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9일째입니다. 오늘은 인도-네팔 국경을 넘어 네팔의 랑그람, 로히니강, 그리고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를 순례했습니다.
네팔로 가는 날은 국경을 넘는데만 6시간 이상 보내는 경우가 많아 일정을 평소보다 일찍 시작합니다. 새벽 2시, 숙소 앞에 대기하던 순례단 버스에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순례단은 방을 정리하고 짐을 실은 후 2시 30분에 쿠시나가르에서 네팔 국경으로 출발했습니다. 차량에 불이 꺼지자마자 순례단은 대부분 다시 잠에 들었고, 버스는 조용히 국경을 향해 달렸습니다.
새벽 5시가 되자 불을 켜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인도-네팔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4백여 명의 순례단은 순서대로 차에서 내려 질서 있게 줄을 섰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국경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여전히 불확실했습니다. 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스님은 무전기를 이용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국경에서 얼마나 기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진행이 빠른 것 같아요. 아마 세 시간 정도면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공부를 하겠습니다. 가이드북을 펴세요.” (웃음)
스님은 빨리어로 된 ‘삼귀의와 오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국경을 통과한 대중뿐 아니라 차 안에서 기다리는 대중도 법문을 들으며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이 법문을 하는 동안 인솔 법사님들과 스태프들이 발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4백여 명이 국경을 통과하는데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통과 시간이 오래 걸릴 경우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누어 일정을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올해는 모두 함께 랑그람으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스님이 무전기로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은 꼴리족이 세운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입니다. 이 탑은 한 번도 허문 적이 없는 곳으로, 아쇼카왕조차 사리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이곳 꼴리족의 사리탑을 참배하고, 내일은 석가족이 세운 사리탑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오전 10시, 랑그람에 도착한 순례단은 자리에 앉아 잠시 입정을 한 후 스님께 법을 청하며 삼배를 올렸습니다.
스님은 먼저 대중에게 국경 통과가 순조롭게 진행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예년에는 국경 통과에 5시간 이상 걸렸지만, 올해는 인도에서 창구를 많이 열어주었고 네팔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이 거의 우리 순례 단 뿐이라 순조로웠습니다. 덕분에 랑그람에서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대중이 함께 참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 당시의 인도 지리와 역사를 소개하며, 이곳 랑그람의 중요성을 설명했습니다.
“인도는 북쪽은 히말라야와 힌두쿠시 산맥, 서쪽은 타르 사막, 동쪽은 아라칸 산맥, 남쪽은 인도양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지역으로 독자적 문명을 형성한 대륙입니다. 당시 인도에는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곳 랑그람은 꼴리족이 세운 나라의 한 지역이었습니다. 두 왕국은 결혼동맹으로 이어져 있었고, 야소다라와 마야부인이 바로 꼴리족 출신입니다.”
설명이 끝나고 대중은 랑그람 사리탑 앞에서 예불을 드리고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친 뒤 탑돌이를 하며 공경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원래는 숙소로 가서 점심 식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스님은 운전기사들을 고려해 일정을 유연하게 조정했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요. 원래는 숙소로 이동해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기사님들이 지금 식사를 준비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우리가 숙소로 가면 기사님들이 밥을 준비하다가 말고 다시 운전을 해야 하니 번거로울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춥더라도 여기에서 점심을 먹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네!”
“기사님들이 새벽부터 운전하시며 고생하셨으니 우리가 조금 배려하도록 합시다. 그럼 랑그람 일정은 여기까지 마무리하고, 점심 공양 후 로히니 강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순례단은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느새 주변 마을에서 아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고 로히니강으로 출발했습니다.
10분 정도 차로 이동하니 모래사장이 나타났습니다. 차 안에서 로히니강을 바라보며 스님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물이 귀하냐, 피가 귀하냐
“자, 이곳이 로히니강입니다. 석가족의 나라인 카필라바스투와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고향인 꼴리족의 수도 데바다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어느 해 이 강물을 두고 석가족과 꼴리족 사이에 물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가뭄이 들어 물의 양이 줄어들자 곡식이 타들어 갔어요. 꼴리족은 수도가 가까우니 ‘농사를 망치지 않기 위해 우리만 물을 쓰겠다’고 석가족 농민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석가족 농민들도 ‘물을 우리 쪽으로 대겠다’고 맞섰습니다. 그렇게 서로 말싸움을 하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싸우게 되었습니다.
싸움이 커지자 양쪽 군대가 농민을 보호하려고 나섰지만, 감정이 격해지면서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은 피를 흘리겠구나’ 하며 싸움을 말리기 위해 이곳에 오셨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이 두 강 사이 허공에 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중립적인 위치에서 양쪽을 대등하게 바라보셨다는 뜻이겠죠. 부처님께서 양쪽 군대 대장을 불러 물었습니다.
‘너희 몸에 흐르는 피가 더 귀하냐, 이 강에 흐르는 물이 더 귀하냐?’
‘피에 비하면 물은 하찮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찮은 물을 위해 소중한 피를 물처럼 흘리려 하느냐?’
부처님의 말씀에 두 종족은 감정이 누그러졌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화해하고 힘을 합쳐 강물을 잘 관리하며 그해 가뭄을 함께 이겨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남북한 갈등과 비슷하지 않나요? (웃음)
남북한의 대립이나 여야의 갈등처럼, 로히니강에서 일어난 분쟁은 전체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워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불교의 평화 사상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함께 경전을 독송하겠습니다.”
스님은 대중과 함께 경전을 독송하며 평화와 화합의 가치를 되새겼습니다.
로히니강을 떠나 차를 타고 약 한 시간 이동해 오후 1시에 부처님의 탄생성지인 룸비니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마야부인을 기념하여 세운 마야데비 템플 앞에 자리를 잡고 스님께 청법 삼배를 올린 뒤 성지 안내를 들었습니다.
“여기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 룸비니 성지입니다. 앞에 있는 건물이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을 상징해서 탄생상을 모셔놓은 템플(temple)입니다. 절 이름이 ‘마하마야데비 템플’입니다.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의 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건물은 최근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이 지역을 발굴할 때 나온 아주 마모가 심한 탄생상을 건물 안에 모셨고, 그 위에는 새로 복원한 탄생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마야 부인이 오른손을 들어 아쇼카 나뭇가지를 잡자마자 오른쪽 옆구리에서 아기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때 하늘의 신들이 아기를 받는 모습으로 조각을 해놓았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날 때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정반 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는 나이가 마흔이 가까이 되도록 아기가 없었다고 그럽니다. 요즘 같으면 나이 마흔에 아기를 낳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옛날에는 벌써 손자를 볼 나이였습니다. 마야 부인은 그때까지 아기가 없었기에 왕국이 편안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후계자 문제가 제기되어 근심과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기가 생겼으니까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로 느껴졌을 겁니다.
마야 부인은 나라의 큰 축제가 열리는 날에 갖가지 형태로 많은 보시를 하고 잠이 살짝 들어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 이층 난간에서 소리 나는 쪽으로 올려다보니까 저 하늘 위에서 뭔가 별빛 같은 게 반짝거리며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점점 가까이 오는 걸 보니까 상아가 6개 달린 흰 코끼리였습니다. 보통 코끼리는 상아가 2개 달렸는데, 상아가 6개 달렸다는 것은 최고로 성스러운 징조를 상징합니다. 흰 색깔도 성스러움을 상징하고요. 그런데 갑자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팍 들어와 버렸습니다.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까 꿈이었어요. 마야 부인은 꿈속에서 본 이 기이한 현상을 선인을 불러 물었습니다. 선인은 ‘귀한 분을 잉태할 꿈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듣고 정반 왕과 마야 부인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임신 후 아홉 달이 지나 아기를 낳을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당시에는 산모가 친정에 가서 아이를 낳는 것이 풍속이었어요. 그래서 마야 부인은 가마를 타고 카필라성 동문을 나와 친정이 있는 데바다하로 갔습니다. 데바다하가 카필라성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문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던 길에 이곳 룸비니에 이르렀는데 그때가 정오쯤이었다고 합니다. 경전에는 이곳에 있는 아쇼카 나무에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고 해요. 꽃구경도 하고 조금 쉬어도 갈 겸 마야 부인도 가마에서 내려 꽃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그때 부인이 오른손을 들어 꽃가지를 잡았는데 그때 산기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아이 낳을 준비를 했어요. 그렇게 부처님이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씩 걸었다.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손으로는 땅 위를 가리키며 사자처럼 외쳤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
풀이를 하면 ‘하늘 위 하늘 아래, 즉 사람과 신들 가운데 오직 내가 가장 존귀한 존재다. 삼계(三界)가 다 괴로움 속에 빠져 있구나. 내 이를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문구 중에서 대부분 앞의 문장만 기억하고 뒷 문장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만 알지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대부분 모릅니다. 뒷 문장은 보살의 원 중에서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친정에 가서 아이를 낳아야 하지만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마야 부인은 아이를 안고 카필라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마야 부인의 형제자매 중에서 아직 결혼하지 않았던 막내 여동생인 마하파제파티 부인이 다시 카필라성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 마하파제파티 부인은 부처님의 어머니 쪽으로 보면 이모가 되고, 아버지 쪽으로 보면 새어머니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양모 또는 이모에게서 키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친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이모에게서 친어머니만큼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부처님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인해 어떤 나쁜 영향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부처님의 일생을 쓴 사람의 입장에서는 위대한 성인의 탄생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나 봐요.
‘이렇게 위대하신 인간과 신들의 스승인 천인사(天人師)께서 어떻게 출가 후 6년의 수행만으로 그런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과거 여러 생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수행의 공덕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부처님을 이해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과거 생에 보살로서 한량없이 수행한 전생 이야기가 수없이 등장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전생담 이야기가 무려 547가지나 됩니다. 빨리어로는 자타카(Jataka), 한역으로는 본생담이라는 경전 속에 수많은 전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1세기 경에 부처님의 일생을 다룬 문학 작품으로 붓다차리타(Buddhacarita), 불소행찬(佛所行讃)이라는 작품이 나옵니다. 인도의 불교 승려인 아슈바고샤(마명보살)가 기록한 불교 서사시인데, 아마도 부처님의 탄생을 신비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의 내용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처님의 탄생 모습을 인류문화사적으로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마야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표현을 오늘날 인류문화사적으로 해석해 보면 부처님이 크사트리아 계급이었음을 상징합니다. 인도의 설화에는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할 때 신의 입에서는 브라만을 창조하고, 신의 옆구리에서는 크사트리아를 창조하고, 신의 배에서는 바이샤를 창조하고, 신의 두 발에서는 수드라를 창조했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카스트 제도의 기원이 되어서 브라만은 신을 찬탄하며 살아가고, 크사트리아는 두 팔로 세상을 다스리면서 살아가고, 바이샤는 배에서 태어났으니 먹고사는 일과 관련된 농사를 짓고 장사하며 살아가고, 수드라는 두 발에서 태어났으니 심부름하고 노동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계급 질서로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표현은 부처님이 왕족 출신이라는 걸 상징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표현은 육도윤회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을 육도 윤회라고 해요.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이 육도 윤회를 벗어나 부처가 되실 분이라는 것이 태어나자마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반왕은 안정을 찾으면서 아들의 미래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저 설산에서 아시타 선인이라는 분을 불러서 부처님의 관상을 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시타 선인이 아기의 관상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우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분은 이 세상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오. 출가하면 부처를 이루리라. 그런데 내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분의 가르침을 들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슬퍼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자신을 시봉 하는 제자에게 먼 훗날에 이 세상에 부처가 출현했다고 하면 반드시 찾아가서 가르침을 들으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정반왕도 자기도 모르게 아들에게 절을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어린 시절에 두 분의 스승을 모시고 학습을 했습니다. 한 스승은 철학, 문학, 예술 분야를 가르치고, 다른 한 스승은 왕도, 즉 무술, 군사, 행정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학습할 정도로 스승을 뛰어넘는 총명한 아이였다고 해요.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은 아니지만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에 왔으니까 아기 부처님께 욕불 의식을 하고, 탑돌이를 하겠습니다.”
성지 안내를 마친 후, 대중은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마야데비 템플을 향해 예불을 올리고 스님이 순례단을 위해 축원을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부처님의 탄생을 되새기며 욕불의식을 했습니다.
욕불의식이 끝난 후 순례단은 합장을 하고 한 줄로 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아쇼카석주를 지나 마야데비 템플로 들어갔습니다. 부처님의 탄생상과 발자국을 본 후 룸비니 동산을 한 바퀴 돌아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룸비니에서 약 3시간 동안 참배를 마치고 스님은 순례단에게 다음날 일정을 안내한 후 숙소인 대성석가사로 걸어갔습니다.
5시가 되어 대성석가사에 도착하니 총무 보현스님이 맞아주셨습니다. 스님은 먼저 법당으로 가서 절을 올렸습니다. 법당에는 부처님과 용성조사님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저녁 식사를 하고 6시 30분부터 법당에서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보현스님은 순례단을 환영하며 대성석가사의 역사와 불사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성석가사 총무 보현스님입니다.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정토회에서 매년 성지순례를 하실 때 룸비니 대성석가사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성석가사는 1995년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네팔 정부와 임대 계약을 체결하며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법신스님이 이곳에 오셔서 불사를 시작 하셨고,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웅전 법당을 짓는 공사를 진행하며 동시에 여러분이 머무르고 계신 요사채도 함께 완공했습니다.
법당은 2007년에 골조 공사가 끝났으며, 이후 2014년부터 2022년까지 단청불사를 진행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법당이 참 크죠?”
“네!”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에 많은 불자들이 모여 대법회를 열 수 있는 한국의 사원이 있다는 점이 참 뿌듯합니다.”
보현스님은 대중의 편안한 순례를 기원하며 이어 말씀했습니다.
“시설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어서 춥고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토회 순례단 분들은 항상 밝은 표정과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아주셔서 보기에 참 좋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잘 쉬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은 보현스님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대성석가사가 가진 의미를 덧붙였습니다.
“이곳은 용성진종조사님의 유훈 10가지 항목 중 하나인 ‘인도 불교 유적지를 잘 가꾸어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곳입니다. 불심도문 큰스님이 이 룸비니에서 대작불사를 시작하셨고, 그 불사를 실제로 완성한 분은 여기 계신 보현스님의 은사, 법신스님입니다. 법신스님은 저와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도반입니다. 체구는 작으셨지만, 이처럼 큰 법당을 지으신 걸 보면 어마어마하게 크신 분입니다.(웃음)
지어진 건물을 와서 보는 것은 쉽지만, 그 짓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둥게스와리처럼 치안이 좋지 않아 각국의 스님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20여 년 동안 불사를 이어가며 이렇게 큰 법당을 마련한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순례하며 한국 사원에서 묵은 적은 없었죠? 늘 다른 나라의 사원에서만 머물렀는데 (웃음) 이번에는 한국 불교를 빛내는 대성석가사에 머물게 되어 뜻깊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혼자 운영하며 힘든 환경 속에서도 법당을 지켜온 보현스님께 특별한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대중은 보현스님의 헌신에 깊은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30분 정도 인사를 나눈 후 순례단은 숙소로 돌아가 내일 도시락을 준비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새벽 2시부터 시작된 긴 하루가 끝났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에 탄센으로 출발해 일출을 보고 부처님이 성장하신 카필라성을 순례합니다.
전체댓글 44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1-25 20:57:41
지명화
감사합니다
2025-01-24 10:39:27
명덕
도문스님 .법신스님 .보현스님 법륜스님 대성석가사를 짓어 용성조사님을 모시며 부처님 성지를 잘 관리 해주셔서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