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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학교와 집밖에 몰랐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 생겼습니다. 노동운동을 위해 공장에 취직했고 2년을 다녔는데, 위장 취업이 발각되어 해고당했습니다. 그 길로 노동운동을 하는 단체에 들어섰지만, 어느 순간 제 역량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대립하고 싸워나가는 방식이 제 성향에 맞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도피하듯 결혼하고 활동을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3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마가 생계를 책임졌는데 직장에 나가면 젖이 불어 울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엄마는 오빠와 저에게 미안해했지만, 엄마의 사랑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공부하라는 그 흔한 잔소리 한 번 안 하고 집안일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간섭도 전혀 안 해서 저는 철없이 컸습니다. '제 맘대로 하는 업식'이 결혼생활의 장애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저와 뜻도 같았고, 강직하면서도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반해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저와 반대 성향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데, 남편은 혼자 있는 걸 유독 싫어하고 모든 것을 함께하기를 원했습니다. 또 '옳고 그름'이 강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주위 사람들도 같이해야 했습니다. 그에게도 그의 업식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신혼에 기선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부부싸움을 하다가 집안 물건들을 던졌습니다. 그러고는 저에게 그걸 치우라고 했습니다. '집을 나가버릴까?' 생각했지만, 어린 딸을 혼자 키울 걱정에 차마 나갈 자신이 없어 울면서 치웠습니다. 굴복한 저 자신에 대한 미움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결혼하고 몇 개월간은 매일 저녁 죽음을 꿈꾸었습니다. 남편이 심하게 화를 낼 때, 저를 죽일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죽음으로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우울증이었습니다.
'마음공부'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불교 이야기였습니다. '그 마음공부라는 걸 하면, 정말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비폭력 대화 모임을 이끌던 지인에게 "나도 108배를 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는 천일 결사1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천일 결사 수행 일지'를 제게 주었습니다. 혼자서 108배를 따라 해보려니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행 일지 앞면에 있는 입재식2 안내를 보고 찾아갔습니다. 그것이 정토회와의 첫 인연입니다.
법륜스님도 모르고 불교도 모르는 상태에서 '천일 결사 입재식'부터 참여한 것입니다. 이후 남편과 함께 <정토불교대학>에 다녔습니다. 불교대학에서 실천적 불교사상을 처음 공부할 때, 환희심이 일었습니다.
그간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도 알았습니다. '모든 걸 함께해야 하는 남편의 성향에 맞춰 살면서, 남편의 잔소리를 간섭과 구속으로 느꼈구나', '남편은 화가 많고, 나는 짜증이 많구나', '내가 우리의 문제를 전부 남편 탓으로 돌렸구나!', '남편을 탓하고 원망하는 그만큼 내 마음이 괴로웠던 거구나'.
이렇게 불편하고 괴로웠던 이유를 깨닫자,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라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서초 법당까지 <경전 대학>을 다녔습니다. 왕복 6시간이 걸렸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경전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정토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남편의 불만이 점점 커졌습니다. 어느 날 법당에서 사시 예불을 준비하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다짜고짜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 집을 나가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알코올성 치매를 앓는 아주버님을 집에서 간호했는데, 남편이 아주버님을 모시고 시골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이 여전히 차분하고 고요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남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은 것입니다.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네, 머리 식히고 오세요. 나는 이대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주일 뒤 돌아온 남편은 더는 집을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제가 정토회 소임을 하는데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남편은 지금도 제가 집에 없을 때는 치매 환자인 친정엄마를 돌보아 줍니다. 제가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남편 덕분입니다.
남편이 정토회 활동을 싫어한다고 여겨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처음에는 숨겼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어, 솔직하게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남편이 문제가 아니었구나! 모두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로 돌아온 것이구나'하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소임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저를 더 잘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사람보다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마음 살핌'이 부족합니다.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을 고민해 보았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마는 직장에 다녀 저 혼자 있을 때가 많았고, 혼자에 적응했습니다. 밖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나'를 더 키웠습니다. 자극받은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자 외부 사정에 무신경해지려 애쓴 것이 업식이 된 모양입니다.
몇 년 전 아침 기도 중에, 혼자서 세상을 두려워했던 어린 제가 떠올랐습니다. “안 죽고 살아주어서 고맙다. 잘 컸다.”라고, 스스로 다독여주니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를 좀 더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연습의 기회가 주어지니, 꾸준히 연습해 나갈 뿐입니다.
저는 통일전망대가 바로 코앞인 강화도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었고, 시골에서 자란 남편은 귀농을 꿈꿨기 때문에 여기로 이사했습니다. 통일전망대에 가까이 오니, 자연스레 통일 기도를 하게 된 것이 벌써 10년째입니다.
이곳은 대북 관계가 안 좋으면 출입하기 까다로워집니다. 한번은 통일전망대가 폐쇄되어 연미정에서 기도하려는데 군인이 올라와서 못 하게 했습니다. 그 순간,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옳다.'라는 마음이 일어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때 저는 '선하고 옳은 일을 한다'라는 마음이 상대를 탓하는 마음으로 둔갑하는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크게 참회했습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입니다. 기도가 끝나면 망배단에 올린 차가 얼어 있습니다. 장갑을 끼고 양말을 몇 개씩 신어도 손과 발이 얼어 아픕니다. 여름 땡볕에 절을 하다 보면 어지럽고, 비가 내릴 때는 처마 밑으로 비가 들이칩니다.
하지만 저는 춥고, 덥고, 비바람 불 때 더 힘이 납니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월 셋째 주 토요일 통일 기도는 한 번도 취소된 적이 없습니다.
평화 통일을 기원하는 것은 개인의 수행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미움과 갈등, 원망을 해소하는 것은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늘 삶에서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통일을 발원하면, '갈등과 경쟁과 분노를 내려놓고, 서로 다른 것만이 사실이기에 나를 고집하지 않겠다'라는 마음까지 원을 세웁니다. 그래서 저는 통일 발원문을 읽을 때면 늘 감동합니다.
통일은 통일일 뿐 이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제게는 남북문제가 제 문제입니다. 우리 집 앞마당에서 바라보면 북한이 보입니다. 실제로도 서울보다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러니 제 문제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겁니다.
통일기도든 어디 불사를 위한 기도든 모든 정진은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발원하는 기도는 결국 자기를 돌이키고, 자잘하게 집착하며 살던 마음이 더 넓은 곳을 향해 돌아앉도록 해줍니다. 직접 해보면 실감이 납니다. 오늘도 가볍게 통일 정진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많은 분이 여기 오셔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는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 되었습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니, 서로에게 이미 보살이고 부처였습니다. 저는 제 부처님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글_장수린 희망리포터 (인천경기지부 인천지회)
편집_이승준 (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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