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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란 이천의 시골 마을은 황 씨 집성촌으로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곳이었습니다. 마을에서는 대부분 남자아이는 서울이나 근교 도시에 있는 학교로 보냈지만, 여자아이는 지역 중학교에도 보내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저의 집은 더 심한 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남동생을 서울로 진학시키며, 돌봐줄 사람으로 나이 차이가 많은 언니를 함께 보냈습니다. 저도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방학이 되어 남동생이 집에 오면 할머니는 쌈짓돈을 풀어 남동생에게만 용돈을 주고, 영양제까지 챙겨주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과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친부모가 아닌 계모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학교 준비물을 사야 할 때는 엄마와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엄마가 준비물 살 돈을 주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않고, 교복과 책가방을 든 채 대문 앞에 버티고 서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참다못한 엄마는 돈을 주었습니다. 속으로 ‘자식을 낳았으면 학교도 보내주고 잘 키워줘야지'라는 반항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고집부리거나 무시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부모님은 들에 일하러 나가고, 할머니는 거동을 못 해 방에만 있고, 언니는 남동생 뒷바라지로 서울에 가고, 어린 저는 혼자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문득 툇마루에 홀로 앉아 석양을 보면서 ‘세상에 나 혼자뿐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어린 시절은 모든 게 불만족스럽고 부정적이었습니다. 허상을 만들어 자신을 괴롭히고 살았음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저는 농사하는 부모님도 싫고, 집을 떠나고 싶어 집과 먼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드디어 집을 떠났습니다.
집을 떠난 기쁨은 잠시,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자취 생활은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던 집과, 미워했던 엄마 품이 그리웠습니다. 오빠의 자살로 상심한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학업을 이어 갔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우리 가족과 다르게 아주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마치 다른 세계 사람 같았습니다. 그게 매력으로 다가와 엄마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핑계로 집을 다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생활은 제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친정은 냉정하지만, 독립적이라 서로에게 간섭하는 일이 없는 반면, 시댁은 서로 의지하고 따뜻하지만, 끊고 맺음이 없었습니다. 시댁은 경제적인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공동으로 했습니다. 경제관념이 없는 남편으로 인해, 저는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 홀로 살림과 육아를 했습니다. 그로 인해 화와 짜증이 늘어 아이들과 남편에게 늘 소리치며 살았습니다.
저의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이혼도 생각했습니다. 결혼 전 엄마를 향한 원망이, 결혼 후 그대로 남편에게로 향했습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집안 살림이 다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 아파트가 넘어가고 이제는 전세 보증금마저 사라졌습니다. 갈 데 없는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습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엄마와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엄마는 저뿐만 아니라, 아들에게도 화를 냈습니다. 남편을 닮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10여 년 다니던 직장도 잃었습니다. 제가 여행으로 보름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 가장 가깝게 지내던 후배가 상사와 함께 제 책상을 뺐습니다.
이렇게 직장을 잃고 사람들에게 실망감, 배신감, 복수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세무사 자격증을 취득해 사무실을 열겠다는 계획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험공부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친구 소개로 절에 다녔습니다. 절에 다니면서 신기하게도 시험 보려는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세무사 공부가 아니라, 불법을 공부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환희심으로 절에 다녔습니다.
집, 절, 직장을 오가며 백일기도를 하고 주말에는 절에 가서 봉사하였습니다. ‘지옥 같던 마음이 이렇게 편해질 수도 있구나’라며 신기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며 엄마의 마음이 다가왔습니다. '고집스러운 나로 인해 엄마가 힘들었구나', ' 엄마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부모님도 저와의 인연으로 왔음을 알았습니다. 부모님이 없었다면, 저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절에서 하는 법문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인터넷으로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들었던 금강경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는 너무 쉬웠습니다. 바로 정토회를 찾아가 2017년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저는 금강경 강의를 다섯 번이나 들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새로운 ‘불법’을 만났습니다.
경전대학 졸업을 앞두고 법사님과의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법사님은 “직장 다닌다고, 돈 번다고, 남편 무시하지?”라며 300배를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300배 권유는 먼저 다니던 절에서도 들었습니다. 그때는 힘도 들고 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법사님의 말을 듣고 ‘아!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300배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정진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전에 저는 ‘내가 남편을 무시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남편 역할을 제대로 못 하니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된다’라고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끊임없이 실패하면서도, 사업을 계속했던 것은 저에게도 원인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경제적 지원을 단호하게 끊지 않고, 계속 도와줘서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남편이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 아니 욕심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습니다.
제가 방에서 기도하고 나오면, 남편은 "안에 들어가면 보살이고, 나오면 중생이지"라고 빈정댔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남편의 말에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웃어넘깁니다. 아직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남편의 말이나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아들이 대학 졸업하고 동생과 다툰 후, 갑자기 방문을 잠그고 3년 동안 저와 말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방문을 열고 "왜 그러냐?"라고 묻기도 하고 소리도 질렀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묵묵부답, 도무지 말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300배 정진을 하면서 아들의 마음이 다가왔습니다. '아! 매우 힘들었구나'라고 생각하며,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 주지 못한 미안함에 참회했습니다. 힘들다고 돌보지 못했던 과보가 왔습니다. 잘 견디어 낸 줄 알았는데, 아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방문을 열고 나오며 “엄마 밥 먹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한동안 아들을 바라보며 말문을 잇지 못했습니다. 저를 완벽하게 투명 인간처럼 대하던 아들이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후 아들은 취직과 동시에 독립하여 잘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300배는 저에게 기적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제가 좋아지고 밝아지니 주변도 밝아졌습니다. 늘 남의 자식과 비교하며 불평하던 엄마는 "고맙다"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엄마, 남편, 아들 모두 저로 인해 만들어진 관계입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온다'라는 것을 확연하게 알았습니다. 바른 법을 만나 밖으로 향했던 마음을 제게로 돌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가 자유롭고 행복해져, 남은 인생은 회향하며 살겠습니다.
봉사란 저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남을 위해서'라기 보다 '나를 위한' 봉사입니다. 저에게 도움이 되고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봉사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역량도 커지고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불법의 위대함을 일반 사찰에서는 막연히 알았는데, 정토회에서는 더 확연하게 배웁니다. ‘복을 비는 나만을 위한 기도’에서 벗어나, ‘나와 남이 모두 행복해지는 기도’를 합니다. 더 나아가 사회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요즘은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하기를’,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서원하며 300배 정진을 합니다.
가족이 모이면 남편은 말합니다. "아들만 정토불교대학에 들어가면 가족 모두 동문이다." 불법을 만나 감사함을 알았고, 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알았습니다. 또한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꾸준히 정진하며 지금의 저를 지켜나가고자 합니다.
황이숙 님은 인터뷰 내내 감정의 동요 없이 잔잔하게 말을 이어 갔습니다. 마치 타인의 삶을 얘기하듯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에게 300배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모든 걸 비우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걸어가는 모습, 그 속에서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앞서 걸어가는 자의 외로움도 보았습니다. 문득 '그가 외롭지 않게 같이 걷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_이삼월 희망리포터(강원경기동부지부 남양주지회)
편집_윤정환(인천경기서부지부 안양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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