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저는 평소 나이 차가 있는 세 아이의 교육 문제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어릴 적 받지 못한 사랑을 제 아이들에게는 아낌없이 주고 싶었습니다. 과외, 학원, 읽어야 할 도서 목록, 진학할 학교까지 내 식대로 정해놓고 아이들을 그 기준에 맞추려 애쓰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대학생인 막내아들이 “중학교 때 시험 끝난 날, 엄마가 ‘4시까지만 놀고 4시 이후에는 책 읽으면서 놀아.’라고 했어.”, “엄마는 의견을 물어보기는 하는데,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답정녀야.”라며 그때 이야기를 합니다.
제 말을 잘 듣고 착실히 공부하는 아이들이었지만, 세 아이의 눈높이와 기준에 맞추는 것이 힘들고 지칠 때 우연히 ‘법륜스님의 희망편지’를 읽었습니다. ‘허송세월하는 자식을 보는 게 힘듭니다.’라는 질문에 냉정해야 자식을 도울 수 있습니다. 냉정하다는 것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이라는 스님의 답변에 답답하게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렸습니다. 내 짐을 내려놓고 어떻게 하면 가볍게 살 수 있는지 해결하고자 포항에 있는 양덕법당을 찾아가 2015년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법문 듣는 게 좋아 화요일에는 불교대학 수업, 수요일에는 수행법회를 들었습니다. 불교대학생이 수행법회도 꾸준히 참여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수행법회에서 촛불 켜고 끄는 첫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법회나 불교대학 행사 때 반찬 봉사 등 작은 소임을 하며 법당에 가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2016년 경전대학에 입학해 금강경 법문을 들으며 매시간 온몸의 때를 닦아 내는 듯 개운함과 새로 태어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강의 내용 중 ‘무주상보시’는 어리석게 살아온 저를 돌아보게 했고, 후회와 자책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은 제가 나누기할 때 '내가 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저는 본가, 동생들, 남편, 시댁에 뭘 했다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법문을 들으며 ‘힘들다거나 원망하는 마음 없이 그냥 했다면 마음이 편안했을 텐데.’ 지난 과거의 내 모습을 참회했습니다. 그렇게 깨우치고 나니 ‘내가 뭘 했다.’라는 마음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에게도 하나부터 열까지 내식대로 해주는 제 모습을 참회하고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렸습니다. 갑자기 자신들에게 집착을 놓아버린 엄마의 모습에 막내는 ‘왜 아무것도 안 해 주냐?’라고 불평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지은 인연과보는 달게 받겠다는 마음으로 “그때는 잘한다고 했는데 미안하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고 지금은 아이들과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공부와 명상을 하면서 무의식에 쌓여있던 감정들과 힘들고 불안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럴 때면 말하는 도중 머릿속이 하얘지며 말문이 콱 막히는 증상이 있었습니다. 나누기할 때 속 시원하게 말이 나오지 않아 스스로 ‘나는 말을 잘못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불안한 감정이 옅어졌고, 진솔한 나누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나누기를 들은 도반들은 “나누기를 잘한다.”라며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꾸준히 마음공부하고 있는 저는 지금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이 더 이상 괴롭지 않습니다.
경북 경산 시골 마을에서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루는 술주정하는 아버지를 피해 동생을 업고 동구 밖으로 나간 엄마를 따라갔습니다. 다섯 살인 저는 엄마가 집을 나갈까 걱정되어 아기 포대기 끈을 붙잡고 “엄마, 내가 말 잘 들을게요.”라며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속상해 바람 쐬러 나갔을텐데, 제게는 그 사건이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부모님께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칭얼거리지도 않고, 그저 말 잘 듣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동생들을 업고 돌봐야 했기에 친구들과 홀가분하게 놀았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는 장날이면 장에 가서 늘 술 마시고 술주정해서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있어 위안이 되었고,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소여물을 쑤고 그날 할 일을 준비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들어 주기는 했지만, 심적으로는 힘들었는지 며칠씩 식사를 거르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나 엄마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지만, 그때는 제가 너무 어린 나이여서 이중적인 아버지의 모습과 넉넉지 않은 형편에 많은 자식을 낳은 엄마가 답답하고 불안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구미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안보고, 집안일도 안 하고 내 할 일만 하니 편했습니다. 미혼인 고모가 교복과 운동화 빨래하는 방법 등 시골에서 온 저에게 기본적인 생활 습관을 알려주었습니다. 할머니와 고모가 잘해 주었지만, 엄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고 “나는 왜 이 집에 태어났을까?,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라며 방황했습니다. 해답을 찾고자 관상 및 자기계발서 등의 책을 읽었지만, 어린 나이에 내용도 이해하지 못했고 마음속 궁금증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궁금함은 해결하지 못했지만, ‘지금 내가 학생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다.’라고 생각하고 대학에 가기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네가 아들이면 땅을 팔아서라도 대학을 보내지만, 딸은 안 된다.”라고 하셨고 저는 결국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부모님께 너무 서운하고 속상하여 6개월 동안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은행에 취직하여 독립했습니다. 엄마를 돕기 위해 여동생 셋을 데리고 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19살 때부터 시작한 첫 적금을 타서 부모님께 드렸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많았지만, 겉으로 대들거나 반항한 적은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뒤늦게 아버지께 ‘그때 왜 그러셨냐?’라고 좀 따지고 싶었지만, 노인이 된 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엄마에게는 내가 무조건 돕고 잘해야만 해.’라고 생각했지,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쌓아둔 채 속마음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도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저를 좀 어려워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교감 없이 무조건 참고 맞춰왔던 부모님과의 관계가 등짐을 진 것처럼 힘들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제 마음을 털어놓고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것이 마음의 짐으로 남았습니다. ‘나눔의 장’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풀어 놓았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술에 의지했던 아버지는 아버지 인생을 살았을 뿐, 일부러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려고 한 게 아니다.’라고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치유되었습니다.
스물여섯 살 때 고모에게 지금의 남편을 소개받아 가볍게 만났습니다. 세 번째 만남에서 남편 따라 시댁 가는 길에 버스 창밖으로 바다를 처음 보았습니다. 너무나 좋았습니다. 남편은 부모님께 저를 소개했는데, 저는 그분들이 참 좋은 분들로 느껴졌고 특히 시어머니께 믿음이 갔습니다. 남편이 이렇게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면 괜찮겠다는 생각과 함께 남편에게도 믿음이 생겼습니다. 어릴 적 끊임없이 술주정하는 아버지의 영향인지 저는 평소 술, 담배 하지 않는 남자면 괜찮다는 상을 가지고 있었고 남편은 딱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조건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으면 내가 벌면 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적 ‘엄마는 자식을 왜 이리 많이 낳았을까?’라며 속으로 원망했는데, 딸 넷, 아들 둘을 낳은 엄마와 비슷하게 저 역시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첫째, 둘째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양육했습니다. 정토회를 만나 스님 법문을 듣고, 세 살 까지 제가 직접 키우지 않은 점이 두고두고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뉘우쳐집니다. 중학교 시절 저를 몇 년 동안 키워준 할머니께 엄마는 크게 고마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점이 할머니에 대한 마음의 빚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를 키워주신 시어머니께 빚 갚는 심정으로 필요한 것 다 해드리고 남편과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댁과 불화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마흔에 직장을 은퇴한 후 얻은 셋째는 온전히 제가 키웠습니다. 셋째를 양육하며 첫째와 둘째를 맡아 키워주고 살림도 도와준 시어머니께 무척 고맙고 감사합니다.
경전대학 졸업 후 그 이듬해 경전대학 담당 소임을 맡아 감동의 법문을 다시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2021년 모둠장 소임을 맡아 온라인 불교대학 돕는 이와 경전대학을 진행하며 전법활동가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22년 모둠장 모임 때 가벼운 산행을 하는 중 넘어져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습니다. 살면서 느낀 가장 심한 통증이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손목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덜 아픈 척하고 하산 후 점심 식사가 끝날 때까지 먼저 병원에 가야겠다.라는 말을 못했습니다. '아프기는 하지만 손목 아프다고 죽기는 하겠나?' 는 마음으로 참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뼈를 맞추고 깁스까지 한 후, 이튿날 새벽 공동정진에 참여했습니다. 정진을 마친 후 지금은 지회장인 도반이 “보살님 손목이 부러졌으면 바로 말을 해야지. 왜 말 안 했냐?,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아픈 것보다 도반들 각자 소임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른쪽 손목이 예전부터 안 좋았다고 도반들을 안심시키고 수술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술 후 종이 한 장도 들 힘이 없어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제게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평소 남에게는 물론 가족에게도 부탁을 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탁을 안 하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식사 때 물도 자기 손으로 마시지 않던 남편이 두 달 동안 집안일을 했습니다. 퇴근 후 신나게 설거지하고 음식물쓰레기도 비우는 남편을 보며, '시댁에서는 알아서 열심히 청소하면서 왜 우리 집 일은 안 하는지?' 분별했던 지난날을 반성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몸살 나면 약 먹고 열 내린 후에 집안일을 했으니, 남편은 제가 아픈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런저런 심부름을 부탁해도 남편은 싫은 내색 없이 다 들어 주었고 남편의 배려로 손목이 잘 나을 수 있었습니다.
2022년 으뜸절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법사님이 “요즘 남편하고 어떻게 지내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속상한 일도 속으로 삭이고 부정적인 말을 못 하는 저는 남편이나 시댁과의 긍정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며, “이제 곧 나이 예순이 되고 큰일도 없는데 그냥 살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제 말을 들은 법사님은 “부정적인 이야기도 해 보는 연습을 하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기도 후 나누기 때 남편에게 감사한 점도 한 가지씩 적어 보면 도움이 될 거다.”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적다 보니 남편에게 남아있던 미진한 마음들이 옅어지며 내 업식에 가려 남편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보며 가졌던 남자에 대한 선입견을 남편에게 적용했음을 알았습니다. 부모님과 시원하게 소통하지 못했던 것을 남편에게까지 이어왔던 것입니다. 남편의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임을 자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기분 나쁠까 조심스러워 그동안 하지 못한 말들을 조금씩 얘기하니, 막상 말하고 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놀라웠습니다. 지금의 저는 남편과 대화도 잘하고, 함께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도 보는 등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토회를 만나 마음공부를 하던 중, 막내 아이 대학 문제로 1년 동안 한 달에 반씩 포항과 서울에 오가며 생활했습니다. 서울 법당이 낯설고 어색하여 수행법회 참여에 뜸했습니다. 그런데 선배 도반들이 제 상황에 맞게 할 수 있는 소임을 주어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2021년 온라인체계로 바뀌고 ‘나이 많고 시력도 안 좋아 전법활동가로서 내 역량이 부족하겠다.’라고 고민했습니다. 법사님께서 “보살님은 자기 생각이 꽉 차 있는 사람이다. 할 수 있고 없고는 정토회가 선택한다.”라며 내 생각에 사로잡혀 남의 말을 잘 못 듣는 저를 일깨웠습니다.
만일결사를 회향하며 일만불대 전법을 할 때였습니다. 전법활동가가 부족하여 중복 소임을 맡았는데, 모둠장인 저보다 소임이 많고 분주하게 활동하는 선배 도반들이 수행법회, 명상수련, 공동정진, 실천지봉사 등 개인 수행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감동했습니다. 선배 도반들이 활동하고 정진할 때 따라만 했는데 저의 역량이 커졌습니다. 정토회를 만난 것, 모자이크 붓다인 선배 도반들을 만난 것은 제 인생의 큰 선물입니다.
불법 만나 너무 기뻐 가족들에게 전법 했습니다. 첫째 아이는 행복학교와 불교대학을 졸업했고, 둘째 아이는 불교대학, 〈깨달음의 장〉을 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엄마가 좋다면 나도 좋다면서 잘 따라옵니다. 남편에게는 ‘혹시나 내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법륜스님의 이름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불교대학 모집 마감일인데 한번 해볼래요?” 툭 던지듯이 말했습니다. 남편도 궁금했던지 퇴직 후 여유가 있어 바로 불교대학에 입학하여 경전대학까지 마쳤습니다. 그러나 아직 막내는 “엄마만 좋으면 됐어.”라고 여전히 철벽을 칩니다. 대학교 4학년인 막내는 요즘 진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부디 불법 만나 행복하게 살길 기대해 봅니다.
작년 고등학교 짝꿍과 30년 만에 연락이 닿아 통화를 하던 중 불교대학을 소개했고 입학했습니다. 제 결혼식에 왔었던 친구 결혼식엔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불법을 선물할 수 있어 기쁘고, 제 마음을 받아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친구 또한 불교대학 공부 잘하고 있다며 제게 고맙다고 합니다. 매 학기 행복학교, 불교대학에 한 사람 이상 입학시키고자 노력합니다. 그 노력이 성공하지 못해도 이제는 부담 갖지 않습니다. 3년 정도 지인들에게 희망편지를 보내며 ‘나는 다만 전달자일 뿐이다.’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가볍게 합니다.
나도 모르게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정토회와 법륜스님, 법사님, 함께 하는 도반들 모두 고맙습니다. 은혜 갚는 마음으로 제가 할 수 있는 한 모자이크 붓다가 되어 이 좋은 법을 전하며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기분이 나쁘면 부정적인 말이 생각보다 더 빠르게 입으로 튀어나오는 저로서는 손목이 부러지는 상황에서도 남에게 피해가 될까 고통을 참는 것은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똑같은 법문을 듣고도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살아가고 있는 저를 돌아보았고, 인터뷰 때도 부족한 리포터를 배려해준 따뜻함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린 시절 동생을 업던 등 위에 이젠 전법이 있고, 한 사람, 한 사람 불법을 전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선배 도반들과 신나게 전법 놀이하는 최희숙 님을 늘 응원합니다.
글_정태남(대구경북지부 구미지회)
편집_김윤희(강원경기동부지부 용인지회)
전체댓글 21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포항지회’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