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5.11. 농사일,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강의, 실무자 공청회
“제가 지도법사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강의와 실무자 공청회가 두북 정토수련원에서 열렸습니다.

5월이 되자 두북 수련원에는 곳곳에 장미가 피었습니다. 햇살을 머금은 장미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해가 뜨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스님이 농사일을 시작하는 시간도 함께 빨라집니다. 이슬이 맺혀있는 아침 일찍 상추와 고수를 수확했습니다.

주말에 서울 공동체에서 실무자들이 내려와서 농사일을 했는데, 오늘 모두 서울로 올라갑니다. 스님은 실무자들에게 상추와 고수를 주기 위해 비지땀을 흘렸습니다.


아침에 수확한 상추가 두 박스를 가득 채웠습니다.

기온이 점점 올라가면서 고수는 이제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상추와 고수를 수확한 후 산윗밭과 산아랫밭으로 가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 실무자들을 격려하고 둘러보았습니다. 산윗밭에는 그저께 만들어 놓은 입구 대문이 양쪽으로 팔을 벌리고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얼마 전 고구마순 보시가 많이 들어와서 산윗밭에도 한 고랑 가득 심었습니다.

산아랫밭도 둘러보았습니다. 실무자들이 한 고랑씩 맡아서 고구마순을 심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처음 짓는 생땅이어서 작물이 얼마나 잘 자랄지는 모르지만, 모쪼록 무럭무럭 자라기를 기원하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두북 수련원에서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생방송으로 했습니다. 스님은 작업복을 벗고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실천적 불교사상 제5강을 강의하는 날입니다. 강의 주제는 ‘불교의 가치관’입니다. 먼저 스님은 1강부터 4강까지의 강의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서 설명한 후 오늘의 강의 주제로 들어갔습니다.

“윤리란 인간이 함께 살아가면서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규정을 뜻합니다. 사람이 혼자 살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지만, 여럿이 함께 살 때는 자신의 행위에 규정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혼자일 때 밥이 한 그릇 있다면 내가 모두 먹어도 되지만, 둘이 있을 때 밥이 한 그릇이라면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내가 혼자 일 때 한 그릇을 먹고 지냈다고 해서 둘일 때도 내가 한 그릇을 다 먹어버리면 상대방은 굶게 됩니다. 상대 입장에서도 밥을 한 그릇 먹고 싶기 때문에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어 밥 한 그릇 때문에 싸워서 죽거나 다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윤리란 내가 먹고 싶은 양은 한 그릇이지만 상대와 반반씩 나누어 먹는 것이 더 좋겠다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계급 차별, 여성차별이 생기게 된 이유

이렇게 윤리라는 가치는 공공의 이익에 기초에서 정해지게 됩니다. 개인의 삶이 공동체에 모두 공개가 되어 살았던 원시 자연 상태에서는 공익적 가치만 형성되고 사익적 가치는 형성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사익을 추구하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므로 모든 구성원들로부터 제재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사익을 추구하게 되면 공동체는 깨지게 됩니다.

그런데 모임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 이 모임과 저 모임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모임 안에서는 삶이 모두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으니까 공익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지만, 이 모임과 저 모임 사이에서는 상대편의 어떤 물건을 훔쳐오면 그 모임 구성원 모두에게는 이익이 됩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에서는 공익이지만, 두 공동체를 합해서 보면 한쪽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한쪽이 손해 보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모임이 커지는 과정에서 생긴 현상입니다. 세력이 큰 집단이 약한 집단의 물건을 뺏고 사람을 잡아와서 강제로 일을 시키면서 계급이 발생하게 된 겁니다. 계급이 발생하면서 하나의 집단 안에서도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피지배 계급이 손해를 보는 것이 빈번해지게 되었고, 지배계급은 이것을 윤리라는 가치로 규정해서 피지배계급에게 주입을 시켰습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도 전체의 이익이 아닌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다수가 희생되는 윤리가 형성된 거죠. 종교도 대부분 이런 지배 질서에 편승을 했기 때문에 인류 역사 전체에서 보면 지배자의 이익을 유지시키는데 종교가 이용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차별을 타파하는 가르침,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그러나 부처님은 세상의 실제 모습을 간파하신 분이기 때문에 계급 차별과 여성 차별 등 모든 차별은 허구임을 자각하셨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가 열등한 것이 아니다. 계급적으로 브라만이 우월하고 수드라가 열등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차별이 생긴 이유는 우리의 의식 속에 까르마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까르마는 타고난 것이 아닌 환경에 의해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까르마는 소멸시킬 수가 있다. 까르마는 본질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무아(無我)’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무상(無常)’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무상과 무아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들의 고통이나 차별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며, 하느님이 점지해 준 것도 아니며, 사주팔자로 주어진 것도 아니며, 전생에 죄를 지어서 물려받은 것도 아니며, 환경에 의해 형성되어진 것임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형성되어진 이런 차별을 합리화하는 윤리는 허구이며 우리가 바꿔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공익이라고 하는 모든 이의 입장에 서서 진실을 말했습니다. 때론 사람을 넘어서서 자연 생명인 생태 윤리까지 포함해서 진리를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함께 행복한 길로 나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을 새로운 윤리로 지정을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의 가장 기본 계율인 ‘오계(五戒)’입니다.

함께 행복해지는 길, 오계(五戒)

오계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갈 때 상대를 나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즉, 나만 생각하지 않고 전체를 생각하는 겁니다.

첫째,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 즉, 죽이거나 때려서는 안 된다.
둘째, 남에게 손해 끼쳐서는 안 된다. 즉,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아서는 안 된다.
셋째,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즉,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해서는 안 된다.
넷째, 말로도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즉, 거짓말을 하거나 욕설을 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술을 먹고 취해서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즉, 술 먹고 취하지 말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행자는 최소한 남을 해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오계만 지켜도 굉장히 모범적인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계만 지켜도 학교 폭력이 근절되는 사회가 됩니다. 청소년들이 학교 폭력을 어디에서 배웠겠어요. 부모나 기성세대로부터 배운 겁니다.

오늘부터 이 ‘오계’를 꼭 명심하셔서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실천을 해봅니다. 이번 일주일 동안의 실천 과제는 오계 지키기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친구에게, 직장 동료에게, 이 오계를 꼭 지키는 실천을 해봅니다.”

오계 지키기를 일주일 동안 적극 실천해보기로 하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불교대학 학생들은 모둠별로 소통방에서 오늘 강의를 들은 소감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생방송이 끝나자마자 스님은 복도를 통해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강당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실무자들이 공동체 법사단의 발표를 들으며 정토회의 미래를 논의하는 공청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법사단의 발표가 끝나고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아침에 밭에서 수확해 온 상추와 각종 쌈채소가 밥상에 올라왔습니다. 점심시간을 짧게 가진 후 오후 1시부터는 스님과 함께 공청회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실무자들은 공동체 법사단이 4월 한 달 동안 연구한 결과에 대해 발표를 듣고 나서 다양한 의문점을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정토회의 발전을 위한 건의도 많이 나왔습니다. 중간에 쉬는 시간 없이 3시간 동안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그중에 한 행자님은 정토회가 대중들을 위한 교육을 많이 진행하는데, 출가공동체 대중을 위한 교육도 해주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명쾌하게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공동체 대중을 위한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정토회 10차 천일결사 계획을 보면 대중 교육에 대한 내용이 많은데, 저희처럼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에 들어와서 생태적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풀어지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공동체에서 살다 보니 더 실천이 안 되는 것들도 있는 것 같아요. 공동체 대중들이 일상에서 업무나 환경실천 등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동기부여 차원에서 재교육이 많이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도법사로서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수행의 관점을 딱 잡으십시오.’

명상을 지도할 때 외국인들에게 제일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어요. 명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명상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 ‘방금 전에는 명상이 잘 되었는데, 왜 지금은 안 될까’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금에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 끄달리는 것입니다. 이런 욕구가 바로 고뇌의 근본 뿌리입니다. 그래서 욕구를 놓아버리라고 말하는 거예요.

수행도 욕구로 하게 되면

우리는 수행도 늘 욕구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러면 건강해질까’, ‘저러면 돈이 벌릴까’, ‘이러면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저러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이렇게 궁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명상을 할 때에도 ‘이러면 조금 편할까’, ‘이러면 다리가 조금 덜 아플까’ 하면서 내내 이런 궁리만 하잖아요. 이런 모든 번뇌의 뿌리는 욕구입니다.

명상은 간단합니다. 앉아서 코끝에서 느껴지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숨이 길면 긴 줄 알고, 숨이 짧으면 짧은 줄 알고, 숨이 거칠면 거친 줄 알고, 딴 생각하다 호흡을 놓치면 ‘놓쳤구나’ 하고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예요. ‘이러면 좋을까’, ‘저러면 좋을까’ 하는 생각 자체를 놓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하는 질문들은 다 그런 질문들이에요.

여러분들은 출가한 스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출가한 스님들은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옷은 주워 입었습니다. 잠은 나무 밑에서 잤습니다. 가족 관계는 유지했어요, 유지하지 않았어요?

“안 했어요”

“세상의 지위를 얻으려고 했어요, 얻지 않았어요?”

“얻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처님의 출가 정신을 여러분들도 가지면, 여기서 뭘 먹든, 어떤 옷을 입든, 어디에 자든 저절로 상관을 안 하게 됩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것보다 잘 먹어요, 못 먹어요?”

“잘 먹어요.”

“남들이 안 입는 아무 옷이나 주워 입어도 부처님 당시에 분소의(糞掃衣)보다는 낫잖아요. 복도에 침낭을 깔아놓고 자도 나무 밑에서 자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래도 여러분들은 명절 때 집에도 가잖아요. 그런데 무슨 괴로움이 있을 수 있겠어요.

번뇌가 저절로 소멸되게 하는 방법

본인이 출가수행자라는 자기 결단이 없다 보니까 늘 이럴까 저럴까 하는 번뇌가 생기는 겁니다.

‘나는 출가 수행자이다’

이렇게 마음을 딱 가져버리면 괴로워 할래야 괴로워할 수가 없게 됩니다. 명절에 집에 보내준다고 하면 ‘출가자가 이렇게 집에도 갈 수 있다니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다녀오면 돼요. 얻어먹지도 않을뿐더러 식은 밥도 아니고 따뜻한 밥을 늘 먹잖아요. 그러니 밥을 먹을 때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먹으면 돼요. 잠도 나무 밑에서 안 자고 방 안에서 편하게 잘 수 있잖아요. 그러니 잘 때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자면 돼요.

농사일은 운동 삼아하면 됩니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뭐해요. 일하는 게 낫죠. 명상해보니까 명상이 나아요, 일하는 게 나아요?”

“일하는 거요.” (모두 웃음)

“저도 매일 명상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명상이 좋다는 게 아니라 ‘일할 수 있는 내 삶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겁니다. 앉아 있으면 뭐해요. 밭에 나가서 일하는 게 낫지요. 저는 명상하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명상보다 농사일이 더 좋아요. 사람들이 명상을 원하니까 명상 지도를 하는 거예요. (모두 웃음)

명상을 하기 위해 앉아서 코끝에 집중을 하는 것이나, 밭에서 고추 모종을 심으면서 손끝을 보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어요. 똑같잖아요. 밭에서 그렇게 안 되니까 앉아서 연습을 하는 거죠. 그런데 무슨 재교육이 필요해요? (모두 웃음)

수행이라는 것은 관점을 딱 잡아버리면 교육이니 뭐니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져버려요.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안 될 때가 있어요. 잠을 자다가 강도한테 쫓기는 꿈을 꾸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강도가 쫓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눈을 딱 뜨고 ‘어, 꿈이네!’ 하면 끝입니다. 그것처럼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과거의 까르마 때문입니다.

어, 꿈이네!

나도 모르게 놓쳐서 음식 투정을 했다면, 이것은 강도한테 쫓기는 꿈을 꾼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툴툴 댔더라도 ‘내가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렸다면 거기서 끝나야 합니다. ‘왜 나는 잘 때마다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는 걸까?’ 하고 연구하는 것은 학자들이나 꿈 해몽가, 또는 정신 분석가들이 하는 일입니다.

수행자는 학자와 다릅니다. 학자들은 악몽을 꾸는 이유를 분석해서 연구를 하지만, 수행자는 눈을 딱 뜨고 ‘헛거네’ 하면 거기서 끝입니다. ‘꿈이네’ 이 한마디면 끝이라니까요. 헛것을 진짜인 줄 착각하고 괴로워했는데, 헛것인 줄 알았으면 거기서 끝이지 헛것을 분석해서 뭐해요.

호흡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흡을 놓쳤으면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되지 그걸 가지고 왜 ‘될까’, ‘안 될까’ 이러고 있느냔 말이에요. 안 되니까 연습을 계속하는 것이지, 잘 되면 왜 연습을 하겠어요. 어제 법사 교육 입재식을 했는데, 상당수가 자신이 법사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부담스럽다’, ‘고맙다’ 이렇게 말을 하길래 제가 웃으면서 그랬어요.

‘완전히 과대망상증입니다.’ (모두 웃음)

법사가 될 자격이 안 되는 건 저도 벌써 알고 있어요. 자격이 되면 바로 법사 수계를 해버리지 왜 교육을 시키겠어요. 자격이 안 되니까 교육을 시키는 거죠. 또 제가 교육을 해도 안 될 사람을 왜 교육을 시키겠어요. 지금은 비록 자격이 안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교육을 시키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교육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가능성이 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잘 안 되는 것을 극복하는 1년의 시간을 가지면 되는 겁니다.

원인을 찾지 말고 벌떡 일어나기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이 하는 이런 말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꿈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 보여요.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잠을 아직 덜 깼기 때문에 아직도 꿈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꿈에서 완전히 깼으면 꿈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관점을 딱 잡아버리면 괴로울 일이 없어요. 관점을 자꾸 놓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괴로움이 생기면 ‘놓쳤구나’ 하고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이런 내용을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까. 팔만대장경을 다 뒤져봐야 결국 이 이야기예요.

첫째, 수행적 관점을 딱 잡으세요.

둘째, 그러나 일상에서는 놓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놓치면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면 돼요. ‘왜 넘어졌을까’ 그런 연구는 할 필요가 없어요.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면 돼요. 아침 5시에 알람이 울리는데도 눈이 안 떠진다고 해서 ‘왜 눈이 안 떠질까?’ 하고 연구하고 있습니까. 그냥 벌떡 일어나면 되죠.

만약 몸이 아파서 안 일어나지는 것이라면 일어날 생각을 안 해야 해요. 몸이 아프면 ‘저는 몸이 너무 아파서 자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냥 자면 되잖아요. 그런데도 공동체 대중을 위한 재교육이 필요해요?” (모두 웃음)

“수행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정토회의 사상이나 역사에 대한 재교육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토회에서 일하면서 안타까웠던 게 정토회의 사상이나 역사를 대중들보다 더 모른 채 일에 파묻혀 산다는 겁니다. 예전에 도반들과 스님의 하루를 매일 읽고 나누기를 하니까 내 생활을 돌아보고 정토회의 사상을 체화할 수 있어서 좋았거든요.”

“지금 공동체 법사단에서 정토대전을 만들고 있어요. 정 대전이 곧 마련되니까 그걸 읽으면 됩니다. (모두 웃음)

정토회의 사상과 역사에 대한 교육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런 교육은 연수원에서 무변심 법사님이 마련할 겁니다. 지금 정토회의 중요한 과제로 대중 교육이 강조되는 이유는 그동안 정회원을 만들기만 했지 정회원을 재교육시키는 것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서원행자도 만들기만 했지 재교육을 거의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 법사단에서는 이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촘촘하게 짜고 있어요.”

웃음이 쏟아지는 가운데 수행적 관점이 무엇인지도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뒤돌아서면 다시 관점을 놓치게 되지만, 그래도 오늘은 스님을 만나 다시 한번 근본 관점을 명확하게 세워 보았습니다.

다들 밝아진 얼굴로 사홍서원을 하며 모임을 마쳤습니다.

공동체 대중들은 서울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겨 바쁘게 차량에 탑승했습니다. 두북 농사팀 행자님들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했습니다.

“다음에 또 봐요. 두북에 자주 내려오세요.”

공동체 대중과의 모임이 끝나고 스님은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주말에 행사도 많았고, 3일 동안 연이어 아침저녁으로 강의를 하다 보니 피로가 쌓였습니다. 저녁에는 원고 교정을 본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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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

2020-06-22 11:42:24

장성희

수행적 관점을 놓치지않기. 나는 그 전에
수행적 관점을 갖기부터 시작해야하는데 그 마음먹기도
쉬운일이 아니다. 욕심과 착을 놓아야하는데
아직 많이 모자라고, 갈등하는 중생이다보니 멀었다.
시작이 반이다. 시작을 해볼까.......

2020-05-28 03:56:51

전정미

스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수행 정진하겠습니다.

2020-05-18 12: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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