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8.10 두북특별위원회 회의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공동체 안거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두북특별위원회 회의가 오늘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공동체 법사단과 하루 종일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산 윗밭으로 갔습니다. 가지를 딸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비 소식에, 태풍 소식까지 있어서 비옷을 갖춰 입고 밭으로 갔습니다.

스님이 먼저 밭에 도착해 가지를 다 땄을 즈음, 행자들이 도착했습니다.



가지를 다 따고 이번에는 깻순을 땄습니다. 스님은 낫으로 깨의 가장 윗부분에서 네 잎사귀 정도를 땄습니다.

“스님, 깻잎 윗부분은 왜 따주는 건가요?”

“그래야 옆으로 가지가 벌어져서 크게 자랄 수 있거든요. 깻순으로는 반찬을 해 먹으면 돼요.”

스님은 낫으로 슥슥 깻순을 땄습니다. 한 손으로 깻순을 쥐는 동시에 낫을 쥔 손으로 벴습니다. 빠르게 깻순을 따는 사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토도독 깻잎 위로, 비옷 위로 비가 신나게 내렸습니다. 비가 내리는 한편 하늘에서는 해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환한 햇살 사이로 비가 내리는 신기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아이고, 덥다.”

비옷 속에는 땀이 흘렀습니다.

잘 익은 수박과 상한 수박도 땄습니다.



가지, 깻순, 수박을 수확하고 나서 스님은 낫으로 풀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비는 계속 오다 말다, 햇살도 계속 비추다 말다를 반복했습니다. 스님은 비옷을 입고 오길 정말 잘했다며 계속 풀을 벴습니다.

“풀베기는 예초기보다 낫이 더 빨라요. 언젠가 예초기랑 시합을 해봐야겠어요.”


풀을 베는데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햇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울력을 마칩시다!”

트럭에 수확물을 옮겨 싣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스님은 대숲에 들러 빗자루를 만들기 위한 대나무 가지를 한 아름 꺾어왔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발우공양을 한 후 10시 30분부터 두북특별위원회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21일 만에 다시 두북 수련원에 모인 공동체 법사단은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했습니다.

먼저 스님에게 여는 말씀을 청해 들었습니다.

“21일 동안의 안거가 어제 잘 끝났습니다. 안거에 참여하지 않았던 법사님들은 다들 잘 지내셨어요?”

“네.”

“오늘 논의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두북특별위원회 활동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우선 이번 주 내에 전국대의원 회의에 제출할 문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법사단이 3개월 동안 연구한 내용을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건을 작성하는 것이 필요해요. 다음 주에는 정토회의 30년 역사를 정리하는 사료편찬 작업을 법사님들이 좀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과제들은 기획위원회, 개원 기념법회 추진단, 사료편찬위원회 등 각 단위로 넘겨준 후 두북특별위원회는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두북특별위원회를 마무리하기 위한 8월 회의 일정을 확정한 후 긴급히 처리할 안건들부터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특히 정회원 중에 회칙을 어겼을 경우 징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온라인 방식으로 전환될 경우 조직과 의결 구조를 어떻게 개편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를 한 후 저녁 8시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주 수요일에 열린 운문사 초청 강연에서 있었던 즉문즉설 한 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경계에 부딪혔을 때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나요?

“걸림 없이 살기 위해서는 경계에 부딪혔을 때 그 경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경전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어요.

‘비구가 여인을 만났을 때 마음에 욕망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부처님은 세 단계로 얘기를 하셨어요.

‘만나지 말라.’

‘그런데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말하지 말라.’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평정심을 유지해라.’

경계에 대응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가능하면 그런 인연은 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피해서 도망가라는 뜻이 아니라, 가능하면 그런 환경을 안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중생은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하면 마음이 일어납니다. 여러분들도 빵이나 피자가 먹고 싶어도 아무 냄새도 안 나면 별 생각이 안 나는데, 어디 지나가다가 냄새가 솔솔 나면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수행을 처음 시작한 초심자일수록 그런 경계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경계를 만났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말을 걸지 말라는 것은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관심이 가서 말을 걸었다면 어떻게 하느냐? 셋째, 자기 마음을 살펴라. 마음을 살피라는 것은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

위파사나 수행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첫째, 느낌을 살핍니다. 경계에 부딪힐 때 첫 번째 일어나는 것이 느낌입니다. 이 느낌은 오온(五蘊)에서 수(受)에 해당합니다. 호(好)와 불호(不好) 또는 쾌(快)와 불쾌(不快)가 일어날 때의 느낌을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이 느낌은 몸에 약간 열이 난다든지 호흡에 변화가 있다든지 하는 몸의 감각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리면 대부분 자동으로 사라집니다.

그런데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을 놓치면 욕망으로 갑니다. 마치 부싯돌이 부딪치는 것과 같습니다. 두 개의 부싯돌을 탁 부딪치면 반짝하고 불꽃이 일어나듯이, 육근과 육경이 탁 부딪히면 반짝하고 불꽃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수(受)입니다. 업식(業識)으로부터 수(受)라는 불꽃이 반짝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꽃이 일어날 때 인화 물질을 다 제거시켜 버렸다면, 불꽃이 반짝 일어나도 주위에 옮겨 붙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느낌을 딱 알아차리면 쾌 또는 불쾌라는 느낌이 일어나도 욕망으로 전이가 안 됩니다. 느낌이 일어났다 그냥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때 알아차림을 놓치면 옆에 인화물질에 불이 확 붙어버리듯이 욕망으로 넘어갑니다. 12연기(十二緣起)에서는 ‘수(受)’ 다음에 ‘애(愛)’로 넘어간 겁니다. 애(愛)는 갈애(渴愛)와 혐오(嫌惡)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걸 갈애라고 하고, 싫어하는 걸 혐오라고 합니다. 업식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수(受)에 따라 쾌는 갈애로, 불쾌는 혐오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날 때 초기에 딱 알아차리면 금방 제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못 알아차리고 놓쳤다면, 화가 나는 걸 아무리 알아차려도 계속 치고 올라옵니다. 그래도 알아차리면 그 다음부터는 올라가는 속도가 떨어집니다. 물리학에서 포물선 운동처럼 올라가는 속도가 좀 떨어지다가 내려가게 됩니다. 마음의 성질이 그렇습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가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플러스에서 제로를 거쳐 마이너스로 가기 때문에 점점 감속이 되기 시작하다가 밑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화가 확 올라올 때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쳤다면 입에서 말이 탁 튀어나오겠죠. 욕이 나오든지 행동이 나오든지 할 겁니다. 말과 행동까지 했다면 참회를 해야 돼요.

느낌 알아차리기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경계에 부딪혔을 때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든, 귀로 듣든, 코로 냄새 맡든, 혀로 맛보든, 몸으로 감촉을 느끼든, 생각을 하든, 육근과 육경이 딱 부딪치면 감수 작용이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안 일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도 감각의 일부입니다. 생각을 하면 벌써 느낌이 오잖아요. 눈으로 보는 것처럼요.

이미 자기 업식으로부터 자동으로 수(受)가 일어나기 때문에 불쾌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안 되고, 쾌하려고 해도 그렇게 안 됩니다. 일단 수(受)는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다음 단계인 애(愛)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부터가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受)에서 알아차리면 쾌와 불쾌는 일어나지만 갈애와 혐오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수(受)를 알아차리는 경지에 이르러야 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은 아무 감각이 없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감각이 일어나지만 거기에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 거예요. 음식을 먹을 때 맛이 좋다고 ‘더 먹고 싶다’ 이렇게까지 안 간다는 겁니다. 그냥 ‘맛이 좋네’, ‘싱겁네’, ‘짜네’ 이렇게 알아차릴 뿐이지 싱겁다고 불평을 하거나 소금을 뿌려서 먹거나 이렇게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계율 지키기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수(受)를 놓칩니다. 명상을 하는 근본 목적은 수(受)를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수(受)를 놓치면 애(愛)에서 알아차립니다. 애(愛)도 초기에 알아차리면 제어가 쉽습니다. 스트레스를 안 받아도 돼요. 그런데 애(愛)를 놓쳐서 이미 욕망이 일어난 뒤에 알아차리면 자기 스스로 결단을 해야 됩니다. 내가 좋은데 행해도 되면 행해도 되고, 내가 싫은데 안 해도 되면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행하면 지금은 좋지만 나중에 손실이 생긴다면, 지금은 싫지만 안 하면 나중에 큰 이익을 놓치게 된다면, 싫어도 하는 결단과 좋아도 안 하는 결단을 해야 되는 겁니다. 이게 계율이에요. 애(愛)에서 취(取)로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계율을 지켜야 돼요.

그런데 계율마저 어겼다면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참회입니다. 수행을 할 때 참회를 많이 하는 이유는 참회가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기 때문입니다. 참회도 안 한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참회만 하고 있으면 안 되고 계율을 지켜야 됩니다. 계율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아, 놓쳤구나’ 하고 탁 돌아오고 다시 계율을 지키면 계율이 스트레스를 안 줍니다. 그런데 욕구를 참으면 압력이 생기고 억누르니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얼굴 표정이 밝지가 못한 거예요. (모두 웃음)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스님이 무슨 스트레스를 받나’ 하지만, 스님들이 세상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훨씬 더 받습니다. 욕망을 억눌러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해버리니까 수녀, 신부님, 스님들보다 더 밝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지만, 욕망이 다 자기 뜻대로 안 되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스트레스를 더 받게 되죠.

수행자는 욕망을 알아차려야지 자꾸 참으면 안 돼요. 참으면 얼굴이 굳어지고 화가 쌓이고 나중에 세게 터집니다. 참는데도 한도가 있어서 특히 한국 사람은 세 번 이상 못 참아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 있잖아요.

‘보자 보자 하니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이러면서 터집니다. 세 번째가 화가 터질 차례예요. 참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보다는 낫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수행에는 안 들어갑니다. 세상에서 인격을 닦는다고 할 때는 참는 것도 하나의 방법에 들어가요. 윤리의 측면에서는 인격 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에 안 들어가는 이유는 참는 것은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수행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계율을 지킬 때 참아서 지키게 되면 결국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다시 계율을 어길 확률이 높습니다. 항상 계율에 대한 이런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욕망이 일어나지만 행하는 것이 나한테 손실이라면, 참는 것이 아니라 손해이기 때문에 안 해야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온갖 명상이 유행하고 있는데 계율을 중요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위와 욕망을 제어해야 되기 때문에 좀 힘듭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라고 하면 사람들이 명상을 안 하려고 해요. 계율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 사람들이 명상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고, 자는 것도 자고 싶은 만큼 자고, 호텔에 머물면서 하루에 몇 시간만 명상을 하고, 다리가 아프니까 의자에 앉아서 명상을 합니다. 이런 명상수련을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내고 참여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보면 이것은 정법이 아닙니다. 잘못됐다가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는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단지 일시적인 즐거움은 누릴 수 있어요. 그러나 계율을 지키지 않는 선정은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율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계율을 너무 고지식하게 지키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자기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제어하는 것을 기초로 해야 돼요. 이것이 기초가 안 되고 명상만 한다는 것은 정신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놀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계율만 갖고는 안 됩니다. 참아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시 계율을 어길 위험이 높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선정을 닦고 평정심을 유지해서 자극을 받았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면 계율을 어길 일이 없어지죠. 그럴 때 이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참을 것이 없어야 인욕바라밀입니다. 참을 것이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인욕이고, 인욕바라밀이라 할 때는 참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이 없어야 돼요. 남이 볼 때는 참지만, 나는 참을 것이 없어야 인욕바라밀이 되는 겁니다.

이를 악다물고 참는 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금강경에는 ‘옛날 가리왕이 내 몸을 찌르고 베고 하더라도 내가 그에 대해 아무런 원망심을 내지 않았다’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렇게 참을 것이 없는 것을 두고 인욕바라밀을 행했다고 합니다. 진짜 그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놔두고, 논리가 그렇다는 거예요. 진짜 그럴 수 있나 해서 찔러보고 하지 말고요 (모두 웃음)

경계의 자극이 왔는데도 아주 미세한 알아차림까지 유지해서 수를 알아차리게 되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남이 볼 때는 경계에 흔들림이 없다고 합니다.

‘아, 놓쳤구나’

자극이 왔는데 내가 거기에 감정적 반응을 했다면, 감정이 일어남을 알아차리되 이것이 손실임을 알아서 제어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냥 이를 악다물고 참는 것이 아니라 ‘아, 이 욕망대로 가면 나에게 손해구나’ 이렇게 알아서 계율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행위로는 옮겨가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냥 순식간에 행위로까지 가버렸다면 ‘아, 놓쳤구나’ 참회를 합니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후회이지 참회가 아닙니다. ‘아, 놓쳤구나’ 하고 탁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게 필요합니다.

이렇게 대응을 해야지 ‘나는 바람이 불어도 안 흔들릴 거야’ 이렇게 각오하는 것은 그냥 의지에 불과합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됩니다. 그래서 채근담에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고, 바람이 멈추면 나뭇잎이 멈춘다’ 이런 말도 있죠. 그런데 중생은 바람이 불 때도 나뭇잎이 흔들리지만, 바람이 안 불어도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흔들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잘못 공부하면 바람이 불어도 안 흔들리는 걸 목표로 삼습니다. 안 흔들리는 것이 도가 아닙니다. 바람이 불어서 흔들면 흔들리지만, 바람이 잠들면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경계가 왔을 때는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내 알아차림의 수준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을 때도 있고, 흔들릴 때도 있고, 놓칠 때도 있는 겁니다. 이것을 조금씩 연습해가면서 자신을 흔들리지 않는 쪽으로 이동시켜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시작부터 너무 욕심을 내기 때문에 안 될 때 좌절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4년이나 공부했는데도 안 되네. 그만두고 나가버릴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수행이란 체험하고 자기화하는 과정

종교로서의 불교는 어떤 믿음을 통해서 복을 구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얻으려 하고, 죽어서 좋은 데 가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주된 내용입니다.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이치를 탐구하고 교리를 배우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자기가 체험을 해야 돼요. 이치를 알아가면서 체험을 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는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을 뜻합니다. 첫 번째가 믿음, 두 번째가 이해, 그리고 세 번째가 실천, 네 번째가 증득입니다. ‘반야’라는 것은 그냥 ‘좀 알았다’ 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확연한 깨침을 뜻합니다. 확연한 깨침은 어떤 믿음보다도 신비하고, 어떤 앎과 이해보다도 더 밝고, 어떤 실천보다도 높고, 어떤 체험과도 비교할 바 없는 체험이라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실천과 체험입니다. 실천이란 여러분들이 실제로 경험해야 한다는 거예요.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기도 하면서 하나하나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행이란 체험하고 자기화하는 과정이에요. 여기에 믿음과 이해가 기초가 되면 더 좋죠. 그런데 실천과 체험 없이 믿음과 이해만 가진다면 삶이 행복해지기가 어렵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두북 농사팀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낼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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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왕

알았습니다. 스님.
알았습니다. 스님.
잘 알았습니다. 스님

2020-08-28 18:05:41

전은주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주문 같기만 했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런 뜻이 있었군요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실천과 체험입니다. 실천이란 여러분들이 실제로 경험해야 한다는 거예요.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기도 하면서 하나하나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2020-08-28 12:48:18

굴뚝연기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선정을 닦고 평정심을 유지해서 자극을 받았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참을 것이 없어야 인욕바라밀입니다. 참을 것이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인욕이고, 인욕바라밀이라 할 때는 참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이 없어야 돼요.]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는 수행에 대한,평정심에 대한 스님 좋으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2020-08-15 04: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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