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1.14(오후) 정토불교대학, 경전반 온라인 즉문즉설
“불교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안녕하세요. 김장 2일째 날입니다. 오전에 외국인을 위한 온라인 즉문즉설을 끝마치고 김장 울력을 하던 스님은 오후 1시부터 경전반 학생들을 위해 온라인 즉문즉설을 하기 위해 다시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원래 경전반 교과 과정은 1년인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이번 가을 학기부터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6개월 과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스님은 바뀐 학사 일정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물어보며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학사 일정이 6개월로 바뀌면서 일주일에 두 번 강의와 나누기를 함께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일정을 다 소화하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강의는 시간이 날 때 각자 온라인으로 듣도록 하고, 나누기와 수행 연습만 일주일에 한 번 온라인으로 만나서 하도록 한 거예요. 집에서 강의를 착실히 듣고 수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 (웃음)

질문자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강의를 듣지 않고 수업에 참여하면 맹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만 듣고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법문을 들었다 해도 그건 그림의 떡이지 내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내 것이 되려면 내 경험을 바탕으로 나누기도 해보고, 도반들의 나누기도 들어보고, 수행 연습도 직접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경전이라는 그림의 떡을 떼어서 맛을 본 것이 됩니다. 그러니 경전 강의를 꼭 시간 내서 듣고, 나누기 수업에도 꼭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금강경 수업을 마친 800여 명의 학생들이 생방송 주소줄을 통해 즉문즉설을 함께 시청했습니다. 그동안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의문이 생겼던 점에 대해 8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주로 금강경에 자주 등장하는 ‘상을 짓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먼저 상을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주며 설명했습니다.

금강경에서 ‘상(相)을 짓는다’란 무슨 의미인가요?

“금강경에서 일체의 상(相)을 버리라고 했는데, 무슨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상(相)이란 주관을 객관화시킨 것을 뜻합니다. 여기 컵과 뚜껑이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큽니까?”

“컵이요”

“그럼 뚜껑은 컵보다 커요? 작아요?”

“작습니다”

“그럼, 지금 질문자에게 뚜껑은 컵보다 작다고 인식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계와 뚜껑은 어느 게 더 커요?”

“뚜껑이 더 큽니다”

“그럼, 여기서는 질문자에게 뚜껑은 시계보다 크다고 인식이 된 겁니다. 첫 번째 조건에서는 뚜껑이 작다고 인식이 되었고, 두 번째 조건에서는 뚜껑이 크다고 인식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이 뚜껑은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예. 뚜껑의 크기는 인연 따라 크다, 작다라고 불릴 뿐이지 뚜껑 자체가 크다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컵 뚜껑은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컵과 뚜껑을 오랫동안 인식하다 보면 비교 대상이 없어도 컵은 큰 것이 되고 뚜껑은 작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때 크다 작다는 표현은 객관적 존재를 표현한 겁니까? 내가 인식한 것을 표현한 겁니까?”

“내가 인식한 것을 표현한 겁니다”

“인식한 것을 표현한 것을 ‘주관’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뚜껑은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뚜껑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객관적으로 인식했다고 착각하고 뚜껑이라는 존재 자체가 작다고 주장합니다. 이럴 때 ‘상(相)을 지었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보기에 저 남자가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때는 나의 주관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지만 ‘저 남자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는 ‘그 남자 자체가 나쁜 사람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주관을 객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상(相)을 지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相)을 짓는다는 것은 인식의 오류를 범할 때를 말하는 것이네요.”

“네.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인식이 다르게 되는 것인데, 동일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존재 자체가 크거나 작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절대화시키고 객관화시킨 겁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그건 상(相)을 지은 겁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내가 본 한 가지 행동만으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 자체가 나쁘다고 객관화시켰기 때문에 ‘저 남자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라고 표현하는 것은 주관을 주관인 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相)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주관을 주관인 줄 알면 다른 사람이 ‘나는 그 남자 좋아 보이던데’라고 하면 ‘그래, 너와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다르구나!’라고 금방 수긍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와도 갈등이 생기지 않아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스님이 된 건 상을 여의고 괴로움 없는 삶을 살려고 출가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스님이다’ 하는 상(相)을 짓게 되면 괴로움이 오히려 더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상을 짓게 되면 ‘감히 스님한테’ 하면서 합리적이지 못하고 비민주적인 잣대를 들이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감히 엄마한테’라고 하고, 남편이 부인에게 ‘감히 남편한테’라고 하고, 선생님이 학생에게 ‘감히 선생님한테’ 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님이라는, 엄마라는, 남편이라는, 선생님이라는 상을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항상 상(相)을 짓고 삽니다. 그래서 괴롭지 않는 삶을 살려면 내가 상(相)을 짓는 순간 ‘아, 내가 상을 지었구나!’ 하고 알아차려서 바로 상을 여의는 게 필요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금강경에 어떠한 것도 옳은 것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교사입니다. 어떤 학부모가 자신의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상 아동들과 같은 교육과정만 고집할 때 어떡해야 할까요?
  • 해탈의 길은 세속의 물결을 거슬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왜 세속의 길은 해탈의 길과 반대일까요?
  • 이 세상에서는 죄의 경중이 있고 죗값을 받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상이 없는 세상에서는 흉악범도 용서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내지 말라고 금강경에서는 계속 나오는데 저의 신랑도 불대에 입학해서 수행 정진하여 본인의 꼬라지를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 몸은 더럽혀지는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신대 위안부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제법이 공한 것과 허무주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 허상이 허상임을 아는 것이 실상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스님은 지식과 용어를 아는 것보다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경전반 학생들을 다시 한번 격려했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용어를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경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공부는 금강경을 공부하고 나서 짜증이 덜 나고, 성질이 덜 나고, 슬픔이 적어지고, 초조함과 불안함이 적어지고, 괴로움이 적어지고, 이렇게 실제의 삶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이치를 알아서 실제로 자기 삶에 변화가 와야 진정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해야 내 것이 되지 아는 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해요. 물론 아는 것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에 너무 매달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수업 빠지지 말고 잘 공부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경전반 학생들은 모둠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고, 스님은 합장으로 인사를 한 후 곧바로 김장 울력을 하기 위해 다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스님이 법문을 하는 동안 행자들은 김치에 들어갈 양념을 준비했습니다. 어제 뽑은 무를 깨끗이 씻고 썰었습니다. 둥근 무도, 곰발 같은 무도 곱게 채 썰었습니다.



갓과 미나리도 다듬어 종종 썰었습니다.

가마솥에 다시마와 여러 채소를 넣고 푹 삶은 물에 고춧가루도 잘 섞어두었습니다. 찹쌀과 늙은 호박도 푹 삶았습니다.

“바다에서 난 것 빼고는 거의 다 우리 손으로 지은 농산물이네요.”


배추는 소금물에 푹 절여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스님은 먼저 그늘에 무청을 널었습니다. 새벽에 법문하고 울력하고, 9시에 법문 하고 울력하고, 1시에 법문 하고 울력을 하니 세 번째 다시 작업복을 입은 셈입니다.

“스님, 몸살 나시겠어요.”

“그래도 어떡해요. 놀기 삼아 해야죠.”


무청을 다 널고 행자들이 채를 써느라 남는 칼과 도마가 없어서 다른 일을 찾았습니다.

“곧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하니 텃밭에 무를 다 뽑아야겠어요.”



텃밭에 남은 무를 다 뽑고 삽으로 땅을 깊이 뒤엎었습니다. 딱딱해진 거름을 망치로 부수고 체로 쳐서 곱게 만들었습니다. 거름을 고루 뿌린 후 밭을 평평하게 골랐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절인 배추를 내일 씻을 수 있게 준비를 했습니다. 깨끗한 물이 아래로 흐르도록 배추통을 3단계로 경사지게 설치했습니다.

오후 내내 썰고 썰어 무, 미나리, 갓을 다 썰었습니다. 채 썰기를 마치고 사용한 고무장갑, 도마, 칼도 씻어 종류별로 선반 아래에 잘 정리해두었습니다.

김장 울력을 하다가 다시 온라인 즉문즉설을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법회 하러 가야 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뒷정리를 하고 배추를 씻고 양념을 치댈 준비를 하는 동안 스님은 다시 법복으로 갈아입고 저녁 6시에 다시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올해 봄에 입학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온라인 즉문즉설 시간입니다.

봄 불교대학 학생들은 지난주까지 근본불교 과목에 대한 수업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근본불교 수업을 들으면서 생긴 의문점에 대해 스님에게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불교대학 공부 잘하고 있나요? 봄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서 수업을 온라인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온라인 수업으로 하게 되네요. 처음에는 임시로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는데, 같이 모여서 수업을 할 방법이 없다 보니 끝까지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웃음)

600여 명이 온라인 수업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은 근본불교 과목에서 배우는 핵심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부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교리를 설명하며 불교를 가르쳤을까요? 부처님이 무슨 학자도 아니고 교리를 가르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부처님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괴로움의 원인을 자각하도록 해서 스스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주신 분이에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강의식이 아니라 대화식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즉문즉설을 하듯이 부처님의 수많은 대화가 있는데, 후대에 그 대화를 모아서 연구해보면 대화 속에 흐르는 어떤 핵심사상, 핵심이론, 핵심논리가 있어요. 그것을 정리해서 체계화시킨 게 교리입니다.

부처님이 새로 발견해내고 창조한 언어

그렇다면 부처님 당시부터 사용했던 불교 용어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용어가 부처님 후대에 논리적 체계를 만들면서 사용한 용어인데, 부처님 당시에도 불교에서만 사용한 용어가 있었습니다. 열반, 붓다, 윤회, 이런 용어는 부처님 이전 인도에 원래 있었던 언어들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하면 부처가 될 것이요. 세상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

이런 말을 당시에 사용했다는 것은 붓다라는 용어가 부처님 이전에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인도 사람이니까 당시의 인도 사회에서 사용했던 언어를 썼을 것이고, 그때도 종교와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용어를 부처님도 사용했겠죠. 가령 머리 깎고 출가를 해서 사문이 된다는 건 부처님이 새로 만드신 거예요? 기존에 있던 풍속을 부처님도 따라 하신 거예요? 기존에 있던 풍속을 부처님도 따라 하신 겁니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치고 나무 밑에서 자고 걸식을 하는 것도 그 당시에 있던 풍속을 따라 하신 겁니다.

부처님이 당시에는 전혀 없던 용어였는데, 부처님이 새로 발견해내고 창조한 언어는 바로 ‘연기(緣起)’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걸 한마디로 말하면 ‘연기(緣起)’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어떤 편견을 갖고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참모습에 대한 존재론적인 진리가 바로 ‘연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연기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체득할 수 있을까요? 존재론적인 진리가 연기법이라면 실천적인 진리는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도 부처님이 처음 쓰신 말이에요. 당시에는 그런 용어가 없었어요.

불교 핵심 사상은 두 가지입니다. 존재론적인 실상의 진리는 연기법이고,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하는 실천적인 진리는 중도예요. 이 두 가지는 부처님이 처음 발견하셨습니다. 누가 하는 것을 따라 배운 게 아니에요.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 스승님이 있어서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연기와 중도는 부처님이 스승님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에게 배워도 해결되지 않는 근본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시행착오를 한 끝에 실천적인 수행을 통해 발견한 게 중도예요. 중도의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고 알게 된 게 연기법입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도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목표를 향해서 어떤 치우침이 없이 나아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중도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한 것이 여덟 가지 바른 길인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란 연기적으로 사유해서 해탈과 열반을 향해 가장 바르게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연기적으로 사유를 했을 때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괴로움이에요. 이것이 고성제(苦聖諦·Dukkha)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이라는 과제에 대해 연구를 했어요. ‘괴로움을 없애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한 것이 아니었어요. 도대체 괴로움이 왜 생기는지 연구했습니다. 이것이 집성제(集聖諦·Samudaya)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규명하면 그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멸성제(滅聖諦·Nirodha)입니다.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실천적인 방법이 도성제(道聖諦·Marga-satya)입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이런 식으로 사유한 거예요.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똑같아요. 환자를 진단해보니 병이 났구나!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 원인을 치료하면 환자가 나을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치료할까? 이렇게 접근하는 거예요. 일반 종교와는 완전히 다르죠. 이게 바로 고집멸도를 뜻하는 사성제예요.

부처님이 사르나뜨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 설법한 내용은 ‘중도’입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먼저 얘기했습니다. 그다음에 사성제를 얘기했어요. 그다음에 구체적인 실천 방법인 팔정도를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교진여가 확 깨달았습니다. 눈을 가리고 있던 무명이 확 걷혀 버린 거예요. 부처님 입멸 후 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에는 이렇게 중도, 사성제, 팔정도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왜 괴로울까?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집착할까? 좋은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원인의 원인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이 12 연기입니다. 그 원인의 원인을 규명해나가 보면 결국 진실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실이 무엇일까요. 연기입니다.

연기는 공간적 연기와 시간적 연기가 있습니다. 공간적 연기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실체가 없고 관계성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 · Anatta)’입니다. 시간적 연기는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 · Anicca)’입니다.

항상하는 것도 없고(무상), 실체도 없는 것(무아)이 존재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연기’라고 하는 겁니다. 연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상과 무아입니다. 내가 어리석어서 무상과 무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있는 걸로 착각하고, 실체가 있는 걸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집착할 수밖에 없고, 집착하니까 괴로움이 발생하는 거예요. 이것이 ‘일체개고(一切皆苦 · Dukkha)’입니다. 만약 무상과 무아를 확연히 깨달으면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모든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열반적정(涅槃寂靜 · nibbana)'입니다. 이것을 체계화해놓은 것이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입니다.

이렇게 근본 교설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하나의 용어 속에 다른 용어들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불교를 공부하고자 한다면 불교 교리를 많이는 몰라도 이런 기본적인 체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연기입니다. 그다음에 중도입니다. 그다음에 사성제입니다. 그다음에 팔정도입니다. 그다음에 12연기입니다. 그다음에 삼법인입니다. 이것을 근본 교설이라고 말합니다.

근본 교리를 배우고 나면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

그러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불교가 학문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과 교리가 나오게 됐죠. 특히 12연기 가운데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대해 설명한 것이 5온(五蘊) · 12처(十二處) · 18계(十八界)입니다. 5온, 12처, 18계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느냐를 자세하게 설명한 겁니다. 괴로움이 왜 생기느냐를 설명할 때 필요로 하는 원리입니다.

이런 근본 교설은 그냥 머리로만 이해하면 안 되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가 중도를 유지하는 거예요. 명상을 하게 되면 이런 근본 교설이 실천적 원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구체적인 실천을 안 하면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데, 실제로 실천을 하면 이 이론에 맞춰서 명상을 해나가게 됩니다.”

여기까지 설명한 후 질문을 받았습니다. 8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불교를 공부하면 감각 기관을 발달시켜서 직장생활을 잘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불교를 공부하면 제 능력을 키울 수 있나요?

“법륜스님 강의를 듣다가 안이 비설 신의(眼耳鼻舌身意)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눈, 귀, 코, 입, 몸, 마음, 각각의 기관들을 발달시킬 수 있으면 여러 가지 능력을 요구하는 직장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많은 괴로움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각각의 눈, 귀, 코, 입, 몸, 마음을 발달시킬 수 있을까요? 저는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듣고 여러 번 들어야 이해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게 발달시키는 거예요? 눈이 잘 보이는 게 발달시키는 거예요?”

“그렇게도 생각을 했습니다.”

“발달시키는 게 어떤 건지를 알아야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없는지 제가 대답을 할 수 있죠. 가령 ‘수행을 하면 눈이 밝아지느냐?’라고 물으면 ‘아니다’고 저는 대답할 겁니다. 질문자의 질문이 너무 막연해요. 눈을 발달시킨다고 했는데, 눈이 어떻게 되는 게 발달시키는 거예요? 눈이 잘 안 보여서 잘 보이게 하려면 안과에 가서 치료를 해야죠.

회사 다니면서 여러 가지 능력을 좀 키우고 싶은데 불교를 이용해서 그 능력을 좀 키울 수 없느냐, 이렇게 질문한 것이라면 질문자가 엉뚱한 생각을 한 겁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런 이론이 나온 이유는 우리가 별 일 아닌 것 갖고 괴로워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저 사람을 미워하면 결국 내가 괴롭잖아요. 그런데 미움이 발생하는 이유는 별거 아니라는 거예요. 그 사람을 안 봤으면 안 미워할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안 들었으면 안 미워할 거 아니에요? 즉, 괴로움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피부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해서 다 생긴 일이에요. 일체가 저 바깥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인식하면 있는 것이고,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세세하게 설명한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별거 아닌 것 가지고 괴로워한다’ 이겁니다.

그 사람이 나를 욕했다고 합시다. 만약 내가 그 소리를 안 들었으면 안 괴로울 것 아니에요? 그 사람이 아무리 나를 욕해도 내가 그 소리 못 들으면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욕을 안 했는데도 누가 ‘그 사람이 너 욕하더라’ 그러면 그 순간부터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그 사람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에요. 이렇게 괴로움이 생기는 이치를 알게 되면 누가 비난하고 누가 칭찬하는 것에 별로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원리를 알아서 괴로움을 소멸시켜 나가라고 이런 설명을 한 거예요.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열등의식도 없어지고 우월의식도 없어집니다.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을 갖고 있으면 괴로워지는 건데 열등의식도 없어지고 우월의식도 없어지니까 괴로움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게 되면 집중력이 커지니까 질문자가 얘기한 대로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힘이 커집니다. 첫째, 다른 생각을 안 하고, 둘째, 그 사람을 딱 주시하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을 딱 주시하고 집중을 하면 훨씬 더 알아듣기 쉽죠. 상대가 말할 때 귀를 쫑긋해서 집중하면 훨씬 더 알아듣기 쉽잖아요. 하나는 집중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생각을 안 해야 돼요. 상대가 말하는데 눈은 다른 데 가 있고, 머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상대의 말소리는 들리지만 나중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명상을 해서 집중력을 키우면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안이비설신의 능력을 키운다는 말은 안 맞는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연기법과 인과응보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하는데 왜 관세음보살을 부르나요?
  • 근본불교 수업에서 ‘인생이 고(苦)라는 것만 알아도 사성제를 거의 안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설하여 주십시오.
  • 마음이 무엇인가요? 느낌과 감정이 마음인가요?
  • 십이연기에서 수(受)를 알아차리면 그냥 사라져 버린다라고 배웠는데 저는 알아차려도 그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남아있습니다. 이럴 때 계율을 떠올려 수(受)가 애(爱)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도 방법일까요?
  • 어떤 아기는 좋은 부모를 만나 사랑 받으며 자라 좋은 업식을 물려받고, 어떤 아기는 불행한 부모를 만나 나쁜 업식을 쌓는 건 전생의 인연과보 때문인가요?
  • 중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까요?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하고 나니 예정된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졸업까지 잘 하셔야 돼요. 졸업식에서 저를 직접 만나보긴 해야죠. 그때도 악수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꼭 졸업하시기를 바랍니다.”

8시 30분이 되어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방송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김장 울력을 하면서 틈틈이 강의를 네 번이나 했습니다. 눈코뜰새 없이 정말 바쁜 하루였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나오니 행자들도 울력을 마치고 씻거나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수고 많았어요. 내일은 몇 시에 울력을 시작할까요?”

“아침 식사 마치고 바로 배추 씻는 것부터 하려고 합니다.”

“아침에 날도 추운데 천천히 해요. 많이 절여졌으면 제가 다 건져놓을게요.”

내일은 김장 3일째를 맞이하여 하루 종일 김장 울력을 한 후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명상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5

0/200

보영

법륜스님🌟 니와노평화상 수상 축하드려요. 늘 건강,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2020-11-22 18:47:42

김현숙여래심

금강경 수업 잘 마쳤습니다 10강 동안 계속 가속 페달 밟고 달린 느낌이예요... 설문지에 소회 남겼습니다
담 경전수업에는 더욱 가속 페달 밟아야 할 듯하여 스케쥴 잘 잡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1-20 22:05:05

실상

주관을 객관화하는 것이 상이다.
명쾌한 말씀 큰 도움이 됩니다.
감히 엄마한테, 감히 선생님한테...
요런 상을 짓지 않도록...
일상에서 늘 상을 짓고 산다.
안 짓는 방법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연습이 필요할 뿐

2020-11-20 06:24:36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