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오세아니아 순회강연 중 두 번째 순서로 시드니(Sydney)에서 한국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6시 40분에 호주를 대표하는 블루마운틴(Blue Mountains) 국립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늘 강연만 하고 가기 바빴는데 오늘은 정토회 회원이면서 호주에서 관광가이드를 하고 있는 표정민 님이 블루마운틴의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기로 했습니다.
“스님, 늘 바쁘게 다니셨는데 잠시 시간이 나셨으니 오늘은 호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한번 보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시드니 시티에서 차로 1시간 20분을 달려 8시에 블루마운틴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산맥의 시작점이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링컨스락(Lincoln's Rock)으로 향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었습니다.
절벽에 걸터앉아 찍을 수 있는 인증샷 명소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장소입니다. 절벽 위에서 바라본 거대한 협곡 산맥은 블루마운틴이라는 이름 그대로 푸른빛을 내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표정민 님이 가는 곳마다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블루마운틴 지명의 유래는 ‘유칼립투스 나무’ 때문입니다. 코알라가 좋아하는 유칼립투스 나무가 무려 100만 헥타르가 넘는 산 전체를 덮고 있는데요. 이 나무에서 나오는 유액이 태양빛을 만나 파장이 가장 짧은 파란색을 반사합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산이 파랗게 보여서 블루마운틴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블루마운틴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세 자매봉(Three Sisters Walk)으로 향했습니다. 에코포인트(Echo Point) 전망대에 도착하니 세 자매봉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을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내려다보는 풍경이 이색적이었습니다.
현지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세 자매봉과 관련된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합니다. 옛날에 한 마법사가 아름다운 세 자매와 함께 살았는데 마왕이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납치를 시도했습니다. 이때 마법사는 세 자매를 세 개의 바위로 만든 뒤에 마왕과 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싸우는 도중 마법사가 위기에 처했고, 주술을 걸 수 있는 지팡이를 잃어버려 세 자매는 지금까지 바위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법사는 까마귀로 변해 블루마운틴 어딘가에 있는 지팡이를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다음은 보아스 헤드 전망대(Boars head look out)로 가서 멧돼지 바위를 보았습니다. 왜 멧돼지 머리인지 궁금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를 보자마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자연이 빚은 조각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잠시 블루마운틴의 전경을 감상했습니다. 만약 이 바위가 한국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거북선 바위’라고 불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거북선과 많이 닮아 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페더데일 야생 동물원(Featherdale Wildlife Park)에 들러 호주에 서식하는 다양한 동물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동물원에는 280종 1400여 마리의 동물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멸종 위기 종인 태즈메이니아데블과 빌비를 비롯하여 왈라비, 에뮤, 웜뱃, 쿼카, 캥거루 등 호주를 대표하는 다양한 동물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웃음을 자아낸 건 코알라였습니다.
“코알라는 깨어있는 시간이 4시간 밖에 안 됩니다. 하루에 20시간을 잡니다. 이렇게 깨어있는 모습이 드물어요.”
귀여운 펭귄도 볼 수 있었습니다. 펭귄 중에서 가장 크기가 작은 종인 쇠 푸른 펭귄이라고 합니다. 마치 인형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아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물원을 끝으로 블루마운틴 답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원래 하루 종일 둘러볼 코스를 반나절로 압축해서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은 자세히 안내를 해준 표정민 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하고 정비 시간을 가졌습니다. 얼마의 휴식을 한 후 저녁 5시 30분에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시드니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에 위치한 라트비안 극장(Latvian Theatre)입니다. 스님이 강연장에 도착하자 곳곳에서 봉사자들이 참석자들을 정성껏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5년 만에 시드니를 방문한 스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교민들이 강연장을 찾았습니다.
저녁 6시 정각에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이 끝나자 스님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습니다.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불교가 종교화되어서 종교적인 성격이 아주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복을 빌면 복을 받는다’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항상 사람들과 만나서 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대화록을 모은 것이 경전입니다.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도 대중들에게 ‘의문이 있으면 물어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 번 더 ‘의문이 있으면 물어라. 내가 죽고 난 뒤에 그때 물어볼 걸 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니 편하게 물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대중들이 묻지를 않자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그렇게 편안하게 물어라’ 하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원형을 따라서 우리들도 이렇게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런 대화를 하다 보면 나의 고민이 해결되거나 괴로움이 해소되거나 스트레스가 풀리게 됩니다. 이렇게 괴로움이 사라지는 대화를 ‘법담’이라고 합니다. 인도 말로는 ‘담마’라고 합니다. 담마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대화를 ‘담마 토크’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이 없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면 돼요. 그런데 나 좋을 대로 산다고 해도 타인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됩니다. 타인을 기준으로 하면 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으니까 나쁜 행동이라고 하고, 나를 기준으로 하면 나에게 손해가 났기 때문에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불교는 항상 나를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나쁘다는 말은 잘 쓰지 않고 어리석다는 말을 많이 씁니다. 만약 내가 만 원짜리 남의 물건 하나를 훔쳤다가 잡혀서 감옥에 간다든지 배상을 십만 원을 한다든지 하면 이것은 손해 나는 행동을 한 거잖아요. 타인을 기준으로 하면 나쁜 행동이라고 표현하고, 나를 기준으로 하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행동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가장 소중하게 여깁니다. 선한 행위를 강조하기보다는 지혜로움을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대화도 ‘어떤 것이 더 지혜로운가?’ 이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대화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부터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여덟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인생 고민과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그중 한 명은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예수님께 기도를 하게 된다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어떻게 버텨내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우리말에 ‘꿩 잡는 게 매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꿩을 잡는 데는 매가 제일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처럼 질문자도 병이 낫는 게 중요하지, 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하느님이든 누구한테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질문자가 어릴 때 교회를 다녀서 그런지 모르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나는 불교 신자이고 수행자라고 해도 예수님이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는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반대로 아무리 기독교 신자라고 하더라도 찬송가를 부르거나 성경을 읽을 때는 아무런 감정이 안 일어나는데 절에 가면 믿음이 생겨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올 때 겉으로는 반가워해도 속마음은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무의식에서 거부한다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무의식이 의식과 일치하게 될 때는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거부할 필요가 굳이 없어요.
가령 정신질환이 있는 경우에 무당이 굿을 하거나 신내림을 받으면 실제로 편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과학이라고 할 때는 거의 99%가 그렇게 되어야만 과학이라고 하거나 원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내림은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데 대부분 열에 한 명도 안 됩니다. 이런 것을 남에게 권유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어떤 지병이 있었는데 꿈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어요. 제가 꿈에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없었어요. 저는 주치의가 있으면 치료를 받고, 없으면 그냥 돌아올 때가 많거든요. 돌아가려니 낯선 의사가 오신 김에 치료받고 가라고 해서 그 사람한테 치료를 받았어요. 그런 꿈을 꾸고 난 후 깼는데 병이 다 나은 겁니다. 주치의한테 갔더니 뭘 어떻게 했냐고 하면서 증상이 많이 완화되었다고 했어요. 이런 것은 어떤 무의식에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이런 현상이 지장보살을 부르다가 일어났다고 하면 ‘지장보살의 가피를 입었다’라고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일어나면 ‘관음의 가피를 입었다’라고 하고, 하나님을 부르다가 일어나면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심리가 있는 사람은 ‘저는 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는 게 좋습니다. 만약 기독교 신자라면 ‘저는 편안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됩니다. 이때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핵심이 아니고, 자기가 자신한테 무의식에 암시를 계속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안하지만 계속 ‘나는 편안합니다’ 이렇게 절을 하면서 암시를 주면, 이것이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효과가 있는 거예요. 많은 부작용이 있지만 이 세상에 종교가 존립하는 이유는 과학처럼 확률이 높은 건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서 이런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통계를 보면 4기 말기암 환자 천 명 중 한 명 꼴로 자연치유가 가능하다고 하고,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평균적으로 천명 중 한 명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해요. 그런데 그 한 명이 불교 신자였다고 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 신자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마침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고 기도를 해서 나으면 법륜스님의 가피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자연계에는 항상 변수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일기예보를 할 때도 ‘비가 온다’, ‘비가 안 온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비 올 확률이 몇 프로다’ 이렇게 말합니다. 환자를 치료할 때도 ‘당신은 일 년 살 확률이 몇 프로다’, ‘5년 이상 살 확률이 몇 프로다’ 이렇게 확률적으로 말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질문자가 그런 증상이 있다고 하면 그 병은 그렇게 치유하는 게 좋은 거예요. ‘나는 수행자니까 예수님을 거부한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중국 속담에는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가 뭐가 중요한가? 쥐만 잡으면 된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공산주의에 너무 메이지 말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효율적이면 받아들이자고 등소평이 한 얘기예요. 만약 눈이 나빠서 병원에 갔는데 기독교 신자인 의사가 치료를 제일 잘한다고 합시다. 나는 불교 신자니까 치료를 안 받는 게 나은가요? 눈을 치료할 때는 눈을 잘 치료하는 의사인지가 중요하지, 의사가 가진 종교가 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질문자도 그런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하면 그냥 그 방식대로 기도해서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고려할 점이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서 거부할 필요도 없고, 거꾸로 이런 효과가 있으니 기독교로 개종해야겠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치료가 안되다가 굿을 해서 나았다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굿을 한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어떤 병에 대한 간증이나 경험담을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어떤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심리적인 현상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그런 경험담을 자꾸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지혜로워지지 않고 ‘이야, 병은 저렇게 하면 낫는구나!’ 하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지혜롭게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를 어리석게 하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통, 신비, 이런 것을 모두 부정하셨습니다. 그런 현상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율에 ‘손금, 관상, 족상, 사주를 보거나, 전생 얘기를 하거나, 운명을 점치는 행위를 하지 말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떤 신통을 보여주는 것도 못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요? 이런 신통을 좀 보여줘야 훌륭한 스님이라고 부릅니다. 신통을 부릴 줄 모르면 ‘가짜 스님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을 지혜롭게 하는 데에 항상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니 질문자의 그런 대처법도 하나의 유용한 도구로 간직하고 계셔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는 불교 신자가 되는 데에 아무 장애가 없어요. 기독교 신자가 되고 싶다고 하면, 종교를 바꾸는 것도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바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 종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나를 닮은 성격의 딸아이를 대하면 화가 납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 편하게 딸을 대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에 대한 자책과 책망을 할 때 어느 정도가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래서 쉬고 있을 때도 불안하고 죄책감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년 넘게 할머니를 모셨던 어머니에게 유산에 대한 지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울화통이 터집니다. 어떡하죠?
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행복할 권리’는 누가 주는 건가요? 왜 스님은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현재 세계적 위기 상황 속에서 스님이 보시기에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가요? 시드니에 사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외국인 여자 친구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고민입니다. 제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양해를 구했습니다.
“현장에서 질문을 좀 받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도저히 안 되네요. 여러분들도 빨리 가셔야 하지만 저도 30분 후에 생방송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쉽지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년에 다시 와서 또 여러분들을 뵙도록 하겠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공연장 로비에서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참석자들이 스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스님, 오늘 강의 잘 들었습니다. 즉문즉설 듣고 정말 많이 행복해졌습니다.”
사인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책사인회가 끝나고 무대 위에서 강연을 준비해 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시드니!”
곧이어서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해야 해서 스님은 서둘러 2층에 마련된 사무실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이 생방송을 하는 동안 봉사자들은 강연장 대청소와 뒷정리를 했습니다.
현지 시간으로 저녁 8시 30분, 한국 시간으로 저녁 7시 30분에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37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와 있습니다. 스위스를 거쳐 독일을 방문했고,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피해 지역을 답사했습니다. 그리고 부탄에 가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하기 위해 공무원들과 연수 교육을 하고, 방콕을 거쳐서 어제 이곳 호주로 왔습니다. 지진 피해 복구 상황과 부탄의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공무원 연수는 여러분에게도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서 영상으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지난주에 스님이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피해 지역과 부탄을 방문한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지금 세계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 위기 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 곳곳에서는 갈등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빈곤으로 인해 식량과 약품이 부족하고, 많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도 다닐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우선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지혜를 갖추어 나를 괴롭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 절대 빈곤을 퇴치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며 기후 위기를 막는 활동에도 여러분 모두 함께 참여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상이 끝난 후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임신 중 남편의 외도를 목격했고 그 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먼저 아이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자가 외로움을 타고 남편의 부재로 인한 부족함을 느낀다면 아이 역시 아빠가 없는 것에 대해 상처를 받거나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습니다. 또 엄마를 외롭게 하는 아빠에 대한 미움이 아이에게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질문자가 혼자 살면서도 아무런 외로움 없이 행복하게 산다면 아이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는 질문자의 심리 상태를 거의 90퍼센트 닮아간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아이가 자라면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그에 따라 상처가 생기겠지만, 어릴 때는 엄마와 밀접하게 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 엄마의 영향을 받습니다.
아이 문제는 이제 제쳐두고,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충격이 컸을 겁니다. 그 충격으로 질문자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니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고, 그 감정을 오랫동안 표현하게 된 거겠죠. 처음에는 남편이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 다오' 하면서 빌었지만, 그 상황이 반복되면 인간의 심리에는 반발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그럼 어떡하자는 거냐? 이혼할 수밖에 없지 않냐?' 하는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보기에는 10만큼 잘못했다 생각해서 10만큼 야단을 치지만, 아이는 자기가 5밖에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도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10만큼 야단을 맞게 되면 이 정도로 야단맞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억울하게 느끼고 반발심이 생깁니다. 반발심이 생기면 교육의 효과가 없어집니다. 아이가 어리니까 지금은 그냥 야단맞고 살지만,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그 억울함을 분출하게 됩니다. 잘못을 덮어놓으면 아이의 버릇이 나빠지고, 그렇다고 내 성질대로 야단을 치면 아이가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감정으로 야단을 쳐서는 안 됩니다.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다’ 하고 이해하지만 이대로 두면 버릇이 나빠질 것 같으니까 아이를 깨우쳐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내 감정풀이로 야단을 치면 안 돼요. 어느 정도로 지적을 해야 아이가 반성을 할지 엄마가 생각하면서 교육적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지, 내 감정풀이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이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남편도 똑같습니다. 나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 감정풀이로 남편을 대했기 때문에 남편은 자신이 잘못한 건 잊어버리고 거꾸로 반발심이 생긴 겁니다. 남편이 '그래, 좋다. 그럼 이혼하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질문자도 또 덜컥 겁이 나서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접근해서는 안 돼요. 질문자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한눈을 판 남편이 일단 잘못을 했어요. 남편이 잘못을 했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용서를 빈다면 '비록 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이 남자가 다른 남자보다는 낫다’ 하고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나간 건 잊어버리고 결혼 생활을 잘 영위해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인물이 잘생기고 아이의 아빠라 할지라도 나 이외의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파는 사람하고는 같이 지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딱 입장 정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 문제도 아니고 정말로 내 인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당신이 그런 실수를 할 수는 있지만, 나는 이런 감정을 갖고 같이 살기는 싫다. 그러니 이혼을 하자' 이렇게 남편에게 말해야 합니다.
지금 질문자는 둘 중에 어느 쪽 입장인지가 불명확해요. 이혼하려니까 애를 키울 자신이 없고, 그렇다고 남편을 그냥 받아들이자니 기분이 나쁘고, 두 가지 이해관계를 두고 자꾸 잔머리를 굴리기 때문에 번뇌가 생기는 겁니다.
남편이 잘못했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결혼 생활을 계속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문제를 삼으면 상대가 '그럼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냐? 결국은 헤어지자는 얘기 아니냐?' 하는 식으로 거꾸로 더 큰소리를 치게 됩니다. 옛날부터 방귀 뀐 놈이 더 큰소리친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것이 바로 반발 심리입니다.
만약 질문자가 남편을 용서해 주고 없었던 일로 정리를 했다면 지금 남편의 문제는 그와 별개의 또 다른 문제예요. 나는 아직 젊은 여성인데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사업을 한다며 밖으로 돌아다닌다면, 이런 결혼 생활을 내가 영위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앞에 말한 내용과는 별개로 질문자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과거를 논하지 말고 '너도 바람피우니까 나도 다른 남자 만나서 행복을 구하겠다' 하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갈등을 확산시킬 위험이 높고, 아이 교육에도 안 좋아요. 그러니 참지 말고 남편을 불러서 이렇게 요청하세요.
'당신이 집을 비우고 안 들어오니 내가 너무 외롭다. 아이만 쳐다보고 살기에는 너무 외로우니, 당신 사업도 좋지만 나와 아이들을 위해서 집에 들어오는 횟수를 늘려 달라.'
한 번, 두 번, 세 번 진지하게 요청을 해보는 겁니다. 너무 강하게 요구하지 말고 조금씩 요청해 보고, 부족하면 또 요청하세요. 상황을 풀기 위한 노력을 한 번 해보라는 겁니다. 이럴 때는 솔직한 게 제일 좋습니다. 남편이 어느 정도 변화가 있어서 같이 살만 하면 이대로 관계를 유지하고, 만약 남편이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고 자기 멋대로 생활한다면 질문자가 선택을 해야 됩니다. 첫째, 아이 엄마로서가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이런 남자 하고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느낀다면, 이혼을 하고 자녀의 양육을 위해 서로 협의를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둘째, '어차피 이혼하고 혼자 살아도 뾰족한 수가 없다. 애도 있는데 지금 딴 남자 만나기도 그렇고 여러 가지가 복잡하다' 이런 판단이 든다면, 아이의 아빠이고 가끔은 남편 구실을 하니까 부족한 점이 있긴 하지만 감수하고 같이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둘 중에 질문자가 결정을 해야 돼요.
그전에 먼저 나의 어려움을 남편한테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과거를 갖고 논하는 게 아니라 현재 내가 이런 어려움이 있으니 좀 감안해 달라' 하고 요청하세요.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 이혼을 하면 나중에 미련이 남거나 후회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 계속 같이 살아도 내면에 불만이 쌓입니다. 먼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 보고, 개선이 되면 다행입니다. 개선이 안 되면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혼을 할지 아니면 개선이 안 되는 걸 전제로 하고 '그래도 이게 낫다' 하고 받아들이고 살아갈지, 둘 중에 결정을 내려야 해요. 그러면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절차를 하나씩 밟아 나가보면 좋겠습니다.”
“남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 30분이 넘었습니다. 다음 주 방송에 대해 스님이 양해 말씀을 구했습니다.
“다음 주 금요 즉문즉설 시간은 제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과 딱 겹쳐서 생방송을 못할 것 같습니다.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이니 듣지 말자’ 이렇게 하지 마시고 꾸준히 즉문즉설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스님은 서둘러 강연장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봉사자들은 400석의 의자를 모두 치우고 빈 강당에 둘러앉아 소감 나누기를 마친 참이었습니다.
스님이 도착하자 잠깐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름과 정토회에서 맡고 있는 소임, 간단한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스님 덕분에 이혼하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미워하며 살다가 스님을 만나고 제 자식에게는 이런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이제는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고, 엄마를 용서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습니다. 스님 덕분에 좋은 직장도 얻게 되었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정말 힘들 때마다 스님 법문을 듣고 살았습니다. 오늘 스님을 가까이에서 뵈니 눈물이 납니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감사해서 눈물이 납니다.”
대부분이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수계식에서 스님께서 저를 보시더니 ‘전법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남편에게 전법을 했습니다."
"신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제 마음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 바퀴를 다 돌고 스님이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누니까 좋지요? 이렇게 모였으니 모둠별로 사진을 찍읍시다.”
모둠별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봉사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스님은 강연장을 떠났습니다.
“스님, 건강하세요!”
“그래요. 2년 후에 또 봅시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밤 10시가 넘어서 숙소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비행기를 타고 시드니 공항을 출발하여 뉴질랜드 오크랜드 공항으로 이동한 후 오후에는 뉴질랜드 정토회 회원들과 차담을 나누고, 남국선원을 방문한 후, 저녁에는 뉴질랜드에 사는 한국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1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