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5.27. 농사일, 수행법회 생방송
“원칙, 원칙 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농사일을 하고 생방송으로 수행법회 법문을 한 후 평화재단 전문가들과 워크샵을 했습니다.

요즘 스님의 하루는 해뜨기 전 밭에서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고수를 수확하고 빈 땅에 다시 고수 씨앗을 뿌리고 상추 모종을 옮겨 심었습니다.


새로운 땅에 자리 잡은 어린 상추들이 햇볕에 타지 않도록 부직포도 덮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수련원 뒷밭에 상추 모종을 옮겨심기로 했습니다.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흙과 함께 삽으로 푹 떠서 대야에 담았습니다. 며칠 사이에 상추가 쑤욱 자라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모종을 옮겨심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키운 모종을 다 가져와 심었는데도 땅이 남았습니다.


수련원 안에 화광법사님이 키운 상추 모종을 조금 더 캐왔습니다.

상추를 다 옮겨 심고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상추를 옮겨 심고 나니 오전 7시 30분이었습니다. 법사님들은 울력을 마치고, 스님은 다시 작업 가방을 챙겨 산 아랫밭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이 파 놓은 연못에 모인 물을 밭에 있는 통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수압을 조절해 호스로 건너편 밭으로 물을 흘려보냈습니다.

“호스 입구를 막으세요. 물 흘려보냅니다.”


“이제 푸세요. 물이 나오나요?”

“네, 나옵니다!”

호스로 물이 흐르도록 한 후 바가지로 양동이에 물을 계속 퍼 올렸습니다.

연못은 어느덧 개구리와 올챙이의 집이 되어있었습니다. 올챙이가 많아서 체로 걸러가며 물을 담았습니다.

“올챙이에 뒷다리가 생겼네요.”

연못에 개구리와 올챙이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물을 남겨놓고 물 채우는 일을 마쳤습니다.



밭에 새로 설치한 물통은 입구에 물이 새고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물이 아까워 밭으로 흐르도록 호스를 연결해두고 다음에 고치기로 했습니다.

수행법회 생방송 촬영이 있기 때문에 농사일을 마무리하고 밭에서 내려왔습니다.

오전 10시 정각에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스님은 환한 웃음으로 전국의 정토행자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5월 마지막 수요일 수행법회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잘 계셨습니까?”

사전에 수십 개의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10개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 2개의 질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정토회는 원칙에 얽매이는 것 같아 불편하다는 질문과 스님의 답변입니다.

정토회는 왜 원칙에 얽매이는가요

“경전반 교실담당을 맡고 있습니다. 한 학생이 어머니의 수술로 영상수업에 못 들어와 그날 저녁에 따로 법문을 제공하고 마음 나누기를 한번 했습니다. 원칙에는 어긋났지만 저는 이 분이 경전반을 졸업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강한데, 팀장님은 학생이 다 떨어져도 원칙을 어기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원칙이 이해가 안 됩니다. 정토회는 왜 이렇게 원칙에 얽매이는지요?”

“금강경에 대해 배우셨죠? 금강경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는 어떠한 정한 법도 없다는 것을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무유정법을 잘못 이해하면 ‘정해진 게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되네’ 혹은 ‘방법이 없네’ 이렇게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무유정법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고, 방법이 없다는 뜻도 아니에요. 시간과 공간, 즉 주어진 조건이 정해지면 그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서울 가는 방향은 어느 방향이라고 정할 수 없어요. 그러나 내가 인천에서 출발한다고 조건이 주어지면 ‘서울로 가는 방향은 동쪽이다’라고 정해집니다. 그러나 인천에서 갈 때 그 방향이 동쪽이라고 해서 서울 가는 방향이 항상 동쪽인 것은 아니에요. 누군가가 ‘수원에서 출발한다’라고 조건을 얘기하면 ‘아, 그럴 때는 북쪽이다’ 이렇게 됩니다.

이처럼 본래는 아무런 원칙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편리를 위해서 ‘이렇게 하자’ 하고 약속해서 정한 거예요. 정토회의 원칙들도 이러저러한 걸 같이 하자고 구성원들이 함께 정한 것입니다.

길을 건널 때 빨간 불에는 못 가고 파란 불에는 갈 수 있다는 원칙은 원래 없었어요. 아무렇게 다니다 보니까 교통사고가 자꾸 나서 그렇게 원칙을 정한 겁니다.

‘교차로에서는 한 쪽이 갈 때 다른 쪽은 안 가기로 하자. 안 가기로 할 때는 빨간 불로 표시를 하고, 가기로 할 때는 파란 불로 표시를 해서 함께 지키도록 하자.’

이렇게 우리가 정한 거예요. 정했으면 지켜야죠. 정해놓고 나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애초에 그런 원칙을 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럴 때 ‘왜 지켜야 하느냐!’ 이렇게 말하면 안 돼요. 물론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죠.

‘길에 차가 없던데요. 없으면 가도 되잖아요!’

네, 없으면 가도 돼요. 그런데 차가 정말로 없다면 가도 괜찮지만, 나는 못 봐서 차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차가 오는 경우라면 사고가 나잖아요. 그래서 차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일단 안 가고 대기해야 하는 거예요.

사고가 나서 막 숨이 넘어가는 사람을 데리고 병원에 5분 안에 가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빨간 신호등이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다친 사람이 죽겠죠. 그럴 때는 역주행을 할 수도 있고, 중앙선도 넘어갈 수 있고, 빨간 불에도 갈 수가 있는 거예요.

이럴 때 점검해야 할 것은 ‘정말로 그럴 만한 응급상황이냐’입니다. 내가 볼 때는 응급상황 같아서 이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니, 어떻게 역주행해서 갈 수 있느냐? 어떻게 빨간 불에 가느냐? 그거는 교통 원칙에 안 맞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는 거예요.

‘이런 일이 있어서 중앙선을 넘고 역주행을 했는데 교통 원칙에 위배된다고 문제 제기를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게 맞습니까?’

‘아, 저는 사람이 다쳤으니 급하다고 서둘렀는데, 이 정도는 응급상황이 아니었군요. 사고 나서 조금 다쳤다고 교통 규칙 위반이 다 허용되는 건 아니고 정말로 생명이 위독할 때만 되는 거군요. 이제 차이를 알겠습니다.’

이렇게 서로 대화해서 풀어가면 돼요. 그런데 질문자는 ‘정토회는 왜 이렇게 원칙이 많으냐?’, ‘왜 원칙을 지키느냐!’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고 벌써 짜증을 내고 있는 것 같아요. 일반인이 이렇게 반응한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이런 자세를 가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부모님 수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기에 제가 급한 마음에 이렇게 처리했는데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러면 간단한 문제예요. 그게 뭐 어려워요? 그러다가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안 하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너무 마음이 급해서 저도 모르게 했습니다. 다음에는 주의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예요. 이런 상황에서 ‘정토회는 왜 원칙에 얽매이느냐’ 이렇게 얘기하는 건 수행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런 것 좀 할 수도 있지!’ 이렇게 질문자가 따지니까 상대방도 질문자더러 좀 정신 차리라고 ‘학생이 다 떨어져도 좋으니까 원칙대로 하시오!’ 이렇게 말한 거예요. 제가 들어도 조금 과격한 표현이긴 합니다.

‘학생이 다 떨어져나가도 좋으니까 시킨 대로 하세요!’

팀장님이 그렇게 말했다면 질문자가 너무 임의대로 처리하니까 원칙을 좀 강조하려다 보니 나온 표현이 아닐까 싶어요. 일단 규칙에서 어긋난 것은 사실이니까, 이럴 때 수행자는 일단 이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아이고,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해명을 해야 해요.

‘저는 이런 사정이라기에 안타까워서 이렇게 처리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원칙을 어겼네요. 다음부터 유의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하게 넘어갈 일인데, 수행자가 이런 일에 자꾸 시비를 하면 수행을 아무리 한들 끝이 나지 않아요. 늘 시비로 인생을 살다가 마치게 됩니다.”

다음은 비슷한 질문이지만 조금은 성격이 다른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원칙을 강조하면서 정작 본인은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상대가 불편하다는 질문과 스님의 답변입니다.

원칙을 강조하면서 자신은 지키지 못하는 상대가 불편합니다

“법당 활동을 하며 저보다 오래됐다는 이유로 이건 원칙에서 벗어난다고 원칙, 원칙 하면서 제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상대를 보며 답답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이후 하루도 안 되어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상대를 보며 ‘왜 저러나’ 싶어 불편합니다. 어떻게 상대를 온전히 인정할 수 있을까요?”

“원래 원칙을 못 지키는 사람이 원칙을 많이 강조합니다.” (모두 웃음)

한 줄 답변에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스님은 왜 그런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이 본인은 원칙을 안 지킬 수도 있어요. 내가 못 지키니까 그런 콤플렉스 때문에 남에게는 오히려 강조하는 경우도 있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강조는 했는데 정작 본인도 깜빡 하고 못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님도 법문하는 내용을 늘 100퍼센트 다 지키지는 못해요. 질문자가 저와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 ‘스님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못 지키네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 자체는 바람직하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얘기는 해야 하는 거예요. 물론 저도 말해놓고 못 지키는 것이 간혹 있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법률을 지켜라’ 이 말 자체는 좋은 말이잖아요. 그런데 ‘법률을 지켜라’ 이렇게 말해놓고 또 못 지키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 사회가 다 그래요. 그렇다고 해도 그걸 마냥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어요. 비록 내가 못 지키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지키는 건 좋은 일이니까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못 지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상대의 모순되어 보이는 언행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며칠 전에 공동체에서 마음나누기를 하는데, 어떤 행자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법사님들과 같이 공양간에서 요리를 했는데, 법사가 된 분들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러면서 입씨름을 하는 모습을 보고 분별이 났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누기를 다 들은 뒤에 ‘그건 뒷말을 한 것에 해당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공양간에서 음식 준비를 하다가 ‘이래야지’, ‘저래야지’, ‘아니야, 이렇게 할래’ 이러는 건 법사 아니라 스님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뭐든지 자기가 잘 아는 분야나 일에 대해서는 이런 태도가 나오게 마련이에요. 우리는 수행이 잘 되어서 시비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시비를 안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기가 조금만 알면 곧장 주장을 내세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것을 탁 내려놓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아는 걸 내려놓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게 맞는 것 같더라도 상대가 다르게 한다면 내가 아는 것을 탁 내려놓고 ‘그래, 그렇게 한 번 해보자’ 이러기가 사실은 잘 안 돼요. 그래서 기술자는 남의 말을 잘 안 듣기 쉬워요. 자기가 그 분야에 전문이니까요.

그러니 행자님이 이야기한 상황은 그분들이 법사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예요. 다들 요리를 한 가닥씩 하다 보니 자기 요리 방식대로 이야기를 한 것일 뿐인데, 그걸 ‘법사가 저래서야 되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안 돼요. 저는 질문자 같은 사람과는 공동체에서 같이 살기가 굉장히 겁나요. 맨날 옆에서 ‘스님이 그렇게 행동해서 되나요!’ 이럴 거잖아요. (모두 웃음)

스님이 폭력을 행사했다든지, 강도나 절도를 했다든지, 성추행을 했다든지, 사기를 쳤다든지, 욕설을 했다든지, 술을 먹고 취했다면, ‘아니, 계율을 어겨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대화하다가 자기주장을 조금 했다고 ‘스님답지 못하게 자기를 고집하네요!’ 이렇게 비난하면 어떻게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겠어요?

물론 말한 것을 다 실행하면 좋죠.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이상대로 되지 않아요. 나도 내가 바라는 만큼 안 되고, 남도 그렇게 되기 어려워요. 우리가 원칙을 이야기하는 건 좋은 일이에요. 원칙 없이 사는 것보다는 원칙이 있는 편이 좋잖아요. 원칙을 얘기하되 못 지키는 것은 못 지키는 거예요. 이렇게 바라보면 마음의 답답함이 좀 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가능하면 원칙을 지키려고 하되, 남이 원칙을 못 지키는 건 좀 포용해 주어라.’

이런 마음으로 살면 함께 살기가 쉬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자기가 못 지키는 건 그냥 봐줘버리고, 남이 못 지키는 건 시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못 보는구나’

이 말씀은 남을 비판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만은 아니에요. 인간 대다수가 다 이런 수준이라는 얘기입니다. 나나 너나 다 그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질문자도 여기서 오십 보 백 보예요. 그러니 원칙을 강조하고 원칙을 못 지키는 사람들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훨씬 더 매끄러워집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에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19 감염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분별심을 내는 걸까요?
  • 수행과 함께 운동, 치료를 병행하며 괴로움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씩 헛헛하고 심하게 불안해요. 어떻게 관점을 돌이켜 정신을 차려야 할까요?
  • 남편이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이 황망함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요?
  • 소수 활동가에게 집중된 일을 나누고 회원들의 참여를 높이려고 조직을 개편했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일이 더 많아진 느낌입니다.
  • 최근 정토회에 남성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남성, 여성 중 이성에게 과하게 집적거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요?
  • 주간반과 저녁반이 통합되어 모둠을 편성하니 모둠장이 주간반과 저녁반을 다 챙겨야 합니다. 전보다 일이 많아져서 소임을 내려놓고 싶다는 분이 있을 정도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에너지가 방전되어 법당에 나오지도 안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할수록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을 위해 한 마디 해주세요.

답변을 모두 마치고 나니 80분이 경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오늘 법문은 수행자를 위한 법문이니 오직 자기에게만 적용하지 남에게 적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법회를 마쳤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법문을 잘 들으셨습니까? 오늘 법문은 수행자들에게 한 법문이에요. 수행자라면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법문을 일반 사람들에게 적용해서 ‘우리 스님이 얘기하는데, 너처럼 그럴 땐 이래야 한다더라’ 이러면 안 돼요. 그러면 상대에게 비수가 됩니다. 오늘 제 법문은 딱 자기한테만 적용해야 합니다. 이걸 가지고 ‘스님이 이렇게 말하더라!’ 하고 남에게 적용하면 안 돼요.

수행은 오로지 나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제가 수행법회에서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을 드리기 때문에 가능하면 수행자들만 이 법문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부작용이 적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부처님오신날에 다시 뵙겠습니다.”

생방송 카메라가 꺼지고, 스님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이동해 강당으로 향했습니다.

강당에서는 곧바로 두북특별위원회 회의가 열렸습니다.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이어지는 일정입니다.

“오늘은 어떤 분과에서 발표가 준비되었나요?”

“개원기념법회분과에서 준비한 내용을 발표하겠습니다.”

내년 3월에 본부 개원 기념법회를 어떻게 준비할지 수차례 논의하고 연구한 내용을 자광 법사님이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법사님들이 다양한 의견을 쏟아내었고, 마지막으로 스님도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서울에서 손님들이 찾아와서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만 합시다.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끝마칠 무렵, 서울에서 북한 연구 전문가들이 스님을 뵈러 두북 수련원을 찾아왔습니다. 서둘러 운동장으로 나간 스님은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손님들과 함께 두북 수련원을 비롯해 스님이 지금 농사를 짓고 있는 곳곳을 함께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이 직접 안내를 했습니다.

“여기는 쌈채소를 키우고 있어요. 배추, 열무, 브로컬리, 토마토, 가지, 오이, 다양한 작물을 키우고 있어요.”

어제 새로 지은 비닐하우스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여기는 새로 지은 비닐하우스예요. 처음에는 노지 재배를 하려고 작물을 다 심어 놓았는데, 군에서 뒤늦게 비닐하우스 짓는 것이 허가 나는 바람에 작물을 먼저 심고 나서 그 위에 비닐하우스를 지었어요.

행자님들이 농사를 처음 짓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습니다. 논을 밭으로 바꾼 땅인데, 흙을 사와서 1차로 부으라고 했더니, 흙을 너무 많이 부은 겁니다. 그래서 여기는 생땅이에요. 쟁기로 땅을 갈아도 밑에 기름진 땅이 안 닿아요.” (모두 웃음)

다음은 엊그제 모내기를 마친 논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뜬 모가 많지 않네요.”

물이 찰랑찰랑하는 논 위로 푸른 하늘과 산이 투명하게 비쳤습니다. 한 분이 농장의 규모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스님, 코로나 때문에 몇 달 안 보이는 사이에 통일 문제에서 농사꾼으로 업종을 변경하셨네요. 농장 규모가 생각보다 커요.” (웃음)

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복안 저수지로 향했습니다.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아 가메들 계곡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이 계곡을 올라가면 저 위에 여러분이 배달 받는 쌈채소를 재배하는 농장이 있습니다. 원래는 경주 남산을 갈까 생각했는데, 쌈채소를 배달 받으시니까 쌈채소가 재배되는 현장을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이리로 왔어요.”

가메들 계곡 위에 탑곡 농장까지 둘러본 후 산을 내려왔습니다.

산을 내려와 저녁을 먹은 후 밤늦게까지 워크샵을 진행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손님들과 경주 남산을 둘러본 후 오후 내내 온라인 정토회를 주제로 공청회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2

0/200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0-10-31 23:01:34

정명

남의 허물을 감싸주는 마음을 내겠습니다.

2020-06-07 17:51:02

정지나

나에게로 시작되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20-06-04 22: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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