 기존 임진각 8·15 행사보다 규모도 크고 준비할 것도 많았지만, 그만큼 뜻깊었습니다.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천지회 이정순 님 북한이 고향인 아버지가 살아생전 북한에 계신 가족을 엄청 그리워하셨어요. 벌써 50년 전 일인 것 같은데, 어릴 적 아버지가 “저쪽이 북한이다, 저쪽이 북쪽이다”하시며 고향 이야기를 자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아버지가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어린 마음에도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는 제가 아버지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산 나이가 되었어요. 오늘 이렇게 300배 정진을 하며 기도하는 중에, 그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거예요. 더 늦기 전에 제발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했어요. 인천지회 이재용 님 일단 날씨가 비가 안 와서 다행인 마음입니다. 많은 회원들하고 같이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 참석해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평화로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애국지사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광명지회 월광법사님 임진각 평화 기도는 북한 동포들이 굶어 죽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법륜스님께서 “이렇게 동포가 굶어 죽는데도 외면하는 것은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며, 그 원한이 너무 크다. 8천만 민족을 대신해 원한을 풀자.”고 하셨고, 2002년 3월 1일, 천일 간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남한 군인의 입장이 되어 북한 군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 북한 군인의 입장이 되어 남한 군과 미군에게 용서를 비는 기도를 이어갔으며, 동시에 남북 간 인도적 지원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이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광화문에서 10일간 기도를 진행했고, 이후 청와대 앞에서 3일간 기도와 3·1절 행사를 이어갔습니다. 1인 시위였지만, 많은 분들께서 도시락을 나눠 주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청와대 앞에서는 형사들의 시선 때문에 편안하게 기도할 공간이 필요함을 느꼈고, 부처님께서 국경 변에서 전쟁을 막으신 것처럼 우리도 임진각 국경 변에서 평화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2011년 5월 16일부터 군사 혁명이 아닌 21일간의 평화 혁명을 선언했습니다. 그 이후 기도는 꾸준히 이어졌고, 오늘 열린 8·15 임진각 행사는 지금까지의 정성과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감동적인 자리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성껏 준비한 행사를 “우리만 보기 아깝다”며, 회향식과 내년 정부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전법 발대식과 함께 다문화 가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미 있는 시간도 마련되었습니다. 태국과 스리랑카 스님과 어린이들이 참여해 평화의 종을 타종하며 한반도의 평화가 온 세상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광복의 기쁨과 ‘그 거룩한 빛’을 실천하는 이 순간,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며 큰 행복과 뿌듯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통일은 곧 행복임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되새깁니다. 글윤보경 사진장회경 지원장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