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6.9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 온라인 수행법회
“투자를 하고 나서 후회하는 마음이 자꾸 듭니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6시에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해가 뜰 무렵 산윗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은 가을에 심어 추운 겨울을 난 후 알이 굵어진 마늘을 수확하는 날입니다. 정토대전 사상서 편찬 회의를 하기 위해 어젯밤에 두북으로 온 법사님들도 함께 울력을 했습니다.

산윗밭은 산을 개간해서 만든 밭이라 영양이 부족하고, 자주 가기가 힘듭니다. 농사 전문가가 손이 덜 가는 마늘과 양파를 실험 삼아 심어 보라고 추천을 해주어서 작년 겨울에 난지형 마늘과 한지형 마늘 두 종류를 심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한지형 마늘을 수확했습니다.

한 두둑에 두 명은 뽑고 한 명은 정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 명씩 세 줄을 맡아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같이 시작했지만, 두둑별로 뽑는 속도가 달라 격차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가장 앞서가던 스님보다 법사님들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스님 바로 옆 두둑에서 마늘을 뽑던 묘당 법사님이 사면에 예초기를 돌려야 해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묘당 법사님과 함께 짝을 맞춰 제일 앞서 나가던 대광 법사님은 가장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뒤쳐진 대광 법사님을 보고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래서 공정성이 중요해요. 앞서 나가다가도 한 명이 빠지니까 우리가 앞서가잖아요.”

거기다 스님이 맡은 두둑은 반만 한지형 마늘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같이 시작해서 가장 빨리 끝난 두둑은 스님이 뽑은 두둑이었습니다.

“이래서 줄을 잘 서야 해요.(웃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늦잖아요. 공정성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이어서 스님은 밭 가장자리 두둑으로 옮겨 갔습니다.


가장 빠른 속도로 나아간 사람은 무변심 법사님과 행자님이었습니다. 제일 앞서간 두 사람은 돌아서서 대광 법사님 혼자 뽑고 있는 두둑을 반대편에서 뽑아왔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 두둑에서는 쑥쑥 뽑히던 마늘이 이번에는 잘 뽑히지 않았습니다. 땅이 딱딱해서 이지창과 손괭이를 이용해서 뽑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해서 빠른 줄 알았더니 조건이 좋아서 빠른 거였네요.” (웃음)

빠르다고 잘난 체 할 것도 느리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밭에 있는 한지형 마늘을 다 뽑을 때까지는 계속 뽑아야 하니까요.


마늘을 쑥쑥 뽑는 동안 뒤에서는 마늘을 크기별로 분류해 30개씩 묶었습니다.


이렇게 묶은 마늘은 밭에서 일주일간 말립니다. 직사광선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마늘단을 차곡차곡 포개어 줄기로 마늘을 가려주었습니다.

마늘을 다 뽑자 모두가 마늘을 묶는 일에 붙었습니다.

마늘을 다 묶기도 전에 울력을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발우공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늘을 밭에 두고 내려왔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스님은 울타리 바깥쪽에 키보다 높이 자란 죽순과 칡덩굴을 벴습니다.


“일찍 알았으면 먹기라도 할 텐데 너무 자라 버렸네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밭을 내려왔습니다.

“백신 맞고 일하지 말라고 해서 무리는 안 했어요. 하지 말라는 게 많네요.”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발우공양을 시작했습니다. 발우를 펴고 아침에 뜯은 싱싱한 상추도 함께 먹었습니다.

대중공사를 마치고 두북 공동체 대중이 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비가 오기 전에 오늘 오후에 오디를 한 번 더 따러 갑시다. 비가 오면 오디에 단맛이 없어져요. 지금은 나무를 건드리기만 해도 오디가 주르륵 떨어집니다. 누가 저랑 같이 갈래요?”

“제가 가겠습니다.”

행자님 두 명이 손을 들고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행자님은 같이 안 갈래요?”

“저는 공양 당번이어서 체력을 좀 안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스님과 두 명의 행자님이 함께 오디를 따러 가기로 하고 발우공양을 마쳤습니다. 오전 10시 30분부터는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불교사상팀에서 지난 한 주 동안 공부하고 세미나 한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두 가지 내용에 대해 발표를 했는데, 하나는 촉과 오온의 작용에 대한 내용이고, 하나는 삼세 양중 인과설에 대한 내용입니다.

발표 후 법사님들 사이에서 삼세 양중 인과설을 어떻게 볼 것인지 활발하게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토론 과정에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자 법사님이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스님, 저희는 계속 토론을 해봐도 삼세 양중 인과설에 대해 어떻게 관점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는데, 스님께서 좀 정리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여러분이 계속 연구해서 모순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방향을 찾아 나가야지, 스님이 얘기를 해버리면 그게 정답이 돼버리기 때문에 탐구가 안 돼요.”

스님은 법사님들이 연구할 수 있게 방향을 일러준다는 관점에서 불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가이드라인을 정하기 전에 정토대전을 만드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해요. 이 일은 ‘도대체 불교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불교는 역사 속에서 2,60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각기 그 시대에 맞게 적응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어요. 사회주의에 가면 사회주의에 맞게, 자본주의에 가면 자본주의에 맞게, 봉건제에 가면 봉건제에 맞게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 필요했습니다. 십 년도 아니고 수백 년 동안 그렇게 유지를 하거나 발전을 하려면 그 체제에 부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잖아요. 인도에서 불교가 살아남으려면 윤회를 부정하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며, 만약 지금 북한에서 불교가 살아남으려면 주체 사상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겠어요? 공산주의에서 불교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공산주의적 해석을 따르지 않고 살아남겠어요? 또 현대 자본주의에서 불교가 살아남으려면 자본주의적인 발전관을 안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중이 참여를 하겠어요?

물론 한 사람은 시대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의 규모를 이루어 사회에 집단적 영향을 주려면 대중이 많이 참여해야 해요. 대중이 참여하려면 그 가르침이 자기들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이것에 대해 표현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죠. ‘왜곡됐다’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것 자체를 역사로 받아들일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왜곡됐다고 표현하기로 하면 사실은 모든 게 다 왜곡됐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말이나 행동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알아보고자 지금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수많은 자료들도 전부 이런 과정을 거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100년 전에 살다 가신 스님들은 아무리 고승이라고 해도 한역으로 된 경전 밖에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부처님은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절에 비해 오늘날 우리가 조금 더 상황이 낫긴 합니다. 니까야(팔리어 경전)까지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자료에 따라 부처님의 모습이 다르구나’ 하면서 부처님의 모습을 새로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그림이 진짜 부처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니까야(소승 경전)이라는 것도 실제 부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접하는 건 전부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그려놓은 그림인데, 실제의 부처님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비유를 하자면, 부처님의 얼굴을 이 사람들은 이렇게 그려놓고, 저 사람들은 저렇게 그려놓고, 사람마다 다르게 그린 것을 앞에 펼쳐두고 어느 게 진짜 부처님의 얼굴인지 가려보려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럴 때 어떤 게 부처님의 진짜 얼굴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어려운 일이에요. 시대마다 지역마다 그것을 달리 그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니까야(소승 경전)가 오리지널이라는 말도 맞지 않아요. 우리가 지금 자료를 검토하며 오류를 수없이 봐 왔듯이 이 역시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이 그린 그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지나치게 니까야에 치우친 해석도 사실은 위험해요. 자기 그림을 포기하고 남의 그림을 무조건 맞다고 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림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금의 세계적 추세에서 보면 안 맞아요. 즉 대승 불교인들이 소승 불교를 우습게 아는 것도 맞지 않지만, 요즘 사람들이 미얀마 또는 스리랑카에서 가르치는 불교만이 진짜이고 대승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그림 중에 어느 게 오리지널 부처님의 모습인지 찾으려면 ‘도대체 어느 시대의 그림을 가지고 오리지널이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그린 그림이 있으면 되겠지만, 역사적으로 대다수의 그림들이 아무리 빨라도 부처님 열반 후 5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그려진 것들이에요. 대승 경전도 다 그 시기에 그린 그림입니다. 소승 경전은 구전을 채록했다는 형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경전이 나온 시기는 비슷해요. 우리는 소승 경전이 먼저 나오고 대승 경전은 나중에 나왔다고 알고 있지만, 채록 시기로 보면 대승 경전이나 소승 경전이나 대부분 불멸(佛滅) 후 500년에서 1000년 사이, 즉 기원 후 1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나왔습니다. 그 경전들이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중에 무엇인가를 ‘진짜 불교다’라고 말하는 방식 자체가 위험합니다. 수많은 그림 중에 어떤 그림이 진짜 부처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그렸다고 해서 무조건 그게 진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림은 많지만 정작 부처님 당시에 그려진 그림은 없기 때문이에요.

가장 원형에 가까운 부처님의 말씀

그런 면에서 다시 살펴보면 철학적으로 해석을 하거나 전문적인 단어가 들어간 내용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형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대중과 만나서 부처님이 대화한 내용이 가장 원형에 가깝지 않을까 이렇게 추론해 볼 수가 있어요. 부처님은 교리를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철학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강가 강에서 목욕하고 기도하면 정말 천국에 태어납니까?’ 하고 묻는 대화에서는 아무런 철학적인 요인도 없고, 공이니 무아니 무상이니 오온이니 12처니 하는 용어도 전혀 나오지 않잖아요. 그냥 만나서 대화했고, 그 말을 듣고 깨달아서 출가를 한 겁니다. ‘이렇게 하면 다음 생에 뭐가 된다’, ‘너는 전생에 무엇이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있다’ 이런 얘기는 대화 속에 전혀 없어요. 우리가 유추해 본다면 이런 내용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장 원형에 가깝지 않겠느냐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내용도 원형이 아닐 수 있지만요.

과연 부처님이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에 대해 연구를 하셨을까요? 정말로 부처님이 천상이나 극락에 태어난다는 얘기를 하셨을까요?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과연 하셨을까요? 부처님은 어제를 얘기해도 그건 지나간 얘기라고 하셨고, 내일을 얘기해도 그건 오지 않은 얘기라고 하셨고, 항상 ‘지금 여기 깨어있으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입니다. 어제 얘기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전생 얘기를 하셨겠어요? 내일 얘기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생 얘기를 하셨겠어요?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무상이나 무아와 같은 불교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해서 물질 현상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건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지 부처님은 과학이나 물질을 연구하신 분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부처님이 물질 현상에 대해서도 다 깨닫고 통달했다 이렇게 기록하기가 쉽습니다. ‘불교는 과학이다’ 하는 주장은 이런 모순에 빠질 수가 있어요.

마찬가지로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생과 내생에 대해 궁금해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갖고 설명을 해내야 했던 거예요. 그런 필요성에 의해서 왜곡된 내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왜곡하고 싶어서 일부러 왜곡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어요.

부처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먼저 알아야 되는 이유

삼세 양중(三歲兩重) 인과설이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논쟁은 ‘붓다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해요. 우리가 붓다가 어떤 분인지를 먼저 알게 되면 전생이 어떻고 내생이 어떻다는 이야기들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어지게 됩니다. 불교의 목표는 물질을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생명을 연구한 것도 아니고, 무슨 병을 연구한 것도 아니에요 불교의 목표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괴로움과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가?’
‘그 두려움이 왜 발생했는가?’

이렇게 부처님의 문제의식은 왜 괴로움이 생겨나는가와 어떻게 괴로움을 없애는가입니다. 해탈과 열반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데에 필요한 내용인가?’ 하는 것 외에는 그 시대마다 필요에 의해서 내용을 갖다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경전을 읽더라도 헷갈리지 않을 수 있어요. 괴로움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12연기가 나왔지, 무슨 몸뚱이가 어떻게 태어나느냐를 설명하려고 나온 얘기는 아닙니다.

삼세 양중 인과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이 과거세(過去世), 현재세(現在世), 미래세(未來世)를 과거생(過去生), 현재생(現在生), 미래생(未來生)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세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뜻하고, 현재세란 한 생각이 일어난 것을 뜻하고, 미래세란 한 생각이 일어난 후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면 굳이 삼세 양중 인과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마음 작용을 과거 또는 미래와 연관해서 분석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 생각 이전에 일어난 것이 다음 생각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또 다음 생각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과거에 일어났던 욕망이 현재 일어나는 욕망에 영향을 주고, 현재 일어나는 욕망이 다음에 일어날 욕망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어요. 조금 전에 사물을 이해했던 이해의 바탕이 현재의 사물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고, 현재 사물을 이해했던 바탕이 다음에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호 연관성 속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지금도 실제로 체험하거나 검증이 가능한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불교의 목표가 괴로움이 없는 삶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다양한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잠시 휴식을 한 후 불교의 사회사상을 주제로 회의를 했습니다. 오늘은 로히니 강의 물싸움, 석가족의 멸망 과정에서 부처님이 보이신 말과 행동을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 실천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발표하고, 스님의 의견을 들은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지금 오디를 따러 가야 하는데 해가 너무 뜨겁네요. 해가 좀 기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디 따러 갑시다.”

손님이 찾아와서 잠시 차담을 나눈 후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 6시가 되어 다시 작업복을 입고 저수지 뽕나무로 갔습니다.

이번에도 나무를 제일 잘 타는 스님이 나무 위로 올라가 가지를 흔들어주고 행자님들은 밑에서 떨어지는 오디를 주워 담았습니다. 잘 익은 오디가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가지를 흔들기 어려운 곳은 장대로 가지를 건드렸습니다.


나무 밑에 펼쳐놓은 천막에 오디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떨어진 오디를 모아 상자에 담았습니다. 지난번 보다 양은 줄었지만 맛은 더욱 달았습니다.


“천막을 또 깔아 둡시다.”

아직 뽕나무에는 오디가 많이 달려있었습니다. 나무 아래 사방으로 천막을 깔아 두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수행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일반 회원 중 저녁 시간에 법회를 듣고 있는 8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스님은 더워진 날씨에 따른 두북 수련원의 하절기 일정과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한 이후 지난 50일간의 변화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 후 곧바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4명의 질문을 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금전적 손해가 발생했을 때 자책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난다며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투자를 하고 나서 후회하는 마음이 자꾸 듭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굉장히 자책하고 후회하는 습관이 깊습니다. 특히 돈에 관해서 더욱 그렇습니다. 저의 실수나 잘못된 판단으로 금전적 손해가 발생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그랬나’ 하는 자책감과 후회하는 마음이 듭니다. 10년 전 투자를 잘못한 것이 지금도 생각이 나고, 최근에도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일 처리를 한 탓에 세금을 많이 내게 된 것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가 되고 마음이 불편합니다. 어떻게 하면 돈에 관해 자책하고 후회하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죠. 돈에 대해 집착하는 한은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안 그러면 실패 안 하고 계속 돈을 벌기만 해야 하는데, 그게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잖아요.

보통 ‘주식에 투자한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주식은 투자라기보다는 ‘합법적 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 비트코인 투자 등을 합법적 투기로 할 거냐에 대해 지금도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사실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인데 이 투기를 합법화 할 거냐 안 할 거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자라고 하지만 엄격하게는 투기적 성격이 더 강합니다.

투기라는 건 도박과 같아서 돈을 벌 때는 왕창 벌고, 돈을 잃을 때는 왕창 잃을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참여하면서 괴로움이 없으려면 아예 참여할 때부터 돈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돈을 벌기만 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누군가는 돈을 잃어줘야 내가 돈을 딸 수 있는 겁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니 질문자도 여기에 참여할 때는 돈을 잃을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괴로움이 안 일어나요.

‘이번에는 돈을 잃었다.’
‘이번에는 돈을 땄다.’

이렇게 여러 번 해보고 나서 종합적으로 계산해봤을 때 ‘그래도 이익이다’라고 판단이 되면 계속하는 것이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손해라고 판단이 되면 그만둬야 하는 거예요. 투기는 늘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런 관점을 딱 갖고 시작하면 아무런 괴로움이 안 생기죠. 결국은 욕심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돈을 벌 생각만 가득하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웃음)

주식만 그런 게 아니에요. 주식을 하든, 부동산을 하든, 남한테 빌려주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자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도 결국 이익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에요. 은행은 이율이 낮고 사채는 이율이 높으니까 사채에 돈을 주는 거죠. 사채는 이율이 높은 대신에 그만큼 높은 위험도를 안고 있습니다. 반면에 저축은행은 그 중간쯤 되죠. 이율이 은행보다는 조금 높고 사채보다는 안전해요. 그래도 가끔은 저축은행도 부도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이익이 수반되는 곳에는 위험 부담도 크기 때문에 그렇게 이율이 높은 거예요.

예를 들어 ‘은행 이율이 1퍼센트인데 나한테 투자하면 5퍼센트를 주겠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잘 안 믿습니다. 어떻게 5퍼센트를 줄 수가 있느냐고 생각해요. 그래도 진짜 준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100만 원만 넣어봅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자 5퍼센트를 줍니다. 그러면 재미가 붙어서 이번에는 500만 원을 넣습니다. 그러면 또 이자를 줘요.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나중에는 없는 돈도 빌려서 1천만 원도 넣게 되는 거예요.

‘투자를 해서 돈을 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안 그렇습니다. 이런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들어온 돈을 갖고 앞서 돈을 넣은 사람에게 이자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돌려막기를 하다가 언제가 이율로 내보내는 돈보다 신규 투자액이 적어지면 그때 부도가 나는 거예요. 1년 만에 터질 수도 있고, 3년 만에 터질 수도 있고, 5년 만에 터질 수도 있고, 더 오래갈 수도 있어요. 몇 년 전 월가에서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는 이런 돌려막기를 30년씩 해온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처럼 신규 투자를 갖고 메꾸면 계속 운영이 가능한 거예요. 그러다가 한 번 터지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실을 입히게 되죠.

지금 비트코인 같은 것에 투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돈이 벌리는 게 아닌데, 그 판에 계속 몰려들어오는 돈이 있다 보니까 코인의 시세도 올라가는 거예요. 어찌 보면 노름판과 똑같습니다. 그걸 법률로 합법화시키면 투자라고 하고, 불법화시키면 노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질문자가 그런 일에 관여한다면 돈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익이 높은 대신에 그만큼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런 일에 일절 참여하지 않으면 돈을 잃지도 않지만 돈을 벌지도 못 하는 것이고, 위험 부담을 안고 그런 일에 참여한다면 돈을 벌 가능성도 있지만 돈을 잃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부동산, 주식, 코인은 그동안 너무 시세가 올라버렸기 때문에 지금 참여하면 잃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만큼 위험부담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계속 투자하는 모습을 보니까 질문자도 따라 하기 쉬워요. 처음에 누가 하자고 할 때는 ‘아이고, 잃으면 어떡하나’ 하고 위험부담 때문에 망설이거든요. 그런데 주변에서 돈을 땄다는 소리만 계속 듣게 되면 어느 날부터는 ‘아, 그때 투자했으면 얼마만큼은 벌었을 텐데!’ 하고 후회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뒤늦게 뛰어들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시세가 꼭짓점에 다다라 있어요. 그래서 돈을 잃게 되고, 돈을 잃고 나면 ‘그때 괜히 했다’ 하고 또다시 후회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투자를 안 해서 후회하고, 나중에는 투자를 해서 후회하는 거예요. 질문자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첫째, 질문자가 괴로운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둘째, 투기를 하든 투자를 하든 노름을 하든 괴롭지 않으려면 위험부담을 각오하고 하면 됩니다. 그래야 괴롭지 않아요. 저는 그런 걸 두고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입니다. 돈을 빌렸으면 이자 쳐서 갚아야 하는 것이고, 갚기 싫으면 좀 궁하더라도 그냥 살아야 하는 거예요. 결국 본인이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질문자가 어떤 분야에 투자를 했거나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줬다면 거기엔 벌써 위험 부담이 내재해 있는 거예요. 이자를 받기로 약속을 했더라도 남한테 돈을 빌려주는 순간 이미 못 받을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그 행위를 할 때 벌써 위험이 따르는 거예요. 그런데도 ‘친구니까 빌려줬다’, ‘동창이니까 빌려줬다’, ‘형제니까 빌려줬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서로 원수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제가 즉문즉설에서 이런 질문이 나오면 ‘아는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말고 그냥 줘버려라’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왜 그럴까요? 남에게 빌려줄 때는 안정성을 점검하고 증빙서류를 반드시 작성하는 반면에, 아는 사람은 아무런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못 받을 확률이 훨씬 높아요. 그러다 원수까지 져서 돈도 잃고 사람도 잃게 됩니다.

그러니 항상 투자를 할 때는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이익이 높으면 위험이 그만큼 높습니다. 이걸 알고 본인이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돈을 잃어도 손을 툭툭 털면서 ‘재미있었다’ 이렇게 말하고 바로 물러날 수 있습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저한테 위기가 오면 자꾸 회피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마음이 없어질까요?
  • 부처, 예수, 마호메트, 공자 등 세계적인 성인들은 모두 남성들 위주입니다 왜 여성 성인들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남아서 방청객으로 참석한 분들 중에서 즉석에서 현장 질문도 받았습니다. 두 명이 추가로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 한 후 스님이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돈을 투자하고 나서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는 분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앞으로 투자를 하게 되면 언제든지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측면도 잘 생각하겠습니다. 몇 년 전 남편이 퇴사한 뒤로 제가 돈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생각보다 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질문자를 격려하며 마음을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노령연금을 비롯해 사회보장 제도가 갈수록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늘어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러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면 그것 갖고는 부족하겠지만, ‘밥만 먹고살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아무 걱정할 게 없어요.”

“스님, 제가 정말 욕심이 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항상 남들보다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습니다.”

“형편이 되면 그렇게 사셔도 돼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괴로워 하고 불안해 한다면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음식이 맛있으면 많이 먹어도 돼요. 먹지 말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났다고 하니까 ‘지금은 그만 먹어라’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음식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한테 ‘먹지 마라’ 이런 얘기를 하지는 않아요. ‘맛있다고 많이 먹다가 배탈이 났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니까 ‘그러면 먹지 마라’ 하고 대답하는 겁니다.

투자를 해보니 손해를 봐도 재미있다고 하고, 이익을 봐도 재미있다고 하면, 제가 왜 ‘투자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겠어요?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봐서 괴로워 죽겠어요’라고 얘기하니까 제가 대답하는 겁니다. 왜 투자를 했는지를 살펴봐야 해요. 투자라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손해를 볼 위험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아예 투자를 안 하든지, 투자를 하려거든 항상 손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라는 거예요. 이익이 높을수록 손해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게 되는 순간 툭툭 털어버릴 수 있어야 해요. 노름을 하다가 밑천이 다 떨어지면 바로 툭툭 털고 일어나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잘 놀았다. 너희는 계속 잘 놀아라. 난 집에 간다’

그러곤 얼른 집으로 와야지 본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집을 팔게 되는 겁니다. 수행이란 ‘노름하지 마라!’ 이런 게 아니에요. 노름을 하고 싶으면 하라는 겁니다. 이 좋은 세상에 무엇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억누르고 삽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놓고 자기가 괴롭다고 하잖아요. 자기가 결혼해놓고 자기가 괴롭다고 해요. 스님이 하라고 한 게 아니라 본인이 좋아서 해놓고는 왜 저한테 와서 ‘괴로워서 못 살겠어요’ 이렇게 하소연을 하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저는 ‘그러면 같이 살지 마라’ 이렇게 말하죠. 그러면 ‘애는 어떡하고요?’ 하고 묻습니다. 당연히 제 대답은 ‘그러면 같이 살아라’ 이겁니다. (웃음)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을 하지 않아요. 담배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담배를 피워놓고는 건강에 안 좋다고 피울지 말지 고민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대화가 전개되는 겁니다.

‘그러면 담배를 끊으세요.’

‘아이고, 담배는 죽어도 못 끊어요!’
‘그러면 담배를 피우세요.’

‘건강에 나쁘잖아요!’
‘그러면 담배를 끊으세요.’

‘죽어도 못 끊겠어요!’
‘그러면 담배를 피우다가 죽으세요.’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어떻게 상담을 저런 식으로 하나?’

저는 상담을 하지 않습니다. 스님이 된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 상담을 하고 삽니까. 저는 인생 상담을 하고 싶다고 신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상담원에 가서 돈 내고 해야지 왜 저를 찾아옵니까?’ 하고 거절해요. 그래서 개인 상담은 일절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상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법담(法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소재로 해서 법담을 나누는 겁니다.

여러분이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데 스님이 굳이 먹지 말라고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걸 먹고 나서 ‘배가 아프다’, ‘배불러서 죽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러면 그만 먹어라’ 하고 말하는 겁니다. 얼마나 쉬워요? 그래도 꼭 먹겠다고 하면 ‘그럼 계속 먹고 그렇게 괴로워해라’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항상 본인이 선택을 하는 거예요. 스님이 선택해주는 게 아니에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선택해야 합니다. 돈을 잃을 각오를 하고 투자를 하든지, 돈을 잃을 위험이 있으니까 투자를 하지 말든지, 본인이 선택하는 거예요.”

“네, 잘 알겠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다음 주를 기약하며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해외에서 법사 수계를 받기 위해 귀국한 두 분의 법사님과 함께 무안 미륵사와 구미 아도모례원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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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공짜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니까 인생이 많이 가벼워진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으로 인해 내가 뭘 얻게 될 거고 뭘 잃게 될 건지 미리 생각하고,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로 선택을 하니까, 더 이상 선택을 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우유부단의 이유는 결국 욕심인 것 같아요.

2021-08-12 12:27:08

송미해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06-14 10:32:08

보리

요행을 바라고 내 능력 이상을 바라는 마음을 경계하겠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2021-06-14 07: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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