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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INEB(참여불교국제네트워크) 방문단이 정토회 견학을 시작한 지 4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다 함께 새벽 예불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6시부터 농사 체험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INEB 방문단은 따뜻한 죽과 메밀 면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스님은 30분 일찍 비닐하우스로 나와서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INEB 방문단과 함께 할 울력은 풀 뽑기입니다. 방문단이 도착하자 스님이 농사일을 안내했습니다.
“오늘 할 일은 풀을 뽑는 것입니다. 한 고랑마다 한 사람씩 들어가서 풀을 뽑아 주세요.”
가사 위에 엉덩이 방석을 착용하고 호미를 하나씩 든 후 앉아서 풀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고추를 심어 놓은 두둑에도 풀이 자라 있어서 손으로 풀을 뽑아 주었습니다.
스님은 풀이 가장 많은 가장자리에서 풀을 뽑았습니다. 군데군데 명아주가 보였습니다. 명아주는 나물을 해 먹기 위해 따로 바구니에 모았습니다.
고추가 이미 많이 자라서 쓰러진 것이 가끔 보이면 지지대를 세워 주었습니다.
풀이 많은 고랑은 여러 명이 붙어서 풀을 뽑고, 풀이 없는 고랑은 한 명이 붙어서 풀을 뽑고, 동남아 스님들은 자연스럽게 필요한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어제 스님과의 대화 시간이 어땠는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정겹게 풀을 뽑고 있는데 저 멀리서 목탁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Everyone will meditate for one minute now.”
(지금부터 1분 동안 명상을 하겠습니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지금, 여기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1분 후 다시 목탁 소리가 들리자 멈추었던 고추밭이 다시 살아 움직였습니다. 순식간에 고랑마다 가득했던 풀을 모두 뽑았습니다.
스님은 동남아 스님들이 풀을 뽑았던 자리를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제대로 풀을 안 뽑았네요. 뿌리째 뽑아야 하는데,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이 구역을 맡았던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추가 안 심어져 있어서 대충 했어요.”
“맞아요. 여기는 습기가 많아서 일부러 고추를 안 심었어요. 다른 작물을 심을 예정입니다. 원래 이 자리가 논이었습니다. 논에 모래를 부어서 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습기가 많은 땅입니다. 그래서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비가 와도 가능한 영향을 덜 받도록 한 겁니다.”
뽑아 놓은 풀은 군데군데 한 곳으로 모아둔 후 울력을 마쳤습니다.
“마음 나누기를 잠깐 하고 갑시다.”
사용한 도구를 원래 있던 자리에 둔 후 농막 옆에 둥글게 앉아서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각자 울력을 하며 느낀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일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 일은 한 20퍼센트 정도만 하고, 80퍼센트 정도는 생각을 하거나 얘기를 하는 데에 에너지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1분 명상을 한 덕분에 현재로 돌아오는 연습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땀을 줄줄 흘리게 되는데, 오늘은 일을 열심히 했는데도 땀이 나지 않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테라밧다 불교에서는 승려가 농장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농장에서 일을 해보니 내가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그래서 승려도 일을 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공감이 갔습니다.”
“스님의 가르침 중에 업식을 없애는 것은 마치 잡초를 뽑는 것과 같다는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뿌리를 뽑지 않고 위에만 뽑게 되었습니다. 현재에 깨어있지 않으면 일도 이치에 맞지 않게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뽑히지 않는 잡초를 뽑을 때는 내 업식도 뽑아내겠다는 마음으로 하니까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 나누기를 다 듣고 나서 스님이 한 가지 이야기를 추가로 해주었습니다.
“오늘 잡초를 뽑았다고 다들 이야기를 했는데요. 잡초라고 정해진 것은 원래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잡초라고 불릴 뿐입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고추를 재배하기로 했는데, 다른 풀이 자라고 있으니까 그것을 잡초라고 부르는 겁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만물에는 다 제 자리가 있습니다.”
울력을 마치고 8시가 넘어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은 한국의 선선한 날씨에 매우 흡족해했습니다.
간단히 세면만 하고 8시 30분부터 스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고, 농사일도 하고, 많이 피곤하시죠?” (웃음)
“YES!”
“그래도 여행을 온 게 아니라 견학을 온 것이니까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
다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매우 가벼웠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많은 것을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스님은 로힝야 난민들을 돕고 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불교인으로서 부끄러운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로힝야 난민 문제입니다. 물론 미얀마에서 불교인들이 왜 로힝야족들을 배척하는지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전 세계 불교인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을 전승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미얀마 불교인들이 인종적 또는 종교적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모습은 ‘그 불교가 무엇을 위한 불교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행위를 방치하는 미국을 보면서 ‘미국이 말하는 인권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로힝야 난민 문제는 앞으로 불교가 서양 사회에 확산이 되는 데에 큰 장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도 미얀마에 가서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도저히 설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방글라데시에 있는 로힝야 난민들이라도 도와야겠다 싶어서 지금은 참회하는 마음으로 난민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난민촌에 가보니까 좁은 지역에 너무 많은 난민들이 모여서 살고 있었어요. 밥을 해 먹으려면 불을 때야 하니 난민촌 주위에 산림이 다 황폐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무하러 가는 아이들을 납치하거나 여성들이 성추행 당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스버너를 지원해 달라고 WFP(세계식량계획)로부터 제안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난민촌에 왜 가스버너가 필요한지 의아해했는데, 환경 문제, 성추행 문제, 어린이 납치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봤을 때 이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전체 난민에게 제공할 가스버너를 두 차례에 걸쳐서 20만 개를 지원했습니다. 그 덕분에 산림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복구되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어서 JTS가 로힝야 난민캠프에 가스버너 20만 개를 지원했던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 곳곳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힘이 닿는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JTS가 지원할 수 있는 역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급적 가장 위험하고 가장 열악한 곳을 찾아서 지원한다는 원칙을 갖고 사업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스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기로 했습니다.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발우공양을 할 때 손가락을 튕기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회활동 기구에서 일하는 봉사자는 누구인가요? 13개 지부에서 일하는 봉사자가 그 일을 하나요?
JTS의 활동이 동남아 국가의 현지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이어서 JTS가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했던 내용을 소개하고 다시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분은 어제 대구에서 즉문즉설 강연을 본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혹시 스님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없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란 게 없습니다. 저는 모르면 모른다고 바로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발우공양을 할 때 왜 헌식기를 향해 네 번째 손가락을 튕기느냐고 물으면 ‘모른다. 그냥 예전부터 그렇게 해 왔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왜 모르냐고 하면 ‘나라고 어떻게 다 아느냐’ 하고 말합니다. 초기에는 지식적인 내용을 많이 물었는데, 요즘에는 이런 지식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제가 강연을 시작할 때부터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것은 묻지 말고 직접 검색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면 제가 승려이기 때문에 승려의 신분으로 말했을 때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 내용이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의 성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자세하게 대답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성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설적으로 대답하기가 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다 함께 방송실로 이동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한 이후 어떻게 온라인 법회를 하고 있는지 방송실을 직접 보여 주었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은 스님이 법문 하는 자리에 앉아서 한 장씩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나오자 모두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오전 11시부터는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음식 세팅을 마치고 두북 공동체 대중들의 우렁찬 소심경 소리와 함께 발우공양을 시작했습니다.
“원단일체악 원수일체선 원공제 중생 동성무상도”
(일체의 악을 끊겠습니다. 일체의 선을 닦겠습니다. 원컨대 일체의 중생과 함께 무상도를 이루겠습니다.)
죽비 삼성과 함께 식사를 한 후 스님의 한 말씀을 듣고 발우공양을 마쳤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이틀 동안 두북 수련원에서 식사 준비를 해준 대구경북지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다 함께 경주 불국사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두 시간 동안 스님이 불국사의 경내를 자세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매년 INEB 방문단에게 정토회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사찰도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일주문 앞에 세워진 지도 앞에서 스님의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불국사입니다. 1300년 전에 지어진 절입니다. 400년 전에 일본이 침략하여 완전히 불태운 것을 다시 복원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규모는 현재 규모의 4배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현재 복원을 이만큼 한 상태입니다.
만약 어떤 스님이 이 절을 지었다면 선종이든 화엄종이든 자신의 종파를 내세워서 절을 지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절은 재가 신자가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 종파와 저 종파에서 좋은 점은 다 취해서 이 절을 지었습니다. 즉, 현재의 세계에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사후 세계에 있는 아미타 부처님, 드러난 세계가 아닌 본질의 세계에 있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모두 모셔져 있습니다. ‘불국’이란 ‘부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해가 떴으면 아주 더웠을 텐데 마침 구름이 끼어서 둘러보기에 좋았습니다. 스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국사를 안내하지만, 올 때마다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새롭게 안내해 줍니다. 오늘은 동남아 스님들이 알아듣기 쉽게 불교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팔리어를 섞어가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국보 청운교와 백운교 앞에서 스님은 축대에서 배울 수 있는 모자이크 붓다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축대를 한번 보세요. 맨 밑에는 자연석입니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섞여 있어요.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 세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있고,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듯이 다양성을 뜻합니다.
그 위에는 잘 다듬어진 기둥이 있습니다. 그 사이사이에 돌들을 끼워 놓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다듬은 돌을 끼워 놓은 것 같은데 저 돌들도 모두 자연석이에요. 다만 평평한 면을 바깥쪽으로 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겁니다. 기둥은 보디사트바를 상징하고, 기둥 사이의 돌들은 중생을 상징합니다.
불국사 축대에서 배운 모자이크 붓다
모든 돌을 다 다듬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축대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잘 다듬어진 기둥이 무게를 버텨주면 나머지 돌은 그 사이에서 자기 균형만 잡으면 안전한 축대가 돼요. 그것처럼 여러분들이 보디사트바라고 하면, 여러분을 따르는 신자들이나 회원들은 모든 일을 다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한 사람이 완전한 붓다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붓다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토회에서는 ‘모자이크 붓다’라고 합니다. 정토회가 추구하는 ‘모자이크 붓다’는 이 축대를 보고 얻은 아이디어입니다. 회원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수행을 많이 해서 완성도를 높여 나가야 하지만, 나머지는 자신의 생활을 하면서 기부를 하든 봉사를 하든 일부분의 역할을 하면 됩니다. 이렇게 서로 어우러지면 붓다가 했던 일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축대를 이렇게 쌓은 겁니다. 이 기초 위에 부처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럼 부처의 세계로 가봅시다.”
다 함께 다보탑과 석가탑을 보기 위해 대웅전 앞마당으로 올라갔습니다. 회랑을 지나자 좌경루에 큰 목어가 달려 있었습니다. 스님은 목어 앞에서 사물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을 둘러보고 대웅전을 참배한 후 무설전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담장 너머로 불국사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담겼습니다.
“이곳이 한국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여러 개의 처마가 한꺼번에 보이죠?”
“Very beautiful.”
관음전을 보고, 비로전을 지나, 나한전을 본 후 마지막으로 안양전을 보고 연화교와 칠보교 앞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불국사를 배경으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개인별로도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불국사를 두 시간 동안 둘러보고 다시 차에 올라타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해마다 INEB 동남아 스님들이 정토회를 방문할 수 있게 재정 후원을 해주고 있는 원만성 보살님을 찾아가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원만성 보살님은 광안리에 위치한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휠체어를 타고 있는 보살님이 INEB 방문단을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스님이 보살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정토회를 견학하는 비용은 이 보살님이 기부를 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사를 드리러 함께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소개가 끝나자 동남아 스님들은 선의를 베풀어준 보살님에게 기도를 해주고 싶다고 하면서 다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의 정성스러운 기도를 받고 원만성 보살님도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스님은 보살님의 두 손을 꼭 잡고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보살님 덕분에 저희는 매년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보살님도 건강하세요.”
보살님께 인사를 드린 후 요양병원을 나와 다시 차에 올라탔습니다.
마침 병원 앞에는 광안리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온 김에 바다 구경을 하고 가기로 했습니다. 푸른 바다와 광안대교가 눈앞에 펼쳐지자 동남아 스님들은 모두 카메라를 꺼내 열심히 바다 풍경을 사진 속에 담았습니다.
30분간 바닷가 산책을 한 후 오후 5시 30분에 광안리 해수욕장을 출발하여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6시 30분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오후 불식을 하는 테라밧다 스님들에게 식혜를 떠주었습니다.
정성껏 차려진 음식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은 후 저녁 7시 30분부터 스님과의 대화 시간을 이어 나갔습니다.
“오늘 불국사 다녀오신 것은 어땠어요?”
“좋았어요.”
먼저 2년 전에 파키스탄 홍수 피해가 난 이후 JTS가 일곱 차례에 걸쳐 지원 활동을 해 온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본 후 JTS의 사업 원칙에 대해 스님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인도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영상을 본 후 순례의 취지와 방식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SNS, 출판 등 정토회 운영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하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JTS의 구호 활동에 대한 설명이 많았는데요. 이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소카(Sokha) 스님이 연달아 질문을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사꾼에게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농사를 짓습니까?’ 혹은 ‘당신은 오늘 모내기를 할 때 무슨 목표를 가지고 모내기를 하나요?’ 이렇게 묻지 않잖아요. 농사꾼은 그냥 밥 먹고 나와서 농사를 짓고, 피곤하면 쉬고, 풀을 베어야 하면 풀을 벱니다. 그것처럼 저도 그냥 이것이 일상생활이에요. 저는 어떤 특별한 자비심을 가지고 활동을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인생을 살면서 잘못을 하고 그 잘못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활동을 하게 될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인도 사업을 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릴게요. 제가 처음 인도 성지순례를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교수님이 안내하는 소그룹 순례였는데 가장 먼저 캘거타에 도착했습니다. 수돗물을 마시면 설사를 할 수 있다고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생수를 사기 위해 밤에 숙소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깜깜한 거리에서 계속 저를 잡아당기며 어디로 끌고 가는 겁니다.
약간 언짢기도 했지만 따라가 보니 가로등 밑이었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데 자기 손을 아기 입에 댔다가 배에 댔다가 자꾸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아기가 배고프다는 뜻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여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그 길 끝에 조그마한 가게가 있었는데, 그 여인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무엇을 사달라고 했습니다. 보니까 분유통이었어요.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 'How much?' 하고 짧은 말로 물어보니 가게 주인이 '60루피'라고 했어요. 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인도 여행을 가기 전에 가이드가 누구에게든 1루피 이상을 주면 안 된다고 안내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이상 돈을 주게 되면 사람들이 따라와서 여행을 못 하게 된다고 했거든요.
숙소에 돌아와서도 그 일이 마음에 계속 걸렸습니다. 아기가 배고프다는데 그냥 와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교수님한테 60루피의 가치가 얼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달러로 치면 약 3달러 정도 된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너무 놀랐어요. 3달러를 달라는데 제가 마치 전 재산을 달라는 것처럼 도망쳐 와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돈을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사회 정의를 위해 운동을 한다며 감옥까지 갔다 왔는데 막상 아기 분유를 사겠다고 3달러만 달라고 해도 안 줬잖아요. 그러면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는 짐을 정리해서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빼고 나머지는 그냥 다 나눠줬어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한 30명이 우리를 따라다녔어요. 그러니 가이드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 저한테 불평을 했죠. '그래, 너 잘났다. 너만 그렇게 착하냐?' 이러면서요. (웃음)
그다음에 어떤 시골 마을로 갔습니다. 길을 가다가 차를 세워놓고 짜이를 한 잔씩 마시는데 시골 아이들 몇 명이 우리를 보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사탕을 가지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오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 쪽으로 갔더니 다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때도 제가 깜짝 놀랐어요. 캘거타에서는 아이들이 '박시시'(도와주세요) 하면서 저리 가라고 해도 계속 따라다녔는데 이곳 아이들은 안 그랬으니까요. 그때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거지가 되는 게 아니라, 뭘 주기 때문에 거지가 되는구나.'
그다음부터는 그 무엇도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막 달라고 따라오면 '너희들, 이 사탕 하나 먹고 거지가 되면 안 된다. 내가 주기 싫은 게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안 주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안 줬어요.
그러다가 보드가야 가까이에 수자타 스투파가 있는 곳에 갔을 때였어요. 이번에는 두 다리를 못 쓰는 아이가 두 팔로 기어서 '박시시' 하고 따라오는 거예요. 그렇지만 아무것도 안 줬어요. 그곳에서 우루벨라 가섭 교화터까지는 거리가 약 1km 가까이 되는데 그곳까지 두 팔로 기어서 따라오는 겁니다. 그때 또 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 아이에게 안 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이냐? 저 아이는 뭐든지 얻어서 살려고 저렇게 애쓰는데 안 주는 게 맞느냐?'
이런 번뇌가 또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인색해서 안 준 것에 대해 반성하다가 그다음에는 좋은 마음을 내서 뭐든지 나눠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로 인해 아이들이 거지가 되어버리니 다시 안 주다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게 옳은가?’ 하는 고민이 다시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가 둥게스와리에 가게 됐습니다. 그곳에도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왜 학교에 갈 시간에 구걸을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니 학교가 없어서 못 간다고 대답했어요. 그때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아, 학교를 짓는다면 아이들을 도와주면서도 구걸하지 않도록 할 수 있겠구나!’
이처럼 저는 잘못을 계기로 어떤 일을 시작하게 된 사례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그냥 일상적으로 하지 어떤 자비심을 갖고 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한 것에 대해 제가 대답할 게 별로 없네요.” (웃음)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소카 스님이 두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께서 제 모습을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밖에서 강연이나 어떤 활동을 할 때나 농사를 지을 때나 이렇게 앉아 있을 때나 항상 같은 마음입니다.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스님' 하면서 사진을 찍자고 하면 저는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피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해수욕장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면 '스님과 해수욕장에서 사진을 같이 찍으면 보기 좋겠어요?' 이렇게 농담을 하며 거절을 하지요. 그러면 '아, 그렇군요' 하고 사람들이 수긍을 합니다.
절에서는 어지간하면 함께 사진을 찍습니다. 하지만 오늘 불국사에서 본 것처럼 사람이 많을 때는 한 사람과 사진을 찍어주면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아예 사진을 안 찍습니다. 여러분에게 불국사를 안내해야 하는데 사진 찍다가 시간이 다 가잖아요. 이럴 때는 처음부터 제가 조금 엄숙하게 말하면 아무래도 스님이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조심해서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웃음)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NGO 활동가인 윈토모 님은 오늘 만난 원만성 보살님이 어떤 분인지 질문했습니다.
”정토회 회원이 기부를 할 때는 ‘무주상보시’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감사 인사를 한다든지 어디에 이름을 붙여준다든지 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써 주면 기부를 한다고 하거나, 건물에 이름을 붙여주면 학교를 한 채 지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토회에서는 그런 돈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토회 회원이 아닌 경우에는 기부한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배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원만성 보살님이 기부를 할 때 뭘 해달라고 요구했으면 제가 아예 기증을 안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보살님은 스님이 하는 일을 늘 보면서 ‘스님이 하는 일이라면 어디든지 좋은 데에 쓰십시오’ 하고 기부를 했습니다. 제가 이 돈을 어디에 썼으면 좋겠는지 여쭈어 보았는 데도 역시 스님이 알아서 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보살님이 건강도 매우 안 좋은 상태에서 기부를 해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가 기부한 돈이 참 잘 쓰이는구나’ 하고 보람을 느끼게 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JTS가 하는 사업은 모두 외국에서 진행되고 있고, 보살님은 환자이시기 때문에 직접 가서 현장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이 분은 독실한 불교 신자이시니 스님들을 위하는 일에 쓰면 참 좋아하시겠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보살님이 일 년에 한 번씩 스님들의 방문을 직접 보시면 ‘내가 기증한 것으로 인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하고 보람을 느끼시지 않겠나 생각했습니다. 정토회에서도 이것은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기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이렇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보살님이 많이 아프시기도 해서 배려를 한 거죠. 여러분들이 그분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이 오늘 그분을 위해 염불을 해준 것 역시 그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INEB 방문단은 조별로 모여서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하여 서울로 이동한 후 정토사회문화회관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정토회 활동가들과 간담회를 하고, 저녁에는 스님과의 대화 시간을 가질 예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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