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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엄마 따라 절에 다녔습니다. 낯설거나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유난히 제 주변에는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디 가서 기도하면 좋다.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면, 밤인지 새벽인지, 심지어 몇 박 며칠도 가리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복 신앙으로 이 절 저 절 쫓아다녔습니다.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남편 사업이 잘되겠지 싶었고, 아들도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절에 다니며 열심히 기도했지만, 남편 사업도 아들도 제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전쟁 나고 16세에 홀로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입니다. 평생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북녘 고향 가까이 살고 싶어 하는 아버지와, 남쪽 고향을 떠나면 죽는 줄 아는 엄마는 자주 다퉜습니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완전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취한 날이면 동생들을 모두 데리고 친구 집으로 피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술 먹는 사람하고는 절대 가까이하지 않겠다 다짐했습니다. 늘 속만 끓이던 엄마가 60대 중반 뇌졸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탓에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많이 원망하고 미워했습니다.
남편은 결혼 후, 느닷없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경험 없이 시작한 사업이라 처음부터 힘들어했습니다. 거의 매일 술에 취했고 귀가가 늦었습니다. 아버지의 술 먹는 모습을 힘들어했던 저는 술 취한 남편이 보기 싫고 짜증스러웠습니다. 결혼에 대한 꿈과 남편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무너졌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불만과 실망이 마음속에서 커졌습니다.
남편에게 기대했던 사업이 실망으로 바뀌고, 제 노력이 수포가 되어 힘들 때, 미더운 아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성적이 우수하고 통솔력 있는 간부로 학교 모범생이었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정한 약속과 목표를 달성하여 제 기대를 쑥쑥 높였습니다. 아들을 보고 있으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나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남들은 둘, 셋도 키우는데 싶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밀어주었습니다. 삶의 기쁨과 의미를 아들에게서 채웠습니다.
고3이 되자, 이제까지 노력한 결실을 보게 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매사 최선을 다하고 의젓했던 아들이 공부를 등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고3 내내 허송세월로 보냈습니다. 설득도, 엄포도, 통하지 않던 아들의 일탈은 원하는 대학 진학 실패라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지방대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학점관리에 소홀하고 놀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아들을 보고 있는 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졸업 후 아들은 대기업 몇 곳에 입사원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마지막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취업 대신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현실도피를 하는 것 같아 내심 불안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2학년 때 휴학을 결정하더니 결국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아들에 대한 배신감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남의 자식들은 번듯한 대학에 입학해 대기업에 떡 하니 잘만 들어가는데 철석같이 믿었던 아들은 왜 이런가 싶어, 비참하고 괴로웠습니다.
가슴이 뜨거운 불길에 타들어 가는 듯했습니다. 해결책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늘 다니던 거리에서 정토회 홍보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정토회는 마음수련 하는 곳이라고 하니 괴롭고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동래법당을 제 발로 찾아가 오래된 인연, 부처님께 귀의하였습니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닌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만났습니다. 그 후, 삶의 순서와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수행이 항상 일 순위가 되었습니다.
불교대학 다니던 그해 5월, <깨달음의 장1>을 다녀왔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남편에게 삼배 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한 번도 숙인 적이 없기에 남편은 “이 사람이 와 이라노, 이번에는 제대로 공부 좀 하고 왔는가 보네”라며 깜짝 놀랐습니다. 깨달음의 장은 한 번도 돌아보지 못한 남편을 제대로 보게 하는 마음의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불법을 배우며 인과법에 어긋난 제 기대와 욕심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주위와 비교로 갈등과 괴로움을 만들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 욕심인 줄 모르고 강요했습니다. 무지와 높은 기대로 가족들은 물론 자신을 힘들게 했습니다. 내려놓으면 가벼워지는 연습을 수없이 했습니다. 차츰 마음을 태우던 불길이 잦아들었습니다. 제 변화가 아들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대기업 취업이란 좁은 문에서 걸어 나와 자신이 선택한 직장에서 자리 잡고 제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저는 아들에게서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결혼할 상대를 데려왔을 때도 “네가 좋으면 알아서 해.”라며 아들의 결정을 믿고 지지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제가 많이 변했다고 말합니다. 모두 불법 만나 꾸준히 수행한 덕분입니다. 가끔 아들에게, “내가 너에게 너무 그랬지? 미안해.”라고 하면 “엄마들은 다 그렇지 뭐.” 하는 아들이 참 고맙습니다. ‘지금 알았던 것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40대에 불법 만난 도반들을 봅니다. 본인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린 나이에 기댈 데 없이 고생하고, 실향민으로 평생 외로우셨구나!’ 새터민 봉사를 하면서 미워만 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었겠지요. 아내는 무지해서 당신의 말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제 고집만 부렸겠지요.’ 답답한 마음 풀 길이 없어 술에 의존했음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그 원통함을 돌아가실 때까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흐릅니다.
‘남편도 경험 없는 사업을 불쑥 시작해 힘들었겠지요.’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에 어찌할 바 몰라 좋아하는 술로 마음을 달랬을 뿐이었습니다. 술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서로를 괴롭혔습니다. 지금도 술 좋아하는 남편을 보면 ‘확’ 올라오는 순간이 있지만 금방 알아차립니다. 예전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예전 동래법당에서 사시 예불을 올릴 때 법당 올라가는 복도에 불이 없어 컴컴해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예불을 올리면 마음이 경건해지고 부처님 가까이 가는 듯해서 마음이 맑아졌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올해 4월 샤워하다 넘어져 갈비뼈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압박붕대하고 움직이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제일 먼저 ‘기도는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주일간 30배 해 보고 그 후 아파도 108배를 다했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온 이후부터 새벽기도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 스님에게 상도 받았습니다. 여행이라도 가면 기도 자리부터 정해놓고 잡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한 덕분에 나날이 걸림이 줄어갑니다. 남편도 정토 일을 하는 중이라고 하면, TV 소리를 줄여줍니다. 고맙고 듬직합니다.
저는 늘 주어진 소임 앞에서 많이 주저했습니다. 대중 앞에서 실수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습니다. 컴퓨터에 서툴러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이 무섭고 부담스러웠습니다. 해 보지 않고 ‘이건 내 일이 아니야, 이건 너무 어려워, 이런 일은 못 해’라고 먼저 선을 그었습니다.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용기 내어 해 보니 이제는 뭐든 ‘하니까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려운 소임을 맡았을 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도반의 응원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포기 없이 뜻깊은 2차 만일결사2를 함께 합니다. 요즘은 잘하려 애쓰기보다 그냥 제 방식대로 제 목소리대로 합니다. 진행자 소임으로 법문을 다시 듣고, 학생들의 배움과 수행을 보면서 저의 상태를 돌아보니 좋습니다. 소임을 통해 더 깊고 넓게 배웁니다.
지금은 어떤 소임이든 ‘네.’ 하고 시작합니다. 뭘 하든 부담이 없습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진흙 속에서 물들지 않는 연꽃이 아니라, 진흙의 삶을 택한 원효대사의 행적이 가슴에 와 닿는다는 박예숙 님. 가슴 졸이며 키운 귀한 아들 내려놓고 품는 삶이 한 송이 연꽃을 피워내는 진흙과 닮은 듯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기도하는 수행자, 그의 깊은 향기를 마음에 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안화순 희망리포터(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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