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5.2 토요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소똥 담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안녕하세요. 오늘은 천일결사 기도를 전 세계로 생방송하는 날입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스님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했습니다.

이번 주부터 매주 토요일 새벽 5시 아침 기도를 전 세계의 천일결사자들이 생방송으로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카메라를 향해 서서 새벽에 생방송에 접속한 정토행자들에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지금 두북 수련원에 있습니다. 공동체 법사단과 함께 정토회의 미래에 대해서 여러 가지 구상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예불은 유수 스님이 집전해 주시고, 천일결사 기도는 무변심 법사님이 집전해 주시겠습니다.

방 안에 기도할 준비를 다 마치셨습니까?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방석을 놓은 후 그 앞에 핸드폰 화면이 보이도록 놓아 보십시오. 삼배를 한 후에 아침 정진을 할 마음의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준비가 되셨으면 기도를 시작하겠습니다.”

스님이 인사말을 하는 사이 35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예불을 하는 유수 스님의 목소리가 생방송 주소줄을 타고 전 세계로 울려 퍼졌습니다.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그리고 반야심경, 해탈주, 삼귀의, 수행문, 참회문, 108배 수행이 이어졌습니다.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잘 살펴보면
다 내 마음이 일으킨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괴로움과 얽매임이 밖으로부터 오는 줄 착각하고...”

스님이 정진하는 뒷모습이 생방송 화면으로 나가고, 3500여 명의 정토행자들은 스님과 함께 108배를 했습니다.

각자 방 안에서 기도를 했지만,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모두가 연결되니 마치 지구 위에서 함께 기도하는 일체감이 느껴졌습니다.

천일결사 정진을 다 마치고 나서 스님은 법상에 앉아 20분 정도 함께 기도한 정토행자들을 위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수행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저희 정토행자들은 매일 아침 눈 뜨고 일어나자마자 1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해서 정진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지난주 수행 법회에서 어느 분이 ‘보시와 봉사는 즐겁게 할 수 있는데,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수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수행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수행을 하나의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수행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 관점을 지니기 때문에 ‘수행을 잘한다’, ‘수행을 못한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수행을 잘한다’
‘수행을 못한다’
‘수행이 안 된다’
‘수행이 힘들다’
‘수행이 어렵다’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수행을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일을 잘한다’
‘일을 못한다’
‘일이 안 된다’
‘일이 힘들다’
‘일이 어렵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절하는 것을 일로 삼고, 명상을 일로 삼고, 염불을 일로 삼고, 모든 것을 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 ‘된다’, ‘안 된다’, ‘잘한다’, ‘못한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수행은 그런 말들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고,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는 괴로워집니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미워지고, 원망하게 되고, 슬픔이 일어나고,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은 괴롭다는 겁니다.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은 육체로 말하면 병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에 병이 생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몸이 아프지 않기를 원할 겁니다.

인간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건강하게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몸을 무리해서 사용하거나, 잘못 사용하거나, 병균에 감염이 되거나 하면 병이 납니다. 병이 난다는 것은 몸의 어딘가가 고장이 났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병이 생긴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벌을 받아서 병이 생겼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의술이 발달하면서 몸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원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가서 병이 생겼습니다’, ‘어떤 영양분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의사의 진단을 받고 그 문제점을 고치면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마음의 괴로움도 신의 벌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고, 전생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왜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되는지 그 원리를 알아서 ‘아, 이래서 부정적으로 작용했구나’ 하고 파악한 후 문제점을 고치면, 마치 몸이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마음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마음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막 기쁘거나 즐겁거나 기분이 좋은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마음이 편안한 상태인 것을 뜻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여기 꽃이 한 송이 있습니다. 그 옆에 돌멩이 하나와 나뭇잎 하나가 있습니다. 이때 마음의 긍정적 작용은 꽃이 피어있을 때 꽃이 피어있는 줄 알고, 돌멩이가 있을 때 돌멩이가 있는 줄 알고, 나뭇잎이 하나 있을 때 나뭇잎이 하나 있는 줄 아는 거예요.

‘꽃이 피어있구나, 돌멩이가 있구나, 나뭇잎이 있구나’

이것이 정상적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과거의 습관과 까르마가 반영되면 ‘꽃이 예뻐!’ 하고 들뜨거나, ‘왜 이 꽃은 아직 안 피지?’ 하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이건 좋다’가 긍정적인 마음이고 ‘이건 싫다’가 부정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대개 ‘싫다’는 것은 나쁜 마음이고, ‘좋다’는 것은 좋은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좋다’는 마음과 ‘싫다’는 마음은 별개의 감정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같은 마음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좋다’, ‘싫다’ 하는 마음은 늘 같이 붙어 다닙니다. 그런데 이 중 하나만 떼어내서 좋은 마음만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한 채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노력만 많이 했을 뿐 실제로 그것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은 ‘좋다’, ‘싫다’는 감정이 일어날 때 이러한 작용 자체가 마음의 부정적 작용이라는 것을 간파하셨습니다.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바라볼 때는 ‘꽃은 꽃이구나’, ‘돌멩이는 돌멩이구나’ 할 뿐입니다. 꽃을 봐서 약간 기분이 좋아져도 거기에 흥분되지 않고, 잎이라고 해서 약간 싫은 마음이 들더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증폭시키지 않는 상태를 유지할 때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자기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감정에 휘둘려서 자기 스스로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약간 들떠있구나’, ‘내가 조금 가라앉아 있구나’, ‘약간 싫어하는 마음이 올라오는구나’ 하고 자기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공부를 해보면, 어떤 물건을 접하여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것은 그 물건 또는 경계(境界, 인식의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나의 까르마가 그 경계에 부딪혔을 때 부정적으로 작용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보고 좋은 감정이 막 일어날 때도 그 대상 자체에 좋은 성질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까르마가 그 경계를 보고 호의적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내가 내 마음의 상태를 안다는 것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나의 까르마를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까르마를 잘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까르마를 잘 모르기 때문에 까르마를 자기로 삼습니다. 까르마는 내가 아닙니다. 까르마는 나의 업식(業識)일 뿐입니다. 나에게 왜 그러한 까르마가 생겼는지는 알아차림을 통해 연구를 계속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환경, 배운 교육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나의 까르마가 형성되었고, 그렇게 생겨난 까르마가 다시 현재의 환경에 부딪치면 자동으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반응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는데, 우리는 그 반응에 푹 빠져서 허우적댑니다.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항상 괴로운 감정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괴로움이 큰 사람일수록 조금만 좋으면 얼굴이 밝아지고 난리를 피웁니다. 또 그런 사람은 조금 전만 해도 얼굴이 환하고 천사 같다가도, 조금만 안 좋아지면 죽는다고 난리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마음

그래서 수행에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마음 중에 첫 번째가 ‘좋다’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욕망이라고 합니다. 감각적 즐거움 또는 탐욕이라고도 합니다. 탐욕은 식욕, 수면욕, 성욕, 재물욕을 모두 포함할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는 어떤 것을 보고 ‘야, 좋다!’ 하고 일으키는 마음 모두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는 욕망에 사로잡힌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이 수행하는데 커다란 장애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두 번째 마음은 첫 번째와 반대인 ‘싫다’ 하는 마음입니다. ‘싫다’는 것에 사로잡히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납니다. 흔히 첫 번째 마음을 탐욕이라고 하는 반면, 두 번째 마음을 성냄이라고 합니다. 이 둘을 붙여서 탐진(貪瞋)이라고 합니다. 탐진의 뿌리는 좋고 싫음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세 번째 마음은 무언가 내 뜻대로 되었을 때 일어나는 들뜨는 마음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네 번째 마음은 이와 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가라앉은 마음입니다. 만사가 귀찮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상태로 법문을 듣거나 명상을 하거나 무언가를 하면 만사가 귀찮으니까 졸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다른 말로 해태(懈怠), 태만, 게으름, 졸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다섯 번째 마음은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그게 정말 그런가?’ 하고 묻는 탐구적 의심이 아니라 ‘그렇게 한다고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 의심입니다. ‘그런다고 될까?’ 하고 매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은 수행에 큰 장애가 됩니다.

이를 수행에 방해되는 다섯 가지 장애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의 장애에 휘둘리면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방법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의 상태가 이렇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런 장애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되었구나’ 하고 자신의 상태를 알아가는 거예요. 자기 마음에 깨어있으면 장애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사로잡히게 됩니다. 놓쳐서 사로잡히게 되어도 ‘아, 놓쳐서 사로잡혔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거기서도 못 알아차리게 되면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말이나 행동이 나온 뒤에도 그 즉시 ‘이렇게 말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참회를 할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반복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일이든 미리 예방을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미리 예방을 하지 못했으면 병에 걸린 다음에라도 치료를 해야 하고, 치료도 늦었으면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선 안 다치도록 조심하고, 다치게 되었으면 치료를 하고, 치료가 불가능하면 다리를 잘라내고 목발을 짚고서라도 다녀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이것 때문에 괴로울 일은 없습니다. 일이 일어난 다음에 우리는 늘 괴로워합니다.

‘내가 미리 대비하지 못했구나’
‘내가 치료를 제대로 안 했구나’
‘나는 왜 다친 다리로 평생 살아야 하나’

이렇게 후회하는 건 괴로운 상태에 빠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일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두고 후회하는 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가 많이 올 것으로 예상되면 둑을 쌓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측보다 비가 더 많이 오면 비가 오는 중에도 둑을 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많은 비가 오면 우선 몸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논밭이 떠내려가지 않습니까?’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일단 그렇게 비를 피하고, 비가 지나간 다음에 축대를 더 높이 쌓고 집을 다시 지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울고불고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이 된다’, ‘수행이 안 된다’, ‘누구는 수행을 잘한다’, ‘누구는 수행을 못한다’ 이런 말들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자기 까르마에 휘둘린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저 사람이 지금 넘어졌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도반이 자주 넘어지는 것 같으면 ‘조심해라’ 이렇게 말을 해줄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 자꾸 넘어진다는 것은 다리가 아프든지, 정신적으로 집중을 안 하든지, 어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도 매일 아침마다 정진을 하기로 약속했지만, 어떤 날은 일어나기 싫을 때도 있고, 어떤 날은 다른 걸 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거예요. 수행이라는 것은 그 일어나기 싫은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일어나버리는 것입니다.

108배가 진짜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절을 하고 예불을 하는 게 수행이 아니라 5시에 일어나기 싫을 때 탁 일어나 보니 ‘별 거 아니네’ 하고 아는 게 수행이에요. 아까 일어나기 전에는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든 줄 알았는데 탁 일어나서 보니까 ‘아무 문제도 아니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게 수행입니다. 일어나서도 수행을 안 하고 있는 사람은 ‘아, 조금만 더 자면 좋겠는데’, ‘지금이라도 자러 갈까?’ 계속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몸만 일어났지 마음은 아직 안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기 싫은 것도 수행의 과제가 되고, 일어나고 싶은 것도 수행의 과제가 되고, 절하기 싫은 것도 수행의 과제가 되고, 절하고 싶은 것도 수행의 과제가 됩니다. 108배를 하기로 했는데 오늘 아침에 힘이 난다며 남보다 빨리 해서 200배 하려고 할 때 그 마음을 딱 보고 마음을 진정시켜서 절을 천천히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럴 때 ‘아, 내가 흥분했구나’ 이렇게 진정시키는 게 수행이에요. 만약 어제 108배를 못했다면 ‘어제 내가 놓쳤으니까 오늘은 200배를 해야 되겠다’ 하고 평정심으로 절을 하는 것과 절을 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오늘은 조금 더 해야지’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럴 때 흥분된 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수행입니다. 오늘은 200배를 했으니까 수행을 두 배로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욕망에 끌려간 것에 속합니다.

자기가 108배를 할 수 있는데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천천히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심장 혈관에 이상이 있어서 다른 사람처럼 절을 하면 숨이 차는데도 ‘주어진 시간 안에 108배를 다 해야지’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자기 몸 상태에 맞춰서 적절한 속도로 하면 됩니다.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니면 나이가 여든이 되어도 천천히 절을 하면 108배를 다 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아주 천천히 절을 해야 되면 다른 사람이 15분 만에 하는 걸 나는 1시간, 2시간 동안 하면 됩니다.

‘게으르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라.’

상황에 맞게 하면 됩니다. 애쓸 필요가 없어요. 애쓰게 되면, 마음이 들뜨게 되거나, 안 된다고 포기하게 됩니다. 아침에 5시에 일어나기로 했는데 눈을 떠보니 일어나기가 싫으면 ‘오늘은 일어나기 싫은 마음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 싫은 마음에 사로잡힐 것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일어날 것이냐는 나의 선택입니다. 마찬가지로 절을 하다가 싫은 마음이 일어나면, 그 싫은 마음에 사로잡힐 것이냐 그냥 절을 할 것이냐는 나의 선택이에요. 절하는 것 자체가 수행이 아니라, 그 싫은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냥 하는 게 수행입니다.

이건 등산하는 것과 같아요. 산을 올라가다가 힘들면 중간에 내려와도 됩니다. 그런데 꼭 올라가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면, 몸이 건강하면 빨리 올라가고, 다리가 아프면 조금 천천히 가고, 더 아프면 중간에 쉬었다가 가면 됩니다. 올라가는 내내 ‘내가 여길 왜 올라가지?’, ‘위에 올라가면 뭐가 있나?’ 하고 온갖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산에 올라가기로 한 건 내가 정했지 누가 올라가라고 억지로 시킨 게 아니잖아요. 올라간다는 목표를 세웠으면, 어떻게 가는지 그 방식은 형편이 되는 대로 선택하면 됩니다. 올라가면서 계속 후회하거나, 남보다 조금 빨리 간다고 좋아하거나, 남보다 늦었다고 자괴감을 갖는 건 모두 부정적인 마음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수행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천일결사 기도를 같이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괜찮았어요?”

“네.”

“요즘 정토회에서는 조금 더 쉽고 조금 더 마음에 다가오는 수행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절에서 하는 전통적인 아침 예불과 기도를 해본 것이고, 앞으로는 제가 혼자서 예불하는 방식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건 아무데서나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정진을 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예불을 할 때 도입부를 다르게도 해 볼 예정입니다. 여러분들도 같이 해보고 어떤 방식이 제일 나은지 알려주시면 그 의견들을 수렴해보겠습니다. 가장 좋다고 하는 방식을 2차 만일결사에 가서 바꿀지, 10차 천일결사 중간에 바꿀지 염두에 두면서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을 찬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중국 사람 방식, 태국 사람 방식이 서로 다르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이 절에는 이런 방식, 저 절에는 저런 방식으로 예불을 드립니다. 그중에서 어떤 방식이 정토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을지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해 보겠습니다. (모두 웃음)

지금부터는 여러분들이 함께 정진해 본 소감을 올려주는 시간입니다. 채팅창에 여러분들의 소감을 올려주시면 같이 한 번 보겠습니다.”

스님이 채팅창에 소감을 올려보라고 하자 수백 개의 소감이 소나기처럼 올라왔습니다.

“싫은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냥 하는 게 수행임을 알겠습니다.”

“그동안 아침 기도를 쉬고 있었는데, 스님 덕분에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덕분에 스님의 법문을 이렇게 집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코로나 사태가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살아있으니 이렇게 기도를 할 수 있네요. 천일결사 기도를 스님과 같이 하고 나니 오늘은 특별한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스님은 소감을 한 줄씩 읽은 후 맞장구도 쳐주었습니다.

“맞아요. 우리가 살았으니까 이렇게 같이 기도를 할 수 있는 거예요.”

법문을 마치며 다음 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천일결사 기도에 동참할 수 있게 독려했습니다.

“매일 기도를 하겠다고 신청한 사람이 7천 명인데, 지금 3,500명이 접속했다고 합니다. 점검이 딱 되었네요. 오늘 실험을 통해 절반이 기도를 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웃음)

주변에 오늘 기도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모둠을 통해 ‘다음 주 토요일에는 스님과 같이 기도하자’ 이렇게 연락해서 다음 주에는 7천 명이 모두 다 접속하도록 해주세요. 새로 시작한 토요일 온라인 정진이 기도를 안 하던 사람들이 다시 기도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생방송이 끝나자마자 천일결사자들은 모둠별로 화상채팅방에 접속해서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과 함께 시작한 주말 아침에 대한 뜨거운 반응이 곳곳에서 전해져 왔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대한 기대감을 뒤로하고, 다 같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농사일을 하러 밭으로 나갔습니다.

비 오기 전에 소똥 담기

며칠 동안 법사님들은 결사 행자 회의 발표 준비를 하느라 울력을 못했는데 오늘은 못다 한 울력을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하루 종일 몰아서 다 했습니다.

내일 비가 온다고 해서 밭에 말리느라고 널어둔 소똥 거름이 비에 젖지 않도록 포대에 담고 천막을 덮어두기로 했습니다. 먼저 돌을 골라내고 삽으로 소똥을 퍼서 포대에 담았습니다.


플라스틱 깔판을 가져와 한쪽에 깔고 소똥이 담긴 포대를 쌓았습니다.


큰 포대를 옮기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일을 다 할 수 있을까...”


스님은 소똥을 긁어모아주던 포클레인을 보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포클레인이 한 삽 뜨면 그 아래 포대를 대고 소똥을 받아봅시다.”


직접 삽으로 퍼 넣을 때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한 사람이 한 포대를 잡기에는 포대가 너무 무거워서 두 사람이 한 포대를 잡고, 스님이 살살 삽을 들고 소똥을 아래로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작업 속도가 훨씬 빨라졌습니다. 깔판 가까이에서 포클레인이 한 삽 뜨고, 포대를 대고, 삽으로 소똥을 떨어뜨리고, 다 차면 포대를 끈으로 묶었습니다.

“자, 포대 빨리 오세요!”

“포클레인 오세요!”

스님은 작업반장이 되어 활기차게 작업을 지시했습니다. 삽을 든 스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공장이 돌아가는 것처럼 포대가 착착 만들어졌습니다.

속도는 빨라졌는데 포대에 소똥이 떨어지면서 온 몸에 소똥 먼지가 튀었습니다. 눈, 코, 입에 소똥이 튀어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습니다. 마스크를 끼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두 줄을 쌓아 올리고 잠시 휴식했습니다. 날이 따뜻해서 땀이 많이 났습니다.

잠시 쉬면서 어떻게 하면 더 쉽고 빠르게 소똥을 포대에 담을 수 있을지 연구했습니다. 묘당 법사님이 덤프트럭의 경사를 이용해서 소똥을 담아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포대로 소똥이 모일 수 있도록 덤프트럭 뒤에 각목을 비스듬히 설치했습니다. 덤프트럭 위로 포클레인이 소똥을 떨어뜨려주고, 덤프트럭 아래에 포대를 받쳐 소똥을 담는 방식이었습니다.

스님은 덤프트럭 위로 올라가 소똥을 아래로 밀어주었습니다.

“자, 포대 오세요!”

쉴 새 없이 포대를 채우고 쌓았습니다.

담아도 담아도 소똥이 끝이 없었습니다.

“이 소똥을 누가 다 받자고 했을까요?”

“법륜스님이요.” (모두 웃음)

“공짜라고 받았다가 일이 엄청 많아졌네요.”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마을 어르신이 공짜로 소똥을 준다고 해서 덥석 받은 소똥이었습니다.

소똥 한 포대는 둘이 들어도 무거운 양이었습니다. 셋 혹은 넷이서 들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포클레인으로 옮겨보았습니다.


낑낑대며 포대를 옮겼는데 포클레인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계속 일을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일을 멈추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2시부터 다시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오후 울력을 시작하기 전에 논둑 곳곳에 자란 쑥을 뜯었습니다.


오후에도 같은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소똥 양이 많아서 나무 깔판 3개를 더 구해다 깔고 소똥 포대를 쌓았습니다.


잠시 쉴 때는 쑥을 다듬었습니다.


오후에 조금만 더 울력을 하면 일이 끝날 줄 알았는데 4시가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투둑, 투둑...”

나무 깔판이 소똥 무게를 못 이겼는지 부서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결국 한쪽으로 무게가 점점 쏠리다가 포대가 한쪽으로 무너져버렸습니다. 개중에는 수로에 굴러 떨어진 것도 많았습니다. 내일 비가 온다는데 수로에 떨어진 무거운 포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스님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포대 사이에 돌을 끼우고 나무 막대기를 댄 다음 다시 포대를 쌓아 올리자고 제안했습니다. 네 명이 함께 힘을 모아 포대를 일일이 다시 쌓았습니다.

“하나, 둘, 셋!”


하루 종일 소똥을 담고 옮기다 보니 손끝이 아려오고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6시가 가까워 드디어 소똥을 포대에 다 담았습니다. 산을 하나 쌓았습니다.

“이제 비닐을 씌웁시다.”


지난해 농사에 사용하고 남은 비닐 조각들을 덮어주었습니다. 비닐을 거의 다 덮어가는 순간 반대편에서 비닐을 잡고 있던 행자들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으아악!!!”

비닐과 함께 포대가 우르르 쓰러졌습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다친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자 모두 어이없어하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냥 이렇게 두고 가면 안 될까요?”

스님은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시간이 늦어 새로 쌓을 순 없고 수로에 떨어진 것만 올려서 더 무너지지 않게 지지해 놓기만 합시다. 금방 할 수 있어요.”

스님은 바로 수습을 시작했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포대를 다시 쌓았습니다.

“하나, 둘, 셋!”

가벼운 마음으로 흔쾌하게 하니 금방 끝낼 수 있었습니다. 포대를 쌓은 모양이 낙타의 모양처럼 우스웠습니다.

포대를 쌓는 작업을 끝낸 후에 바닥에 있는 소똥을 다 긁어내니 또 작은 산 하나가 생겼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이 소똥은 비닐만 덮어 두기로 했습니다.

작은 소똥 산을 덮어주는데, 쌓아놓은 포대를 덮었던 것보다 더 큰 비닐을 찾았습니다.

“이 비닐을 저 비닐과 바꿔줍시다.”

비닐을 맞바꾼 후 마지막으로 비닐 위로 줄을 감아주고 돌로 고정시켜주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열 명 남짓한 인원이었지만 기계와 손발을 맞춰 오늘 안에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뿌듯했습니다.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소똥 먼지가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법당 밖 마루에서 저녁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샤워를 한 후 저녁 8시에 다시 모여서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일하면서 어떤 알아차림이 있었습니까? 마음 나누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스님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부터 차례대로 자신이 알아차린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까지 농사일을 하면서 최고의 노동 강도였습니다. 장갑을 꼈는데도 손에서 피가 날 정도였습니다. 쌓아놓은 포대가 세 번째 무너졌을 때 멘붕이 왔습니다. 다시 쌓아야겠다는 의욕이 완전히 상실되었어요. 그때 옆에서 스님이 ‘다시 쌓을 수 있다’라고 가볍게 말씀하시는데, 그 순간 ‘리더의 힘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어요. 죽을힘을 다해 쌓아 놓은 것이 세 번이나 무너졌는데,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추슬러서 끝까지 마무리를 짓는 모습이 감동이었어요.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어주신 지도법사님께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쌓아놓은 포대가 세 번째 무너졌을 때 허탈한 마음이었습니다. ‘왜 지금 무너지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갈 시간이었는데, 지금 무너지는 바람에 저녁을 못 먹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옆에 있던 무변심 법사님은 ‘지금 무너졌기 때문에 단도리를 하고 갈 수 있어 다행이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 이 일의 주인인 사람과 주인이 아닌 사람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아, 나는 주인이 아니었구나. 남의 일을 해준다는 마음으로 일했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스님도 소감을 말했습니다.

“소똥이 바짝 마르면 굉장히 가벼운데, 흙이 섞여서 그런지, 돌이 들어가서 그런지, 수분이 있어 축축해서 그런지,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어요. 두 명이서는 포대 하나를 끌지도 못할 정도로 무거워서 여러분이 애쓰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어요. 너무 힘이 들어서 ‘아니, 남자는 다 어디 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힘쓰는 남자 한 명이 묘당 법사님인데 포클레인 운전을 해야 하니까 팔이 아픈 저도 힘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행자님 한 분이 사람 두 명을 데리고 산 아래 밭에 다른 일을 하러 간다고 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었어요. 제가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는 순간 묘당 법사님이 저보다 먼저 섭섭한 마음을 이야기해버렸어요. 덕분에 저는 조용히 있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웃음)

그래도 각자 자기 몫을 다 해준 여러분들 덕분에 무사히 일을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함께 고생을 해서 그런지 고된 마음을 이야기할수록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입니다. 농사일을 잠시 쉬고, 오전에 경주 남산에 다녀온 후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 명상수련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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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당

알아차림~~

2021-04-05 23:15:50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0-09-25 23:58:59

윤순도

스님 고맙습니다~(())
소똥. 정겹게 느껴집니다!

2020-08-22 04: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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