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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8년에 아내가 등 떠밀어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아내는 지금도 친구들에게 “주위에 힘들게 하는 사람 있으면 정토회로 보내라”고 말하는데, 저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많이 힘들었나봅니다. 아마도 제가 군인이셨던 아버지를 닮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집에서도 군 생활이 배어 있었고 자식들에게 규율이나 예절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쳤습니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우리 4남매를 엎드려뻗쳐 시키고 체벌하셨는데, 그때도 아버지께 대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나 아파 죽겠어요!!” 누나가 소리 지르고 도망가거나, 어머니가 매를 든 아버지 손을 잡고 말리면 더 세게 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저는 ‘차라리 가만히들 있지’ 생각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곤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을 예편하고 자영업을 시작하셨는데, 그때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에 신문을 두고 가는 형을 쫓아가서 “나도 신문 배달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신문을 배달하다가 나중에는 신문을 떼어와 팔았습니다. 다방에 들어가서 신문을 팔던 중 구두 닦는 형들이 “나하고 같이 해볼래?” 제안해서, 구두를 모아 구두닦이에게 가져다주는 어린 찍새 일도 했습니다.
또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있는데 어른들이 “꼬마야, 저 가게 가서 우산 좀 사 와라”고 하여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떼어와 팔았습니다. 가난했지만 성실하셨던 부모님을 보면서 우리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밥을 하루에 두 끼만 먹을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은 우리 4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게 업이 되어서인지 꼭 아버지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지나친 부분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고지식할 정도로 지적을 많이 하셨는데,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라 안타까워서 알려주려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이러지 마라 저러지 마라” 하시니 좋아하며 따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걸 항상 봐왔기에 아버지처럼은 하지 않으려 했으나 똑같이 제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언젠가 회사 교육에서 혈액형 A 유형 사람들의 고민을 들었는데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저는 섬세함이 배려라고 생각해서 꼼꼼하게 설명해 주려하는데 상대방은 부담스럽고 지나치다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젊어서 아내와 부부싸움 할 때도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그걸 오해해서 화낼 때는 저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는 수행하니까 ‘저 사람한테는 내가 그렇게 보이는구나!’ 합니다. 상대가 느끼는 저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제 속마음까지 다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 욕심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전자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회사에서는 구매 업무만 35년을 했습니다. 기업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익을 내야 하지만 가격 인상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원가를 줄여야 하는 중요한 과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원가 절감의 중심이 되는 부서가 구매팀입니다.
구매팀은 원가 개념과 데이터를 이해하는 효율성, 정직함과 윤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회사를 대표하는 얼굴로서 다양한 협력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알게 된 정보들에 대해 보안 규정도 지켜야 합니다. 더불어 자신이 담당하는 제품은 그 설계도와 상세 요건을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협상을 할 수 있습니다.
구매팀은 접대를 받는 갑의 위치이기에 뇌물 받는 사고가 종종 있어 보통은 3년 만에 보직을 이동하는데, 저는 이 분야에서 35년을 일해 온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낍니다. 물론 힘들었던 순간도 있습니다. 구매 업체 선정에서 제외된 협력사들이 저에게 불만을 품고 음해하여 회사를 옮긴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파란만장한 사회생활과 보리수 봉사는 큰 차이가 납니다. 사회생활 할 때는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비즈니스라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긴장했습니다. 하지만 보리수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여줄 수 있어 편안합니다. 다만 회사 생활하면서 평생 일의 효율성 높이는 방법을 고민했기에, 보리수 업무가 너무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10명이 할 일을 1명이 하는데 보리수에서는 1명이 할 일을 10명이 하고, 10명이 할 일을 100명이 합니다. 제 경험을 들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저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안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럴 때 분별심이 일어나지만, 보리수는 일이 우선이 아니라 수행이 우선이기에 받아들입니다. 사회에서 돌아가는 시스템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우리 수행자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토회는 제일 앞서가는 사람에게 맞추는 것도 아니고, 중간의 사람에게 맞추는 것도 아니고, 제일 뒤처지는 사람에게 맞춘다는 느낌입니다.
제가 쉽게 할 수 있지만 “해보실래요?” 하고 봉사자인 노보살님께 공구를 쥐여드리면 그분들도 뿌듯해합니다. 그렇게 직접 일해보면 일머리가 생기게 되고 봉사자들이 뿌듯해하는 걸 보는 것이 제가 보리수에서 느끼는 새로운 재미이자 보람입니다.
저는 정토회를 알기 전에도 모태 불자인 아내를 따라 산중의 절에 가곤 했지만, 기본적인 에티켓도 모르는 터라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작은 죄를 지으면 그만큼의 업이 쌓이고, 큰 죄를 지으면 그만큼 큰 선업을 지어야 한다는 말이 다가왔습니다.
교회든 절이든 구복 기도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정토회는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게 저와 코드가 맞았습니다. 생활에 맞닿은 불교 공부를 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일주일에 한 번은 회사 퇴근 후 서초법당에 가서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진행자로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는 회사 직원들이 저에게 “정말로 많이 달라지셨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불교대학이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늘어난 일정에 진행자를 그만두었고 정토회를 찾는 일도 뜸해지면서 예전처럼 화를 자주 내는 저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다 작년 3월에 퇴직하고 다시 정토회를 찾았고 지회에서 만난 거사님들의 추천으로 보리수 백일 정진에 입재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제가 정토회를 일찍 만나 수행자의 관점으로 회사 생활을 했다면 더 승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임원까지는 업무 능력으로 승진하지만, 그 이상은 호감도가 중요해서 덕망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늘 효율과 성과를 중심으로 직원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보리수에서 사람을 기다리며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을 하면서 제가 직원들을 매우 힘들게 했음을 반성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도 잘 굴러가는데 왜 그렇게 아등바등 직원들을 끌고 가려 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아버지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직원들도 저랑 이야기하면 “다 맞습니다. 맞는 말씀인데 너무 힘듭니다"라고 할 때가 있었는데, 아버지도 꼭 그랬습니다. 틀린 말씀 하나 안 하시는데 저는 힘들었습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늙어 손주들에게 세배받으며 “느그는 자식들을 나보다 잘 키워서 좋겠다”라고 하셨을 때 인정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보면 아버지의 엄격한 기준을 맞추며 살아온 부분이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모든 직원이 힘들어하는 상사를 만났을 때도 저는 그분을 잘 맞추며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까지 이젠 다 제 삶의 거름이자 추억이고 지금은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부모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고생한 티가 나지 않는다며 어릴 때 부유한 가정에서 편하게 살아온 것 같다는 얘기를 들으면 가장 흐뭇합니다. 가난이란 상황을 힘들어했다면 얼굴에 다 드러났을 텐데, 솔선수범하며 긍정적으로 살아온 저 자신이 대견합니다.
보리수 백일 정진에서 유수스님께 ‘나는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아왔습니다’라는 기도문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저는 제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에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글_이동우(보리수 6기)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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