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3.4 8일 출가열반 정진 6일째, 평화재단 통일의병 즉문즉설, 정토회 합동회의
“미래를 내다봤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이 뭘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8일 출가열반 정진 6일째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하고 오전 8시부터 공동체 법사단회의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오전 10시 정각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자 8일 출가열반 정진 6일째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8일 출가열반 정진 6일째 법회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하기 전에는 출가열반 정진을 할 때 법당에 모여서 함께 정진했는데,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하고 나서는 온라인으로 접속하여 각자 자신의 방에서 정진을 하고,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방에서 정진을 하는 만큼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정진을 하고 있는 모든 회원들을 먼저 격려했습니다.

“오늘은 8일 출가열반 정진 6일째 날입니다. 매일 정진을 잘하고 계십니까?” (웃음)

어제까지 부처님의 수행, 성도의 여정까지 법문을 했고, 오늘은 성도 이후 교화와 전법의 길을 어떻게 걸어갔는지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바라나시의 사르나트에서 처음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 설법을 듣고 다섯 명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세상에는 부처님 혼자가 아니라 모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생겨났습니다. 부처님 외에도 열반을 증득한 사람이 다섯 명이 더 생기게 된 거죠. 그 후로 45년 동안 부처님께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수행정진하고 교화를 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을 항상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는 수행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그러한 길로 인도하는 전법 또한 하루도 쉬지 않고 행하셨다는 걸 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붓다이면서 동시에 상가의 일원이 되어 한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불교는 오직 깨달음을 추구하는 길만 있고, 타인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전법의 힘은 많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 깨달음마저도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확천금을 바라는 기복적 성격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붓다에게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달라고 비는 기복의 성격까지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난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을 보셨기 때문에 교화와 설법을 하실 때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고 거침이 없으셨습니다. 누가 어떤 질문을 어떻게 해도, 어떠한 문제제기를 해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모두 다 알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기되는 이야기들, 세상의 온갖 차별들, 세상에서 흥행하는 이야기들이 모두 다 꿈과 같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현상이기 때문에 꿈에서 깬 사람이 볼 때는 다 허망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붓다는 그들의 생각 또한 존중했습니다. 다만 물으면 진실은 이렇다고 대답했을 뿐 그들을 비판하거나 내치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붓다의 법 안으로 들어올 때는 계급 차별적 인식을 버려야 한다는 점을 아주 분명히 하셨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장자들도 있었고, 큰 나라의 임금과 황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걸 다 소유하고도 번뇌가 많았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그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붓다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늘 그들이 고뇌와 어려움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로부터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일체 요구하는 법이 없었고, 설령 그들이 무언가를 준다고 해도 수행에 필요한 것 이상은 받지 않았습니다.

수행자라면 뭘 구해서는 안 됩니다. 뭘 구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게 수행입니다. 오히려 대중이 뭔가 준다고 해도 가려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걸 가리는 기준은 수행에 도움이 되는가 여부입니다. 그것이 수행에 꼭 필요한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수행에 필요 없는 것이라면 아무리 세속에서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과거에 가졌던 세속의 것들도 다 버리고 출가의 길에 들어섰는데, 왜 그걸 남이 준다고 해서 다시 받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빔비사라 왕이 왕위를 내어준다고 할 때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나라도 버리고 출가를 했는데, 왜 남의 나라를 받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집도 버리고 출가를 했는데 왜 남의 집을 받겠으며, 내가 내 돈도 버리고 출가를 했는데 왜 남의 돈을 받겠습니까? 수행자는 이런 입장이 아주 분명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대중이 활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간을 마련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은 절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모은 재정이 얼마나 많은지를 자랑으로 삼는다면, 그건 세속의 길이지 붓다의 길도 아니고 출가의 길도 아닙니다. 대중이 보시한 돈은 사람들이 활동을 하기 위해서 잠시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내 것이라고 집착하거나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관점을 분명히 해야 재물을 두고 일어나는 분쟁이나 이권 다툼이 일체 사라집니다.

비굴한 거지가 아니라 당당한 수행자의 길

출가수행은 고달픈 길이 아닙니다. 진실에 대한 관점을 분명히 함으로 해서 오히려 먹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고, 입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고, 자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고, 세상의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꾸 세속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그 가치관 위에서 수행자들이 먹는 걸 보고 불쌍하다고 여기고, 입는 걸 보고 불쌍하다고 여기고, 자는 걸 보고 불쌍하다고 여기고, 생활하는 걸 보고 불쌍하다고 여깁니다. 수행자 자신이 스스로를 이렇게 여긴다면 그는 당당한 수행자가 아니라 비굴한 거지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하는 건 좋지만, 만약 이 수행적 관점을 놓치고 있다면 그는 세간 사람 중 착한 사람에 불과할 뿐 수행자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수행자는 무엇보다 관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오늘날 붓다를 따르는 길을 가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2,600년 전에 이 길을 가셨습니다. 당시에는 계급이 엄격한 사회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계급을 뛰어넘는 이 길을 갔습니다. 차별이 엄격한 시대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차별을 뛰어넘는 길을 갔습니다. 성차별이 엄격한 시기였는데도 여성이 출가수행자가 되는 길을 갔습니다. 이는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붓다 이후에 이 길이 더욱 발전되기는커녕 퇴보해서 결국 세속의 길로 빠졌습니다. 역사 속에서는 세속의 길로 빠진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불교 운동이 여러 번 일어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세속의 길로 빠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수행자가 세속을 정화하는 게 아니라, 세속의 길이 오히려 수행자를 오염시키는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하더라도 환경 위기, 전쟁과 분쟁, 갈등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법을 따르지 않고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문제를 해결할 길은 있지만 우리가 그 길을 가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길을 한번 가보자는 것입니다.

법당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사는 집이 곧 법당이고, 내가 사는 방이 곧 법당입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각자 자신의 법당에서 정진을 꾸준히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6일째 300배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한 배 한 배 절을 하며 오늘 스님의 법문을 가슴에 새기고, 부처님이 처음 제시한 길을 향해 나아가 볼 것을 다짐했습니다.

평화재단 통일의병 즉문즉설

곧이어 11시부터는 평화재단 통일의병 운영위원들과 온라인으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2023년 새해를 맞이하여 통일의병 모임이 많이 개편되었습니다. 본부장을 비롯하여 지부별 운영위원들이 새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지부별로 서로 인사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신임 운영위원들은 올해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가기에 앞서 궁금한 점들을 편안하게 질문했습니다. 여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의병 정신의 중요성을 되새기면서 사회 운동을 해나갈 때 수행이 왜 필요한지 질문했습니다.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수행은 왜 필요할까요?

“저희가 의병 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의병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백의종군, 자발성, 공공성, 헌신성의 의병정신을 실제 우리의 활동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결국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 즉, 수행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또 수행이라고 하면 뭔가 종교적인 것 아니냐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사회 운동에서 수행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의병들은 어떻게 수행하면서 의병운동을 해 나갈 수 있을지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양극단의 목소리가 잘 전해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파의 극단이 있고, 좌파의 극단이 있는데, 이들의 장점은 열정적이라는 점입니다. 열정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까지 합니다. 대신 폐쇄적이고 독단적이라는 단점이 있죠. 그래서 정파적으로 볼 때는 상당한 힘이 있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사회를 분열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여야를 나눠 싸웠고 진보와 보수가 서로 싸웠지만, 요즘은 이 갈등의 정도가 거의 밥도 같이 안 먹고 말도 안 섞을 만큼 적대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서로가 편중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처럼 사유가 편중된 사람이 기독교를 믿으면 기독교 원리주의자가 되고, 무슬림을 믿으면 무슬림 원리주의자가 되고, 보수가 되면 보수 극단주의자가 되고, 진보가 되면 진보 극단주의자가 되는 성향을 보입니다. 사람의 심리가 이렇게 한쪽으로 편중될 때의 장점은 결단력이 있고, 행동력이 있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단점은 자기만이 옳다는 독단성입니다.

반면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의 장점은 편중되지 않고 포용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그만큼 추진력이 별로 없습니다. 가능하면 갈등이 있는 곳에 끼고 싶어 하지 않아요. 어찌 보면 고고하고 신사적인데, 갈등을 피하다 보니 추진력이나 힘이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아무래도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데만 몰두하면 분쟁이 생기고, 반대로 아무리 좋은 말도 추진하는 힘이 없으면 실천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에 결과물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회운동에는 늘 이러한 모순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화재단에서는 추진력과 결단력을 갖추면서도 동시에 편중되지 않은 제3의 길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재단이 통일의병을 만든 이유입니다.

자기만이 옳다는 편중성을 극복하려면 서로 다르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 다르지만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고 최소한 대화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협력이 가능합니다. 이 말은 자기 생각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의견을 갖되 자기 의견만 내세우며 상대를 부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 생각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생각도 소중하게 여기면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중요시한다는 것을 무엇이라고 이름을 정하기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갖는 걸 전통적으로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건 다른 사람만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도 성찰하고, 자기 주관에만 빠지지 말고 객관성을 유지하도록 깨어있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어떤 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면 억울한 요소가 생깁니다. 그럴 때 지금이라도 ‘우리가 너무 편중되었었나’ 하고 반성하기보다는 억울함에 빠져서 다시 정권을 빼앗아 와야 한다는 생각에만 골똘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적폐로 취급하며 청산할 생각만 합니다.

이 상황에서 통일의병은 한쪽에 편을 들지 않아야 합니다. 둘 다 틀렸다고 보고 우리만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는 어느 한쪽 입장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쪽의 입장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통일의병의 자세입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조금 더 나은 길, 조금 더 합리적인 길을 찾아가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통일의병입니다.

진보도 버리고 보수도 버리라는 게 아니라, 비록 진보에 있는 사람도 보수를 포용할 줄 알아야 하고, 보수에 있는 사람도 진보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배움을 일부 불교 용어와 함께 공부를 하다 보니 너무 종교적인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무슨 종교를 믿든,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든,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분열을 막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원래 각자가 자기주장을 펼치게 되어 있고, 투쟁도 하고, 싸우기 마련입니다. 그걸 다 없애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나 경쟁을 하고 투쟁을 하되, 나라를 위해 필요할 때는 서로 대화도 하고 협력도 하는 정도의 자세는 갖추어야 합니다.

국내에 있는 상대방과도 대화를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북한과 대화를 합니까? 진보 세력은 보수와는 대화하지 않고, 북한과는 대화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러면 보수가 볼 때는 저 둘은 같은 패거리라고 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니 ‘나라를 팔아먹는다’, ‘빨갱이다’ 하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반대로 보수 세력은 같은 민족인 북한과는 대화를 하지 않고, 일본과는 대화를 하고 협력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진보가 볼 때는 매국노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한 발만 떨어져서 보면 모순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북한과도 대화를 해야 하고, 일본과도 협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같은 헌법 체계 안에 있는 진보와 보수, 여야 사이에는 대화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합의가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대화는 되어야 하고, 어떤 어려움에 처할 때는 협력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쟁을 하면서도 필요할 때 대화와 협력을 해나가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런 역할을 해나가는 것이 통일의병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보수적인 시민단체와 진보적인 시민단체를 막론하고 계속 자기주장만 하지 협력이 거의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시민운동도 한계를 갖게 되는 겁니다. 설령 개인적으로는 보수에 있거나 진보에 있거나 중도에 있다고 하더라도 큰 국가적인 어젠다를 두고는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소소한 걸 두고 경쟁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 관점을 갖고 의병활동을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진보의병도 아니고, 보수의병도 아니고, 불교의병도 아닙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이 있을 수도 있고, 불교인이 있을 수도 있고, 보수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진보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의병으로 포용되려면 서로 존중하는 관점이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만 옳다고 밀고 나갈 거라면 처음부터 ‘보수당 의병’ 또는 ‘진보당 의병’ 이렇게 규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할 수 있는 국민적 의병이기 때문에, 그게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놓고 가야 합니다.

대신 개인적으로 어떤 이념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든 의병이 될 때는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은 의병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통일하지 말자는 의견을 가진 사람도 의병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의 종교나 이념은 일절 관여하지 않겠으나 적어도 통일을 지향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사람이어야 의병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만큼은 일치된 관점을 보이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의병입니다. 즉, 목표는 단일하되 개인의 개별성은 존중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불분명하고 개인성이 강조되면 여러 다른 의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목표는 분명하게 하되 개별성은 존중해야 합니다. 통일의병의 목표와 관계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포용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포용해야 하되,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성은 순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의병활동의 본래 취지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의병의 지도부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마음공부가 필요합니다. 불교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라면 피정(避靜)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행복학교를 다니는 정도의 공부는 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겪는 갈등도 대부분 나만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관점을 버리지 않고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입니다. 한쪽에서는 나만 옳고 상대가 틀렸다고 하고, 상대방도 자기는 옳고 남이 틀렸다는 걸 주장하니까 일반 시민단체들이나 세속에 있는 단체가 갖는 문제점들이 통일의병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의병의 수가 많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목표성이 유지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목표성이 유지된다는 전제하에 숫자가 많아져야 의병 활동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목표성이 유지되지 않은 채 중구난방으로 숫자만 많아지면 어느 순간 그 단체에 돈이 많아지거나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되면 분열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다양성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건 반성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표성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면 그 점도 반성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혼란 속에서도 통일의병은 일반 시민단체와는 다르구나 하는 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일반 시민단체와 별 차이가 없는 단체가 될 겁니다. 그렇게 되고자 우리가 의병을 따로 모을 필요는 없습니다. 일반 시민단체와 비슷한 양상을 띨 거라면 처음부터 다른 통일단체에 들어가서 각자 활동을 하면 될 일이지 왜 굳이 통일의병을 만들었겠습니까. 우리가 새로운 노력을 한번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면 이 관점을 잘 유지하면서 부족한 점을 계속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네,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관점을 잘 잡아나가면서 여기 모인 사람들과 부족한 부분을 같이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통일의병 모임의 운영과 관련하여, 활동하면서 생긴 개인의 고민과 관련하여,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모든 질문에 답변을 한 후 올해에는 조금 더 화합된 통일의병이 되기를 당부하며 운영위원들과의 즉문즉설 시간을 마쳤습니다.

정토회 합동회의

오후 1시부터는 정토회 합동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정토회 합동회의는 대중부, 공동체, 사회활동위원회를 비롯해 정토회 산하에 모든 단체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각 단위 사업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회의입니다. 참석자들은 사전에 자료를 충분히 검토한 후 오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스님이 입재 법문을 한 후 곧바로 안건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2023년 전국 사업보고를 듣고 나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후 2차 만일결사 사업 방향, 2-1차 천일결사 사업계획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질의응답이 끝나고 모둠별로 정토회의 운영 방향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갖고, 토론 결과를 다시 경청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발표 내용을 경청하고 혹시 더 의문이 나는 점에 대해 활동가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2차 만일결사부터 개편되는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었고, 스님의 답변을 통해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일곱 시간 동안 발표하고 토론하고 질문하는 시간을 가지는 동안 날이 저물었습니다. 참석자 모두가 2차 만일결사의 방향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 8시가 넘어서 합동회의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회향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회의하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다음 만 일, 그 가운데 최소한도 천 일을 이끌어갈 지도부가 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발심을 해서 힘차게 정토회를 이끄는가에 따라서 나머지 전법회원들과 일반회원들이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법륜스님이 어떤 상태에 놓이느냐가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주듯이, 여러분들이 어떤 상태에 놓이느냐가 대중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충분히 숙지하고, 파악하고, 또 함께 공유해서, 정토회를 새롭고 창의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미래를 내다봤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이 뭘까요?

지난 만 일을 돌이켜보면, 정토회가 상당히 조직적으로 움직여 온 측면도 있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또는 주먹구구식으로 움직여 온 것도 사실입니다. 뭐든지 처음에 일을 할 때는 사람을 믿고 해야 합니다. 제도나 법이 아니라, 초창기에 오직 믿을 수 있는 건 사람밖에 없습니다. 정토회도 처음에는 사람들을 믿고 그들에게 일을 다 맡겨서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규모가 커지게 되면, 그렇게 사람에 의지하는 방식으로 운영해 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규모가 커지면 사람을 믿는 방식만 갖고는 부족하고, 차츰 제도적인 뒷받침도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고 제자들을 받을 때만 해도 계율이라는 게 따로 없었습니다. 출가하겠다고 원을 세운 제자가 오면 ‘오라, 비구여!’ 한 마디 하신 게 전부였어요. 상가의 규모가 크지 않으니까 사람을 믿고 제자로 삼은 것이죠. 그런데 상가도 사람이 점차 많아지니까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했고, ‘이런 건 하면 된다’, ‘저런 건 하면 안 된다’ 이렇게 계율이 나오게 된 겁니다. 계율이라는 것이 사회로 말하면 법규이고, 정토회로 말하면 규칙입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법규 중심으로만 운영을 하면 오히려 그 규칙에 사람이 갇혀서 속박을 받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법규에 지나치게 갇혀서도 안 되지만 일정 정도의 규모가 생기면 사람만 믿고 해 나갈 수도 없습니다. 재정지출의 관리도 사람한테만 맡길 게 아니라 크로스 체크를 해서 안정하게 관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인력 관리도 어느 한 사람만 믿고 맡겨 놓으면 나중에 친한 사람들과 인정에 기반한 인사이동이 일어날 위험이 있습니다. 사업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자꾸 움직여나가다 보면 사업이 개인화될 수 있는 것처럼, 정토회도 미래에 더 큰 비전을 만들어가려면 규모가 커질수록 제도화하고 규칙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속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

그래서 담당하는 사람이 바뀌더라도 단체가 큰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 법륜스님이 없어도 정토회가 나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어야 해요. 공동체 법사님들이 없어도 정토회가 나아가는 데 큰 영향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지난 30년 동안 제도화를 꾸준히 이뤄왔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시스템을 잘 구축해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는 인정에 기반해서 운영하거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면 안 되고, 가능하면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회의를 소집해서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정토회의 운영 방식이 우리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종교단체나 개인이 일으킨 단체를 보면, 처음에 시작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모든 권한을 다 가지고 운영하고, 나머지는 그 사람만 쳐다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사람이 죽으면 그 단체도 함께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수도 없이 봐 왔습니다.

정토회 역시 그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1세대가 살아있을 때 차츰 제도화를 시켜 나가야 합니다. 다음 3년 동안은 다음 세대가 자리를 잡고 나아갈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정토회가 얼마나 큰일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이 일이 지속가능하도록 제도와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매우 중요합니다.”

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사홍서원과 함께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하는 정토회 합동회의를 끝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을 생방송하고, 8일 출가열반 정진 7일째 법회를 한 후, 오후에는 제13차 통일의병대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저녁에는 일요명상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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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북한을 적대시 하는 미국만을 추종하다 결국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듭니다.

통일의병이 활성화 되어
전쟁은 안된다는
확신이 점점 더 많은 국민들에
전파 되었으면 합니다.

2023-07-13 12:22:06

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3-03-23 09:44:39

김병숙

든든한 정토회의 미래를 봅니다
감사합니다

2023-03-20 0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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