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05.30 부처님 오신 날
“지금 이대로 행복해지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생방송으로 천일 결사 기도를 하고,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생방송으로 기념 법문을 했습니다.

새벽 4시 45분, 종송과 함께 천일 결사 기도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5시 정각이 되자 새벽예불을 시작했습니다. 예불 끝에 스님은 기도에 동참한 대중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남에게 보탬이 되는 수행자가 되기를 축원해 주었습니다.

“저희 정토행자 대중 일동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전파하여 이 땅에 정토세상을 실현하고자 만일결사를 시작하고 오늘 9,083일째 기도정진 중이옵니다. 저희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며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사람, 모든 존재의 평등성에 바탕을 둔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발원합니다.”

예불과 축원에 이어 108배, 명상, 경전 독송, 발원문 독송을 마쳤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스님은 평소보다 짧게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기도 잘 하셨어요? 오늘은 부처님이 오신 날을 맞아 봉축법요식이 있는 날입니다. 그런데 수도권에 코로나19 감염자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수도권 법당에서는 봉축법요식을 전부 취소하고 온라인으로 봉축 법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각 법당에서 행사를 준비하느라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도권에서는 행사가 취소되는 바람에 준비한 솜씨를 발휘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겠지만 ‘사람이 죽고도 산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다음에 솜씨를 보여주면 되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잘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우리가 읽는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까지 하루하루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늙고 병든 몸을 가지고도 항상 깨어있으면서 수행자들에게 언제 어떤 상황에도 깨어있기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진정한 의미는 연등을 켜고 어떤 의식을 하는 것보다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거예요. 봉축법요식을 진행하는 지역 법당에서는 행사를 잘하려고 짜증 내고 싸우고 삐지고 미워한다면 수행적 관점에서는 일을 잘 하는 게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잘하려고 하다 보면 또 그렇게 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럴 때 깨어있지 못한 것이죠. 오늘 손님을 맞이하고 예기치 않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마음 관리에 늘 만전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초파일 행사를 해야 하니까 이 정도로 마치고 다음 주 토요일 기도에 뵙겠습니다. 초파일 준비한다고 수고들 하셨고요, 봉축행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천일 결사 기도 촬영을 마친 후 청소를 하고 발우 공양을 했습니다. 발우 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공동체 행자들에게 법당을 참배하는 분들을 반갑게 맞이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6번의 법회를 모두 취소하고 온라인으로 1번만 법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수가 모이는 법회는 취소했지만, 회원들이 법당을 참배할 수는 있습니다. 꼭 마스크를 끼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참배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세요. 그래도 한 공간에 30명이 넘게 모여 있지 않도록 해주시고, 오시는 분들을 반갑게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의 재확산 조짐으로 인해 정토회는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을 수도권 법당에서 모두 취소하고, 전국적으로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매년 천여 명이 오갔던 법당의 풍경이 조용합니다. 법당 입구에서는 체온을 재고 손 소독을 한 후에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10시가 되자 스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언급하며 봉축 기념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많이 흐트러졌습니다. 과거를 기준으로 하면 많이 불편해졌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겪는 불편은 정말 불편해서 겪는 불편이 아니라 과거의 습관을 기준으로 지금을 바라보기 때문에 불편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앞으로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지금의 비정상적인 일상이 어쩌면 보편적 일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과거의 업식에 끄달리지 말고 항상 주어진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서 자유로움을 맛보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처음에는 많이 불편하더라도 수행자라면 이 상황에 맞게 재빠르게 생활 태도와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불편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어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가 무엇인지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부처님이라는 용어 자체는 인도어의 ‘붓다’에서 왔습니다. 붓다는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깨달으면 모든 고뇌가 사라져 버립니다. 번뇌 망상이 삭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두고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아픔을 병이라고 하듯이, 마음의 아픔을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목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몸의 여러 부분이 아픈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건강하다는 것은 힘이 얼마나 센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아프지 않으면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표현합니다. 열반이란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편안한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수행의 목표는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심리적인 불안정 없이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일상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입니다.

이런 상태는 몸이 건강한 지 안 건강한 지, 키가 큰 지 작은 지, 외모가 예쁜지 안 예쁜지, 돈이 많은 지 적은 지, 지위가 높은지 낮은지, 신분이 양반인 지 상놈인 지, 성별이 남자인 지 여자인 지, 집이 큰 지 작은 지와 관계없이 마음이 편안한 것을 말합니다. 큰 집에 살 수도 있고 작은 집에 살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고, 늙을 수도 있고 젊을 수도 있고, 신체가 건강할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지만, 이런 조건이 어떠한 지와 관계없이 마음이 항상 적멸에 드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는 편안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돈만 많이 있으면 마음이 초조하거나 불안해도 좋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수행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돈이 많아도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는 건 싫다’
‘나는 집이 아무리 커도 근심, 걱정이 많은 건 싫다’
‘나는 비록 집이 작아도 마음이 편안한 것이 좋다’

수행자는 이런 태도와 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자(佛子)입니다. 그런데 불자들 중에는 스스로를 불자라고 칭하면서도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하면 돈을 많이 번다’
‘기도하면 시험에 붙는다’
‘기도하면 선거에 당선된다’
‘기도하면 아픈 몸이 낫는다’
‘기도하면 결혼을 하게 된다’

이런 세속적인 이익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이 불자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정체성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해보면 좋겠습니다. 불자의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는 바로 해탈과 열반을 인생의 최고 덕목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비로소 불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 보니, 이는 아주 특별한 사람만 이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셨습니다.

이는 마치 몸이 많이 아프다가 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회복한 사람이 지나놓고 보니 이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참 많은데 그 사람들도 필요한 약을 먹고, 조금만 운동을 하고, 조금만 음식 조절을 하면 누구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키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고, 피부색이 흴 수도 있고 검을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사고로 인해 다리를 크게 다쳐도 생활이 불편할 순 있지만 여전히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그런 것처럼 사람의 얼굴이 희든 검든, 신분이 높든 낮든, 부자든 가난하든, 지식이 많든 적든,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든 중생은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건 우리 몸 안에 불성이라고 부르는 구슬 같은 어떤 자아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행복해지기

그럼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요?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면, 방 안에서 비단 이불을 덮고 편안하게 자고 있었는데 악몽을 꾸게 되었습니다. 악몽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겠죠. 강도에게 쫓기게 되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꿈을 꿀 수도 있고, 꿈속에서 누가 죽어서 울게 되기도 합니다. 꿈속에서 누구를 미워하거나, 화를 내거나, 두려워서 공포에 떨기도 합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나면 그 꿈의 종류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강도에게 쫓기는 꿈이든, 호랑이한테 쫓기는 꿈이든, 뱀한테 물리는 꿈이든, 싸우는 꿈이든, 죽는 꿈이든, 재산을 날리는 꿈이든, 꿈속에서는 모두 괴로운 일이지만, 눈을 뜨고 나면 꿈의 종류와 관계없이 ‘아, 꿈이었네’ 하고 이불 위 편안히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그렇게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꿈을 꾸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무지에 빠지는 겁니다. 무언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 모르거나, 편견을 갖거나, 어떠한 환영에 휩싸여서 우리는 마치 꿈속을 헤매듯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데서 온갖 괴로움이 발생하고 있는데, 꿈에서 깨듯이 눈을 탁 뜨면 그 모든 괴로움이 종류에 관계없이,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꿈속에서 아우성을 칠 때나 꿈에서 깼을 때나 방 안에 누워있는 건 똑같습니다. 상황이 바뀐 건 아닙니다. 있는 상태 그대로 꿈에서 깼을 뿐입니다. 그런 것처럼 여러분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상황은 지금 그대로인데 번뇌가 모두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남편도 그대로 있고, 아내도 그대로 있고, 아들, 딸도 그대로 있고, 회사도 그대로 다니고, 몸은 그대로 있는데 괴로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지금, 여기, 나

환영에 휩싸인다는 것은 실재(實在)의 세계, 즉 지금, 여기, 나에 깨어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여기 있으면서 저기 생각을 하고, 지금 있으면서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고,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고 남 탓을 하는 등 늘 어떠한 환영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걸 한 마디로 어리석음, 무지(無智), 무명(無明)이라고 말합니다.

환영에서 깨어나게 되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그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괴로움이 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본래 괴로워할 일이 없었는데, 어떠한 환영 속에 사로잡혀서 괴로워한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건 어떠한 신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꿈을 꾸다가 꿈에서 깨듯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 알 듯이, 어떠한 관념에 휩싸여 있다가 실재(實在)를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지금, 여기, 나에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하면 의식을 잘 보존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게 아닙니다. 노력을 해서 무언가 얻어야 되거나, 강도가 쫓아오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거나 숨어야 하는 게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건 너무나 쉬운데도 우리는 자꾸 도망가고, 도움을 요청하고, 숨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의 꿈속에서 다른 꿈속으로 옮겨가는 방식밖에 안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괴로움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니 괴로움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꿈에서 깨어난 자, 무지를 깨우친 자, 진실을 본 자, 실재(實在)의 세계를 본 자, 꿈에서 깨어난 자, 중생들이 꿈에서 깨어나도록 안내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삼귀의를 나에게 적용하면

그래서 ‘귀의불(歸依佛)’은 한 편으로는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신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괴로움이 없는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을 내 인생의 목표로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의불(歸依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의법(歸依法)’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늘 진실이라고 믿고, 나도 그 가르침을 따라 행하겠다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실재(實在)에 항상 깨어있겠다는 뜻입니다. 괴로움은 환영 속에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는 말은 ‘지금’, ‘여기’, ‘나’에 깨어있겠다는 의미입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면 바로 ‘아, 지금 내가 무언가에 사로잡혔구나’하고 점검하고, 지금, 여기, 나에게로 돌아오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어떤 환영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실재(實在)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귀의승(歸依僧)’은 이렇게 수행하는 공동체, 즉 수행자들의 모임에 귀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나에게 적용하면 꿈에서 깨기 위해 꾸준히 연습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고, 현재 나는 괴로운 상태에 놓여 있으니, 현재의 괴로운 상태에서 괴로움이 없는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환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 환영에서 깨어나는 길을 알고 있어도,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게 되고, 깨어났다가 또 잠들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꿈으로부터 깨는 연습을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수행의 가장 핵심은 ‘꾸준히’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어떻게 꾸준히 해야 하는지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다만 할 뿐인 자세로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놓치면 다시 하고, 또 놓치면 또다시 하고, 사로잡히면 돌아오기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꾸준히 정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잘했다, 못했다는 평가도 있을 수 없고, 요행을 바라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불법승(歸依僧) 삼보(三寶)에 귀의(歸依) 하고,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아야 한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분명하게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잡히고 나면 이제는 그 길로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면 삶의 원칙이 분명하게 잡히게 되고, 그 후로는 계정혜 삼학을 꾸준히 닦아나가면 됩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이 세상의 실재 모습이 어떠한지 보셨는데, 이것을 불교의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종교, 철학을 막론하고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관은 이 세상의 천하 만물은 모두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각각의 개별적인 존재가 세계라는 큰 바구니에 담겨있다고 봤습니다. 이를 삼라만상(森羅萬象), 즉 ‘개별적 존재의 집합’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죽어서 윤회를 한다, 천당에 간다, 지옥에 간다 등 이런 다양한 믿음과 사상들은 모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개별적 존재의 집합’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그렇게 개별적인 존재로 알았던 것들이 개별적이지 않고 세상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비단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뭇 생명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생명과 무생물까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걸 깨달으셨습니다. 이것을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일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은 일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분명 과거에 있었던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이러한 결과가 생겨난 것입니다. 우연이라는 건 없습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그 원인을 모를 때 ‘우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지, 시공간을 확장해서 보면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시공간 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의 세계관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의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법 발견을 위대한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다 연관되어 있습니다. 만약 개별적인 존재들이라면 이건 귀한 존재, 저건 천한 존재, 이건 비싼 것, 저건 싼 것, 이렇게 나눌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다 연관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들을 구분할 수가 있겠습니까. 손가락 다섯 개가 각자 따로 존재한다면 하나는 중요하고 다른 건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 손에 모두 다 이어져 있는데 어떤 손가락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대승불교의 언어로는 ‘제법(諸法)이 공(空) 하다’라고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공성(空性)’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개별적 존재라는 본성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연기법의 사회적 실천

깨달음이란 연기법을 말합니다.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무아(無我)입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공(空)입니다. 이것은 만물의 절대 평등성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귀하고 천한 것이 없습니다. 남자, 여자를 귀하고 천하다고 보거나, 양반, 상놈을 귀하고 천하다고 구별하는 것은 모두 환영에 사로잡혀서 꿈속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셨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계급 차별도 부정하시고, 남녀 차별도 부정하신 겁니다.

정의란 평등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차별성에서 평등성으로 나아갈 때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등성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정의로운 실천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는 인종차별도 없고, 종교차별도 없고, 성차별도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이런 다양한 차별이 존재하지만, 이는 모두 환영에 사로잡힌 무지의 소산입니다. 무지가 걷히고 나면 모든 존재는 서로 다를 뿐 각자가 제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다 제 역할이 있듯이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여기에는 어느 것이 더 귀하고 천한 것이 없습니다.

수행자는 자기를 행복하게 하고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이런 태도도 모두 평등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돈 조금 있다고 거들먹거리거나, 지위가 높다고 남을 무시하거나, 남자라고 여자를 차별하거나, 나이가 많다고 젊은 사람을 차별하거나, 얼굴이 희다고 검은 사람을 차별하는 건 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아예 불법(佛法)을 모르거나, 설령 불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교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물론 과거의 업식 때문에 아는 것을 다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법(佛法)을 모른다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고, 알긴 아는데 다 행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을 조금 더 기다려줘야 합니다. 알기도 어렵지만, 안다고 하더라도 다 행하는 건 금방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포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항상 진실에 기초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지금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잘못도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진실을 보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혜의 눈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타인에 대해서는 이 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고 그들이 연습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자비(慈悲)’라고 합니다.

붓다의 눈으로 본 코로나 사태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서 등을 달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부처님이 오신 그 뜻을 다시 한번 새기고, 내가 불자(佛子)로서의 바른 관점을 갖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을 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세상이 참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자연과 우리는 원래 하나인데, 지금까지 자연과 하나라는 것을 간과하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왔기 때문에 결국 자연의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이 복수한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자연이 우리에게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인 겁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너무 좁은 식견을 갖고 사람 중심으로만 문명을 발전시켜왔는데, 눈을 뜨고 보면 우리 인류도 연관된 세계 속의 한 부분입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로 삼아보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이 정말로 진리일 뿐만 아니라 현실에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다시 살펴보는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경전 중에서 부처님께서 탄생하던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어서 아기 부처님을 씻기고 스님이 대중에게 ‘미래에 부처를 이루리라’는 의미로 이마의 미간에 붓으로 점을 찍어주며 수기를 주었습니다. 매년 스님은 하루 종일 수백 명의 대중에게 마정수기를 주었는데, 올해는 생방송 촬영을 위해 대표로 법사, 대표, 총무에게만 마정수기를 직접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카메라를 향해 생방송 시청자 모두에게 마정수기를 주었습니다.

“온라인으로 보는 대중들은 지금 제가 다 마정수기를 주겠습니다.”

점을 찍는 동시에 유튜브 댓글 창에는 ‘온라인 마정수기 받았습니다. 감동입니다.’ 화면에 머리를 갖다 대면 되네요‘라는 댓글이 우수수 올라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지만, 의식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오늘 스님의 법문처럼 나도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워보았습니다.

봉축법요식을 마치며 정토회 대표 김은숙 님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국내에 계신 정토행자님들, 해외에 계신 정토행자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준비하시느라 많이 기대하시고 바쁘셨을 텐데요. 뜻대로 행사는 못했지만 그 노고는 저희가 다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법문을 들으며 제가 부처님의 제자라고만 생각했지 제가 부처가 되겠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자유롭고 괴롭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미처 그 목표까지 세우지 못했습니다. 혹시 제자로만 살아가겠다는 분이 있으면 오늘 저와 함께 발심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만 부처님이 되지 말고 나의 사랑하는 이웃, 가족들도 부처님이 될 수 있도록 한 발을 내딛는 첫날이 되어보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국무총리 정세균 님의 축사 영상이 있었습니다.

"법륜 스님이 이끌어온 정토회는 국민의 행복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 오셨습니다. 특히 빈곤 퇴치, 환경 파괴 등 인류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 왔습니다. 이런 노력은 종교를 초월했고, 국경을 넘어서까지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정토회는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법회를 중단하고, 불자들은 기부와 나눔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노력과 정성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모두가 행복한 그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정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두손모아 봉축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생방송을 시청해준 정토행자들에게 사회자가 마무리 인사를 하면서 봉축법요식을 마쳤습니다.

“본래부터 갖추어진 내 안의 지혜와 자비가 꽃처럼 피어나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하며 불기 2564년 5월 30일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봉축법요식을 마치고 대중은 떡 주머니를 하나씩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오후에 스님은 법당에 머물면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오후 4시에 박원순 서울시장과 차담을 하고 두북수련원으로 출발했습니다.

두북으로 가는 사이 해가 지고 스님은 차 안에서 원고 교정을 보았습니다.


내일은 농사일을 하고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온라인으로 명상수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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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

불자들의 목표가 해탈과 열반임을 잊지 않아야 겠습니다.

2020-06-16 20:44:42

원 미연

부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깨우쳐 있으라 하셨는데 이리저리 핑계로 집중을 하지 못하고 명상도 오래하지 못했습니다. 여여히 가야는데 이렇게 모자람에 참회합니다.

2020-06-06 23:58:18

원 미연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끈을 놓지 않으려 감기에 몸이 괴로워도 108배로 저를 다스립니다. 아프다고 인상쓰고 지낸 오늘 하루 참회합니다.

2020-06-06 23: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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