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광명지회
인간 정재연, 그리고 세가지 소원

정재연 님은 예전 법당 소임 하면서 종종 얼굴을 보곤 했습니다. 이번에 《정토행자의 하루》주인공으로 선정되었을 때, 매우 궁금했습니다. 겉으로 비추어진 모습 말고,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수행자라는 이름에 국한되지 않은, 인간 정재연을 만나러 안산에 다녀왔습니다.

2022년 12월 31일, 임진각 기도 두 번째 날

2022년 12월 31일, 임진각을 향해, 월광법사님 광명지회 도반들과 함께 안산다문화센터를 출발했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새해맞이 임진각 만배정진 두 번째 날입니다. 지금은 더 안 좋아졌지만, 그 당시에도 남북 관계는 벼랑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북녘의 얼어붙은 땅과 마른 가지가 보였습니다. 얼어붙은 땅처럼 냉랭해지는 남북 관계가 우리들의 정진으로 조금이라도 녹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2022년 12월 31일 임진각 통일기도(윗줄 오른쪽 두 번째가 정재연 님)
▲ 2022년 12월 31일 임진각 통일기도(윗줄 오른쪽 두 번째가 정재연 님)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남북이 화해하며 함께 번영하기를’
‘평화통일을 이루어 세계평화의 바탕이 되기를’

3대 이상 이어져 온 불자 집안

아버지와 함께
▲ 아버지와 함께

저는 경상북도 점촌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은 충청북도 제천에서 보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님 모두 절에 다니시는 불자 집안으로 비교적 평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절의 신도회장이기도 했고, 어머님은 백중1기도를 열심히 챙겼습니다. 외할아버지가 6.25때 돌아가셔서 시신도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따라다니던 저는 경전을 외울 정도로 불교와 절 문화에 익숙했습니다.

각자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을 물려받았습니다. 또 두 분 다 엄하지 않아 자유롭게 자랐습니다. 특히 언니나 동생은 아버지를 매우 어려워했지만, 저는 유독 저를 예뻐했던 아버지가 편했습니다.

어쩌다 천일결사2

결혼해서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쯤 친정어머니가 57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보면 그 후 몇 년 간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그거 외에는 큰 기복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친한 친구 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가 ‘하루에 천 원 씩 모아서 어려운 이를 돕는다’는 말을 듣고,’그거 정말 좋은 일이네’ 하면서 동참했습니다.

이때부터 매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원래 불자였으니 기도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천일결사였고,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함께 입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자연스럽게 제천 법당에서 하는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 전에도 다른 곳에서 하는 불교대학도 다녀봤지만, 뭔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에서의 법륜스님은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을 해줘서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2017년 7월 15일 임진각 기도(맨 왼쪽이 정재연 님)
▲ 2017년 7월 15일 임진각 기도(맨 왼쪽이 정재연 님)

평온한 일상에 불어온 세찬 파도 ‘너만 없으면 행복하겠다’

28살이 되는 여름에, 제천 향우회에서 만난 남편과 7년 연애 끝에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털털한 저와는 다르게 자상한 성격이었습니다. 저는 녹색어머니회 회장을 하고, 여러 가지 배우러 다니고, 사람도 많이 만나면서 활동적인 반면에, 남편은 조용히 오긋하게 지내는 걸 좋아했습니다. 결혼 초부터 남편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경제적 기반이 약했던 남편은 은행 대출과 사업자 명의를 제 이름으로 했습니다.

결혼 10년 차 되는 어느 날, 다른 여자가 생긴 남편이 "너만 없으면 행복하겠다"면서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그 말이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사업자명의도 다른 여자의 이름으로 바꾸고, 들어간 자금을 돌려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다른 여자가 생긴 것보다는 그러한 남편의 태도와 마음에 배신감이 컸습니다. 상처와 배신감도 이유 였지만 ‘상대가 원하는 걸 할 자유도 있다’라는 법문을 생각하며 이혼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가 얽혀져 있고, 양육권 분쟁 등으로 1년 간의 법적절차를 밟는 동안 많이 괴로웠습니다. 그래도 아웅다웅 싸우거나 욕하지는 않았습니다. 온갖 욕을 듣고 남편이 정토회 행사장까지 와서 소란을 피워도 대꾸를 안 했습니다. 특히 아이 앞에서는 남편을 욕하거나 비하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아들이 ‘왜 엄마와 아빠는 서로 싸우지도 않고, 재혼도 안 하면서 이혼은 왜 했어?’라고 물어 볼 정도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혼한다고 하니 엄청 놀랐습니다.

가슴 아픈 고리 ‘아들’

돌아보면 제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합니다. 양육권이 남편에게 넘어가고, 남편은 저의 가장 소중한 존재이자 약한 고리인 아이를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법적으로 면접교섭권을 얻어서 한 달에 한 번 만나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이에게 ‘엄마가 나쁘다’ 얘기한 건지, 아이 스스로 엄마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아이는 저를 만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찾아가도 아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전화번호도 바꾸어서 매우 힘들었습니다.

전화번호를 수업 참관할 때 가서 알아내고는 계속 연락했습니다. 만나기로 한 날짜에는 아이가 나오든 안 나오든 상관없이 찾아갔고, 매일 문자를 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우산 챙겨가라’하고, 학교 홈페이지 들어가서 일정을 보고 ‘체육복 챙겨가라’ ‘시험 편안하게 잘 보고 와라’ 했습니다. 이렇게 거의 3년을 매일 문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게 오히려 아이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 하며, 포기하는 마음이 들 때 쯤 <나눔의 장3>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참석했었는데 이구동성으로 ‘아이와의 끈을 놓지 말아라, 엄마랑 연락이 되는 아이와 안되는 아이의 심적 상황은 아주 다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2020년 새해맞이 만배정진(오른쪽이 정재연 님)
▲ 2020년 새해맞이 만배정진(오른쪽이 정재연 님)

다시 연락을 계속할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서울에서 광명으로 이사하게 됐습니다. 바쁜 와중에 2개월 정도 연락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 ‘엄마 저 보러오세요’라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어린이날에 보러 갔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러 점심 식사를 같이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벅차고 기뻤는데, 마음은 편안하고 감사했습니다. 이후에 제 문자에 처음으로 단 두 글자의 답장을 보냈을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ㅇㅇ’이라고..

평소 아이에게 아빠에 대해 나쁜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사는 아빠를 미워하면 아이가 힘들어진다는 법문을 듣고 실행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건 아빠가 잘 아니까 잘 상의해 봐", "아빠 생일이니 네가 잘 챙겨줘" 하면서 아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초반에 만날 때는 아빠 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는데,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얘기했습니다.

또 아이가 물어보고 부탁할 때까지 미리 나서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라’ ‘아이가 부탁하는 일만 도와줘라’라는 법문을 듣고 그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는 저에게 어렵거나 고민이 있을 때 편안하게 얘기합니다. 최근에는 여자친구와 학업에 대한 고민을 물어보기도 합니다.

아이한테는 엄마의 힘들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가볍게 얘기하고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덕분에 아이가 엄마에 대한 신뢰가 생겼습니다. 한편으로는 꼭 하고 싶은 숙제가 생겼습니다. 가볍게 우회적으로 지나가는 말로 "너 힘들었지? 미안해" 정도의 말은 했지만, 이제 성인이 된 아들에게 정식으로 진지하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엄마가 선택한 거지만, 그동안 너를 너무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2019년 북한어린이를 위한 옥수수 1만 톤 모금 운동(맨 왼쪽이 정재연 님)
▲ 2019년 북한어린이를 위한 옥수수 1만 톤 모금 운동(맨 왼쪽이 정재연 님)

남편에게 3년간의 참회, 그리고 나눔의 장

이혼하고 나서 3년 동안 남편에게 참회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와 소임속에 남편을 많이 이해하고, 저도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올라오는 감정은 간헐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후에 <나눔의 장>에서 남편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과 저의 상처가 아직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너만 없으면 행복하겠다’라는 말에 제가 정말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모르고, 그 마음을 보듬어 주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외로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건데, 제가 상처받고 오래 가지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사교적이고 외부 활동을 많이 한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외로움을 느꼈듯이, 남편도 저의 외향적 성격에 소외감을 느끼고 힘들었겠구나 했습니다. ‘충분히 내가 할 일을 다 했다’는 제 생각과 행동에 상대방은 굉장히 답답했었음을 이해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자상한 아빠로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돌아보면 처음 3년간의 참회 기도는 제가 편해지고자 했던 것이고, 남편에 대한 깊은 이해는 못했던 것입니다.

2016년 통일의병 발대식, 문경수련원에서(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정재연 님)
▲ 2016년 통일의병 발대식, 문경수련원에서(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정재연 님)

소임으로 이겨내고, 소임에 울고, 소임에 행복하고, 소임에서 길을 찾다

최초 소임은 경전대학에서 회계와 담당 소임을 맡았습니다. 이혼하면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 제가 기도의 끈을 놓칠까 봐 걱정했던 도반이 서울정토회 총무도반과 연결해 주었습니다. 그 때 무슨 정진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은데, 저에게 목탁 치는 소임을 주었습니다. 힘들고 괴롭던 마음이 청아한 목탁 소리와 간절한 정진 속에 녹아 들어갔습니다. 이후로 서울정토회 회원관리와 광명법당 불사 회계를 맡았습니다. 소임 속에서 자칫 무너질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2016년 4차 통일의병대회. 황룡사지 역사문화관, 9층 목탑 모형을 배경으로(왼쪽 두 번째가 정재연 님)
▲ 2016년 4차 통일의병대회. 황룡사지 역사문화관, 9층 목탑 모형을 배경으로(왼쪽 두 번째가 정재연 님)

이후 광명법당 저녁책임팀장을 맡고, 인천경기서부 선임팀장 소임을 했습니다. 지금은 회계, 회원관리 등 소임이 세분되었지만, 당시 지부 소임은 혼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와우4시스템과 구글관련 업무가 모두 초창기였던 때라, 불완전한 프로그램에 혼자 공부하면서 업무를 했습니다. 함께하는 일이면 도반들과 나누기라도 할 텐데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지부에서 기획이 돼야, 법당에서 일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에 미루면 안되었습니다. 거기다 통일의병 소임도 겹치면서 너무 힘들어 컴퓨터를 잡고 울기도 했습니다.

힘든 소임 속에서도 저로 인해 전법할 수 있는 공간과 일이 진행된다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회계업무를 할 때, 지나가는 말로 "이걸 밤에 다 해야 돼요?"라는 말을 했는데, 한 도반이 밤에 조용히 와서 함께 회계철을 묶어주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이렇게 하는 게 참 보람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현재는 안양정토회 대표, 광명지회장을 거쳐 인천경기서부지부장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도반들과 관계 때문에 크게 힘들지 않았는데, 그만큼 저를 도와주는 도반들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첫 번째 소원 –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

처음 제천법당에 다닐 때, 갑자기 목탁을 가르쳐주더니,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서울에 와서 보니 그때 읽었던 것이 통일기도 발원문이었습니다. 그게 인연이었는지 통일의병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통일의병 소임을 하면서 통일의병 대회를 1차부터 계속 참여하고, 3년간 1초도 끊어지지 않는 통일기도도 매일 참여 했습니다. 3년 기도 후에도 매주 통일기도에 참석하고, 도반들과 함께 815 임진각 기도를 전국적 행사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평화통일에 대한 원을 세우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건, 어느 날 월광법사님이 매일 아무도 없는 긴 시간 혼자 기도했을 때의 그 마음이 탁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법사님의 원이 저의 원이 되니 그냥 계속 했습니다.

참고:월광법사님 두 번째 이야기

저를 잘 살피지 못해 미워했던 마음이 있었다는 걸 늦게 알아차렸고, 그게 탁 풀리는 순간 인생이 가벼워졌습니다. 남북의 분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형적으로 갈라질 수는 있지만 미워하는 마음이 해결되면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올 거라는 염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6.25 때 돌아가셔서 외로웠던 저의 어머니처럼, 상처 받은 사람이 많고, 그게 다음 세대로 계속 내려오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북한 정권도, 통일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오해와 어리석음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 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이 넓게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고 한계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그만 힘들이 모여, 어떤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공동체에 있는 이유입니다.

2017년 815임진각 평화통일기도(왼쪽면 위에서 두 번째가 정재연 님)
▲ 2017년 815임진각 평화통일기도(왼쪽면 위에서 두 번째가 정재연 님)

두 번째 소원 - 100만 수행자의 양성

요즘 사회에 불안한 사건들이 자주 생깁니다. 그만큼 사람들도 불안해 하고, 안전하지 않은 사회가 됐다는 방증입니다. 특히 제 아들 세대인 20대의 불안감이 큰 것 같습니다. 정토회에서 추구하는 수행자가 많이 생긴다면, 이런 사회의 흐름에 변화를 줄 힘이 생깁니다.

정토회원들의 구성도 직업과 소임을 병행하는 인원들이 전체의 70%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전업주부 회원들이 많았는데, 파트타임 등 아르바이트 일을 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생계를 위한 일과 함께, 소임을 가볍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할 수 있으려면, 소임을 세분화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인원이 많아져야 하고, 그래서 100만 수행자가 필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순 부속처럼 일하는 것이 아닌, 전체 흐름을 잘 이해하도록 해야 보람을 느끼고, 자기실현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제 소임 중 통일의병, 전법회원에 대한 교육 진행과 연구를 하는 연수원 소임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시각과 제대로 된 관점, 그 속에서 본인이 하는 역할에 대한 자부심을 얻게 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연수를 통해서 본인이 그런 일을 하고 있지만 ‘전체속에 내가 작은 모자이크 붓다’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소원 – 사홍서원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이 땅에 고통받는 중생이 한 사람도 없는 정토세계를 이루겠습니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어떠한 경우에도 괴로움과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행 정진하겠습니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라’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하며 모두 배우겠습니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일체중생과 더불어 꼭 성불하겠습니다)

정토회 와서 처음 사홍서원할 때, 고개를 안 숙였습니다. 사홍서원이 너무 원대한 꿈인데, 저는 이거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엄청 오만했습니다.

지금은 사홍서원할 때 눈물이 핑 돌 때가 많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내가 이걸 원으로 삼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이 생애 못하면 다음 생애라도 하겠다’ 하는 마음입니다.

2022년 5월 부처님 오신날. 문경수련원 연등 울력(왼쪽 첫 번째가 정재연 님)
▲ 2022년 5월 부처님 오신날. 문경수련원 연등 울력(왼쪽 첫 번째가 정재연 님)


글 편집 형식상 조금 진지한 느낌이 들지만, 정재연 님은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한 모습입니다. 소임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의 본래 목표인 수행자틀을 벗어난 인간 정재연을 파고들어 봤습니다. 하지만 결국 수행과 세속적 삶을 구분했던 저의 속마음만 들켰습니다. 본래 모든 인간의 삶 자체가 수행임을 깨닫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여행이나 취미활동 운동을 하고 싶지는 않나요?’ ‘소임 때문에 그런 걸 못 해서 아쉽지 않나요?" 라는 저의 질문에 대한 정재연 님의 답으로 글을 마무리 합니다.

"예전에 많이 했어요. 술도 먹고…지금도 그런 거 마음먹으면 할 수 있지요. ‘소임 때문에 못 한다’ 하는 것은 핑계 대는 거죠. 다른 삶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게 이제 나의 삶인데, 구분 지어서 이분법적으로 뭘 더하고 싶고, 이것 때문에 못 하고 이런 건 이미 없습니다.”

글_윤정환(인천경기서부지부 안양지회)
편집_김난희(강원경기동부지부 원주지회)


  1. 백중불교 7대 행사의 하나. 돌아가신 조상님을 생각하며 천도재를 지냄. 

  2.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3. 나눔의 장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인간관계가 평화로워지는 4박 5일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참여자만 신청하여 참여할 수 있음. 

  4. 와우정토회의 회원정보 통합관리시스템 

전체댓글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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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희

함께 하는 도반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2024-02-22 02:46:34

박정순

눈물 핑그르르~~
재연님이 그렇게 담담하게 사셨네요~
깊이있는 대화도 안 해보고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 늘 다부진 모습이었어요. 아들과의 관계는 참으로 감동입니다.
그 아들이 이젠 다 커서 엄마를 늠름하게 볼 것 같네요~~
재연님 같은 분이 정토회에 있어 참 다행입니다_()_

2024-01-25 21:46:34

성현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12-03 19: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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