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1.16 행복학교 4기 마음편 이수 특강
“어렸을 때 차별받고 자란 것이 상처가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김장을 마치고 난 후 행자들과 뒷정리를 하고 윗 밭에 올라가 산수유 열매를 땄습니다. 저녁에는 행복학교 4기 마음편을 이수한 참가자들과 함께 온라인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새벽기도와 공양을 마치고 어제 입었던 작업복을 다시 입으니 김치 양념이 여기저기 묻어있었습니다.

먼저 김장에 사용한 물품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어제 물품을 대부분 씻었지만 바닥에 깐 큰 천막들은 씻지 못했습니다. 평상 위에 천막을 놓고 물을 뿌리며 빗자루로 흙먼지를 쓸어냈습니다. 씻은 부분을 접어가며 양쪽 면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물을 뿌리고 씻고 접는 사람이 한 마음으로 손발을 맞춰 착착 씻었습니다.


깨끗이 씻은 천막은 볕이 잘 드는 곳에 널었습니다. 평상도 씻은 후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무장갑과 앞치마도 깨끗이 빨고 널었습니다.

뒷정리를 말끔히 마치자 스님이 제안했습니다.

“점심 먹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소풍 삼아 산수유를 따러 갑시다.”

산 윗 밭 아래에 동네 어르신이 따도 좋다고 한 산수유나무가 열 그루 정도 있었습니다. 톱, 낫, 쪽가위, 포대를 챙겨 들고 산수유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길 없는 길을 따라 가파른 산을 오르니 빨간 열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 있네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다 말랐겠어요.”

손이 닿는 가지에 달린 산수유 열매는 바로바로 땄습니다.

높은 가지에 달린 산수유는 스님이 톱으로 베어주었습니다. 발이 자꾸 미끄러지는 가파른 등성이에서 아래에서 위로 힘을 줘 가지를 베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가지를 잘라 주면, 행자들은 햇살 좋고 평평한 땅에 앉아 가지에 붙은 산수유를 땄습니다.


한참 열매를 따다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이 다 되었습니다.

“스님, 점심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 준 가지까지만 하고 이제 그만 내려갑시다.”

“네!”

스님은 산수유를 따다가 제일 마지막으로 산을 내려갔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산수유는 평상 위에 널어두고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함께 한 후 오후에는 휴식을 하고 저녁 7시 30분에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행복학교 4기 마음편을 이수한 참가자들과 온라인 즉문즉설을 하는 날입니다. 1200여 명의 행복학교 참가자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행복학교에 오신 걸 환영하고, 그리고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사실 여러분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석·박사까지 거치며 이미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늘 지식에 대한 공부였습니다.

‘내가 왜 괴로운가,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공부는 아직 유치원 수준도 안 됩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행복학교에 입학해서 마치 유치원생이 글과 셈본을 익히듯이 행복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를 하고 직접 경험도 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강연장에서 질문할 때와 다르게 지금은 집에서 혼자 질문하면 되니까 긴장을 하거나 떨 이유가 없잖아요. 저와 둘이서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편안하게 이야기해보시기 바랍니다.”

120여 명이 질문 신청을 하였지만, 최종 7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그중 한 분은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차별로 인해 생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어렸을 때 차별받고 자란 것이 상처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독자인 집안에서 1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독자이시다 보니 남아선호 사상이 심해 남녀차별로 인해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결혼을 하였더니 남편도 비슷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2남 1녀 중 차남인 남편은 장남에 비해 차별을 받고 자랐습니다. 시부모님께서 며느리들까지 차별을 하는 것 같아서 많이 서운하고 속상합니다. 어렸을 때 받은 상처 때문에 더 많이 괴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부모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풀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시부모님에 대한 남편의 서운한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남편의 마음은 질문자가 풀어줄 수 없어요. 남편이 직접 즉문즉설에 참석해서 질문하면 모를까 질문자도 자신의 서운한 마음을 못 풀면서 남편의 마음을 어떻게 풀겠어요? 남을 자꾸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남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하는 것이 수행이지 상대방을 바꾸려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애만 쓰게 돼요. 그러니 남편은 빼고 질문자의 문제에 집중해봅시다. 질문자는 어떻게 차별을 받았어요?”

“저는 1남 4녀로 자랐고, 가정 형편도 별로 좋지 않았어요. 부모님께서는 아들은 대학까지 보내주셨는데, 딸들은 상업고등학교를 진학하게 하고 빨리 취업해서 알아서 시집을 가라고 하셨어요. 부모님께서 세뇌하듯이 계속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 시대에는 질문자의 부모님만 그랬을까요, 아니면 다른 집 부모님도 그랬을까요?”

“다른 집 부모님도 그러셨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런 부모님의 행동은 그 당시의 관습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관습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자의 부모님이 나빠서 그러셨을까요? 아니면 그렇게밖에 보고 들은 게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렇게밖에 보고 듣지 못해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

“질문자도 만약 학교를 가지 않았다면 그런 차별의식을 느낄 수 없었을 거예요. 학교에서 남녀평등을 배웠기 때문에 차별의식을 느끼게 된 게 아닐까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부모님이 질문자를 고등학교에 진학시키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겁니다. 부모님이 질문자를 초등학교도 안 보냈다면 질문자는 차별이라고 못 느꼈을 거예요. 그런데 고등학교까지 다니면서 의식을 깨치게 되면서 ‘오빠는 대학까지 보내주고 나는 안 보내준다’ 하며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난 겁니다. 그 생각에 딱 걸려서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인도의 천민 마을에 학교를 세워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있어요. 천민 마을 아이들이 ‘우리 마을에 학교를 지어주세요’라고 먼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학교를 짓게 되었을까요? 제가 보기에 아이들이 학교도 안 다니고 구걸하러 다니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학교를 짓게 되었을까요?”

“스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지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제가 학교를 지어주지 않았더라도 아이들은 저를 원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아이들은 그 마을에 태어나서부터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아무도 학교를 다니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 학교를 가고 싶다거나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아예 없이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던 겁니다.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자신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 텐데, 주변에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요.

아이들이 글자도 모르고 셈본도 못하고 나이도 모르는 것을 보고 ‘그래도 초등학교는 다녀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를 짓고 나서 공부하러 오라고 하니까 정작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들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어요. 부모들이 교육열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아무도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아이들을 학교에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에게는 학용품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사탕이 제일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 오면 늘 사탕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공부하러 오는 게 아니라 사탕을 먹으러 학교에 오지요. 그렇게 학교를 다니게 된 후에도 결석하는 아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똑같은 개수의 사탕을 주다가 결석하는 아이에게는 사탕을 조금 주고, 학교에 잘 다니는 아이에게는 사탕을 많이 주었습니다.

일 년쯤 지나면 ‘사탕 먹을래? 공부할래?’라고 자꾸 물어봤습니다. 아이들은 사탕도 먹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으니까, 처음에는 대답을 안 해요. 조금 더 지나면 ‘공부할래요’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한두 명 나옵니다. 저학년 아이들은 ‘사탕 먹을래요’라고 하고, 고학년 아이들은 ‘공부할래요’라고 하고, 중간 아이들은 사탕에도 손을 들고, 공부에도 손을 듭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형이나 누나가 학교를 가니까 동생들도 따라서 학교를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학교에 입학하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어졌죠. 동네에서 학교 가는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저절로 학교에 오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문맹퇴치를 하기 위한 초등교육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한 남학생들은 멀리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는데,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학생들은 학교를 그만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여학생들이 저를 찾아와서 중학교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거기까지 여력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또 와서 중학교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기에 ‘너희들이 어린아이들을 돌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서 오전에 유치원 아이들을 돌본 후에 오후에 중학교 과정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학생은 유치원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고등학생은 초등학교 저학년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대학생은 초등학교 고학년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전부 다 열의를 가지고 자신의 공부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쳐주기도 한 겁니다.

만약 이 아이들을 초등학교만 다니게 하고 중학교를 보내주지 않으면, 저를 원망할까요, 원망하지 않을까요? 또 중학교를 졸업시켜 준 다음 고등학교를 안 보내주면, 저를 원망할까요, 원망하지 않을까요?”

“원망하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교를 안 보내주면 어떨까요? 원망하는 정도가 아니라 해코지까지 합니다. 자신을 도와준다고 해놓고 학교도 안 보내준다고 밖에다 안 좋은 소문까지 막 내요. 학교에서 글을 배우면서 비판의식도 생겼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안 해주면 해코지까지 하는 겁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아이들을 도와주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하다고 말하면서 구호활동을 중단해 버립니다.

이렇게 아이들을 도와주면 고마워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는 겁니다. 공부를 하게 되면 그만큼 해코지를 할 줄 아는 능력도 함께 생기게 된다는 거죠. 이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원망을 들을 수밖에 없어요. 도와주면 감사하다는 인사보다는 원망의 소리를 더 많이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애지중지 키우지만 결국 자식들로부터 원망을 받게 되잖아요. 부모가 되려면 자식에게 원망 들을 각오를 해야 하듯이 좋은 일을 할 때도 원망 들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좋은 일을 하면서 칭찬을 들으려고 하니까 실망을 해서 도중에 그만두는 거예요. 인도 천민 마을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은 사실 원망을 들을 일입니다. 그래도 어린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할까요, 배우지 않아야 할까요?”

“배워야 합니다.”

“질문자 입장에서는 부모님이 대학을 안 보내준 일이 원망스러울 수 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가정형편이 어려운데도 질문자를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줬잖아요. 상업고등학교 진학해서 취직도 할 수 있게 해 주셨잖아요.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게 원망할 일이에요? 아니면 감사할 일이에요?”

“감사한 일이긴 한데, 자식들에게 똑같이 그렇게 하셨으면 괜찮았을 겁니다. 그런데 아들인 남동생만 대학 공부시켜 주신다고 하니까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질문자의 부모님은 그렇게밖에 할 줄 모르는 걸 어떡합니까? 남녀차별을 합리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까요. 그러나 질문자처럼 생각하면 질문자의 부모가 나쁜 사람이라는 결론밖에 안 나오잖아요. 질문자는 자기 부모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니요.”

“부모님이 뭘 몰랐기 때문에 어리석었다고는 할 수 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질문자가 이 상처를 치유하려면 부모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대학 안 보내 주신 일에만 신경 쓰지 말고, 이런 마음을 가져 보세요.

‘그래도 저를 낳아서 키워주시고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주셔서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차별받은 것에 대한 질문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어요. 시부모님도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밖에 보고 듣지 못한 겁니다. 남편도 불법을 공부한 게 아니니까 자신이 차별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 부딪히는 거예요. 장남인 형한테만 잘해줬다는 생각밖에 안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는 아들한테만 잘해주고 딸인 자신에게는 안 해줬다는 원망만 하고 있고, 질문자의 남편은 장남인 형에게만 잘해주고 차남인 자신에게는 안 해줬다는 원망만 하고 있는 겁니다. 피해자끼리 모여서 자신의 부모를 원망하고 있는 형국이에요. (웃음)

남녀차별이나 차남차별은 가부장 사회에서 일종의 관습으로 자리 잡아온 측면이 크기 때문에 법적 고발 조치를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차남과 장남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것은 앞으로 질문자 자신이 실천할 일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 기도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먼저 치유해서 앞으로는 이런 차별의식을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 해요. 이런 말을 남편에게 해준다고 남편이 좋아지지는 않아요. 남편은 행복학교를 다니며 자기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야 해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해주는 것이 최선입니다.

법률적으로는 남녀 차별과 차남 차별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딸, 아들이나 차남, 장남이나 똑같이 유산이 분배되잖아요. 하지만 이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의 일이고, 살아계실 때에는 부모님이 마음대로 아들이나 장남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실 수 있는 겁니다. 그것까지는 법적으로 제재를 가할 수 없어요. 이런 관습이 개선되려면 시간이 좀 흘러야 돼요.

부모님 세대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감사의 절을 하는 게 좋습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주신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알았죠?”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제 이야기에 대해서 스님이 남녀차별을 무마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부모님 세대가 옳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만 듣고 보고 살아오신 분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네. 부모님께서 나쁘셨던 게 아니라 그 시절의 관습이 그랬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일부터 바로 감사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웃음)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똑같은 똥이지만 똥을 오물이라고 생각하면 버려야 할 대상이 되지만, 거름이라고 생각하면 주워 와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모든 대상은 오물인 동시에 거름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오물로만 생각해서 버리려고만 하지 그것이 거름인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직장에 일이 좀 많아지면 대부분이 이 상황을 오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두는 게 낫느냐. 그건 또 아니거든요. 일이 많아도 직장을 다니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거름이 되는 이치입니다.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부모님의 문제점만 보지 말고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옛날 사람이기 때문에 남녀차별이나 장자 우선과 같은 가부장적인 사고를 갖고 계셨구나. 그 모습을 보고 어릴 때는 몰라서 상처를 받았는데, 어른이 되어서 보니까 나를 키우고 공부시켜주신 고마움을 모르고 원망만 했구나. 제가 어리석어서 그랬습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상처가 치유됩니다. 자신의 상처를 탁 털고 떳떳하게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은 바보 같은 인생이에요. 대장부가 되어서 자신 있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스님의 답변을 듣고 질문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누가 칭찬해주지 않으면 내가 잘하고 있지 않은 건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에 매달리지 않고 싶은데 어떻게 제 마음을 돌아봐야 할까요?
  • 행복학교에서 나의 마음이 얼마나 급격히 변하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의 간격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요?
  • 아이를 낳으면서 아내는 몸이 안 좋았고 저의 무심한 성격에 아내가 상처를 오랫동안 받았습니다. 이제 와서 잘해보려 하지만 아내의 마음을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이사를 오고 나서 가족이 돌아가면서 아프고, 안 좋은 일이 계속 생겼습니다. 식구들은 이 집이 싫다고 이사를 하자고 하는데 어떡하죠?
  • 미국으로 이민을 오고 나서 다른 인종의 사람을 보면 경계부터 하게 되고, 영어 울렁증도 생겨서 늘 긴장되고 말을 자신 있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극복해야 할까요?
  • 일이든 수행이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져서 지금 행복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질문자들의 한 줄 소감을 들어본 후 관계 편 공부도 계속해 나갈 것을 당부하면서 방송을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행복학교 마음 편을 공부했는데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남녀차별, 인종차별, 빈부격차, 전쟁, 환경오염 등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음 편 다음에 이어지는 관계 편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제 문제들을 정의롭게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 것인지에 대해 공부하게 됩니다. 관계 편도 신청하셔서 빠지지 말고 공부를 해나가시면 세상을 보는 눈이 훨씬 넓어질 거예요. 관계 편이 끝날 즈음에 저와 또 직접 이야기 나눠 봅시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참가자들은 행복학교 홍보 영상을 함께 시청한 후 모둠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일 농사일에 대해 농사팀 행자님과 의논한 후 일정을 마쳤습니다.

11월 17일

날이 밝았습니다. 기온이 따뜻해지고 있는 가운데 오늘은 아침 기온이 12도까지 올라갔습니다.

오늘은 비닐하우스에서 생강을 캤습니다. 행복학교 진행을 하거나 업무로 비닐하우스에서 울력할 사람이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삽으로 생강을 캐는 건 스님 혼자 했습니다.



“생강 풍년이네!”

생강은 캐는 것보다 다듬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비닐하우스 끝에서부터 생강 손질을 시작했습니다.

“씨생강 중에 상태가 괜찮은 것은 따로 넣어주세요. 혹시 싹이 날지 모르니까 내년에 한번 심어볼게요. 이번에 씨더덕도 다시 심어보니 싹이 다 났거든요.”

두 가지로 나누어 손질한 생강을 모았습니다. 줄기 끝에 꽃봉오리 같이 특이한 모양이 달려있는 생강도 있었습니다.

“수련원에 가져가서 잎이 피는지 물에 한번 담궈 놓아 봅시다.”

울력을 마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손질할 생강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산 아랫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행자 두 명도 불러와 함께 생강을 손질했습니다.

“다 했다!”

생강을 손질해보니 두 박스가 나왔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 오후에는 어제 만든 김장 김치를 배달하러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은사 스님이신 도문 큰스님을 비롯해 몇몇 곳을 방문하여 김장 김치를 직접 전달한 후 저녁이 되어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농사일과 수행 법회를 한 후 오후에는 부산 경찰청 초청으로 경찰관들을 위해 즉문즉설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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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혜

공부를 젤잘하고 젤많이한 제가 왜 젤 부모님을 원망했는지 ㆍ알겠습니다ㆍ눈이높고 감사한줄몰랐네요ㆍ감사합니다

2020-11-28 12:10:12

청정화

이번 300배 참회 정진 기도께서 스님께서 해 주신 법문으로
못 배운게 한이신 부모님이 대학까지 보내 주셨는데 은혜를 모르고 비판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부모님 은혜에 감사 합니다.
스님의 법문에 감사합니다.()

2020-11-21 13:02:01

권선희

감사합니다~
스님 말씀 덕분에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2020-11-21 07: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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