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달서지회
수행은 삶의 힘

저는 초보 희망리포터로서 처음하는 인터뷰에 잔뜩 긴장했습니다. 하지만 밝은 미소로 인사하는 김은선 님을 만나며 긴장이 풀어지고 편안하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정토행자는 전법활동가교육생 돕는 이 소임을 하고 있는 대구 달서지회 김은선 님입니다. 김은선 님이 어린 시절 겪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경험은,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묵묵히 마주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저력이 되는 듯합니다. 주인공이 수행을 통해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23년 부처님오신날 김은선 님
▲ 2023년 부처님오신날 김은선 님

행복을 찾아서

정토회를 만나기 전 이곳 저곳 이 절 저 절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고, 대구에서 열린 즉문즉설 강연 참석을 계기로 정토회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어 행복을 찾아준다는 말을 듣고, 2018년 행복학교에 등록했습니다. 행복학교에서 법륜스님의 말씀은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기뻤고, 마음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듯 충만했습니다. 행복학교에서 많은 행복을 느끼고 행복 시민으로 활동하며 ‘불교대학도 다녀보자.’라는 마음이 생겨 불교대학까지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토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활동하면서 참 좋았던 점은, 도반들이 그냥 있는 그대로 저를 인정하고, 재촉하지 않고, 지켜봐 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토회가 한결같이 활동하는 모습도 좋았고, 정일사 때 법사님이 제게 콕 집어주는 수행 지도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 활동을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얘기를 잘하지 못하면 못 하는 대로 받아주고, 제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무척 행복했습니다. 행복학교 다닐 때 받은 감동은 이어진 행복 시민 활동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동력이었습니다.

2018년 행복학교활동(오른쪽 김은선 님)
▲ 2018년 행복학교활동(오른쪽 김은선 님)

정토회를 만나기 전 저는 겉으로는 가정과 직장생활을 무리 없이 해나갔으나, 마음 한편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30대부터 마음 수련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위안받고 다소 편안해지는 경험은 했으나, 깊숙한 마음의 갈증을 해소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삶이 허전하고 외로운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받았습니다. 저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그저 눈치 보며 맞추려고 했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만 했고, 저 자신이 어떤지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을 찾아서

수행하면서 살아온 습관과 업식을 돌아보면 어린 시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린 시절 기억이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기 위해 형제들에게 묻고, 시골 동네에 찾아가 뒷집 어르신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학교생활기록부도 떼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린 시절 기억을 짜 맞추기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저 자신이 진짜 제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023년 모둠활동(뒷 줄 왼쪽 네번째 김은선 님)
▲ 2023년 모둠활동(뒷 줄 왼쪽 네번째 김은선 님)

저는 3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엄마는 일곱 명의 자식을 낳고 제가 4살 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마의 빈자리에 젊은 새엄마가 들어와 이복동생을 낳았습니다. 손위 형제들은 결혼하거나, 직장 다니며 각자 살기에 바빴습니다. 당시 어린아이인 저는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집에 혼자 남아 부모님이 싸우는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새엄마가 아버지와 싸우다 홧김에 이복동생에게 약을 먹이며 죽이겠다고 난리 칠 때, 저는 혼비백산하여 이복동생인 아기를 업고 집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그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추운 겨울 찬물에 맨손으로 빨래하고, 새엄마가 돈 빌려 오라는 심부름시키면 이웃에 돈 빌리러 다니는 등, 제가 집안 살림에 큰 몫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과 7, 8년 함께 살다 부모님은 이복동생과 안동 시골에서 시내로 이사 가고, 나머지 형제들과 저는 따로 대구로 분가했습니다.

대구에서 저희 5남매는 단칸방에 세 들어 살면서, 주인집 눈치를 보며 조심하고 살았습니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 저는 직장 다니는 언니를 위해 밥도 하고, 언니가 야근할 때는 직장까지 찾아가 기다리다 일 끝나면 같이 집에 왔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저는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고 학업은 주경야독하며 고등학교, 대학교 과정을 혼자 힘으로 마쳤습니다. 초·중학교 생활기록부를 읽어보니, 그 당시 의기소침하고 소심했던 제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당뇨병을 앓던 아버지는 일할 수 없었고, 자식들이 버는 적은 수입은 살아가기에 몹시 빠듯했습니다. 아버지는 당뇨병이 악화하여 새엄마와 이혼하고, 자식들이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대구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18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내면 아이를 보듬는다.

어린 시절 저는 아프면 아프다고 울고 소리칠 줄 몰랐습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하라는 대로 순종하고 제 앞에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해냈습니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해 부모님과 함께한 추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나이 들어 삶이 고단할 때, 자식을 많이 낳고 일찍 돌아가신 엄마가 야속했고 원망하는 마음이 났습니다.

2023년 전법활동가교육 돕는이 활동(앞줄 오른쪽 김은선 님)
▲ 2023년 전법활동가교육 돕는이 활동(앞줄 오른쪽 김은선 님)

어느 날 둘째 언니의 “우리가 부모님 도움은 못 받았지만, 우리끼리는 잘 산 것 같다.”라는 말을 듣고, 저는 어린 시절 아픔이 떠올라 마음이 무척 불편했습니다. 또한 나눔의 장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데, 보살핌을 받지 못한 어린 제가 너무 안쓰러워 눈물이 났습니다.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아이, 말문이 닫힌 아이, 기억 저편에 처박혀 방치된 어린아이를 성인이 되어 비로소 마주했습니다. 어릴 적 알아차리지 못했던 마음을 끄집어내어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과정에서 응어리가 풀어졌습니다. 그리고 ‘서른아홉 나이에 핏덩이 같은 자식 일곱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난 엄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었습니다. 엄마를 원망했던 마음이 이해와 감사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남편과 도반이 되다.

부모님을 비롯해 형제들의 편치 않은 결혼 생활을 보며 저는 웃음꽃 피는 화목한 결혼을 꿈꾸었습니다. 남편의 미소 띤 편안한 모습을 기대하며 남편을 받아주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 기대에 어긋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고, 남편은 말수가 줄어들며 웃지 않았습니다. 사람 좋아하는 남편은 상대의 부탁을 거절할 줄 모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작정 돈을 빌려주어 경제적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결혼하고 25년 넘게 그런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했습니다. 결국 남편의 사업이 풀리지 않았고 억대의 빚을 떠안았습니다. 그로 인해 심각하게 이혼을 고려할 정도로 부부관계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20년 넘게 계속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남편의 의지로는 바뀌지 않는 습관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의 관계를 내가 결정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이 살지, 아니면 헤어질지. 다행히 정토회 활동을 통해 관점이 바뀐 저는 이 상황을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면서, 대신 이혼을 1년간 보류하는데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 조건은 ‘첫째 불교대학에 입학하기, 둘째 5시에 일어나 함께 기도하기, 셋째 그 두 가지를 1년 동안 해 보기.’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보고 그 후 내가 이혼을 결정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 후 1년이 지나 지금은 4년째입니다. 제가 그때 이혼이 아닌 같이 사는 것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혼은 1년 뒤에 해도 되고, 무엇보다 정토회에서 공부한 덕에 ‘제 마음이 단단해지니 남편이 무엇을 하든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댁식구와 여행 중 남편과 함께
▲ 시댁식구와 여행 중 남편과 함께

그렇게 남편은 저의 권유로 불교대학에 입학해 저와 함께 도반이 되었고, 1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기도를 했습니다. 덕분에 결혼 생활 최대의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는 생활을 하다 보니 3년 만에 빚을 다 갚고 지금은 저축도 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던 남편과 저는 동네 앞산 계곡에 앉아 “여기가 알프스고, 미국의 로키산맥 계곡이다. 이리 좋은 데 멀리 갈 거 뭐 있노?”라며 웃습니다. 저희 부부는 10년 넘게 시험관시술을 했으나 아이와는 연이 닿지 않았고, 지금 이대로 둘이 잘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저의 도반이자, 제겐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한 지원군입니다.

제가 정토회 활동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점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 정토회에 와서 몇 년 동안 이 점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정토회는 마음나누기 등 말을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 제가 진행을 맡았을 때는 종이에 적은 것을 그냥 읽는 수준이었습니다. 또 사람들 앞에 서면 땀이 나고 떨리면서 말할 내용을 잊어버리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제 감정을 조금만 건드려도 바로 눈물부터 나곤 했습니다.

작년에〈나눔의장〉에 갔을 때 이 과제를 풀고 싶어 저의 어린 시절 겪은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뭔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이렇게 속마음을 이야기하니 ‘어 별거 아니네!’, ‘내가 뭘 이렇게까지 숨길 게 뭐 있노?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에 그런 환경에서 그런 인연으로 내가 그렇게 되었을 뿐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면서 말이 조금씩 나왔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스스로 참 대견하다.’라고 여기며 저를 쓰담쓰담합니다.

2018년 행복학교 개근 꽃선물
▲ 2018년 행복학교 개근 꽃선물

그리고 무엇보다 천군만마 같은 남편이 도움이 되었고, 지지를 많이 해줍니다. 제가 진행자 소임을 맡았을 때, 말하는 두려움이 커서 정토회를 그만두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남편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냥 해봐라,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졌잖아.”라는 격려의 말에 용기를 얻어 정토회 활동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고 또 하다 보니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고 있으니 참 기특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면 두렵지만, 이제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고, 전보다 가볍게 마음을 내어 놓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말주변이 없는 저에게 홍보꼭지 소임이 주어졌는데, 이전 모습과는 달리 그냥 ‘예’하고 기꺼이 합니다.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기

정토회에서 수행, 봉사하면서는 행복학교 다닐 때의 감흥과 달리 자책을 많이 했습니다. 기도하며 자책을 많이 하는 저를 보는 것이 힘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상대의 요구에 맞추고 저를 바꾸는 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도와주면서 제 생각대로 그 사람을 바꾸려는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렇게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상대와 세상 탓을 하며 저 자신을 무던히도 괴롭히며 살아왔습니다.

2019년 불교대학생들과 함께(왼쪽 세번째 김은선 님)
▲ 2019년 불교대학생들과 함께(왼쪽 세번째 김은선 님)

남편은 저와 성향이 매우 다릅니다. 저는 급하고 빨리해야 하고 잘해야 하는데, 남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천천히 하고 느립니다. 저는 약속 시간도 먼저 가서 기다려야 하는데, 남편은 30분 늦는 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사고가 너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저는 남들에게 잘 보이려는 경향이 많고, ‘남들에게 민폐 끼치는 건 절대 안 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남편이 인정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조금 느긋해졌고, 남편은 조금 서두르며 맞춰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남편은 절대 뛰는 일이 없었는데, 이젠 약속 시간에 뛰어가기도 합니다. 친구가 10년 넘게 남편과 시어머니 탓을 하며 제게 하소연했습니다. 그런 친구에게 저는 “상대 탓만 하는 네가 문제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10년 동안 친구를 바꾸려고 했으니 나도 참 독하구나. 안 바뀌는 친구를 그렇게 바꾸려고 하는 내가 참 문제였구나! 내 고집이 만만치 않았구나!’라고 알아차립니다.

남의 시선에 민감한 저는 남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를 고치려 했고, 그럴수록 남편이 마음의 문을 닫는 것도 모르고 되풀이했습니다. 친구가 10년 동안 시어머니와 남편의 불만을 말할 때마다, 들어주기보다는 조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진행자 소임을 할 때 저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도반에게 알려주기만 해도 되는데 가르치려 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살아온 방식을 알아차리고자 하지만, 어느새 또 후회와 곱씹는 과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속도가 전보다는 조금씩 빨라지고 많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이제는 좀 편안하게 봅니다. 남편도 직장동료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어 저도 상대도 편안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은 나의 벗

앞으로의 수행과제는 상대를 바꾸려고 하는 저의 업식을 계속 살피는 것입니다. 제 업식을 살피는데 도반은 저의 거울입니다. 도반을 통해 저를 돌아봅니다. 상대방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피는 제 성향을 살려 마음 알아차림에 활용합니다. 도반들의 반응을 보면서 ‘아! 내가 또 가르치려 하는구나! 잘난 척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면 ‘일단 멈춤’ 합니다. 남들이 저를 가르치려 하면 저 역시 싫으니까요. 알아차림을 놓쳐 실수해도 다시 알아차리기를 계속하면서, 저를 구속하던 자책감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습니다.

2023년 부처님오신날 봉사자들과 함께(왼쪽 세번째 김은선 님)
▲ 2023년 부처님오신날 봉사자들과 함께(왼쪽 세번째 김은선 님)

소임을 맡아 도반들과 활동하면서 저 자신을 마주하고 관점이 바뀌니, 상대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니 말이 없던 남편이 요즘 잘 웃고 말도 잘합니다. 전에는 불만이 많았던 직장에서 직장동료들의 수고를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제가 솔선수범합니다. 이렇게 제가 편안하게 변하니 가족들도 정토회에 들어왔습니다. 남편을 비롯해 세 명의 형제 그리고 조카들이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에 다녔고, 정토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인지 집안이 아주 화목하진 않지만, 예전보다 분위기가 편안해졌습니다. 큰오빠는 많이 너그러워졌고, 둘째 언니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 같습니다.

가르침과 실천이 일치하는 일과 수행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정토회는 제가 꾸준히 수행 정진해 나갈 수 있는 큰 힘입니다. 저는 언제 어디서든 여행지에서도 거르지 않고, 아침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수행, 보시, 봉사를 통해 개인의 행복을 넘어서 이웃과 세상의 행복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고마운 친구 수행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김은선 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희망리포터인 저와 참관자들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위로와 격려의 말로 서로 토닥여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 어릴 적 돌보지 못한 상처 받고 울고 있는 각자의 내면 아이를 안아주는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새롭게 출발하는 수행 여정의 길을 걷고 있는 김은선 님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글_길현숙(서울제주지부 송파지회)
편집_김윤희(강원경기동부지부 용인지회)

전체댓글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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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숙

김은선님을 아는게 좋고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2023-08-31 18:38:16

서기남

멋지십니다.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자신의 성향을 마음을 알아차림에 활용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2023-08-24 06:10:31

마음의평화

낙숫물 정진
멋진 도반입니다.^^

2023-08-23 18: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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