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2.24 온라인 수행법회, 평화재단 이사
“이득을 보려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싫어요,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 신축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불상 제막식을 한 후 스님은 정토회관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온라인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1200여 명의 주간반 정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2021년도 벌써 두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2월 마지막 법회이고, 다음 주부터는 봄맞이 법회가 되겠습니다. 매서운 추위도 지나가고, 날씨가 한결 따뜻해졌어요. 시골에 가봤더니 벌써 담장 밑에 난초가 파랗게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도 오는 봄을 막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급변하고 있는 지금 시대를 이야기하며 변화에 대처하는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정토회는 온라인정토회로 전면 전환을 했습니다. 그 동안 운영방식을 온라인으로 바꾸고 그에 맞게 조직을 재편하느라 많은 공청회와 논의가 있었는데, 1월 말로 그 작업도 끝이 났어요. 지금은 전국에서 지역 법당을 철거하고, 모둠을 재편성한 후 모둠에 기초해서 지회와 지부를 만드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많이 혼란스럽죠?

이런 변화 속에서 여러분들이 많은 혼란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혼란을 느끼게 되지만, 사실 세상에는 큰 혼란이 없습니다. 세상은 늘 그렇게 변해 왔습니다. 급격하게 변할 때도 있고, 변하지 않고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서서히 변할 때도 있어요. 그때마다 변화의 속도가 제각기 다를 뿐이에요. 그런데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들의 인식 틀이 고정되어 있다 보니까 변하는 세계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모든 게 혼란스러워 보이고 불편을 느끼는 겁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로 악수를 못 해서 서운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 악수하고 살았습니까? (웃음)

옛날에는 아무도 인사할 때 악수를 안 하고 지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늘 악수를 하다 보니까 악수를 나누지 않으면 인사한 것 같지 않다고 느끼는 겁니다. 인사할 때 포옹을 하던 사람들은 포옹을 안 하면 인사한 것 같지가 않다고 하듯이 이것도 다 습관의 문제입니다. 옛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서로 엎드려 절을 하는 게 인사였어요. 그러다가 악수를 하는 문화로 바뀌었는데, 그 때도 처음에는 악수가 무례하다고 해서 반발과 갈등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또 악수를 안 하고 인사를 하면 맞먹으려 들거나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잖아요.

이것은 다 인사법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변화가 오면 그 변화 자체는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인식의 틀이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혼란스럽게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혼란스럽다’ 이렇게 말들 하지만 세상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세상은 늘 그렇게 변해가고 있어요.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면 사람은 또 여기에 적응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을 느끼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게 일상생활이 돼요. 원시시대에는 옷을 안 입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옷을 입게 되고, 옷을 입고 살다 보니 한때는 또 너무 많이 주렁주렁 껴입었잖아요. 옷을 안 입고 있다가 옷을 입으면 답답하게 느껴지고, 옷을 많이 입고 있다가 좀 벗으면 마치 벌거벗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면 적응해서 편안하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마스크를 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마스크를 끼고 사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앞으로는 마스크를 벗는 것이 마치 평소에 늘 화장을 하다가 화장을 안 한 맨얼굴을 내놓는 것 같이 느껴져서 오히려 불편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반면에 늘 마스크를 안 끼다가 끼게 되면 갑갑하고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옷으로 몸을 다 가려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잖아요. 그것처럼 모두가 마스크를 일상적으로 끼고 다니다 보면 앞으로는 눈만 보면 상대가 누군지 다 알아보는 인식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얼굴 전체를 보고 인식하는 방식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눈만 보고는 인식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는 얼굴을 가리는 복면도 마스크처럼 코와 얼굴 아래쪽을 주로 가렸어요. 그렇게 얼굴의 아래쪽 절반만 가려도 알아보기 힘드니까요. 그러나 지금처럼 다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생활에 오래 적응을 하면 눈만 봐도 누구인지 인식하는 능력이 또 생기게 됩니다.

변화에 대처하는 수행자의 자세

마스크를 끼든 마스크를 벗든, 옷을 많이 입든 적게 입든, 짧게 입든 길게 입든, 이런 변화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다 습관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습관과 너무 다르다 보니까 불편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서서히 변하는 게 아니라 급격하게 변하니까 굉장히 갑갑하고 두려움도 생기는 거예요.

수행하는 사람은 어떤 변화가 와도 능히 그 변화에 대응하고, 적응하고,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조건을 나에게 유리하도록 활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해요. 마스크를 끼는 것이 불편한 것처럼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적응하기가 어렵듯이, 정토회의 변화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달라지니까 적응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지역마다 법당이 있고 그 법당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 방식이 모두 바뀌게 되니까 한편으로는 편리하다고 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처음부터 이렇게 온라인으로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면 또 다르게 느껴졌을 겁니다. 지금 정토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불교대학도 온라인으로 하고, 경전반도 온라인으로 하고, 법회도 온라인으로 하는 것에 처음부터 익숙해지기 때문에 ‘원래 이런가 보다’ 하고 아무 문제를 못 느끼겠죠.

아무튼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변화가 좀 빠른 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지 않으면 혼란을 느끼기 쉬워요. 그러나 수행자는 이런 빠른 변화에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적절히 대응해 나가야 합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150여 명이 방청객으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6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직접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이득을 보려고 접근하는 사람이 너무 싫은데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이득을 보려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싫어요, 어떡하죠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젊었을 때부터 인간관계가 귀찮았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강하다는 생각으로 지냈습니다. 이득을 보려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특히 싫어하고, 상대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면 거리를 둡니다. 불법을 접하면서 연기법을 배웠지만 마음으로는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네,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질문자가 사는 모습은 좋게 말하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동물 같이 산다고 할 수 있어요. 산속의 다람쥐 같이 살고 있는 거예요.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내 일만 하고 산다’ 이런 관점이잖아요. 그렇게 산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는 없어요. 동물 같이 사는 것은 다른 사람한테 특별히 이익도 주지 않지만 특별히 손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없어요.

사람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남한테 이익을 주기보다 해를 많이 끼치는 사람, 남한테 이익도 안 주고 손해도 안 주는 사람, 남한테 이익을 주는 사람, 이렇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어요. 손해를 많이 끼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저런 사람은 좀 없으면 안 될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에게 손해도 안 끼치고 이익도 안 주는 사람은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있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없다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익을 주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아이고, 저 사람은 꼭 필요해’ 이렇게 말합니다.

옛날에 나쁜 왕은 백성들의 원성을 많이 들었습니다. 손해를 많이 끼치는 왕은 없는 게 더 좋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나라에도 잘못된 정치인을 비롯해 ‘이런 사람은 없는 게 더 낫겠다’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우리 주위에 청소부는 없으면 안 됩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 직업을 하찮게 여기더라도 청소부는 ‘꼭 필요한 사람’에 속합니다. 반면에 엄청난 권력이나 재물, 명성을 갖고도 이 세상에 없는 게 좋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가치 기준으로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요. 세상의 가치가 아닌 진리의 눈으로 보아야 어떤 사람이 정말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질문자는 이 세 종류 중에서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지향하는 것 같아요. 남에게 이득을 볼 생각도 없지만, 본인한테 이득을 보려고 접근하는 사람도 싫어한다고 하니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죠. (웃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이득을 보기 위해 접근하기 마련이에요. 그 중에서도 제일 이득을 보려고 접근하는 게 결혼입니다. 보통은 한 사람에게 접근할 때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 한두 가지예요. 그렇게 많지 않아요. 경제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경제적 이익을 보려고 접근하고, 권력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아부해서 한 자리 얻으려고 접근하고, 유명한 사람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옆에 붙어서 자기도 같이 유명해지려고 접근합니다. 그런데 결혼 상대를 고를 때는 여러 가지를 전부 다 이득 보려고 해요.

상대가 돈이 있어서 경제적으로 이득을 봤으면 좋겠고, 지위도 높아서 이득을 봤으면 좋겠고, 집안도 좋아서 이득을 봤으면 좋겠고, 능력도 있어서 이득을 봤으면 좋겠고, 성격도 좋아서 비록 내가 까칠하게 굴어도 상대는 나에게 너그러웠으면 좋겠고, 나는 한눈을 팔더라도 상대는 나만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종합적으로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이 결혼 상대자를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이런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다는 얘기예요. ‘그게 사람이다’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득 보려는 마음은 중생심인 줄 알아서 가능하면 내려놓고, 남이 이득 보려고 나한테 접근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얼마 전에 즉문즉설을 하는데 어떤 분이 제게 말하길, 얄미운 친구가 있대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말해요.

‘그 친구는 평상시에는 전화 한 통 없다가 꼭 자기가 필요한 때만 전화를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애초에 전화가 왜 생겼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원래 필요한 용건이 있을 때 소통하기 위해서 전화가 만들어진 거 아니에요? 농담하라고 전화가 만들어진 건 아니잖아요. 필요할 때 얘기하라고 생긴 게 전화니까 전화는 필요할 때 하는 게 당연합니다. 필요하지 않을 때 자꾸 전화하면 ‘왜 쓸데없이 전화하냐?’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니 필요할 때 전화한다고 얄밉게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저도 다른 사람한테 연락할 때는 항상 뭔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연락합니다. 평소에는 연락을 안 해요. 부탁할 것이 있을 때 연락합니다. 그 사람이 질문자처럼 생각한다면 저한테 뭐라고 할까요?

‘이 스님은 평소에는 연락도 안 하더니 꼭 자기가 필요한 때만 연락하네!’

이렇게 말하겠죠. 이처럼 연락이라는 건 원래 필요할 때 하는 거예요. 저한테 부탁할 게 있는 사람이 저에게 연락을 하는 겁니다. 평소에 아무 연락 없이 지내다가 숨넘어가는 급한 상황이 되면 제 역할이 필요하니까 연락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연락이 왔을 때 할 수 있으면 해주고, 못 하면 못 하고, 이렇게 우리가 사는 거예요. 그러니 나한테 접근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사람들이 질문자한테 접근하는 것은 질문자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뭔가 좀 얻어먹을 게 있다는 뜻이니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사람들이 볼 때 나와 관계 맺어서 좀 얻어먹을 게 있겠다는 것은 내가 좀 괜찮다는 뜻이에요.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기 위해 질문자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질문자가 돈이 좀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위나 능력을 좀 가져보려고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질문자가 지위나 능력이 있다는 얘기예요. 사람들이 질문자를 높이 평가하니까 연락해서 부탁을 하지, 질문자를 낮게 평가하는데 누가 질문자한테 연락해서 부탁을 하겠어요?

제 말은 질문자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질문자한테 이익을 얻기 위해서 접근한다는 것은 질문자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높게 평가했다는 뜻이니까 ‘감사합니다’ 이렇게 얘기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 내 형편이 경제적으로나 지위나 능력 면에서나 도와줄 형편이 못 된다면 도와주지 못한다고 얘기하면 되지, 그걸 얄미워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연락을 하겠어요?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법륜 스님한테 부탁하면 어떻게 좀 해결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으니까 저 같은 사람한테까지 전화를 했을 겁니다. 상대가 돈을 달라고 하거나 제가 능력이 안 되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저도 도와줄 수가 없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저는 흔쾌히 도와주는 편입니다.

남이 질문자한테 접근하는 것을 나쁘게 본다면 질문자는 산속의 다람쥐처럼 살아야 해요. 제가 말을 조심스럽게 했지만, 거칠게 말하면 지금 질문자는 짐승같이 살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에요. 사람같이 살고 싶으면 남에게 도움을 좀 받고나서 ‘감사합니다’ 할 때도 있고, 남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형편 내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살아야 해요. 그게 사람입니다. 본인이 잘 살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잘 산다고는 말할 수가 없어요. 문제가 없냐고 묻는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지금은 건강하고 돈도 있으니까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그렇게 살면 나중에 외로워집니다.”

“저도 그게 좀 걱정이 돼요.”

“뭐가 걱정이에요? 지금 본인이 하는 행동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다람쥐는 그럴 때 외롭다고 하지 않아요. 만약 외롭다면 질문자는 다람쥐보다도 못하다고 할 수 있어요. 다람쥐는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잖아요. 질문자는 자기가 선택한 것에 책임을 안 지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든 후에는 외로워질 것이 걱정돼요. 그래서 저도 삶의 태도를 좀 바꿔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약간 들긴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단점이 보이면 관계를 탁 끊어버리는 기질이 너무 강해서 고민이에요.”

“그러면 외롭게 살면 되죠. 지금처럼 살면 죽을 때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세상을 떠나고도 열흘 쯤 지나서야 발견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탁탁 끊어내는 성질을 가진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스님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데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 보고 삽니다. 너무 밉보이면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탁탁 끊고 살면 안 돼요. 사람이 살면서 손해도 좀 보고, 도와달라면 도와주기도 하고, 못 도와주면 미안하다고 사과도 좀 하면서 살아야죠. 그렇게 오고감이 있어야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손 잡아주는 사람도 있고, 병문안 오는 사람도 생깁니다. 그렇게 탁탁 끊고 살면 누가 옆에 있으려고 하겠어요? 그렇게 살려거든 외롭다는 생각을 안 해야 합니다. 저 산 위의 한 그루 낙락장송처럼 우뚝 서서 천하가 돌아봐주지 않아도 끄떡없이 당당하게 살든지, 안 그러면 사람들과 주고받으면서 살아야 해요. 그것은 질문자의 선택이에요.”

“예. 그런데 저는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이고, 장점을 보는 것이 어려워요.”

“장점과 단점을 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장점과 단점이란 본래 없어요. 그냥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에요. 상대방의 성격이 급하면 단점이라고 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저 사람은 성격이 급하구나.’
‘저 사람은 느리구나.’
‘저 사람은 화를 잘 내는구나.’

이런 모습들을 장점과 단점으로 보면 안 돼요. 그냥 그 사람의 성질로 봐야 합니다. ‘급하구나’, ‘느리구나’, ‘이익을 추구하는구나’ 이렇게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단점이다’ 이렇게 본인의 판단을 끼워넣지 마세요.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줄 게 있으면 주고, 줄 게 없으면 안 주면 돼요. 이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남에게 굉장히 피해를 주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피해를 줘도 내가 피해를 안 입으면 되죠. 바보같이 무엇 때문에 피해를 입어요? 본인도 상대가 내 뜻대로 되면 좋겠다고 바라거나 상대에게서 뭔가 이익을 추구하니까 피해를 입죠. 피해를 안 입으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지난 추석에 코로나로 시댁에 안 갔는데 그때 남편이 굉장히 화가 났었습니다. 이번 선택에 내 욕심은 없었는지 의심이 듭니다. 왜 확신을 못할까요?
  • 육아와 코로나로 힘든 부분이 있어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약을 먹고 있습니다. 최대 6개월 먹으면 된다고 하셨는데 7개월 넘게 먹고 있어도 게으른 행동은 그대로입니다. 봉사만 겨우 하고 있는데, 정토회 활동에 갈등이 느껴집니다.
  • 정토회 원칙 중 하나는 고용은 하지 않고 봉사자로만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라인 사업과 관계된 전문 분야는 위탁업체에 의뢰할 경우 봉사자로만 정토회를 운영한다는 원칙이 흐려지지 않을까요?
  • 엘리트 집단이라는 사법고시와 의사고시 출신들의 집단 이기주의는 시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를 보입니다. 시민으로서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할까요?

답변을 다 마친 후 시간 여유가 생겨서 방청객 중에서도 즉석에서 질문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혹시 지금 즉석에서 질문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어서 곧바로 법회를 마쳤습니다.

수행법회가 끝나고 스님은 곧이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이사짐을 나르기 위해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평화재단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이사를 하는 날입니다. 공동체 활동가들과 평화재단 봉사자들은 아침 8시부터 평화재단에 모여 이사짐을 날랐습니다.

스님은 오후 1시부터 결합해서 함께 이사짐을 날랐습니다. 모든 짐을 다 이동시키는 가운데, 몇몇 물건들은 ‘폐기’라는 딱지가 붙여져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스님이 실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물건은 아직도 충분히 쓸만한 물건인데, 왜 폐기하려고 해요?”

“이 물건을 사용하고 싶은 다른 부서가 있는지 여러 번 공지를 했지만,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부서가 없었어요. 그래서 폐기하려고 해요.”

“그건 정토회의 재활용 정신에 맞지 않아요. 완전히 부서져서 못 쓰게 된 물건이라면 모르지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폐기하고 괜찮은 다른 물건으로 대체하는 방식은 재활용한다는 원칙을 어기는 겁니다. 재활용이란 이미 사용하고 있는 물건을 최대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님은 ‘폐기’라고 적힌 딱지를 다 떼어내고 그 물건들을 재활용할 수 있게 고스란히 챙겼습니다.

저녁 6시 무렵 평화재단 이사를 끝마쳤습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평화재단 이사 기간을 이틀을 잡았는데, 모두가 발빠르게 힘을 모은 결과 하루 만에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내일은 JTS와 여행팀, 청년정토회가 이사를 합니다. 스님은 하루 종일 이사짐을 같이 나른 후 저녁에는 유튜브 ‘희망세상만들기’ 구독자와 함께하는 즉문즉설 Live 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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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

감사합니다 스님^^ 재활용원칙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03-03 11:44:01

백민영

현존하시는 부처님...법륜스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21-03-02 16:26:56

김정희

ㅋㅋㅋㅋ 폐기 딱지 떼 내고 다시 챙기시는 모습이.. 제가 버릴려고 내 놓으면 입을만 하다..멀쩡하다고 다시 주워들이시는 우리 시어머니 같으셔서 빵 터졌어요

2021-03-02 06: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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