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5.12. 농사일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괴로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농사일을 하고 밀린 업무를 보았습니다.

기도와 공양을 마치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오늘 울력 일감은 ‘고추에 천연 벌레퇴치제 치기, 소똥 밭으로 옮기기, 토마토 곁순 따주기, 작물 수확하기’입니다.

고추에는 계란과 콩기름을 섞어 만든 천연 벌레퇴치제를 뿌려주었습니다.

작은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서 어느새 팔뚝보다 굵은 호박으로 자랐습니다.

스님은 소똥을 옮기는 포클레인 옆에서 텃밭에 뿌릴 거름을 한 포대 담았습니다.


그리고 긴 줄을 묶은 호미, 괭이, 레기, 낫, 톱을 챙겨 논 위에 있는 저수지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숙원사업을 해결해야겠어요.”

올라가다가 논 가장자리에 물이 고여 있어 물길을 내주었습니다.

물길을 세 군데 내주고 저수지로 올라갔습니다.

스님의 숙원사업은 저수지에 빠져있는 나무를 건져내는 일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나무에서도 새 잎이 나고 있었습니다. 나무 옆으로 이끼가 가득했습니다. 저수지의 물을 밭에도 주고, 비닐하우스에도 주고 있기 때문에 스님은 오래전부터 물에 빠진 나무와 이끼가 눈에 밟혔나 봅니다.

어디에 쓸지 궁금했던 줄로 묶은 호미는 나무를 건져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줄을 휙 던져 나뭇가지에 호미가 걸리면 줄을 잡아당겨 나무를 끌어냈습니다.

스님은 어느 정도 나무를 건져내다가 연못 기슭에 자란 나무 위로 올라가 나무를 건져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지마다 잎이 자란데다가 물을 먹어서 나무가 아주 무거웠습니다. 스님은 기합소리를 내며 나무를 하나씩 건졌습니다.

건진 나무는 저수지 위쪽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땀은 비 오듯 흘렀지만, 놀이를 하듯 재밌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 나무를 다 건져 올렸습니다.

“오늘 숙원사업을 해결했네요. 저수지 한가운데 남아있는 이끼는 작은 고무 배를 하나 만들어서 타고 가서 다 건져야겠어요.”(웃음)

나무를 다 건져낸 후에도 스님은 저수지 주변을 돌며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사용한 도구를 씻어서 제 자리에 두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스님은 소똥 거름을 말리고 원고 교정 등 밀린 업무를 하며 오후를 보냈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스님과 함께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법사님들은 분과별로 회의를 하거나 연구를 하고 두북 공동체 행자들은 포살법회와 행복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저녁 예불 후에는 마음 나누기와 농사회의를 하며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했습니다.

나누기를 마치고 스님은 인쇄할 때 사용하라며 이면지를 한 뭉치 주었습니다.

내일은 농사일을 하고 생방송으로 수행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5월 6일 수행법회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나 소개해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괴로워요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올라옵니다. 어떻게 하면 적당하게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요?”

“잘 하고 싶으면 잘하면 돼요. 잘하고 싶은 마음 자체는 나쁜 게 아니에요. 잘하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지나치면 결과에 실망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100의 노력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20밖에 노력을 안 해 놓고 100의 결과를 바라면, 바라는 결과가 안 일어나니까 결국 실망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실망과 원망이 생기는 이유

내가 노력한 것보다 잘 하고 싶은 것이 욕심입니다. 내가 농사를 잘 짓고 싶다는 마음 자체는 욕심이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지 연구해서 노력을 하면 돼요. 이번에는 이 정도밖에 안 됐다면 현재 내 능력이 이것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잘하고 싶은 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잘하고 싶다면 그만한 노력을 하면 되지, 노력은 안 하고 결과만을 바라기 때문에 실망하고 원망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축대를 쌓는다고 합시다. 누구나 축대를 잘 쌓고 싶지, 못 쌓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잘 쌓고 싶어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쌓았는데 돌아서니 무너져버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실망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무너진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물 반죽을 너무 묽게 했다든지, 쌓을 때 돌이 튀어나왔다든지, 결국은 물리적으로 보면 어떤 역학관계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럴 때는 다시 해체해서 쌓으면 돼요.

그럼 앞에 노력한 것은 쓸데없는 짓이냐. 아닙니다. 내가 기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니까 다음에 쌓을 때는 한 번 더 그걸 고려해서 쌓으면 돼요. 그런데 또 무너졌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솥을 아홉 번째 걸 때 깨달은 구지선사 이야기

옛날에 도를 구하러 한 스승을 찾아간 수행자가 있었어요. 스승은 ‘네까짓 게 무슨 도를 구한다고 그래’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수행자는 자기는 ‘죽어라’ 그러면 죽을 수도 있는 각오로 수행할 테니 지도해달라고 애원을 했어요. 그러자 스승이 ‘그래, 솥을 걸어라’ 이렇게 말했어요. 즉, 부엌을 만들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제자가 솥을 자기 나름대로 잘 만들어 놓았는데, 스승이 보고 ‘뭐 이렇게 만들었어?’ 하고 발로 팍 밟아버렸어요. 이때는 아직 스승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이 스승 밑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자기 욕구가 있으니깐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쌓았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만들 때도 잘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로 쌓아보니깐 앞에 보다 확실히 잘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스스로 ‘이래서 문제가 있다고 하셨구나’ 하고 반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들어서 스승에게 보여주니 스승이 또 솥을 밟아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속에서 조금 불만이 생겼겠죠. 그러나 그 불만보다는 여기서 내가 어쨌든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강하니까 ‘알겠습니다’ 하고 또 새로 쌓았어요. 또 정성을 들여 쌓으니깐 확실히 아까보다 잘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러셨구나. 이번에는 합격이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스승이 또 밟아버렸어요. 그러니 화가 푹 올라왔습니다. 이때는 화가 푹 올라와도 참았습니다. 푹 올라오는 감정을 성질대로 표현하면 스승 밑에서 배울 수가 없으니까 참고 또 다시 쌓았습니다. 배우겠다는 이익이 손실보다 더 크기 때문에 참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스승이 아홉 번째로 솥을 밟았을 때는 더 이상 참지를 못했습니다. 못 참았다는 것은 현재의 불만이 배우고 싶은 욕구를 넘어서 버린 겁니다. ‘여기 아니면 공부할 데가 없나?’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이게 뭐하는 짓이냐?’ 하면서 확 뒤집어지려는 찰나에 이 제자가 깨달았습니다. 스승이 죽으라고 시키면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공부를 하겠다고 했으면서, 고작 솥을 아홉 번 밟는다고 성질이 확 나서 뒤집어지는 그때 자기를 본 겁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수행은 이렇게 자기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것을 탁 보는 순간 찬물을 끼얹듯이 마음이 가라앉는 겁니다. 그때 스승이 ‘이제 공부할 만하다’라고 하면서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쌓았다가 다시 쌓으라니 쌓고, 무너지면 또 쌓고, 어차피 무너트릴 건데 하는 식이면, 그건 마음이 게으른 것입니다. 반대로, 집중을 해서 애를 썼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이 확 뒤집어집니다. 그런데 수행은 집중해서 하되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찾아갔을 때 맹세를 했잖아요. 처음에 스승이 안 받아 준다고 하니까 ‘제가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하고 약속까지 했는데, 솥을 아홉 번 밟는 순간 마음이 뒤집어진 겁니다. 솥을 아홉 번 밟았다고 해서 그게 죽을 일은 아니잖아요.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 이렇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 같지만 건드리면 탁 에고가 작동합니다. 그걸 딱 봐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보입니다. 감정이 확 일어날수록 그걸 잘 지켜봐야 되는데, 감정이 확 일어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집니다.

아무리 스승이니 제자니 법사니 해도, 이런 상황이 한 번 거치고, 두 번 거치고, 세 번 거치고,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집니다. 그때는 스승도 없고,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이, 감정이 그대로 표출되어 버립니다. 그런 감정들이 우리 마음속에 다 묵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상황에 부딪히면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요즘은 아무리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 하더라도 그런 부분까지 건드리면 같이 못 삽니다. 그것까지 건드리면 다 집에 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 개선을 해나가려고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예요. 옛날에는 제자가 찾아오면 오자마자 그것부터 건드려서 마음이 확 뒤집어지게 하고 그랬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괜찮아요. 그런데 잘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면 실망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자꾸 실망하고 원망하니까 ‘잘 하고 싶은 마음을 버려라’,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버려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리고 내가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잘 봐주나요? 잘 보이고 싶은 것은 내 마음이고, 잘 봐주는 것은 상대의 마음이에요. 그것은 남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하겠다는 겁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나 상대가 잘 봐주지 않아도 ‘그건 그 사람의 마음이다’ 이렇게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내가 잘하고 싶으면 결과도 잘 되어야 한다’, ‘내가 잘 보이고 싶으면 상대도 잘 봐줘야 한다’ 이렇게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원망이 생기고 실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하고 싶다’, ‘잘 보이고 싶다’ 하는 마음을 버리라고 말하는 겁니다.”

전체댓글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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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화

스님 항상 감사합니다()()()

2020-05-23 21:05:58

원 미연

아주 간단한 듯 싶은 수행자가 갈 길 입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집착과 아상을 버리고 내가 한다는 그 생각마저 버리는 것을 잊지 말고 늘 알아차리겠습니다.

2020-05-19 20:05:45

청정화

'구지 선사'이야기에서 내가 잘하고 싶으면 결과도 그러해야 한다.내가 잘 보이고 싶으면 상대도 그러해야 한다는.
전 언제나 인간 관계에서 모든 일에서 이런 등가 법칙을 내었습니다.그것이 당연하다고 제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는 말입니다.잘 봐주는 것은 그의 맘입니다.

2020-05-17 01: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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