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7.31 금요 정기법회
“잘해주니까 저를 만만하게 봐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에 농사일을 하고, 오후에는 공동체 수행 대중과 공청회를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정기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아침 기도를 마치고 울력을 하러 나오니 멀리 논둑에서 풀을 베는 스님이 보였습니다.

스님은 어제 하다 만 논둑 중간 지점부터 풀을 베고 있었습니다.




논둑 끝에 다다를 무렵 비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논둑 끝까지 풀을 다 베고, 예초기를 돌리는 행자들에게 어떻게 예초기를 돌리면 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면을 뒤덮고 있는 칡덩굴을 정리했습니다.




예초기로 풀을 깎고 나니 논둑이 이발을 한 것처럼 시원해 보였습니다.


“오늘은 땀을 안 흘리려고 했는데, 또 흠뻑 젖었네.”

스님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웃었습니다.

논에서 내려오니 대중도 울력 뒷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빨간 고추를 따서 씻어 널어둔 후 수확한 호박을 들고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발우공양을 한 후에는 하루 종일 분과 별 활동을 했습니다. 스님은 오후 4시부터 이번에 새로 구성한 온라인 특별위원회와 화상회의를 했습니다.

“행정처장님이 어제 급하게 전화를 해서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긴급 회의를 소집하게 된 이유를 말해주세요.”

실무 담장자들은 9월부터 개강할 온라인 불교대학의 학사과정을 점검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한 시간 동안 학사과정 기획안을 보며 무엇을 개선하면 좋을지 조언해 주었습니다.

“스님, 경전반 학사과정도 검토해 주셔야 합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일정이 있어요. 자료를 읽어볼 시간이 없네요.”

“농사 울력을 빠지시고 새벽에라도 회의하시면 안 될까요?”

“안 돼요. 울력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해야죠. 그럼 내일 저녁예불 마치고 괜찮아요?”

“네. 좋습니다.”

경전반 학사과정에 대한 검토는 내일 저녁 예불을 마치고 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회의를 마치자마자 강당으로 이동해 공청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공청회 주제는 ‘불사’, ‘의식’, ‘교육수련’, ‘공동체’입니다.

대중이 제안하거나 질문을 하면, 담당 분과 법사님이 답변을 하고, 스님이 추가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오늘도 다양한 제안과 질문이 나왔습니다.

  • 대학원대학, 에코 아파트를 짓자는 아이디어를 스님의 하루에서 읽었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궁금합니다.
  • 불사를 계획할 때 관련 부서와 사전에 논의를 해서 공간 설계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설계와 실제 사용이 달라서 추가로 보완하느라 비용이 들 때가 있습니다.
  • 건물을 재활용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건물을 쓸 때는 안전을 위해 보수가 필요합니다.
  • 2차 만일결사에는 해외에도 공동체가 많이 생길 텐데, 우리가 지향하는 수행공동체의 명확한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중간 관리자를 양성할 수 있도록 공동체 부서를 편재해보면 좋겠습니다.
  • 수행법회는 정회원 교육이기도 하니 교육연수 분과에서 담당해보면 좋겠습니다.
  • 발우공양을 할 때 바라지가 꼭 필요할까요?

공동체 대중에게는 ‘공동체’라는 주제가 일상과 가장 밀접한 주제입니다. 공동체를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더욱 분위기가 활발해졌습니다.

발우공양을 할 때 바라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매일 밥을 급하게 먹는 문제가 있어서 바라지가 정말 필요한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중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충분히 듣고 공감한 후 말했습니다.

“무엇이 불편한지, 무엇 때문에 시간에 쫓기는지 더 자세하게 살펴본 후 개선안을 한번 내보세요. 얼마든지 개선을 해도 됩니다. 만약 개선안이 안 받아들여지면 법사들이 직접 바라지를 한번 해보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젊은 활동가들은 2차 만일결사의 방향에 대해 많은 제안을 했습니다. 공청회를 마칠 시간이 되자 스님이 이에 대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30년 전 정토회가 출발할 때 가졌던 문제의식

“불교란 무엇일까요? 어떤 전제도 필요 없고 ‘진실이 무엇인가?’ 이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에 의거하여 진리가 검증될 수 없다. 지금 눈으로 보고 검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말씀이 경전에 분명하게 적혀 있습니다. 자꾸 사람들이 ‘브라만교 관점에서는 이렇다’ 하는 얘기들을 하니까 ‘눈 있는 자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입멸 후 불교가 계속 논리화되고 관념화되어 가니까 대승 불교가 일어나서 ‘공(空)’을 내세웠습니다. 법도 공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너희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도 공하다. 어떤 형식도 이것이 진리라고 정할 수 없다’

이렇게 기존 관점을 깨뜨려 버렸어요. 또 시간이 흘러 수행이 점점 지식화 되어 가니까 선(禪)이 일어나서 ‘불립문자(不立文字)’, 즉 문자로 진리를 검증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론이나 문자로 진리를 검증할 수가 없고,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즉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검증의 기준은 없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생각이 아닌 본인이 직시하고 체험한 것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관점을 제기한 겁니다.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만 기준으로 삼고 그 외에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적인 접근법으로 삼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승려라는 이름이 있느냐, 머리를 깎았느냐, 옷은 무엇을 입었느냐, 경전은 얼마나 읽었느냐, 이런 점들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딱 검증이 가능한 것만 기준으로 삼겠다는 관점에서 접근한 거예요. 이런 관점은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0년 전에 정토회가 출발할 때도 이런 관점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불교라는 이름도 내려놓고 단도직입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럼 너희의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런 질문에 대해 설명을 많이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정체성이나 근거를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명을 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아져서 이런저런 얘기를 덧붙이다 보면 결국 사이비 취급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1차 만일결사 때는 현재와 같이 불교의 관점을 갖고 출발하기로 했어요. 2차 만일결사부터는 불교라는 이름도 내려놓고 단도직입적으로 나갈 것인지, 1차 만일결사와 똑같은 방식으로 갈 것인지,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인 방식을 선택한다면 당시 선불교처럼 새로운 차원의 혁명적인 접근이 될 것이고, 과거의 전통을 계승해서 불교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선택한다면 혁신안 정도가 될 것입니다.

미래 30년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지금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에는 혁신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 세대가 역사적으로 우리를 평가하면서 ‘혁신을 넘어서서 혁명적인 접근이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대승 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본인들이 혁명적으로 접근했다고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그 전 불교와는 다른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부처님은 브라만이라는 혈통이 없이도 정신적인 지도가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대신 전제조건은 있었어요. 가족도 재산도 다 버리고 숲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길이 열려 있었지만, 대부분은 결단을 하지 못했죠. 부처님은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결단을 한 사람들을 데리고 혁명을 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는 수준이에요.

‘스님들도 요즘 이렇게 검소하게 안 사는데, 왜 우리에게 자꾸 검소하게 살라고 하십니까?’

혁명을 하려면 최소한 이런 수준은 넘어야 합니다. 혁명을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스님들이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연연했다면 제가 벌써 여러분들을 다 출가 승려로 만들었지 뭐 하러 머리를 남겨두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을 본질의 세계로 단도직입으로 가도록 하려는 겁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을 붙여놓았더니 오히려 더 안 되는 것 같아요. (모두 웃음)

머리카락을 깎아 놓으면 ‘나는 스님이다’ 하는 상을 갖게 되고, 머리카락을 붙여 놓으면 중생이 되어 버립니다. 머리카락이나 옷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는 출가 수행자이다’

이렇게 자기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머리카락이 붙어 있으니까 자꾸 친구나 가족들이 인생의 기준이 되어서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을 따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 20년을 여기서 살아도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입니다. 출가를 했다면 마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스님에게 공동체 대중은 삼배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공청회를 마치고 화장실만 다녀온 후 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다시 수련실로 이동해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7시 30분부터는 1300여 명의 정토회 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정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을 한 후 스님은 도라지꽃 앞에서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어제까지만 해도 장맛비가 내려서 시원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꽤 무더웠습니다. 일기예보에서는 제가 있는 곳의 최고 기온이 31도라고 했는데 온도계로 재보니까 34도까지 올라갔어요.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르는 상태입니다. 낮에 농사일을 할 때는 비를 맞은 것처럼 땀이 흘렀습니다. 이제 곧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될 텐데요. 더위 먹지 않도록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7월의 마지막 날 정토회 회원을 위한 금요 정기법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짧게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질문자들이 화상으로 직접 질문을 했습니다. 덕분에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참 좋아졌네요. 질문해보세요.”

6명이 화상으로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서면으로 신청한 질문에 대해서도 2개 더 답했습니다. 그중 잘해주니까 만만하게 봐서 고민이라는 질문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잘해주니까 저를 만만하게 봐요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주라 하셨는데 계속 그렇게 상대방에게 맞춰줬더니 상대방이 점점 요구하는 게 많아집니다. 제가 웬만한 폭언에도 화를 안 내니까 저를 만만하게 보고 말의 강도도 점점 세집니다. 열 번 중에 아홉 번을 들어주고 한 번만 안 들어줘도 난리가 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왜 상대의 요구를 아홉 번만 들어주고 한 번은 안 들어줍니까? 열 번을 다 들어주면 되죠.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라’라는 말의 의미는 열 번을 요구하면 열 번을 다 들어주고 백 번을 요구하면 백 번을 다 들어주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꼭 이 길밖에 없는 건 아니에요.

서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에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길은 상대방이 나에게 맞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가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돈이 많든 지, 지위가 높든지, 인물이 좋든지 상대방이 나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손해를 보게 되는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돼요. 이 길은 내가 상대방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길이 있다고 해도 실현하기는 굉장히 어려워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 길을 원합니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에게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정신 차리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들은 사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게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을 빌리려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수행은 그런 게 아닙니다.

두 번째 길은 서로 타협을 해서 반반씩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할 테니 당신은 이만큼 해라’하고 서로의 요구를 맞춰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전부 다 내 방식대로 하고 싶듯이, 상대방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의 경우에는 상대방이 큰소리를 칠만한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상대방이 인물이 잘났든지, 돈이 많든지, 지위가 높든지, 성격이 원래 그렇게 생겼든지 해서 ‘내가 원하는데 감히 네가 내 말을 안 들어?’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반반씩 맞추는 게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헤어질 수밖에 없어요. 헤어질 수 없다면 계속 갈등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니에요. 또 길이 있어요.

세 번째 길은 내가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이 길은 자칫 비굴해 보일 수도 있지만 비굴함과는 완전히 성격이 달라요. 내가 맞춰주고 관계를 유지하는 게 이익인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게 이익인지를 계산해보고 덕 될 게 좀 있다고 하면 내가 맞추는 거예요. 하지만 내가 바보도 아니고 노예도 아닌데 무조건 맞춰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방이 내게 맞추게 하든지, 서로 타협을 해서 반반씩 맞추든지 그것도 어려우면 헤어지면 됩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에 내가 전적으로 맞춰주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거예요.

제가 볼 때 제일 쉬운 길은 내가 맞추는 겁니다. 상대방이 어떤 요구를 하든지 ‘예’라고 대답하고 무엇이든지 맞춰버리면 되니까요. 상대방과 상관없이 내가 결정해버리는 것이니 노력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제일 쉬운 길로는 아무도 가지 않고 제일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피곤한 거예요.

아홉 번을 해주다가도 한 번을 안 해주면 상대방이 화를 내는 게 너무 당연합니다. 처음부터 한 번도 안 해주면 화를 좀 내다가 나중에는 포기하잖아요. ‘저 사람은 원래 저렇다’라고 여기는 거죠. 하지만 아홉 번을 해주니까 ‘저 사람은 내가 말하면 늘 해주는구나’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다가 한 번을 안 해주니까 더 화를 내는 겁니다. 돈을 빌릴 때, 열 번 빌려달라고 했는데 한 번도 안 빌려준 사람에게 화를 낼까요, 아니면 열 번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주다가 한 번 안 빌려준 사람에게 화를 낼까요? 계속 빌려주다가 안 빌려주면 화를 더 냅니다. 처음에 안 빌려주면 처음에는 화를 좀 내다가 성질을 안 내든지 관계를 끊든지 하겠지요.

질문자는 일절 아무것도 안 해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엄청 불같이 화를 낼 거예요.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 상대방이 화내기를 멈추든지, 헤어지자고 하든지 할 겁니다. 질문자가 이 길을 선택하려면 헤어질 각오를 해야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타협을 해 보든지, 안 되면 내가 맞추는 길이 있습니다. 수행은 내가 맞추는 거예요. 쉬운 길을 가는 게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어떤 마음으로 수행을 해야 서원행자, 결사행자에 이를 수 있나요?
  • 왜 전법이 중요한가요? 전법을 하기가 어려운데 좋은 방법이 있나요?
  • 남편이 잘 씻지 않아서 짜증이 나요.
  • 남자고등학교 교사입니다. 남학생들의 여성 혐오가 심해서 걱정이에요.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요?
  • 수술하는 의사로서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나요?
  • 젊을 때 남편과 사별하고 두 아들을 다 키웠습니다. 아들들이 무탈하게 오래 살기만을 바라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낙태에 대한 죄책감이 있습니다. 태아 영가는 어떻게 천도할 수 있나요?

9시가 되어 법문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내일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어떻게 할지 대중과 논의한 후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들과 천룡사를 방문한 후 공동체 수행 대중과 공청회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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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모닝

네~~ 스님 말씀이 명답입니다.
뭐든지 내가 해서 탈이 생겨나면
가만히 있으니 아무일없듯이 지나가더군요^^
감사합니다~~

2020-08-08 23:11:02

실비아

쉬운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합니다 수행으로 쉬운길을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2020-08-06 17:00:39

김애자

상대방과 상관없이 내가 결정해버리는 것이니 노력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제일 쉬운 길로는 아무도 가지 않고 제일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피곤한 거예요.

2020-08-05 16: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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