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3.15. 용성조사 열반일, 즉문즉설
“선택하고 나서 후회가 될 때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 근대불교의 중흥조이시고, 민족 독립운동가이신 용성조사님의 열반 83주기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4시 20분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해 장수 죽림정사로 향했습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산 너머로 해가 떴습니다. 죽림정사로 향하는 길에 매화가 핀 하동으로 둘러 갔습니다. 도로 위로 늘어진 가지마다 매화가 송이송이 피어 있었습니다.

“이야, 창밖 좀 보세요.”

잠시 차에서 내려 봄꽃 구경을 했습니다.


잠시 꽃구경을 하고 나니 시간이 촉박해졌습니다. 아침 식사도 거르고 가까스로 8시 30분에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죽림정사는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이시고 이 운동의 막후 기둥이셨던 용성조사님의 탄생성지에 세워진 절입니다. 스님은 먼저 대웅전으로 가서 삼배를 드리고 오늘 행사가 열리는 교육관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8시 30분부터 용성조사 열반 83주기 기념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역대 전등 조사들을 기리는 다례재를 지냈습니다.

다례재를 마치고 10시 정각에 본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 한 후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해 묵념을 하고, 용성조사님의 행장을 낭독하고, 기념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참석한 내외빈 소개가 있고 난 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이자 죽림정사 주지인 스님이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열반일이기 때문에 조사님의 열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중심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이 살았던 당시에는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의해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기까지 했으니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더 가중되었습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은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려면 법을 알도록 해서 깨우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먹고살도록 하고,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나라가 먼저 독립이 되어야 한다.’

어떤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그 선결 과제로 나라의 독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마치 오늘날에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전쟁의 위험을 막는 것과 같은 일이 바로 당시에는 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기울어져 민중이 고통에 빠져있고, 일제에 나라까지 빼앗기고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던 때에 용성조사님은 이런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험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분의 업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왜 용성조사님께서 그렇게 사셨는지, 왜 그분의 삶을 오늘날 우리가 위대하게 칭송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북간도에 대단위 농장을 마련한 이유

용성조사님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천도교 손병희 교주님과 독립운동을 일으킬 논의를 했습니다. 그 후 3·1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결국 서대문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1921년에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이듬해에 용성조사님은 당시 북간도라고 불렸던 지금의 조선족 자치주 안도현 봉녕촌과 명월촌에 각각 700 정보의 땅을 샀습니다. 각각 210만 평에 해당하는 넓은 땅입니다. 그때는 사람이 살지 않던 때니까 넓은 땅을 농장으로 개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겉으로는 선농일치(禪農一致), 즉 수행자가 보시받아서 사는 게 아니라 생산하며 수행하자는 의미를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습니다.

우선 농장의 위치가 백두 산록에 있었습니다. 백두산에서 연해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어요. 1920년에 우리의 독립군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일제는 강력한 탄압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독립군들은 탄압을 피해 만주에서 러시아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때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서 백군과 적군이 싸울 때였어요. 거기에 휩쓸리게 되면서 우리의 독립군이 모두 해산이 되어 버립니다. 1920년대에 강력한 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그러한 외부 상황과 내부 분열 때문에 해산되어 버렸는데, 이것을 ‘자유시 참변’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민족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세력은 모두 궤멸이 되어버렸어요. 바로 그때 실의에 빠진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넓은 부지의 농장을 마련한 것입니다.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배경으로 독립군이 재건됩니다. 그 후 일본의 간도 토벌대가 그곳에 본부를 두고 독립군 섬멸 작전을 펼친 정황을 보면 용성조사님이 구입했다는 명월촌 농장은 바로 독립군이 재건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오시자 마자 바로 그곳으로 가서 그렇게 많은 농토를 구입을 했던 겁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비밀리에 해야 했기 때문에 농장의 이름을 ‘선농당’이라고 한 거예요.

이런 사실들은 앞으로 밝혀서 역사에 남겨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1927년이 되어서야 북간도의 중심 도시였던 용정에 대각교당을 내게 됩니다. 교민들을 위한 대각교당을 내기 5년 전에 이미 농장을 마련했다는 것은 이곳이 전법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는 백운산 자락에 30 정보를 구입해서 화과원을 만들었습니다. 이 화과원도 한쪽으로는 선농일치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다른 한쪽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이렇게 3·1 독립운동의 막후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다 외면하고 떠나고 아주 소수의 사람만 함께 했습니다. 당시에는 대종교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의 이름을 빌려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1934년부터 일제는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사이비 종교 척결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전통적인 종교 몇 개를 제외하고 모든 종교를 없애 버렸습니다. 용성조사님이 세운 대각교도 사이비 종교의 범주에 넣어 탄압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1934년에 이미 재산 대부분이 일제에 신탁됐고, 1936년에는 재산을 뺏기지 않으려고 할 수 없이 대각교 교당을 ‘범어사 경성포교당’이라고 간판을 바꿔 달고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1938년에 일제는 대각교를 완전히 법적으로 해산시켜 버렸어요. 한마디로 활동할 수 있는 아무런 토대가 없어졌습니다. 오늘의 우리로서는 생각도 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거죠. 용성조사님이 그런 시대에 사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대한의사군 1만 명을 중국에 보내기로 했지만

그런데 1937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습니다. 사실 1931년에 일본은 이미 만주사변을 일으켰습니다. 만주를 침략해서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정권을 수립했던 거죠. 하지만 일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서 중국 본토를 침략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내전 때문에 공산군과 국부군이 서로 갈라서서 싸우고 있었는데 우선 일본의 침략을 막고 나서 나중에 다시 싸우더라도 싸우자며 국공합작을 했죠. 이렇게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되는 모습을 본 용성조사님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조선의 힘만으로는 안 되고, 중국과 연합을 해서 일본군을 한반도로부터 몰아내야 하겠다.’

그래서 1938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국부군과 공산군 대표들을 만납니다. 1930년에 4억 명의 중국인이 일본에 기를 못 펴고 있었는데 대한의 남아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거사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중국인들이 감명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사실은 윤봉길 의사를 김구 선생님 쪽으로 보낸 사람이 바로 용성조사님이셨습니다. 윤봉길 의사라고 하면 중국인들 누구나 다 아니까 용성조사님은 국부군과 공산군 대표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윤봉길 의사 같은 사람을 조선에서 만 명을 모아 대한의사군을 중국에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대한의사군 1만 명과 국부군 10만 명, 공산군 10만 명을 합해서 조 중 연합군을 만든 후 일본 제국주의를 격퇴합시다.’

이에 합의하자 용성조사님은 1만 명의 대한의사군 모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국내는 워낙 감시가 심하여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용정과 중국 북간도에 오랫동안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좌 한 명을 북간도로 파견했습니다. 그가 용성조사님을 대신해서 대한의사군을 모집하도록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일제가 보낸 밀정이었습니다. 일제는 용성조사님이 중국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수상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밀정 한 명을 넣어서 신임받도록 한 겁니다. 결국 밀정 때문에 1939년에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 비선 조직이 일망타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용성조사님은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한탄을 하셨다 그래요.

‘쇠가 쇠에서 난 녹으로 썩게 되었구나!’

제자가 스승을 배반하고, 조선인이 자기 혼자만 친일하면 되는데 남까지 친일하도록 창씨개명을 밀어붙이는 그런 시대가 바로 용성조사님이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일제의 침략을 받은 것만 문제가 아니라 내부에서도 이렇게 분열이 되니 좌절과 절망에 빠질 만한 일이죠. 예수님도 제자로부터 고발을 당해서 십자가에 못을 박혔을 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렇게 말했다고 하잖아요.

절망의 시기에 미래의 희망을 제시한 분

그런 절망의 시기에도 용성조사님은 분노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이것이 용성조사님의 위대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일망타진되어서 암흑천지가 되었지만, 앞으로 60년 후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나제려 대국이 되는 문호가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훗날 대한민국이 옛날 신라, 고구려, 백제를 합한 그런 대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신 겁니다. 이런 희망을 안고 경주 남산 천룡사에 종을 만들어서 그 종을 아침저녁으로 계속 처라고 하셨는데, 그때 만든 종이 지금도 천룡사에 남아 있어서 정토 행자들이 계속 기도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을 지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열 가지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지금 정토회는 그 열 가지 유훈을 하나씩 실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가야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봉림사지는 지금 경남지부에서 가꾸고 있고, 고구려불교 초전 법륜 성지는 중국 땅에 있어서 우리가 직접 가꾸지 못하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씩 역사 기행을 하면서 그곳을 밟고 있고, 백제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우면산 대성사는 불심도문 큰 스님께서 복원하셨고, 정토회가 그 앞에 회관을 짓고 옥상에 대성초당을 건립해서 가꾸어 나가고 있고, 신라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아도모례원은 대구경북 지부에서 가꾸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과 낭산은 매년 봄가을로 수천 명이 순례하면서 가꾸고 있고, 천룡사지는 부산울산 지부에서 가꾸고 있고, 인도 룸비니에는 대성 석가사가 불심도문 큰스님의 원으로 세워졌고, 보드가야는 근처에 수자타 아카데미를 세워서 정토회가 가꾸어 나가고 있고, 쉬라바스티 기원정사는 천축선원을 지은 분이 그곳을 용성조사님의 유훈 실현 도량이라고 지목을 하여 가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바라나시 녹야원과 쿠시나가르 사라수원도 조금씩 성지 가꾸기를 해나갈 예정입니다.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이미 백만 명에게 삼귀의 오계를 주었지만, 정토회에서도 다음 만일 동안 백만 명의 수행자를 만들자는 원을 세웠습니다. 이미 스님의 책이 많이 판매되어 백만 권 이상 보급이 되었고, 행복학교를 통해서 종교와 관계없이 전 국민에게 인연을 맺어 나가고 있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불법을 만나 활동할 수 있도록 해나가고 있습니다.

엄혹한 시대에 생을 마친 용성조사님의 뜻을 기리며

용성조사님은 원래 2월 15일인 부처님 열반일에 열반에 들려고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가장 큰 스님이셨으니까 돌아가실 때는 해인사, 범어사, 내원사 등 큰스님과 인연 있는 도량에서 돌아가셔야 하잖아요. 그래서 제자인 동헌 완규 조사님을 보내서 돌아가실 방을 구하려고 했는데, 아무도 방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큰스님을 모시게 되면 조선총독부로부터 탄압을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일이 넘어서 동헌 완규 조사가 돌아오자 ‘그러면 여기서 내일 열반에 들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대각사에서 24일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스승이 ‘나는 간다.’ 하고 말하니까 제자가 ‘어디로 가십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용성조사님이 대답했습니다.

‘항상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법은 다 원래부터 고요하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한가로이 삼밭에 누웠도다.’

이렇게 열반송을 남기고 입멸을 하셨습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 음력 2월 24일입니다. 용성조사님은 대한민국의 국호를 정하신 분입니다. 3.1 운동을 하고 나서 상해임시정부를 세울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운동이라면 대한제국 부흥 운동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나라는 왕의 나라가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이라고 해라.’

그래서 올해는 3.1 운동 104주년이기도 하지만 곧 4월이 되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4주년이 됩니다. 우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 국가를 이루었고, 가난한 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70년이 지났는데도 평화 정착을 못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반도에 평화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분단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남한만으로도 세계 10위에 근접하는 경제 부국이자 군사 강국, 문화 대국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통일로 나아간다면 훨씬 더 발전하는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용성조사님이 말씀하신 나제려 대국의 위상을 앞으로 갖게 될 것입니다. 용성조사님은 그 엄혹한 시대에 생을 마쳐야 했지만, 앞으로 100년 후를 내다보고 우리가 희망을 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용성조사님의 이런 위대한 업적을 세상 사람들은 많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용성조사님의 뜻이 많은 국민들에게 전해져서 대한민국이 발전해 가는 데에 큰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오늘을 기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홍서원으로 기념식 생방송을 마친 후 곧바로 현장에 참석한 대중들을 위해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즉문즉설은 생중계하지 않고 현장에서만 질문을 받았습니다.

세 명이 즉석에서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선택하고 나서 후회가 될 때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선택을 하고 나서 후회가 될 때, 어떡하죠?

“제가 작년에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렌즈를 끼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렌즈를 삽입했습니다. 그리고 올봄에 눈이 좀 아팠어요. 렌즈를 끼워서 아픈 줄 알고 ‘렌즈 삽입 수술 괜히 했다.’ 하고 후회가 되고 마음이 매우 괴로웠습니다. 최근에 알고 봤더니 렌즈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안구 건조증이 와서 아팠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마음이 좀 놓이긴 했는데 그래도 아직 불안이 올라옵니다. 어떻게 불안한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요?”

“우선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면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을 알아차림, 즉 ‘사띠’라고 해요. 두 번째는 어떤 행위를 하든 그 행위에는 항상 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하면 결혼해서 좋은 점도 있을 수 있고, 결혼해서 나쁜 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한다는 것은 선택에 대한 결과를 안 받아들인다는 얘기예요.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하는 과보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돈을 빌리고 나서 빌린 걸 후회한다는 것은 갚기 싫다는 얘기거든요. 이것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안 지려는 자세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인생에서 선택을 하면 그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해요. 선택을 하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후회를 하면 안 됩니다. 후회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안 지는 자세에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렌즈를 눈에 넣어 놓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안 지려고 하기 때문에 후회하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결혼해 놓고 후회하는 이유는 결혼하고 나면 당연히 뒤따르는 게 있는데 그걸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빌릴 때만 좋았지, 갚을 생각은 안 하고 빌렸으니까 돈을 빌린 것에 대해 후회를 하게 되는 겁니다. 후회는 책임을 안 지려는 자세에서 오는 거예요. 선택했으면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네. 저도 안구 건조증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하니까 나중에는 아픈 게 좀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원인을 알거나 지은 인연을 알면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질문자는 안구 건조증이라는 원인을 알게 되니까 원망이 없어진 겁니다. 그러나 원인을 모르더라도 수행자는 항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원인이 안구 건조증일 수도 있고, 렌즈를 끼운 것일 수도 있잖아요. 원인이 무엇이든 그 결과를 그냥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말을 잘못 듣고 ‘그냥 뭐든지 다 받아들여라.’ 이렇게 오해하시면 안 돼요. 왜 아픈지는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후회하는 것은 무책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후회가 될 때 ‘내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돌이키면 될까요?”

“그렇죠. 후회할 때 마음을 돌이키라는 거예요. 눈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면 됩니다. 렌즈 때문에 아픈 것 같다고 느낀다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다시 해보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괜히 렌즈를 했나?’ 하고 후회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한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안 지는 태도에서 비롯된 겁니다. 후회한다는 건 결과를 안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해요. ‘그때 이렇게 할 걸’ 하고 후회를 한다고 해서 아무 문제 해결이 안 되잖아요.”

“저는 후회를 하고, 불안이 심해져서 병원에 가서 약도 좀 받아오고 그랬습니다.”

“그것도 괜찮아요. 여러분들은 암이라는 진단이 나오면 두려워하잖아요. 부처님은 병을 치료하지 말라고 얘기하신 게 아니에요. 다만 병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죠. 암이라는 진단이 나오면 치료를 하면 됩니다. 어제까지 암이라는 진단을 안 받았을 때도 암이 내 몸에 계속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어요.”

“괴로움은 순전히 심리의 문제입니다. 암이 없다가 오늘 생긴 게 아니잖아요. 어제도 내 몸에 암이 있었는데 오늘 알게 된 겁니다. 아는 건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좋은 일이에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암이 있었네!’ 하고 기뻐해야죠. 왜 괴로워해요? 수술하든지, 자기 생활에서 욕심 냈던 걸 좀 줄이든지 하면 되잖아요.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겼다면 모르지만 있던 걸 새로 발견했잖아요. 발견은 좋은 일 아니에요? (웃음)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아는 건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좋은 일이잖아요. 그 사실을 알기 전인 어제도 남편은 바람을 피웠어요. 오늘 새로 알았으니까 대책도 세울 수 있는 겁니다. 남편과 같이 살든지 안 살든지,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좋은 일이 생겼는데 왜 나쁜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지금 알았으니까 대책을 세울 수가 있잖아요. 처음에는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울 수도 있는데, 돌이켜보면 나쁜 일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오늘 새로 알았으니까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스님과 대중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대웅전 앞에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대중은 모둠별로 나누기하고 함께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도시락을 먹은 후에는 죽림정사 도량 곳곳에서 울력도 했습니다.

스님은 점심 식사를 하고 1시부터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회와 총회를 했습니다.

오후 3시에 이사회와 총회를 모두 마치고 죽림정사를 출발해 두북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날이 저물었습니다.

내일부터 1박 2일 동안은 평화재단 연구위원들과 숙박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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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3-04-04 09:46:41

들꽃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가끔 궁금했는데 용성조사님이셨네요..
알게 해주신 스님도, 용성조사님도 감사드립니다

2023-03-25 06:47:13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3-03-24 15: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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