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정토행자의 하루
소소(小小)

너무 작아서 손에 쥐고 있기도 힘든, 아주 소소한 일상의 깨달음들이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이렇게 온라인으로 흘러가도록 두어 봅니다. 또 모르죠. 흘러 흘러가다 보면 다른 도반의 지혜와 만나 어느 날 큰 바다를 이룰지도요.

그녀의 삼배는 진심일까

아내와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우리는 24시간 붙어 있습니다. 일도 같이하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이 쉽니다. 온종일 서로 많은 말을 하지요. 그 말들에는 대부분 애정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너도 스트레스를 받고 나도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겹치면, 모서리가 뾰족한 말들이 팝콘처럼 서로에게 툭툭 튀어 가곤 합니다.

아내는 저보다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팝콘이 더 많이 튀지요. 또 저는 상처도 잘 받는 성향이라 팝콘 두어 개쯤 맞으면 '억'하고 쓰러집니다. 화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소위 삐지기도 하면서 시간이 흐릅니다. 아내는 자기 잘못을 곧잘 인정합니다. 그건 장점이에요. 요즘 아내는 무슨 유행처럼 무릎을 꿇고 사과합니다. 이렇게요.

▲ "여보, 제가 엎드려 사죄합니다."

처음 이 모습을 보았을 때는 놀라서 일으켜 주었습니다. "당신이 잘못한 건 맞는데 무릎 꿇을 정도는 아니다." 하면서요. 그때 아마 제가 살짝 화가 풀린 듯한 표정을 지었던 모양입니다. 아내는 그 이후로 계속 무릎을 꿇습니다. 제 표정이 조금만 안 좋으면 갑자기 털썩 주저앉아 사과하는 것입니다. 한 번에 안 풀리는 것 같으면 저 모양으로 삼배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 장난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말해보지만 이미 저도 피식 웃고 있습니다.

아내의 몸이 내려가는 곳에 마음이 가고, 몸 가는 데 마음 가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의 화도 함께 내려간 것입니다.

새벽 정진은 그 사죄를, 나에 대한 참회를 108번 하도록 합니다. 절을 하는 데 익숙해지니 '몸 가는데 마음 가는 효과'를 잊곤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나는 얼마나 풍선처럼 팝콘처럼 툭 치면 어딘가로 날아가 돌아오지 않을 만큼 둥둥 떠다니는지요. 새벽에 20분이라도 바닥을 기며 나를 한껏 내려보고자 합니다. 몸 가면 반드시 마음 가더라고요. 우리 아내처럼요.

어디서 아빠한테

아들이 네 살이 되었습니다. 말을 안 듣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분명 저놈에게 제 말이 들리는 것 같긴 한데, 자기 목소리가 너무 크다 보니 결국 제 말은 안 들리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제일 잘하는 말은 "아니야!"이고, 제일 잘 하는 행동은 이겁니다.

▲ "아닌데?!"

아들은 배를 까놓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덤비곤 합니다. 뭐가 됐든 일단 아니라는 거죠. 자기주장을 하는 데는 배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쳤는지 일단 배부터 까는 것입니다.

도를 넘는 짜증이나 화는 잡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다스릴 수 있게끔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화를 내다 내다 화에 사로잡혀 저를 발로 찼네요. '아 이때구나' 싶어서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아들의 어깨를 잡았습니다. 눈을 맞추면서요. 한마디 해야하는 타이밍인데 적절한 '훈육의 한마디'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훈육에서 중요한 것은 메시지보다는 타이밍이라고 했습니다. 일단 말부터 하고 봅니다.

"아빠를 때리면 안 되지. 아빠가 네 친구야?"

좀 유치했지만 '단호한 목소리였어. 거의 불호령이었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들이 울면서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그 순간 말문이 막혀 눈빛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저는 아들에게 늘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었으니까요. 저도 모르게 "그래...고...고맙다."하고 안아주었습니다. 아빠는 뭐가 고마운지도 모르고 고맙다고 말하고, 아들은 울다 말고 웃음이 나는지 큭큭대더군요.

하나만 하자

불법을 배우는 아빠이니 남다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 같으면서도 엄격할 때는 엄격한 아빠'라는 상을 지었습니다. '사랑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따끔하게 훈육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치는 멋진 아빠' 그런 것이지요. 멋있잖아요?

그러나 아이에게 친구란 어디까지나 대등한 놀이 동무입니다. 친구면 친구고, 아니면 아니지 '엄격한 친구'라는 건 모순이었어요. 친구이면서 엄격한 아빠라면 사실 친구도 아니고 엄격한 아빠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요.

그래서 우선에 엄격한 아빠는 달성했으니, 이번에는 친구가 되어 보기로 했습니다. 아들은 아빠보다 친구의 조언을 귀담아듣습니다. 기분도 더 좋아 보이네요. 물론 여전히 저를 툭툭 차기도 하지만, 저도 아들을 차니까 괜찮습니다.

여기를 톡 차면 되게 좋아합니다. 애들이란.
▲ 여기를 톡 차면 되게 좋아합니다. 애들이란.


글_이승준(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편집_권영숙(서울제주지부 서초지회)

전체댓글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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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남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2023-09-15 11:57:10

김영아

바삭한 쌀과자 같은 글을 읽으며 입꼬리가 절로 올라감을 느낍니다. 이승준님 후속편 기다릴게요~. 감사합니다!

2023-09-13 22:39:40

김미래

모순된 상을 참 많이도 짓고 있구나!를 일화속에서 알아차렸지만 내삶에 너무나도 많네요.. 웃다가 뜨끔하네요ㅎ 저도 하나만 하겠습니다.

2023-09-12 19: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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