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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나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불 한 번 안 개게 하고 키웠다고 어머니가 말할 정도로 부모의 사랑도 듬뿍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습니다. 100점 받은 시험지를 들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엄마, 나 1등 했어. 100점이야!”라며 자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무척 기뻐했습니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고 또 공부에 취미도 있던 터라, 열심히 공부하면서 부모의 인정과 애정 속에 모범적인 아이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는 물론 형제들의 생계도 책임지느라 바빴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와 놀아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어릴 땐 과묵하고 엄격했던 아버지가 무서웠습니다. 식사 중 말이 많다고 혹은 음식을 흘린다고 야단맞고 울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 억압이 성장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학년이 높아갈수록 아버지와 갈등은 줄었고, 제가 공부를 잘해 집안의 자랑거리였습니다.
10여 년 전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아내, 4살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갔습니다. 주재원을 나가기 전 저는 열정을 다해 일하는 회사원이었고 동기 중 승진도 빠른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이런저런 일이 겹치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또 승진도 안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제일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법륜스님의 《엄마수업》을 읽은 아내가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으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어 아내는 천일결사에 입재했고, 저는 아내를 집에서 먼 입재식 장소에 데려다주고 아이와 함께 장을 보며 기다리곤 했습니다.
회사 일로 너무 괴로웠던 저는 아내의 도움으로 108배를 시작했습니다. 즉문즉설도 계속 들었습니다. 아침마다 108배를 하면서 마음에 위안을 느끼고 제 모습을 조금씩 살폈습니다. 그러다 아내가 저희 집에서 불교대학을 열고 진행을 했습니다. 당시 해외에서는 입학생 5명이 되면 불교대학을 열 수 있었는데, 마침 다음 기수에 4명이 신청을 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신청하면 개설 인원 5명이 되기에 아내의 권유로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덕분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가 진행하는 불교대학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정토회와 귀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학교 때는 사회적 문제 의식을 가지고 학생 운동도 했지만, 졸업 후 직장을 얻고 가정이 생기자 어릴 때 공부 잘해 칭찬받았던 것처럼 회사에서 인정받아 일찍 승진하고 임원이 되는 데 마음을 쏟았습니다. 다른 길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회사 일에 몰두하며 남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하다 보니, 일찍이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받았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미국에서는 연이어 승진에서 누락되었고, 저는 과중한 업무와 엄청난 스트레스로 체중이 7kg가량 줄었습니다. 오랜만에 저를 본 사람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을 정도로 얼굴은 수척해졌고 피로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삶이 어떻게 이렇게 되나?’ 할 정도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알았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부모님이 아들이라고 떠받들어 주니까 ‘나는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어, 나는 잘 될 거야’라며 나 잘난 맛에 살았다는 것을요. 학교에서 공부 잘해 인정받는 것을 ‘나’로 삼고, 회사에서 일 잘해서 승진하는 것을 ‘나’로 삼는 성취 지향적인 삶은 결국 저에게 독이었습니다.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난 맛에 살던 인생이 한 번 크게 깨지는 덕분에 부처님 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삶을 돌이키고, 지금은 꾸준히 수행하면서 정진과 봉사로 삶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퇴근 후 회사에서 가까운 강남법당을 다니면서 경전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당시 신생 법당이었던 강남법당은 분위기가 무척 좋았습니다. 특이하게도 남자 도반이 많은 법당이었습니다. 부처님오신날 전야제 무대에서는 머리에 알록달록한 뽀글이 가발을 쓴 남자 도반들과 함께 민요를 개사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또 천일결사 입재식에서 서초법당과 강남법당 남성 도반들이 모여 함께 축하공연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풍물 잘하는 도반을 중심으로 풍물패를 만들어, 큰 글씨를 쓴 깃대를 힘차게 흔들고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흥을 돋구었습니다.
경전대학을 졸업하면서 JTS 거리모금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청계산 거리모금 활동에 돕는이로 참여했습니다. 일 년 반 정도 여러 도반과 함께하면서 봉사활동의 의미를 몸소 체험했는데, 첫 JTS 봉사부터 열한 살인 아이와 함께 꾸준히 참석했습니다. 제가 회사 일로 빠질 때도 아이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혼자서라도 참석해 도반들이 많이 예뻐했습니다. 아이와 꾸준히 함께했던 봉사활동이라 저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가는 아이는 요즘에도 JTS 거리모금 활동이나 연탄 봉사를 저와 같이하고 있습니다. 저와 아내가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정토회 온라인 활동을 할 때면 ‘엄마 아빠는 도대체 언제 정토회 활동이 끝나냐’라며 가끔 투덜거리지만, 그래도 스스로 식사를 챙겨 먹고 봉사활동을 따라나서는 걸 볼 때면 대견합니다.
저는 기분이 나쁘면 꽁한 채로 화를 참았고, 이후 참았던 화가 터지면 크게 화를 냈습니다. 제가 꽁한 채 말을 안 할 때 아내는 힘들어했습니다. 수행하기 전에는 제가 인내심과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매일 아침 정진하면서 제 ‘꼬라지’를 마주하니 이제는 제가 화도 많고 분별심도 많다는 걸 자각합니다. 몇 년간 화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중점적으로 했고, 지금은 꾸준한 정진 덕분인지 화도 줄고 상대를 이해하는 폭도 넓어졌습니다. 다음 수행 과제로 삼은 것은 ‘왜 나는 그때그때 말을 못 하고 꽁하게 입을 닫고 있으면서 화를 키울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살펴보니 어려서부터 인내가 미덕이라고 배웠고, 싫은 소리 잘 못하는 부모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또 제 말을 듣고 상대가 저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컸습니다. 정일사를 통해 가볍게 내어놓는 수행 연습을 1년 정도 하다 보니, 전보다는 제 의견과 마음을 가볍게 내어놓습니다. 또 제가 가볍게 내어놓으면 상대도 편안하게 듣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행 연습 덕분에 자존감도 높아졌습니다.
수행을 통해 삶이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전에는 승진 욕심으로 심각하고 무거울 때가 많았습니다. 불법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뀌니 회사 생활은 편해지고, 일하는 시간은 줄었지만 나름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고 아이 양육에도 더 많이 참여합니다. 회사 생활 외 대부분 시간을 정토회 활동으로 채우니 삶이 균형 잡히고 보람도 큽니다.
정토회에서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어떻게 살아도 잘 사는 것이다. 다만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면 된다’라는 말씀이 가장 좋았습니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수행을 통해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가고, 보시와 봉사 활동으로 이웃과 세상에 잘 쓰이고 있습니다. 보람있는 삶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 몰랐습니다. 지금은 제 삶을 좋아하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제 삶이 가벼워지니 주변 사람들도 이 좋은 법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까지 5년 정도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진행자를 맡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학사과정을 졸업하고 도반이 되어 함께 정진하고 봉사할 때 뿌듯합니다. 형제에게도 불법을 전했습니다. 누나는 불교대학을 졸업했고, 여동생도 행복학교를 다녔습니다. 직장 동료 몇몇도 불교대학과 행복학교를 다녔습니다. 전법은 만만치 않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인연 따라 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꾸준한 정진과 봉사 활동으로 제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돈 많이 벌고, 승진하고, 인정받고 좋은 소리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보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으로 ‘내 인생 잘 되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이 잘 되고 잘 사는 것만 생각하며 살다가, 거리모금 활동과 불교대학 진행자 등 봉사 활동으로 훨씬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인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에는 더 좋은 것이 있었고, 그건 남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봉사 활동 덕분에 지금까지 정토회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은퇴할 때까지는 불교대학이나 경전대학 진행자를 충실하게 하고 싶고, 은퇴 후에는 좀 더 다양한 소임을 맡아보고 싶습니다.
강상혁 님의 수행담을 들으면서, 책임지기 싫어서 늘 선택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저를 돌아봅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어떻게 살아도 잘 사는 것이다. 다만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면 된다’라는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저도 흔쾌하게 선택하고 책임지겠다 생각해봅니다. 진솔하고 담담하게 나눠준 수행담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김진희 희망리포터(대전충청지부 청주지회)
편집_이혜수(서울제주지부 성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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